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공성전 또한 왜구들의 특기중 하나지요... 일본의 성을보면, 서양사람들도 감탄합니다... 철옹성과 같아서요... 그런곳을 매날 치고박고 점령하던 놈들이니.... 강할수 밖에요...
근데, 저 일본군과 조선군과의 10:1은 좀 아닌듯 싶군요.... 조총이나 전술을 통해 털리면 털렸지... 개인적으로 저런 피지컬 차이가 나기는 힘들죠
원래 전쟁같은 경우는 경험이 많으면 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선군도 나중에 함경도 기병 3천이 내려와서 요격하는데
이 병사들은 엄청 잘 싸웠거든요.
그 이유가 변경에서 여진족과 끊임없이 싸워서
전투감각이 유지된 점이 큽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군은 강해지고 일본군이 약해진 것은
조선군은 본토에서 싸우는 점과 경험이 쌓이면서 강해졌고
상대적으로 일본은 초반 기습전이 끝난데다 조선도 전열이 갖춰지면서
상황이 바뀌는 겁니다.
그리고 일본성도 단점이 있어서 기요마사는 조선의 축성을 연구해서
일본으로 돌아가 성을 쌓는 점에서 일본성이 완전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견룡님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말하는 님이.. 좀 거시기 한겁니다. 아무리 국뽕을 한사발 들이키더래도 인정할건 인정해야죠. 현대 한국 육군 전력도 세계적으로 평가는 받지만 무기 순위라던가 이거저거 보면 약간 마이너하게 밀리는게 실전경험이 없어서에요. 미군이 왜 세계최강이라 불리는데요. 천조국다운 신기술의 장비,물량빨도 쩔지만 정말 다양한 실전경험이 토대가 되었으니 그렇죠.
왜놈들은 그당시 유교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전국시대 등 왜놈들 역사를 보면 충이란 글자는 희미합니다. 개나소나 성이니 군주니 공주니 왜왕은 있으나 마나였고요 심심하면 반란이고 강하고 뛰어난 리더가 살아남는게 상식이였는데 조선은 안그랬죠 왜? 유교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왜놈들도 유교를 원했죠 아주 다스리기 쉬운 방법이였거든요
장창부대는 크게 언급할 바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임란에서 대규모 회전이래 봐야 탄금대, 용인, 벽제관, 직산전투 정도입니다. 그 외에는 공성전이나 게릴라전 양상이라 크게 활약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실제로도 일본군의 총이나 칼에대한 언급은 여러 사서에 나오고 훈련도감에서도 검술이나 사격술을 가르쳤습님다만 나게야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과장되었다곤 생각합니다만,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이 무시되고, 당파싸움으로 사리사욕에 젖어있던 당시 조선의 모습은, 전후 선조와 대신들은 도망가고.. 대부분의 육군은 의병이었으니까요..
군사적 훈련도 받아본적이 없고, 농기구만 들던 자들과, 전국시대를 통일한 직후의 왜군과는 훈련이나 전투경험에서 비교가 안되었을거라고 생각하긴합니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은 확실한게 아닙니다.
진짜 주장했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요.
서류상에는 조선군은 아마 35만 정도는 됐는데
이미 나라가 평화가 오래되면서 실제로는 그만큼 징병이 안됐습니다만
전쟁 중에는 17만에서 30만까지 징병이 결국 됐고 전쟁을 겪으면서 정병으로 변해서
초반 1년만 일본에게 밀렸고 그 다음부터는 계속 일본이 밀린게 맞습니다.
조선이 전쟁준비를 안한 것보다는 그동안의 전례에 비춰봐서 그만큼의 대규모 침공을
예상하진 못했고 아마 1~2만 정도로 습격하는 것을 예상했던 것이 문제였을겁니다.
그리고 일본이 강했던 것은 말 그대로 내전이 오랫동안 계속된 탓에
경험이 풍부했다는 점입니다.
에도 막부가 개창되고 얼마 안되서 일본도 군대가 개판이 됩니다.
그래서 도쿠가와가 전쟁능력이 약화된 것에 불만을 표시하죠.
다 비슷한 것이 청나라의 팔기군도 중국에 들어가서는 금방 약체화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대규모 전투가 많았던 고려 초에는 경험이 많아서 강했죠.
그런 차이입니다.
일본에서도 내전 기간에는 무술이 크게 발전하진 못했습니다.
전쟁터를 경험하면 알아서 강해진다는 말도 있었죠.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갔던 강항의 저서에서는 오히려 신체적으로는
조선이 우세하지만 일본이 강한 것은 사회구조상 만약 전쟁에서 진다면
모든 것을 영주에게 몰수되고 인맥이 끊기는 이유로 전사하거나
아니면 할복이라도 해야 가족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썼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의 고위층과 친분이 있어서 기록에 신뢰성이 높습니다..
와키자카의 그 전투는 일본에서는 쳐주지 않더군요.
그 5만이라는 숫자가 사실 군대라고 볼 순 없어서.
그리고 1500명이라고 아는데 아닌가요?
그리고 전에 니탕개의 난에서 보여준 조선 기마병의 모습은
일본군에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이 좀 안습이였던거죠.
행주대첩은 대단한 전투가 맞습니다.
그 전투로 전황에 영향을 미쳤고 적은 수로 대규모 적군을 막아낸 전투입니다.
별로 그렇게 비웃을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용인전투? 그때당시 끌어모았던 조선군은 80%이상이 무기도없는 징집한 농민 이었습니다.
