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간은 교묘한 말장난이 만성으로 아직도 어설픈 허접소리로 여기 저기 낯짝 두껍게 설치구 단니는 구만(매번 겉핥기 교묘한 반자이식 조작질은 본인 일기장에나 쳐할것)
신석기와 고조선 전기 비파형동검등이 요하를 중심으로 요서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엄연히 한반도와 요동(만주일대라도 요서 요동은 지형적 환경이 상당히 이질적. 요동은 산악과 강 숲등도 풍부. 한반도와 함께 백두산 호랑이의 주서식지 공간으로 조,수수 콩등을 재배 수렵과 농업의 겸업 가능. 이러하기에 우리 고조선 고구려 역시 요서의 내몽골로 이어지는 전형적 유목 문화와는 달리 오랜 정주 도시문명에 기마 문화가 가능한 반농반목 문화) 연해주일대는
우리 고조선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수천년 독자적 동방문명권의 오랜 본거지이자 내지 문화권이며(애초에 천년사직 고구려 역시도 요서 후연을 압박 고구려계 고운을 추대한 북연을 동족의 예로 대하다
북위에 공격을 받던 북연의 사람과 물자를 대대적으로 고구려 요동 내지로 데리고 오면서 도리어 요서를 비우고 서토왕조와 일정 거리를 두던 국가. 즉 기본 본토인 요동 내지를 곤고히 요서일대의 북위나 거란등 주변지역에 적절한 무력 투사와 지원 정치 외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즐겨했던 나라)
우리 한민족의 주요 종족인 대(삼)한 즉 예 맥 한의
주활동 무대이자 고향으로 이후
다시 남북국시대 발해와 발해 부흥국
그리고 요양은 발해 멸망 이후에도 대거 발해
인(고구려계)가 살던 곳에
서토 송을 멸망시킨 대금의 발해인은 신라계 황제가 세운 대금 황실의 주요 외척으로 여전히 활동(금의 전성기를 이끈 세종이 요양 발해인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
근세 조선시대에도 압록강을 너머 요녕성 일대의 봉황성 책문을 서토로 들어가는 첫관문이자 경계에 내지로 인식.(명 하한족 왕조 시절에는 요동은 요동도사같은 일반 행정 기관으로 편입되지 않는 군정 기관을 일부 요동에 국한해서 설치) 근현대는 간도등.
지금의 요동 일대는 서토 하한족을 정복한 만주 왕조의 산타크로스 선물이자
버러지 전범 쨉이 대한제국과 만주 침략 이후에도 계속해서 온갖 쓰레기 짓거리를 쳐하다 핵쳐맞고 급패망하면서 나온 공백 상태를 피지배 서토 하한족들이 어부지리로 얻은 산물.
해동의 두 번을 비록 지난날 원정했으나, 감히 고구려 요수를 건너지 못했고, 백제 큰 바다의 물결을 넘을 수 없었다. 해마다 자주 병사를 보냈으나, 중국이 부서지고 소모되었다. 이미 지난날의 일이지만, 나는(당 고종) 그것을 후회한다.
- 『册府元龜』 卷981 外臣部36 備禦4 唐 高宗(678)
천년사직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오늘날 군 최고 합참의장격인 대막리지 연남생이 당나라로 거란 일부 부족과 투항하는 초유의 사태로 내부분열이 발생.
당 고종은 2차 고당 대전에서도 대패를 당하자 결국 지지를 치고 백성들에게 이제는 병장기를 내려놓고 농사나 지어라고 선언했다
초유의 고구려 군권 최고 자리에 있던 연남생의 투항에 처음에는 믿지를 않고 재차 확인하고는(연남생도 2차에 다시금 고구려가 승전국이 되면서 이제는 나름 홀가분한 마음으로 외유 시찰을 나갔다 형제에게 통수 맞고 급당황 격분)
이후 당나라도 국력을 쥐어짜내면서 3차 대전이 급발발.
