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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9-28 18:25
[K-POP] 한국문화가 다 지들꺼라고 우기는 중공 무지랭이한테 시달리고 있습니다.~~~
 글쓴이 : 딱선생
조회 : 5,355  

이번에 퀸덤에서 일등한 오마이걸 데스티니 커버 리액션 영상을 흐뭇하게 보다가, 댓글 중에 왠 중공 간자체를 봤습니다....'중국인들도 관심이 있는가 보구나'하고 반가운 마음에 번역기 돌렸다가 왠걸~ 오마이걸의 국악버전 퍼포먼스를 보고 왜 중국문화를 흉내내고 훔쳐가냐는 말도 안되는 억지를 싸질러 놓은 것입니다.

아무도 한국인들이 대응을 안하기에 열받아서 댓글 달았다가 계속 스토킹 당하고 있습니다.

왠만해서는 댓글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데 이 중공 부스래기의 집요함 때문에 주말이고 뭐고 생활이 엉망입니다... 누룩돼지처럼 맷집도 대단하고 제대로 된 대화와 상식이 통하는 놈도 아니에요. 그만 하고 빠지려는데도 계속 달라붙습니다.

모른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한국사람끼리는 그냥 '개무시'하고 끊는 편입니다만, 이 중공 무지랭이한테는 그러자니 괜히 저 놈의 논리를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아서 속이 상해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 정말 중공 공산당의 자국민 세뇌교육이 이렇게 심각하네요....이런 애들하고 어떻게 앞으로 상종하고 살아야 하는지 참으로 갑갑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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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빠따 19-09-28 19:14
   
차이나의 반댓말은 오리지날. 중국어와 같은 말은 거짓말.
할게없음 19-09-28 19:43
   
중국이 전통 음악이 어딨다고ㅋㅋ
굿잡스 19-09-28 19:45
   
세계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동양 최고의 악보 조선시대 '정간보'

음의 길이를 알 수 있는 현대적 악보의 효시인 동양 최고의 악보이자 서양에서도 구현되지 못한 총보까지 먼저 만듦.

총보(總譜)

합주나 합창 등에서 각 파트를 각각 다른 보표에 기록하고 종합하여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작성한 악보이다. 파트보와는 대비되는 악보로, 오케스트라모음악보(스코어)에서는 위로부터 목관악기·금관악기·타악기·독주악기·현악기의 순서로 적으며, 각 악기군(樂器群)은 고음악기부터 저음악기의 순서로 내려 적는다. 서양 음악의 경우 16세기말에 기악합주음악의 발달에 따라 모음악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조선 세종(재위 1418년 ~ 1450년) 시대에는 새로 만든 곡을 기록하기 위해 정간보를 창안하였으며, 각 악곡은 관악기와 현악기, 타악기, 그리고 가사까지 함께 적은 총보에 기록하였다.

http://www.culturecontent.com/dictionary/dictionaryView.do?cp_code=cp0237&dic_seq=184

한국 무용의 기원

 
무용의 발생은 종교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영적(靈的) 존재에 대한 숭배와 그 신앙에서 생성되었다. 원시의 인간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자연의 초자연적인 힘, 즉 정령(精靈)의 힘을 빌리기를 소망했고 이와 같은 힘을 빌리기 위한 수단으로 제사의식이 행해졌으며 주술이 생성되었다.
 
즉 무용은 제사에 수반되어 정령을 부르는 행위나 주술능력을 증가시키는 행위로서 인식되었고 이와 같은 무용은 점차 일정한 형식과 시기를 갖추면서 의식화되었다. 또한 천제(天祭) 이외에도 수렵 ·전투 ·다산(多産) 등 다양한 의식에 사용됨에 따라 정형화되기 시작했다. 한국 무용의 시원은 환웅이 3천 단부(團部)를 거느리고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 인간사회를 이룬 이래 제천과 숭배를 관장하는 집단가무를 행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 시기의 무용의 형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무용이 종교적 제천의식에서부터 비롯되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초기 한국 무용의 형태에 관한 문헌상의 자료로는 중국문헌인 《한서 동이전(漢書東夷傳)》이 있는데, 중국 하소강(夏少康) 때에 우리 춤과 음악이 중국에 전해져 연희되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내용을 토대로 볼 때 중국에 앞선 우리 악무(樂舞) 문화의 발전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지모무(持矛舞)와 영선무(迎仙舞)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형태를 정확히 알기 어려우며, 지모무가 창을 들고 추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반면 한국 무용에 관한 정확한 문헌상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는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東夷傳)>을 들 수 있는데, 삼한시대의 가무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부여 ·고구려 ·동예는 일정한 시기를 두고 온 마을 사람이 한데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가무를 베푸는 연중행사가 있어 부여는 정월에, 고구려와 동예는 10월에 각각 제천의식을 가졌으며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행사로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무를 하였음을 서술하고 있다.
 