진격하는 와중에 절반이상이 달아나버렸죠...ㅋ
그리고 와키자가가 500명으로 5만을 도륙한게아니고 선발대로왔던 소수의 징집된 농민을
기습해서 무기조차 제대로 가지지못한 농민들을 해산시킨거죠
아마 그의 의도는 부대가 모두 집결하기전에 조선군의 전력을 탐색하고
일부 병력이나마 소모시키기위한 일종의 무력정찰 같은거였는데...잭팟이 터진거죠~ㅋ
여튼~그로인해 조선군 본진?의 탈영병이 급속히 늘었고 징집한 농민만이 아니라
정규군마저 탈영하는바람에결국 부대 자체가 흐지부지 와해되버린거죠...
그게 뭔 500 VS 50000 이고 1 VS 100 인가요?ㅋ 학살?ㅋ
그리고 요즘 국사책엔 안나오나요? 전 국사시간에 배웠는데...
그때 국사선생님이 병,신같은 권율 등,신같은 조선 머저,리 선조라고
찰지게 욕하던게 생각나네요~ㅋ
또 육전에서 일본군을 이긴적이 없다구요?ㅋ
중증이시네.....정기룡 장군님이 웃습니다 그려.....에혀...
평양성 과 한양성을 전투없이 후퇴한게 심심해서? 조선군은 너무 약하니 양보하려고?ㅋㅋ
성을 중심으로한 의병 활동으로인해 보급이끊기고 시도때도없이 벌어지는 게리랄식 기습에
병령과 물자가 야금야금 갈아먹히니 어쩔수없이 퇴각한거죠......에혀....
그리고 행주산성 전투는 일종의 상징적의미거든요.....
군대가 박살나고 양반 관료들은 다토끼는 와중에 일부 양반과 백성들이 힘을모아
왜군의 전격을 거의 처음으로 저지한 전투가 행주산성전투고
그 시점을 기준으로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거세지게된 계기? 시초?를 제공한거죠,,,
쪽바리들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왜 비밀리에 처리한줄아시나요?
바로 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독립운동의 의미와 의지를 다지는 성지화가 될까봐서에요...
행주산성은 바로 임진왜란당시 왜군을 막고자하는 의지가 발현되고 이루어진
성지와도 같기에 의미가있는겁니다......그래서 대첩이라고 떠드는 거고요...에혀...
애초 일본에는 기마병이라는게 없다는게 맞습니다.
다케다 기병 어쩌구 말하는 것도 실제로는 이동수단으로 말을 탄게 맞고
조선이나 몽고같은 기마병은 아닙니다.
창을 주로 사용한 것은 이것을 익히는데 시간과 노력이 적어서 그렇고
찌르기가 아닌 내려치기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실제 칼이 전투에서 큰 도움이 안됐고 총은 활보다 익히기 쉬워서 도움이 됐다고 하더군요.
초반 일본에게 털린 것은 예상못한 대규모 침공과 경험이 원인입니다.
1. 다이묘 (장군)
2. 마상 사무라이 (기병 기사. 중급 기사신분)
3. 보병 사무라이 (보병 기사. 초급 기사 신분. 마상 사무라이의 지휘를 받음)
4. 장창 아시가루 (농민 출신. 장창 + 칼 로 무장. 마상 사무라이의 지휘를 받음)
5. 철포 아시가루 (농민 출신. 조총 으로 무장. 다이묘 직속부대임 )
일반적으로 마상 사무라이 1명은 보병 사무라이 5명과 장창 아시가루 10명을 거느림..
다이묘가 100명의 마상 사무라이를 거느릴 때,,, 철포 아시가루는 대략 20명 정도로,, 직속부대로 거느림
말을 탔다고 기마전을 하는게 아닙니다.
조선에서도 제대로 된 기마병은 마상재를 익혀야 쓸모가 있지
그 외에는 그냥 '말 탄 보병'이라고 불렸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조선군의 핵심병종은 키우기가 너무 힘들다는
면이 있는데 기마병과 궁병은 키우기가 힘듭니다.
반면 창병은 키우기가 쉽다는 점에서 일본이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시기의 전투에서 일본군의 장점은 장창인건 사실.
기존의 조선의 우위였던 궁병을 조총병이 상쇄시켜서 일본의 단병접전이 유리한 것도 사실.
다만 조선에서는 화포가 일본보다 우위였고 조총도 연구해서 사실 조총 때문에 밀렸다기엔 좀...
단병접전은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한 훈련도감이 창설됐지만 이 병사들은 주로 후반에
도성을 수호하느라 실제 전투에는 참가하진 못했다는데 사실여부는 모르겠고
기존의 조선무예와 기효신서가 합쳐져서 도움이 됐다는 말은 있습니다.
근데 무예의 보급이 원인인지 전투를 치뤄가면서 실력이 쌓여서 그런지 평양성 전투에선
조선군이 그 전과는 달리 너무 잘 싸워서 이상하기도 하죠.