(연남생에 의해 고구려의 허실과 요충지를 알고 요동을 따라 점으로 치고 들어가 평양을 공격. 이미 내부분열로 각성마다 동요가 일어나면서 이전같은 제대로된 싸움도 되지 못함)
그러나 이런 당나라의 3차 대전과 다시금 무리한 요동 정벌은 결국 당나라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키면서(여전히 요동 각지의 고구려 성들은 건재 동북방은 제대로 밟아보지도 못한 당은 끊없는 저항과 소요에 부딪치면서 얼마가지 않아 평양에서 요동 요서로 밀려나게 됨)
토번의 성장으로 침탈이나 절도사의 난등( 고구려계 이정기의 제나라(등 세금도 내지 않는 번국들이 여기저기 생겨나면서)에 당군주가 도망단니게 되는 촌극 발생)
중후기로 가면서 소위 당나라 부대라는 별칭을 가져오게 됨.
그러면서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탈출 이후 요동의 고구려 세력을 다시 규합 30여년이 안되어 대발해를 세우고 남북국 시대를 맞게 되는 흐름.
이후 발해 무왕은 당이 간섭을 해오자(고구려시대에 고당 전쟁에도 참여하는등 고구려 휘하 부용세력으로 있던 흑수말갈에 대한 획책을 시도하자
발해는 흑수말갈을 복속 아예 직접 지배지화. 이후 신라계가 흑수부락에 들어가서 분열된 흑수부에 선진 규범을 통해 규합한게 신라 고려 교체기의 김함보.
발해 멸망 후 신라계 황제 아골타와 발해인 연합의 대금이 등장. 발해인은 금황실의 주요 외척으로 이후 반요의 요와 송까지 멸망시켜버리면서 대금은 북방의 패자로 등극)
해상으로 당나라 산둥 등주의 해군시설을 초토화시켜버리고 요서로 밀어버림.
정강의 변 : 서토 (북)송이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고조선 인구는 10만~30만 정도로 추산되고, 고조선 영토는 한반도보다 작았습니다. 조선이 굴욕외교했다고 욕먹지만 그런 조선도 어떻게든 영토 넓혀 한반도라도 차지하고 독립을 지켜 최소한 국내에서 한국인이 외국인에게 치이는 일은 없었기에 17세기 18세기 인구가 세계 7, 8위 정도, 1900년 인구는 14위 정도였습니다.
지금 한국은 조선의 반도 안 되는 영토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고 한국인끼리만 싸움붙이고, 한국인 VS 외국인 이해충돌에서 한국인 이익을 지키지 않으니, 그 직격탄을 청년세대가 맞아 20년째 세계서 가장 애를 안 낳고 있습니다.
대다수가 이를 신경쓰지 않고 자기 집값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단군 할아버지가 부동산 사기 당했다" "통일하면 한국 국력이 일본 넘을 것" 등의 말이 나오는 것은 허망합니다. 지금 같은 저출산 + 대량유입 추세가 쭉 이어지면 통일은 자동으로 불가능해지고 한민족이 소수민족 됩니다. "한국 군사력이 일본보다 세다"고 말하는 네티즌이 많은데 지금 연간 신생아 수는 일본의 3분의 1 정도로 징병제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빨리 군인처우 대폭 개선해 모병제 전환하는 게 현실적인 국방의 길입니다.
대체 "국방"이 뭔가요? 한국남이 군대 가서 국경선을 지키는 이유는 "땅"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의 1.2배인 북한 땅도 포기하고 이대로 살자는 한국인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많이 나오는데
네티즌들은 "여자도 군대가라"는 말만 하지 대체 한국남이 군대 가는 이유가 뭔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니 모병제 전환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같은 추세로 쭉 가면 군대도 땅도 외국인이 채웁니다. "그리벨트는 후손을 위한 땅"이라는 논리로 그린벨트 해제 반대하는 이가 많은데 지금 추세면 그린벨트를 채울 후손은 외국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