위와 같은 행사는 계절적인 시기와 연희방법이 비슷하여, 부여에서는 영고(迎鼓), 고구려에서는 동맹(東盟), 동예에서는 무천(舞天)이라 하였으며 마한에서는 5월과 10월 추수 후 음주 가무를 행하였는데 그 모습은 수십명이 앞뒤를 따르며 땅을 밟는 집단가무로서 중국의 탁무와 비슷했다고 한다.
 
즉 온 마을 사람이 한데 모여 천신을 섬기는 종교적인 의식행사라는 점에서 볼 때 영고 ·동맹 ·무천은 그 맥을 같이 했음을 알 수 있고, 그 내용 또한 신을 즐겁게 하여 복을 비는 무속행사로써 굿의 원초적인 형태로 한국무용의 발생동기를 엿볼 수 있다.

https://story.kakao.com/_7XOgK5/JTGRXt6mYw0

우리의 새로운 공연 예술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뿌리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같은 제천의식 또는 마한의 농경의식 같은 자생적·토착적 공연예술이었다는 것. 전 교수는 보다 구체적으로 “고대 한류로는 수·당의 칠부악·구부악·십부악 가운데 고구려기인 호선무(胡旋舞)와 광수무(廣袖舞), 중국에서 유명했던 고구려 인형극 등을 들 수 있으며, 일본에서 인기 있었던 고대 한류로는 일본의 무악(舞樂) 가운데 우방악인 고구려악 24곡을 꼽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72401032430065004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

http://cafe.daum.net/leekh2224/NDhU/107?q=%EC%A0%84%EC%84%A4%EC%A0%81%EC%9D%B8%20%EB%AC%B4%EC%9A%A9%EA%B0%80%20%EC%B5%9C%EC%8A%B9%ED%9D%AC

현대의 K팝 역시도 춤을 빼놓을 수 없지만 고대부터 우리 고조선 고구려 동방문명권의 가무는 하늘에 지내는 제천의식등에서 비롯되어 근현대에도 빼놓을 수 없던 문화였군요.
굿잡스 19-09-28 19:47
   
이집트보다 더 빠르다는 동북아 피라미드.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wr_id=76741&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B%8F%99%EB%B0%A9%EC%9D%98+%ED%94%BC%EB%9D%BC%EB%AF%B8%EB%93%9C&sop=and&spt=-8169&page=1


신석기 혁명, 빗살무늬 토기의 발명지.   

유라시아의 동쪽, 한반도가 가장 앞선 지역이었던 이유   

https://news.v.daum.net/v/20171015140004655?rcmd=rn&f=m

본래 고고학적으로도 북방 지역의 청동,철기 제련술이 훨씬 이른시기에 더 뛰어난게 이미 보고되고 있고

서토 내륙 농경권의 하한족은 단순 일체형 동검 이였지만

우리 고조선의 비파형동검은 구리 주석 아연의 일정 정교한 합금기술등에 손잡이 분리형으로 더뛰어났고

최초 동아시아 금속 갑옷도 고조선 유물에서 이른시기에 나오는 등에다  남북국시대로 가면 첨단 도자기뿐 아니라 식기류에서도 활발한 방짜유기등에 인쇄활자술에도 이런 금속 주조를 이른 시기에 활용이 그래서 가능했군요.(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의 원형도 고려에서 이미 등장에 세계 최초 함대함포해전도 중세 고려에서 나온 유산)


서토보다 앞선 동아시아 최초의 고조선 금속갑옷   

http://cafe.daum.net/luck5194/MFUT/283?q=%B5%BF%BA%CF%BE%C6%20%B0%A9%BF%CA%C0%C7%20%BF%F8%C1%B6%20%B0%ED%C1%B6%BC%B1-%20%B0%ED%B1%B8%B7%C1
     