그 당시 우리 육군은 썩어있던 상탠걸 좀 감안해보세요 ㅋㅋ 이래뵈도 수나라 망하는데 일조한 고구려핏줄이 우리며, 비록 영토를 좀 많이 뺏기긴 했었지만, 당나라와 맞짱 뜬 민족이 우리였으며, 몽고와 3차까지 맞짱뜨고 거란족과 맞짱떴으며, 한땐 원래 우리 땅이지만,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이 잠시 살던 땅을 다시 되찾았다가 갈곳없는 여진족들이 애걸복걸해서 또 관리하기 귀찮아서 머물도록 허락해준 민족이 우립니다. 일본이야 군사만들어 우리만 치면 끝이지만, 우린 모든 군사를 일본에 쏟아부울 수는 없죠. 옆에 중국이 있는데.. 우리가 일본에 정신팔면 중국이 군사가 빈 한국을 가만둘까요? 반대로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개털렸더라면 우리처럼 다시 일어날수있었을까요? ㅋㅋ 저렇게 개인주의 팽배한 나라가.. 우리니깐 가능했죠. 그리고 아직 우리가 다 일깨워내지 못한 영웅만해도 셀 수 없어요. ㅋㅋ 일본이 우리같은 상황에 놓여 수나라니, 당나라니.. 거대나라들과 싸워봤다면 벌써-_- ㅋㅋㅋ 땅이 떨어져 있는 걸 천운으로 알아야죠ㅋㅋ 그리고 잊으셨나본데.. 이미 일본역사가 도래인들의 역사.. 즉 이미 고대시대에 한반도 우리 민족의 발아래 꿇려져있던 민족들입니다. ㅋㅋ 지금 좀 끈이 끊기고 역사적으로 악이 남아서 이럴뿐이지.. 저들 핏줄안에 저곳을 점령한 우리 핏줄이 흐름을 잊지 마세요. ㅋㅋ 이미 점령했던 땅임.. 일본 문화재며 고분이며 한국과 연관되지 않은 곳이 없음.
수당과 독단적으로 70년 이상을 맞짱뜬 나라가 고구려임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통일 시켜 전쟁떳으면 정말 모르죠 ㅋㅋ 지금도 그렇고 고대에도 짱꺠들은 머릿수가 많았음 ㅋㅋ 고대전쟁에서 군사의 수가 절대 무시 못할 요소인데 절대적으로 숫자적인 불리함을 안고도 고구려는 700백년 이상 존재했던 왕조임. 신체적인 강함과 정신력이 없었다면 그렇게 버티지도 싸우지도 못했을거임 용맹 그 자체였음.
- -- - - - - 도저히 쪽팔려서 역사책에 쓸 수 조차 없는 경우임..........
- - - - - - - 근데,,, 용인전투 보다 쌍령전투가 한 수 위의 뻘 짓 .......
-- - - - 일일이 글 쓰기도 쪽팔리니 각자 함 검색해 보시길,,,,,,,,,,,,
그 유명한,,,,,,,,,,,,,,,,,,,,,,,,,,,,,,,,,, 쌍령전투........
쌍령은 흔히들 잘못알고 있는 경우입니다.
청태종실록을 보면 쌍령에 참전한 병력은 6000~7000정도로 봐야 합니다.
훗날의 승정원 일기등을 보더라도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병자록이나, 병자일기, 연려실기술이나 묘갈명등을 봤을 때 조선 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3만~4만 정도가 맞다고 생각됩니다만 청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역시 청쪽 사료가 좀 더 확실하죠.
육전 에서 이긴 적이 없다구요??~~ 권율이 이긴 전투는 머죠??
용인 전투는 학살이 아니고 ~ 농민들이 도망 치거나 해산 정도 이겠죠~~ 이전투도 양쪽이 뻥튀기 숫자일 가능성도 큽니다...행주 대첩 대첩이라고 불릴 정도 로 대단한 전투 맞구요~~ 조총이 위협 적이라 그렇지~~ 사실 왜구는 체구 가 작아 500백 병사로 5만 이길 정도느 아닙 니다
인터넷 댓글에서 이런 말을 쓰는 것도 우습기는 합니다만...
요즘 생각한건데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데로 믿는게 서로 속이 편합니다.
모든 일은 그렇게 간단한게 아닌데
게임의 영향인가 영토확장이 땅 따먹기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전투도 어떤 영향으로 그렇게 됐는지 생각보다는 그냥 그게 옳다고 쓰는데
일단 본인도 전문가가 아니고 사람이란게 객관성이란게 있을 수 없으니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데고 생각하고 서로 정신승리를 하는게 좋다고 생각이 드는군요.
출전 당시 와키자카 야스히루의 병력이 1600여명 정도였고 한양까지 이렇다할 전투없이 진격했으므로 전투손실은 없었을 것입니다. 와키자카의 부대는 편제상으로는 수준이었으나 일본의 해상 전략은 원칙적으로 적 수군의 격멸을 통한 적극적인 제해권의 확보가 아니라 부산과 큐슈간의 해상선을 유지하는 소극적은 전략을 고수했기에 조선수군의 저항이 없다고 판단되자 지상으로 이동하여 한양 수비에 투입 본대 1천명은 한양에, 600명이 한양 남쪽 용인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포진했습니다.
이광이 이끄는 대규모 조선군이 북상하여 수원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퇴하고 용인 부근까지 진격하자 한양에서도 와키자카의 부대를 주축으로 출전. 여기서 조선군의 병력이 개전 이래 최대 규모인 5만명에 달했기에 일본군으로서는 상당히 긴장하지 않을수가 없었음. 고니시를 비롯한 주력 부대는 한양 점령 후 조선군의 저항이 예상외로 약하다고 판단 서로 경쟁적으로 북상했고 조선군 대부대의 한양 진격을 예측하지 못했기에 한양의 일본군 수비병은 그렇게 많지 않았겠죠. 즉, 허를 찔린 격이죠.
