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기에 등장한 과거시험은 고대 사회가 보수적이고 세습적인 친족 족벌 사회에서 그나마 능력 본위의 사회로 아주 조금의 변화를 꾀했다는거 자체에 큰의미를 둬야 하는 거죠 인권이니 평등이니 그런 개념 자체가 없던 고대시절에는
과거시험자체를 도입하는것 조차도 쉽지 않은 생각이었고 획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현재 우리 관점으로 보기보다 큰 역사의 흐름에서 본다면 정말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환관의 횡포는 진실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들식 표현으로 청류와 탁류로 구분될때 환관 및 친환관파는 탁류, 숭고한 유학자 선비들은 청류라고 구분하였는데...역사의 정리는 청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시대나 말기적 상황은 유사성이 있겠지만 한나라 말기에 나타난 환관들의 득세와 횡포는 청류인사들 입장에서는 그 자체로 재앙이었을 거에요.
한나라가 망국의 길로 접어든 이유는 다양하게 있겠지만 첫번째는 조비가 찬탈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유비가 죽고 난 후 명맥을 이어가던 유선이 진(사마씨)에 항복하며 한나라가 끝내 사라졌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사실 문제를 제거한다고 해서 반대로 상황이 좋아진다고 장담할 수는 없죠. 더 나빠지지 않을 순 있어도...한나라는 십상시를 제거한 이후에도 다른 다양한 문제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십상시로 인해 나빠지는 것만 막아낸 셈이겠네요. 원소가...동탁을 불러들이면서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총수가 15만명 정도이고 대충 매년 100-300명 정도 였음. 그러니 그당시 인구수를 감안해도 오늘날 서울대 합격보다 훨씬 어려운 관문이었음. 더구나 문과는 그 1/10 인 1만 5천명 정도 였으니 거의 사법고시 합격 수준이었음. 그러니 문과합격자면 거의 가문의 영광 수준이고 무과 합격자도 집안의 영광으로 동네잔치할 정도이었을 것임.
고려는 과거제도가 안착한 시대는 아니라고 이해하는 편이 조금 더 옳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고려는 개국부터 호족들의 연합 비스므리하게 출발한 나라고, 각 호족들은 다들 한 지역에서 사병도 갖고 있는 말하자면 자기가 왕인 지역하나씩 있는 사람들이니 이들에게 중앙 정치 지분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조선 이전에는 원래 힘쎄고 잘나가는 사람이 관직도 맡았다면, 조선시대부터는 관직 맡은 사람이 잘나가는거고 힘 쎄지는거고 그런 차이가 아닌가 싶어요. 조선은 챙겨줘야할 귀족 자체가 없는 나라라...
전체적으로는 시대의 변화나 각 시대별 특징으로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음서 자체는 말하자면 인재 발탁의 방법 중 하나였던건거니까요. 조선도 그렇지만 지금은 당연히 음서가 옳지 않죠.
그렇네요. 고려는 중앙집권제라기 보다는 호족연합의 봉건제에 가깝죠. 중국도 원나라는 물론 명나라도 봉건제 국가였으니. 완전한 중앙집권제는 조선과 청나라에 와서야 확립되지요. 봉건제에서 중앙관리는 당연히 봉건영주들의 자식들이 차지하고 또 인질역할도 했음. 즉 호족의 일족이 중앙관료를 하는 것은 봉건제의 핵심적 장치임. 그러니 음서는 그당시로는 적폐가 아니고 오히려 중앙 정치에 지방호족 세력의 참여를 보장하는 선진적 장치였음.
고대 중세의 일을 현대 기준에서 보니까 적폐로 보이는거죠.
오히려 신라시대의 골품제의 적폐를 청산을 하고 개혁한 결과가 저 음서제도+과거제도죠.
역사란 언제나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거죠.
특정 제도가 적폐가 되는건 시대의 변화에 의해 그 제도가 더이상 필요가 없어지거나 혹은 실행하는 인간들의 타락으로 시스템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는데 고려말에 음서제도는 두 경우 모두 해당되었죠.
고려 최고의 적폐제도는 토지제도예요.
음서제는 막말로 관직 안하는 사람은 뭔 상관입니까
토지제도는 아예 그냥 생업문제였으니까요.
얼마나 심각하게 병폐가 발생했냐면
땅 하나에 세금을 걷어가는 주체가 10군데가 되는 일까지 벌어질정도로 개판이 되었어요.
괜히 이성계가 사전혁파부터 한게 아닙니다.
민심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본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