고대 한류로서 갑옷문화의 국제적 위상(1)     
고조선 갑옷이 중국에 준 영향     

http://m.breaknews.com/a.html?uid=196626


 
 고구려 음악과 무용: 고려기, 고구려기, 지서가, 지서무, 호선무,납소리,쌍룡무

https://blog.naver.com/koreancranedance/221544374087



[속자치통감 제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 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숙원잡기]의 기록에는,《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굿잡스 19-09-28 19:47
   
'요동에서 헛되이 죽지 않으리(无向辽东浪死歌)'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wr_id=190581&sca=&sfl=wr_subject%7C%7Cwr_

도표로 한눈에 보는 천년 사직 고구려의 위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1002&logNo=30152299778


발해 

당나라 산둥 등주 공격 

장문휴는 732년(인안 13) 무왕의 명령을 받아 수군을 이끌고 산둥 반도에 있는 당의 국제무역항 등주를 공격해, 당의 동방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발해 무왕의 대외팽창에 위협을 느낀 동북만주의 흑수말갈이 발해와 우호관계를 단절하고 당과의 연결을 꾀하여 발해를 위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무왕은 흑수말갈의 정벌을 결정했으나 무왕의 동생 대문예가 발해와 당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흑수말갈의 정벌을 중지시키려다가 실패하고 당으로 망명했다.당에 대한 강경책으로 돌아선 발해는 수군을 동원하여 등주를 공격 초토화시켜버리고 육지로는 요서로 밀어버림.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무왕- 

발해가 점차 강성함에 따라 흑수 역시 그 소속이 되었다. 
-당회요 말갈- 



'고려국왕대흠무언(高麗國王大欽茂言)' 

≪속일본기(續日本紀)≫ 천평보우 3년 경오 (남북국시대 발해 문왕(文王) 대흠무가 왜국에 보낸 국서에) 


四年春, 以<均貞>爲侍中, 以伊湌<忠永>年七十, 賜几杖. 秋九月, 遣級湌<崇正>使北國. 
   
 가을 9월, 급찬 숭정을 북국(발해)에 사신으로 보냈다. - 삼국사기 신라 헌덕왕.



정강의 변 : 북송이 신라계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황제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 많은 송나라 황족들과 황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무엇보다 이 사건 당시 휘종 등이 금나라로부터 어느 정도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황제 일가를 제외한 송나라 종실들과 수행원들은 개봉에서 금나라로 이동하면서 많은 수가 풍토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죽었으며(대략 3천 명 중 2천 명) 휘종이 금나라에서 하사받은 옷감들과 자신의 재산을 팔아 이들을 치료받게 하려 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애당초 그나마 좋은 취급을 받은 경우도 이렇게 송의 황제였던 휘종과 흠종 한정으로 이 때 끌려간 황족들 중 그나마 두 황제는 남송과의 관계를 감안한 금 태조의 지시로 전직 황제 취급은 받아서 그나마 처지가 나았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지옥행 그 자체.   

특히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었고, 운이 좋아야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의 첩이 되었다.(처녀들은 물론이고 유부녀들도 얄짤없었다. 또 원래 모시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 또다시 첩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시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흠종의 황후인 주씨(시호: 인회황후(仁懷皇后)) 또한 치욕을 경험해야만 했다. 외모가 예쁜 편이었던 황후 주씨에게 금나라 장수가 노래를 부르라 시키자 주씨는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여진족인 금나라 장수는 가사를 알아듣지 못 해서 오히려 흥겨워하며 다시 노래를 부르라 재촉했다. 그 후에는 아예 술 시중까지 들라고 했고, 주씨가 이를 거부하자 금나라 장수 택리가 주씨를 아예 끌어당기면서 강제로(성 추행..) 술 시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에 주씨는 술자리 시중 들기를 거부하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분노한 택리에게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ㅠㅠ)   