와키자카의 본대 1천명이 용인에 주둔한 병력 600명에 수원에서 철수한 병력, 그 외에 한양이나 그 인근에 주둔한 병력 등이 부랴부랴 동원되어 조선군을 저지하기 위해 출격 하지만 어차피 고작 3마나석짜리 소다이묘인 와키자카였다는 점에서 병력의 규모는 2천을 넘기기는 어려웠을겁니다. 한편 , 이광은 용인에서 소수의 일본군을 발견하고 공격명력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장거리 행군으로 병사들은 지쳐있었고 공격 할 태세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한 공격은 실패 백광언 이시지등이 전사 와키자카는 고니시 가토등에 비한다면 소다이묘에 불과하지만 히데요시 최측극 시동출신으로 "칠본창" 중 한명으로 불릴 만큼 매우 용맹 조선군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시간적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쟁 경험을 토대로 조선군의 포진 무질서한 지위 사기의 급격한 저하를 파악 아침 식자중인 조선군을 재빨리 기습 와키자카는 전술가로서 대단한 결단력과 지휘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죠. 그정도로 대단한 전술가이자 용맹한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수군에서 이순신 장군께 개털렸죠. 정말 이순신 장군님은 대단하고도 정말 정말 대단한 장수이신분..
와키자카가 이끈건 기병 1500 용인에서는 5만의 조선군이 밥먹고 있을때 돌진해 들어갔기 때문에 한방으로 박살내 버릴수 있었죠( 적은수로 몇십배에 달하는 적을 기습한다는 이 부분 정말 대단한 전술가임)
그때 조선군 지휘관이 문관출신이라 정정당당하게 붙었어도 아마 조선군의 참패는 피하지 못했을겁니다.
다만,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은 재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조리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부분 목숨을 건질수 있었고, 이들은 이후 전라도 수비에 많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일본군은 이후 엄청난 혈전을 겪으면서도 조선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해 전라도진입을 포기하게됨
초창기 조선군이 진짜 개털린건 균율이 엄격하지 못했고 이 부분이 제일큼 실전경험이 후달렸음 그에 반해 오랜 내전으로 전쟁에는 도가 튼 녀석들이 왜구들 그리고 임진왜란이란 이 전투를 일본에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음 흑역사라면 흑역사인 부분이니깐요. 30만 대군을 출병시켰는데도 살생과 약탈만 했을뿐 소득을 얻은 전투도 아니였음 그래도 이득이라면 도공과 학자들을 잡아가 도자기 문화를 꽃피운 부분에서 이득이라면 이득이겠죠 사실 우리도 임진왜란이 터지기전 나름 전쟁준비를 해왔음 계속해서 정보를 얻었고 왜구들이 쳐들어올 가능성이 높다는 첩보도 얻었구요. 그래서 전력을 나름 분석했는데 규모는 1~2만 이 정도 규모로 쳐들어올줄ㄹ 알았음 ㅋㅋ 조선 정부에서는 아 그래? 그정도수면 그냥 막음 ㅎㅎ 개깔봤다가 막상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의 규모는 20만 완전 대병을 끌고왔음 ㅋㅋ 그래서 초기에 개털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임진,정유재란 당시 조선군의 단병접전능력은... 그냥 쉽게 개념자체가 없었습니다... 1:10 이야기도 임난이전 중종실록에 이미 1:10 이야기가 나왔고. 선조실록에도 칼만 들면 조선군이 튀었다는 기록도 있죠. 명군참전이후 명군이 왜구를 소탕했던 절강병법에서 몇개 급히 차용하여 살수(암살자가 아닌 단병접전을 할 병사들)를 키웠지만... 항왜들이 그것을 보고 아이들 놀이라 할만큼 열악했구요... 기존의 왜구는 단병접전에 능하다라는 공포심과 실제 열악한 단병접전 능력으로 인해 칼만든 왜군에게 속절없이 무너지거나 도망간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20의 왜군에게 140의 수군이 도륙당한 기록도 있고...
당시 조선수군이 함대함 결전을 지향했는지도 여기서 이유를 찾을수 있죠.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이 육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린 건 맞지만 너무 자학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용인전투는 조선군이 5만이라 하지만 대부분 급히 모은 농민이 대부분이었고 5만명이 다 전사한게 아니라 대부분 와해되어 도망갔다고 봐야 할 겁니다. 지휘부도 도망가기 바빴으니까요. 얼마 안되는 정예병은 신립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으로 다 죽였고... 그나마 용인전투에서 권율 정도가 지휘권을 유지하여 휘하 병력을 큰 피해 없이 후퇴시켰고, 이 점이 눈에 띄어 향후 지휘권을 잡게 되죠.
사실 육전에서 조선의 승전이라고 할 수 있는건 수성전으로 진주대첩과 행주대첩이 있고, 야전에서는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막아낸 계기가 된 이치전투, 웅치전투, 슬치전투가 있습니다. 각각 다른 전투로 볼 수도 있지만 이치, 웅치, 슬치전투는 지역을 바꿔가며 펼쳐진 하나의 전투라고 하는게 맞을 겁니다. 그래서 3가지 전투를 대표해서 이치전투로 부르기도 합니다. 권율이 지휘한 이치전투는 왜군도 조선의 3대 승전 중 하나로 기록할 정도니까 조선의 승전이 분명하죠. 이 전투를 통해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바다의 이순신과 함께 육지의 권율이 막아냈으니까 임진왜란 전체 전황에 끼친 영향이 큽니다. 권율 하면 행주대첩이 유명하지만 오히려 이치전투가 더 중요한 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임진왜란 전체를 놓고 보면 왜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했다고 할 만한 전투는 전쟁 초반의 탄금대 전투와 용인과 쌍령의 조선 입장에서 한심한 패배 말고 별로 없습니다. 의주까지 일사천리로 도망친데다 명군이 오기 전까지 의병의 게릴라전을 빼면 왜군에 대응할만한 조선군이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전투에서 승패를 가장 크게 좌우하는게 공포에요.