이에 흠종이 결국 참다 못하여 분노를 터트렸는데, 오히려 포로가 반항을 한다고 열받은 택리가 흠종을 죽이려 들었다(...). 이때 현령이 "폐하(금 태종)께서는 저 놈을 생포해오라 했습니다. 죽이면 장군님만 손해입니다."라고 택리를 설득해서 흠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황후 주씨는 이 때 당한 치욕과 폭행으로 인해 결국 몸져 누웠고, 흠종이 눈물을 흘리며 주씨를 치료해달라 요청을 했음에도 철저하게 무시당하여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ㅠㅠ) 더 비참한 것은 한때 일국의 황후였던 그녀의 시신이 금나라 군에게 멍석으로 대충 말아져 지나가던 중 아무 곳에 묻혀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금나라 관기들의 기방인 세의원으로 보내져 창기(娼妓)가 된 경우도 많았다. 서진 시대의 영가의 난처럼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손들의 굴욕적인 몰락이었다.
굿잡스 19-09-28 19:48
   
정강의 변 : 북송이 신라계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황제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송나라 황족들과 황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왜 여직(진)발해본동일가(女直渤海本同一家)라고 했을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899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5%9C%EA%B7%9C%EC%B2%A0&sop=and


금나라 황실 조정내의 고구려계(발해인) 파워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106493129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http://news.donga.com/3/all/20140313/61666261/1


女真酋長乃新羅人 (송막기문- 남송기록)       
("여진의 지도자는 신라인이다")       
"其初酋長本新羅人" (몽골  금지(金志))       
(여진의  초기지도자는 신라인이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 (금사 (金史))       
(금의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왔을 때  60세였다.)
굿잡스 19-09-28 19:48
   
원나라(몽골)의 법률은 서토 한족은 예외 없이 노예로 취급했으며 "노예는 물건과 같다"라고 규정   

노예의 주인은 노예를 임의로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었고 언제든지 한족을 살생할 권리가 있었다.   

 한족 20가구를 1甲 으로 편성하였다.   
 각 甲마다 한 명의 甲主를 두었다.   
 갑주는 몽골인이다.   
20가구가 1명의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은 몽골 갑주의 몫이었는데,   
짱국 漢族은 혈통의 순수성 유지를 위해 첫번째 태어난 아기를 죽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몽골은 한족의 반란을 방지하기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한족의 사내아이가 태어 나면 엄지손가락을 절단햇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회를 열지 못하게 했다.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다. 10가구에 하나의 부엌칼만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무술을 배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몽골족의 동의를 받은 후에 가능했다.   
노예는 사유물이므로 노예의 재산은 언제든지 뺏을 수 있다.   
노예인 한족은 전통적인 한족 성명을 가질 수 없었다.   
(출생일자를 가지고 이름을 삼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관직이나 공직등 중요한 자리에는 몽골인들과 고려인,색목인(북방계)이 우선 등용.
굿잡스 19-09-28 19:48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 청사 저자 임계순 -     

당시 일개 만주족 병사가 미국으로 치면 주지사(웬만한 나라의 대통령)급에 해당하는 성주를 구타할 정도로 만주족은 소수였음에도 피지배 서토인을 강점 지배하는 정복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고 

이들은 서토인과 구분되는 그들만의 독자적 만성이라는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며 서토인에게 세금을 착취해서 생활.     

(후기로 가면 만주 팔기군중에서 초기 청에 복속, 서토 정복에 동원되어 수백만 자국 짱개들  학살하던 앞잡이 한족계열은 세금만 쳐먹는다 팔기군에서 빼버림)     


명말청초의 만주족에 의한 짱국 서토인 대규모 학살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굿잡스 19-09-28 19:48
   
만주족의 서토 한족 피지배인 통치 방식   

1.<유강 정책>   

   
청조의 對 한인 정책은 협조하면 유화책을 구사하지만, 반항하면 철저하게 도살하는 유혈강경책이었지요, 예컨대 화남과 화북을 잇는 군사적 경제적 거점이었던 揚州城(양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청군은 끝까지 저항한 한인 8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만주족은 중국인구의 0.03%에 불과했습니다. 소수가 다수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본떄를 보였다.>   

   

2.< 과거 제도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고도의 전술>   

   
과거 실시로 체제 불만 제거   

―청조가 과거제도를 유별나게 중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거제를 통해 능력과 장래성이 있는 漢人을 관료로 발탁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사대부와 지방의 紳士(신사) 계급을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과거 합격자가 관직에 바로 등용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生員, 監生, 貢生, 擧人 등의 학위소지자로서 사회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상급 시험인 進士試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청조는 이들이 관계에 진출하기 위해 지옥과 같은 多단계의 과거준비에 얽매이게 유도함으로써 체제에 불만을 가질 겨를이 없도록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청대의 과거합격자 110만명 중 관료가 되었던 사람은 2만7000명에 불과했습니다』   