몽골군이 대표적이죠. 몽골군은 처음 나가서 무조건 몰살이었어요. 군인은 물론 마을 자체를 말려 버렸죠.
그러다보니 그 다음은 승승 장구죠. 왜냐하면 그 무서운 몽골군이 항복하면 그냥 지나가는데 항복 안하면 씨를 말린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친일 논쟁의 중심에 있는 백인엽 장군의 "장정" 에도 나옵니다.
당시 춘천에 있던 한국군 1개사단, 미군 1개사단이 있었고, 여기에 미군 기계화 연대가 1개 더 있었죠.
근데 갑자기 중공군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겁에질려 원주까지 도망가죠.
나중에 알고보면 중공군은 3개 연대였어요. 3개 연대에 2개 사단이 넘는 부대가 100킬로 가까이 도망치면서 군수품 놓고 가고(중공군은 군수품이 제대로 없었어어요. 아주 횡재했죠) 뿔뿔이 흩어지고 죽고... 한 겁니다.
무기도 제대로 없는 농민군으로 사무라이를 어떻게 이기냐고요?
그게 알아야 하나요? 우리가 농민군이라 불리했다는걸 알아야 하나요?
왜요? 후세인의 이라크 군도 대단한 미군에 반항했으니 엄청 대단하겠군요.
그런건 따질 필요가 없는 겁니다. 우린 정규군 자체가 없었어요. 농민군 아니면 쓸 군인이 없었다는 뜻이죠.
그 상태에서 어떻게 이기냐고? 그럼 왜군이 우린 정규군이 없으니 좀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미군이 오합지졸 이라크군을 상대로 미사일만 수천개 날린거 알죠?
미사일 몇개 없는 이라크군을 상대로 너무한거 아닌가요? 좀 봐줘야죠?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싶은건가요?
전쟁에서 그런거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졌고, 그래서 우린 100:1 로 붙어도 힘들었고, 그래서 우린 공포에 휩싸여서 1000:1 도 힘겨운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왜군이 강하기도 했지만, 조선엔 군대란게 없었어요.
여러분 마을에 인민군이 쳐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할건가요? 도망가아죠. 총도 없는데....
인민군이 30명이 왔어요(1개 소대죠)
근데 마을엔 장정이 3천명이 넘어요.. 그럼 붙을건가요?
아닙니다. 총도 없는데 도망가야죠.
항복하던지...
일본 검술이 강하다? 우리가 초반 임진왜란에서 밀린건 검술 칼 이 아니라 조총 과 숫자에서 밀렀지 백병전과 검술 에서 밀린건 아닙니다 이치 전투에서 보듯이 왜구는 체구가 작아 충분히 제압 할수 있는 상대 이고 임진 왜란은 왜구가 조선을 많이 유린했지만 결국은 우리가 이긴 전쟁 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군의 연속된 패배의 이유를 조총을 드는 분들이 아주 많은데
(무기만 동등했다면 모르는거다 라는 생각이 깔린것으로 보임)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그때당시 조총이 활보다 강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활은 위력이 좋았기에 전투가 벌어진 시점에서 무기 화력의 차이를 탓하긴 무리가 있습니다.
조총의 장점은 필요한 훈련 기간이 짧다는것이 전부이고 오히려 날씨에 따라 사용 못하는 경우도 많기에
화력에 억울하게 당한것은 절대 아닙니다.
삼백년 뒤에도 사용되던 머스켓총으로도 유효사거리가 짧고 명중률도 형편 없어서
일렬로 상대방 공격하든 말든 맞으면서 최대한 붙은 후 일제사격을 하는 전술을 사용한 이유입니다
하물며 300년전 조총이 얼마나 강력했으려구요
윗분이 체구를 근거로 들었는데 물론 붙어서 개싸움 날 경우엔 피지컬적인 차이로 압도가 가능하지만
무기를 들고 훈련받은대로 경험한대로 싸웠을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향료전쟁이란 책을 보시면 서양인들은 백병전에서 일본 해적 한명의 전투력을 유럽 병사 7명과 비교했을정도로
일본은 실제로 전투력이 우월했구요.
그리고 조선군은 말만 군대지 그냥 농민들 불러다 세워놓은게 전부입니다.
중앙군과 정예군은 남쪽전선에 있지도 않았고 수도 얼마 없었죠
그리고 조선군 병사의 개인 장비들은 그냥 흰 일상복에 농기구나 몽둥이 들고 나왓 ㅓ싸웠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구요? 말이 안되죠. 근데 조선은 그런나라였어요.
가끔 조선군 병사의 개인장비들 줄줄이 나열하면서 거품무는 분들 계신데
그건 국가 문헌상 권장사항이지 절대로 그렇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개인병기를 주면 그걸 먹을거로 바꾸는 경우가 빈번해서 실제 전투에선 집에서 쓰던 농기구 쓰거나
그나마 여유있는 사람은 그거 녹여서 대체무기나 만들어 썼죠.
조선시대 세율이 생산량 10%였습니다. 이걸로 법제상 농병일체였던 조선군의 개개인의 병기 지원이 가능했을까요?
지방관들이 개인적으로 슈킹했던 농민 재산들 때문에 어마어마한 부담을 농민이 지고 살았던거지
공식적으로 나라가 가져가던 세금은 저게 전부였습니다.
가끔 일본도는 잘부러져서 두세개씩 차고다닌다고 비웃는 분들 있었는데
전쟁용 칼한자루 못쥐어주던 나라가 조선이란걸 좀 알아두셧으면 좋겠음.
한심한 나라였습니다. 부정할 필요 없어요
이런 한심한 나라에서 나라지키려고 목숨바친 이순신장군님 같은 분들이 이래서 대단한거죠..
참고로 조선 포졸이 사극에서 허구헌날 들고다니는 삼지창은 왜란 이후 명나라로부터 들여온겁니다.
삼지창이요.. 조선이 이런 나라였습니다.
소리였죠. 쾅 하는 소리말이죠. 우리군 정규군은 북쪽에 몰려있고 왜놈들과 싸운건 끌어모은 농민병과 징집병들 이었습니다. 그렇게 훈련이 안되서 집단전에 사기와 군기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는 것이 징집병들인데 달려가는도중에 쾅하는 소리가 났더니 옆에사람이 죽으면 그주위는 순식간에 패닉에 빠지는거죠. 하물며 일제사격이라도 했다면 그 패닉은 더 커지겠죠. 조총수가 달랑 10명이라도 징집병들을 패닉에 빠지게하는데는 충분했을겁니다.
실제로 조선군은 전투 시작하면 그렇게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군은 의병 전투력이 훨씬 높을 수 밖에 없어요
어짜피 의병이나 징집병이나 훈련상태는 똑같은데
맨날 재산이나 빼먹던 지방관이 끌고온 사람보다 어떠한 동기부여가 되어있는 자발적인 전투원이
당연히 더 잘싸울 수 밖에 없음
왜놈이 보급끊겨서 양민들 건드리지 않았으면 의병활동도 이정도로 안커졌을 수도 있었죠..
진짜 이이 말대로 천운이 따른겁니다 조선입장에선
태클은 아닌데 순서가 약간 바꼈어요
왜군의 보급이 끊겨 민간을 약탈...그로인해 의병활동 증가가 아니고...
의병들의 게릴라 전술과 청야작전으로 보급이 차단된거죠~
꼭 농기구나 조악한 무기들고 왜구와 싸워야 의병활동은 아니죠
청야작전은 절대적으로 농민의 일방적인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건데
그런분들도 어떤의미에선 가장큰역할을한 의병인거죠...
또 의병이라는 존재자체가 왜구들에게는 이해할수없는현상 이었죠
왜구들의 싸움이란 대장이 도망,사망 혹은 수도(본거지)를 저령하면 끝나고
모든 백성은 새로운 군주에게 알아서 조아리는게 상식인데
조선은 개전초반에 정규군이 궤멸하고 왕은 도망가버렸는데
일반 농민들이 스스로 의병활동하며 거세게 저항하는게 이해안되는 일종의 공포였죠...
그런것들이 사기(의지)로 이어져서 조선 정규군보다 농민 의병이
왜구와 더잘싸우는 웃기는 그림이 나오게된거죠...
승전 65회의 전투 중 조선 관군의 단독전이 38회로 압도적이었으며 의병의 참전 아래 관군이 주도한 전투가 11회, 그리고 의병 단독전은 10회, 관군의 참전 아래 의병이 주도한 전투는 6회였습니다.이 통계로 보아 관군이 전투를 주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연도별로는 개전 첫해인 1592년 9개월동안 70회가 집중적으로 벌어졌는데 이 가운데 조선군의 공격전이 43회, 방어전이 27회, 승리 40회, 패배30회로 평양까지 몰린 개전 초기를 제외하고는 첫 해부터 승세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그 다음해부터는 조선이 일방적인 공격을 가했으며 명군 참전은 105회의 전투 중 8회에 그쳤습니다.>
좀더 흐름을 설명하면 1592년 4.14부터 5.2까지 한달까지만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였습니다만
이후 1592년9월까지 전세가 역전이 되어 31승 19패의 전적으로 거의 앞서다가
1592년 10월 이후부터 1593년까지는 거의 전승 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1593년 1월의 평양성 탈환은 조선의 승전분위기 속에서 일으난 하나의 승전일 뿐입니다
다시말해 명의 평양성탈환으로 전세가 역전된것이 아니라 이미 전세는 역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1594~1597년까지 큰 전투한번없는 소강상태이다가 정유재란 발발한
1597년에는 거의 4:4정도로 승패 우위가 없다가 1598년에는 또 일방적인 조선,명군 연합군의 승리입니다
상처뿐인 승리가 아닙니다 실제로 일본은 초기 1달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방적인 수세에
몰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의병의 역할이 그렇게 큰것도 아니었습니다. 주요 전투는 거의 조선육군이 담당하고
일방적인 승리를 했던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실제와는 다르게 조선군은 무력했다는 선입견이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것 같습니다
승리한 부대 승리 회수
조선 육군 22
조선 육군,의병 10
의병 10
명군 1
조선 수군 12
조선육군,수군 1
일본 40
조선 육군이 참전한 대규모 공격은 명군과 연합 공격한 울산성 전투가 유일함..... 근데,, 패했슴..
명군 단독 공격은 평양성 공격과,, 벽제관 전투 이 2건인데,,, >??
명군 단독 공격 평양성?? ㅋㅋ 뭘 좀 알고 떠드세요(저 위에서 부터 혼자 겉핥기 허접웃긴
소리나 계속 쳐하는)
평양성 2차전투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1월 6일부터 9일까지 평양에서 조·명연합군과 왜군이 벌인 전투.
명은 원군으로 파견하였던 조승훈의 군대가 1차 평양성전투에서 왜군에게 패하고 돌아오자 일본과의 잠정적인 휴전을 하면서 시간을 버는 한편, 요동지방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격퇴하기로 하고 이여송에게 4만의 군사를 주어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온 명군은 1월 6일 이른 아침 조선의 관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고 성문 밖에 진을 쳤다.