   
3.< 만주족 고유의 풍습과 연고지를 지킴>   

『만주족의 土風(토풍)을 지키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청조는 발상지(본거지)에 사는 만주족이 한족식 집을 짓거나 한족교사를 초빙해 글을 배우는 것조차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中原에 들어간 만주족들은 元을 세운 몽골족처럼 한족에게 몰리면 언제라도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려 고토로 되돌아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의 얘기입니다만 청조는 대만이나 산동반도 같은 곳은 쉽게 할양했지만,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아 청일전쟁까지 치렀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이 그들의 본거지와 인접해 있기 때문이었지요』   

   

4.< 전족등 악습을 폐지않고 생활속에서 그들의 힘을 약화시킴>   

   
청신한 기풍의 진작을 강조했던 청조가 한족 여성의 纏足(전족)을 금지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족은 後唐(후당) 시절 이후 차츰 번져 온 한족 여성의 폐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북방 기마민족이 만리장성 이남 지역으로 쳐들어와서 한족 여성들을 납치해 가는 짓 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전족을 했던 것입니 다. 젖먹이 때 전족을 하여 발의 성장을 억제시켜 놓은 여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뒤뚱거려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전족을 한 여성은 북방민족의 약탈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런데 명-청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족한 여성이 남성들의 성적 취향을 만족시킨다는 이유로 유한계층에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만주족여성들의 전족만은 엄금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청조는 한족의 약화를 은근 히 조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5.< 언론 장악>   

청조는 변경이나 군사문제를 연구한 책, 夷狄(이적)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책, 명조를 칭송한 모든 논평서 등 모두 2320종의 서적을 禁書(금서)로 정하고, 이런 금서를 보관하거나 편찬한 수천 명의 사대부와 관료들을 가혹하게 처벌했습니다. 王錫侯 (왕석후)라는 학자는 康熙字典(강희자전)을 비판하고 避諱(피휘)해야 할 청조 황제의 廟號(묘호)를 무엄하게 수록한 字典을 만 들었다고 해서 처형되었으며, 그 가족 21명은 노비가 되었고, 편찬을 후원한 江西巡撫(강서순무) 역시 처형되었습니다』   

6. 변발이라는 혁명적 풍속을 받아 들이게 함으로서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시키도록   

하였고 이에 반항할 경우에는 가차 없는 처단이 이루어졌다.   

- 조선의 경우는 도리어 청에 대한 치욕이니 말을 하지만 실상 두번씩이나 조선의 청에 대한   

충돌 이후의 처벌은 서토에서의 경우에 비하면 도리어 온건하다 할만큼 서토에 대한 저항 세력의 청의  진압은 너무도 무자비하고 강건했다. 그리고 문화적 부분에서도 청은 조선을 인정한 반면 서토의 경우에는 가차없는 만주족 방식을 고수 하도록 철저한 정책을 폈다. 

   
7.< 조선과 만주족의 관계>   

 이성계의 私兵 집단에는 여진족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지금의 함경북도 북청지역은 여진족 추장 퉁두란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가 함경남도 함흥 지역의 토호인 이성계에게 굴복하고 의동생이 되어 李之蘭 (이지란)이란 이름을 받았지요. 나중에 그는 조선왕조 개국공신이 되어 建州衛(건주위)를 정벌하기도 했습니다. 이성계의 휘하에는 이밖에도 斡朶里族(오도리족)의 만호 猛哥帖木兒(몽거테무르), 火兒阿(할아) 의 만호 阿哈出(아하추) 등이 종군하고 있었습니다. 일개 지방군벌에 불과한 이성계가 중앙정계에서 강력한 실력자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여진족이라는 배후세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르하치의 선조는 누구입니까.   
『建州左衛(건주좌위)의 開祖(개조) 몽거테무르가 바로 누르하치의 직계조상입니다. 아하추는 建州本衛(건주본위)의 개조가 되었지요.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 창업 후 여진족의 대소 추장들에게 만호, 천호의 직첩을 새로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창업 초기의 조선왕조는 두만강 하류 孔州(공주 )에서 상류 甲山에 이르기까지 통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태조는 여진족에 대한 동화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ㅡ청사 임계순 