조선에서도 도원수 김명원을 비롯하여 이일·김응서의 군대와 휴정·유정의 승군도 합세하였다. 이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연광정의 토굴로 쫓겨 들어가고 칠성문·보통문·모란봉 등지의 제장들도 여기에 모여서 응전하였다. 이여송은 이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으나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막다른 지경에 빠진 왜적들이 발악할 것을 염려하여, 성 밖으로 군사를 거두고 고니시에게 길을 열어줄 테니 퇴각하라고 하였다.
고니시는 군량·무기가 다하여 없어지고 원군도 오지 않아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여송이 이 사실을 조선 진영에 통보하자 조선측은 복병을 철수하고 길을 열어주었으며, 이에 고니시는 밤중에 남은 군사를 거두어 서울로 후퇴하고 조선은 비로소 7개월 만에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도망가는 왜구를 추격했던 황인엽? 조선 장수가 평양성의 몰골을 보고
모조리 몰살시키지않고 적당히 추격하는 흉내만 내다 보내주게 분해서
이를갈다 이가 세개나 부러졌다죠...
그리고 일본의 전쟁은 단순 무식 그자체죠 그들의 관해상
적장을 잡거나 죽이거나 수도를 함락하면 끝나는건데
조선은 달랐죠 왕이 도망가버리고 군대는 무너지는데 백성들은 스스로일어나 투쟁하고...
그덕에 오로지 수도만 바라보 송곳처럼 파고들었다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버린게 왜군의 현실이었죠
오죽하면 선두는 중북부까지 치고올라갔는데
후방부대는 전라도조차 뚫지못하고 오리혀 허리가 끊겨
보급도 차다당하는 기형적인 전선이 야기됐으니 말이죠...
뭐 조선 정규군ㅋ 이 일본군으 상대로 이긴적이 없다고 주장하시는데
현실은 반대에요 개전 초기 1~2달 동안 송곳처럼 파고드며
준비간안된 조선군을 기습으로 이기다
조선군의 전열이 정비되고 후방이 의병들이 거병한후론 쭈~욱~ 연패였습니다.
보급과 사기가 꺽인 왜구스스로 대구모 전투를 철저히 피해 다녔죠...
또 명군의 가세도 오히려 독이됐죠 명군의 유지는 조선이 부담해야했기에
조선군이 제대로 전열을 정비할수가 없었고 명군은 일본군과의 결전을 피하며
오히려 조선 백성을 약탈하기도하면서 단물을 뽑아먹으려들었기에
시간만 질질끄는 양상이 되버린거죠 만약 조선군만으로 대항했으면
7년이나 갈없이 애초에 끝났을 전쟁이었죠...
정유재란 당시에 거제도에 나무 베러왔던 왜병 20여명이 고성현령 조응도가 지휘하는 판옥선에 기어올라 사부와 격군을 포함한 140여명을 모두 몰살시킨 사건이 있었음. 일본군이 단병접전에 강한건 맞음. 카더라긴 하지만 조선수군에 왜병이 한명이라도 배로 기어올랐을시 갑사 10명이 그를 당해내지 못한다라는 말까지 돌았던거 보면..
한학자 이시언이 도산전투 당시 명군 소속 몽골 용병들에게 패퇴하는 일본군을 보고 '조선군 도망치듯이 한다'라고 자조적으로 뇌까렸던거 생각하면 뭐.. 물론 조선군이 임진년 와중에 잘싸운 전투도 있고 분전한것도 많지만 일단 군대의 질적 수준은 당연히 전국시대를 거쳐온 일본군이 우수했지. 그건 당연한거임.
울산성 전투는 가토를 궁지로 몰아넣긴 햇지만 작전자체는 실패임. 일본군이 축조한 왜성이 너무 견고하고 조명이 알던 기존의 성곽 축조방식과 달라 공성이 난항을 겪었음. 2차 울산성 전투는 피해 규모가 불명이지만 1차는 조명 연합군이 피해를 더 많이 받았다. 가토를 고사시키는 작전으로 변경된것도 일본군의 강력한 수성으로 피해가 너무 커지자 전략을 바꾼거임. 1차때는 그래도 가토를 궁지로 몰아넣은게 있어서 조명연합군이 아깝게 함락못시켰으니 다시 재공격가자, 해서 2차 울산성 전투를 벌였는데 패배했다. 울산전투는 승전이 아니라서 반박으로 올릴만한 거리는 아닌데..