대지의 작가 펄 벅도 치를 떨었던 짱국 한족 여인들에게 가해진 끔찍하고 미개한 천년 풍습, 전족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ynameisysys&logNo=120029073775&proxyReferer=https%3A%2F%2Fm.search.daum.net%2Fsearch%3Fw%3Dfusion%26q%3D%25ED%2595%259C%25EC%25A1%25B1%2B%25EC%25A0%2584%25EC%25A1%25B1%26DA%3DTWB%26lv%3D2%26p%3D2
굿잡스 19-09-28 19:49
   
고대의 쭝국이란 지금의 특정 국가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이런 북방유목민족과 동방세력들에 의해 서토의 풍부한 농토와 노예(하한족)을 차지하고 군림하면
누구나 될 수 있었던 일반명사.

그리고 천년사직 고구려 태왕시절 이들 전투민족들(거란 후대 요, 실위 후대 몽골, 말갈(여진) 후대 금,청등)은 우리 태왕 앞에서는 제대로 대가리도 못들고 살면서 휘하 부용세력들이였군요. (물론 동북방의 저런 날고 뛰던 전투 유목 종족들 중 일부가 서진 유럽에선 신의 재앙 어쩌고 인도 중동 유라시아를 휩쓸고 단녔지만 거란,몽골등도 길어야 백여년 정도가 전성기들)
대두머리 19-09-28 19:57
   
지금의 중국이라는 한족들은 북방민족의 노예로 몇천년을 살았고 처녀들의 초상권까지 북방 민족들이 가졌죠..... 그리고 지금 중국인들이 누리는 그 문화들은 북방 민족들이 세운 문화이며 정통들입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중국의 문화란.. 북방민족의 문화와 정통을 훔치고 조작한겁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역사를 조작하고 문화를 훔치고 있죠.. 어느 중국인 역사 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져... 중국의 역사는 98%가 조작이라고...
굿잡스 19-09-28 20:28
   
서토 하한족과 우리는 태생적으로 천하를 보는 <<세계관>> 자체가 이질적이군요.

서토인들은 전형적 농경 문화권으로 토에 바탕한 짝수의 정체, 대칭 안정의 세계관이 물질문명에서 반영되어 나오면서 이후 북방과 동방문명권 세력에 의해 수시로 정복 점철되면서 강제된 반면

우리 고조선 고구려 동방문명권과 북방 유목문명권은 1, 3, 5로 분화되는 홀수 세계관의 하늘 숭배와 불안정성을
도리어 역동성과 편안함으로 느끼는 기질.


그리고 기본적으로 우리 동방문명권은 신석기 시대 독자적 빗살무늬 토기의 발명지로 서토와는 이미 일상의 토기 문화권에서부터 이질적 서로 다른 정체성에서 출발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고

묘제에서도 우리는 피라미드 형태의 적석총이나 고인돌같은 거석 문화나 석제를 통한 묘제 양식이나
서토인들은 기본 땅을 파서 묻는 매장 형태에서 출발.

이후의 청동 철기등의 발전 양상이나 합금 제련술의 독창적 문화나 우리의 하늘 숭배에 기인한 새숭배의 이런 전형적 줄기찬 문화는 새깃털을 장식으로 하는 조우관같은 관모부터 오늘날 우리 대통령의 상징을 봉황으로 하고 있듯 굳건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져왔고 도시문명 역시도 기본 석제를 이용한 산성과 평지성의 셋트형 조합으로 고대부터 근세조선시대까지 그 전통을 도도히 이어져 왔군요.(우리는 지형지세를 이용한 굴곡진 성곽 형태이나 서토인들은 평지 장방형의 직각 형태가 주류) 물론 인접한 국가간에 교류가 있다보니 어느 정도 소통되는 문화도 있지만

우리  예 맥 한의 대삼한은  내부에서 정권 교체로 수천년을 이어져온 반면 서토 하한족은 수시로 외부 세력들에 의해 정복사로 점철되다 보니 이민족 왕조때마다 여러 문화들이 강제 주입되어져 왔고 무엇보다

기본 세계관 자체가 우리 고조선 고구려 동방문명권의 대한민족은 서토 하한족과는 이질적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 변화 발전.

물론 여기에는 언어(우리는 조사나 접사가 발달한 교착어(agglutinative language) 이고 서토 짱국어는 전형적 소리가 문자에 강제되는 고립어(Isolating language ))부터

고대에는 상형문자에서 시작하긴 했지만 오늘날 표음 문자를 사용하는 우리의 한글과 표의문자인 한자를 사용하는 서토 짱국과는 엄연히 구분되군요.


고고학자 쑤빙치는 “은(상)의 조상은 남으로는 연산에서 북으로는 백산흑수(백두산과 헤이룽강)까지 이른다”고 단언했다. 

또한 그 유명한 안양 인쉬(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은 일찍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다. 


한자의 원형은 서토 하한족을 정복한 이민 동이족 상나라의 갑골문에서 시작 여러 세대 국가를 걸쳐 나온 동북아 공용 상형문자 체계.

"일본 가타카나 기원은 신라 향찰·이두" 

히로시마대 교수 

http://blog.daum.net/damule/8881879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열도를 지배 일본을 세우면서 단순히 한자만이 건너간게 아니라

쨉의 가타카나는 우리 한국인 선조들이 한자는 뜻을 나타내는 표의 상형문자다 보니 우리식 한국어 발음을 표현하기 위해 뜻과 상관없는 우리식 발음을 위해 만든 향찰 이두를 한글 발명 이전에 과도기로 사용하다  왜구에게 던져준게 오늘날 가타카나군요.

USA 캘리포니아 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discover誌“1998년 6월호「일본인의 뿌리」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아이누족을 정복하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     

토쿄대 사학과의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교수     

”일본은 고대 한국인이 세운 나라이다”(‘日本國家の起源, 1967)     


카큐슈우인대 오오노 스즈무(大野 晋, 1919∼) 교수     

”한국인은 일본열도에 금속 제조및 사용법 야금·금공 기술 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     
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조경술등 모든것을 가져왔다(‘日本語の 世界’, 1980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 ... 나라시대(奈良時代- 제50대 칸무(桓武) 왕이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만엽집(万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다”고 말해 전체적으로 일본고사기들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일본에는 8세기 초에 간행된 4가지 고전이 있다. 

고대사 책인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 풍토기(風土記), 만엽집(萬葉集)이 있다. 

8세기에 편찬된 이들 책들은 7세기 요동치는 한국의 정세판도에 따라 

가야계, 백제계, 신라계, 고구려계의 황족, 귀족 등 

엘리트 집단들이 대거 신천지 열도로 건너가 

서로 정권을 다투는 우리 한국인들끼리의 피 튀기는 정권 각축전을 담은 역사책이다. 

http://cafe.daum.net/sisa-1/f8lD/714?q=%B8%B8%BF%B1%C1%FD
     
딱선생 19-09-28 21:10
   
오 새삼 많이 배웁니다. 굿잡스님 감사합니다.^^
탄돌이2 19-09-28 20:40
   
열등감에 찌든 놈들이 원조타령합니다. 
우리도 한 때 환빠같은 쓰레기들이 원조타령 많이 했어요.
우리나라가 잘 나가닌깐,  찐따들이 조그라들어서 사라지고 있죠.
znxhtm 19-09-28 20:52
   
여기 쓰지말고 유툽에 화력지원 갑시다.
     
znxhtm 19-09-28 21:06
   
어라? 댓글 사라졌나?
          
딱선생 19-09-28 21:13
   
댓글 싸움이 커지니까 신고를 해서 삭제 해버린 모양이네요...에유 그나마 남은 주말 편하게 보내게 될 듯 싶습니다. 또 모르지요. 그 인간이 또 새로 댓글을 달지,,,아마 그러고도 남을 애예요...
구름속의해 19-09-28 21:13
   
스토킹하듯이 댓글 계속달면 신고 계속 하세요. 사유도 이놈이 나 스토킹하면서 괴롭힌다로 계속 하시다보면 계정정지먹습니다. 한두번신고하다 말면 안되고 계속 하시면 됩니다.
소프트쿠키 19-10-02 02:52
   
드가니까 댓글이 다 사라졌다니 허탈하시겠네요

시간 , 체력 다 뺏기고....

하지만 수고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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