제승방략체제가 지방군이 한 지점에 집결해 있다가 중앙 지휘관이 내려와 지휘권을 수습하는 방식이고 이 체제가 제대로 발동하기 위해서는 평시에도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했는데 사실상 훈련은 커녕 수준이 형편없었기에 일본군에게 야전을 벌이다 패퇴한거지 체제 자체는 잘 발동했음. 각지의 병력들은 잘 집결했고 물자등도 메뉴얼에 맞게 동원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승방략체제가 가진 단점이 부각된데다 낮은 훈련도 까지 겹쳐 전쟁당시 한계를 들어냈다. 그랬기에 상비군 체제인 속오군과 훈련도감 체제로 바뀐거다. 속오군이 처음 편성된게 선조 27년 전쟁중이고 진관체제가 다시 복구되어 정유재란때 동원된다. 이미 개박살나서 전쟁중에 체제자 진관체제로 다시 돌려졌는데 이미 뒤진 제승방략이 제대로 다시 발동해다는건 개소리임
사실상 조선군은 와해된 상태였고 명군을 그토록 폄하하지만 명군 참전이후에 조선육군에 숨통이 트인건 사실이다. 적어도 평양성 전투까진 제대로된 역항르 해냈고. 명군이 조선에 들어와 온갖 패악질을 벌인것도 사실이지만 공도 있는건 사실이다. 명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조선 육군에 일본군을 모두 몰아낼 힘이 있었나? 정유년때 조선군은 3만이었고 육전은 사실상 명나라가 수행했다. 전선을 고착화시킨 책임이 명군에게 있는것도 사실이고 패악질을 자행한것도 사실이지만 평양성 수복으로 물꼬를트고 정유년 왜군의 공세를 직산에서 저지시킨것도 명군이지
제승방략체제니 진관체제니 따로 있는게 아니라니? 두 체제가 전시에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인터넷에 좀 찾아보고라도 와라;; 내가 뒤에서도 말했지만 제승방략체제는 현대 한국군의 작계와 같은 메뉴얼화된 병력 동원 계획, 즉 작전계획이지 조선군 그 자체가 아니다. 너야말로 뭔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데, 제승방략이 붕괴되었다 해서 조선군이 붕괴되었다는게 아니다. 조선군의 병력 동원체계가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전을 맞으면서 한계를 여실히 들어냈기에 상비군 체제인 속오군, 훈련도감이 편성되고 과거의 거점 수비 위주인 진관체제를 약간 손본것으로 대체된다.
다시 말하자면 제승방략이 붕괴 = 조선군이 붕괴 이게 아니라는거다. 도대체 제승방략을 뭐라고 이해하는거냐? 실록에도 기존의 체제인 제승방략을 구체제인 진관체제로 교체하는 내용들이 실려있는데 니말대로 하면 사실상 차이가 없는 체제를 두고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해댄거냐? 진관과 제승방략은 아예 뿌리부터 다른 방어체계다
"오골성이 몇만 단위가 주둔할 수 있을 만큼 각개 성방어를 곤고히하여 적이 쳐들어 올
때 발을 묶고 중앙군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서 성내외에서 합동 육박전을 벌였음. "
이게 니가 말한 진관체제다. 각 지방의 거점이 제 역할을 하며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중앙군이 내려와 적을 격멸하는게 진관체제의 주 골자다. 웃기지도 않은 예시를 들어놓고 제승방략이니 진관체제가 있는게 아니라고 하는데 도대체 뭘보고 아니라고 판단하라는거임? 애초에 두 체제의 뿌리부터 다른게 진관체제는 그야말로 각 지방의 최소 단위인 진(鎭)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향토 방위체제이고 양인개병과 자영농을 바탕으로 운용되는 체제이고 제승방략으로 바뀐것도 향토방위중심에 각개격파당하기 딱좋은 진관체제에 한계를 느낀것도 있지만 당시 조선 농민층이 자영농에서 지주전호로 바뀌어버리고 진관체제를 먹여살릴 병역을 지는 보인의 숫자가 급감함에 따라 진을 유지할수가 없었기에 뿌리부터다른 제승방략으로 선회한건데 뭔 차이가 없어? 진관과 제승방략은 조선사회와 경제와도 연관이 있는 사회 변화이다. 군 운용 또한 독립된 작전권을 가진 진관과 다르게 제승방략은 분군법(分軍法) 운용에 의한 중앙집중, 야전중심으로 바뀌는데 퍽이나 똑같겠다
개물고기 14-05-04 17:56 제승방략은 이미 한계를 노출해 임진년 중간에 붕괴되고 그랬기에 전란이후 속오군 체제로 변경된건데 이미 이일 신립 다 박살나고 제승방략 체제가 실질적으로 붕괴해 명군 참전전깢 파국을 맞았던건데 그게 건재해서 다시 발동했다니. 예토전생이라도 한모양? >>
개물고기 14-05-04 17:31 임진년을 거치며 붕괴한 제승방략이 점차 발동되었다고? 어디서 나오는 소리냐?
제승 방략체제는 조선군의 전투시 '교리'를 말하는게 아니라 전쟁 초기 조선군의 동원을 메뉴얼화 하고 체계화한 '작계'를 말하는거임.
제승방략체제는 전쟁 발발시 분군법에 의해 나누어진 군대가 중앙집중화되어 올라오는 적군을 상대로 야전을 벌이는걸 상정한거지 조선군 전체의 전략 전술을 말하는게 아님 -_-
진짜 당신하고 나 사이에 계속해서 이렇게 헛소리도 틀어지는게 그거 때문임. 조선군 제승 방략체제의 끝은 임진왜란 전체와 궤를 같이 하는게 아니라, 이일과 신립과 용인에서 근왕군이 개발살날때 이미 그 체제는 깨진거임. 이후 패잔병이나 와해된군대가 전라도와 북방에서 분전한건 제승방략체제라는 교리에 의해 방어전을 펼친게 아니라 완전히 중앙, 야전군화되어 전선군으로서 기능을 한거지 제승방략을 들먹일게 전혀 아님. 제승방략은 현대 한국군으로 치면 예비군과 현역의 동원 과정을 아우르는 거국적 동원체계를 말하는거지 당신이 말하는 전투를 아우르는 군사 작계를 말하는게 아님
현대 한국군으로 설명하면,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켰을때 현역 군대의 동원과 예비군의 일제 소집, 전 후방 전시 동원체제로의 전환 여기까지가 조선시대의 제승방략임. 조선군의 전투와 전투 내용에 관해서는 진짜 상관이 없는거임. 제승방략을 무슨 조선시대 병법 교리 이런걸로 생각하나? 제승방략은 전시에 돌입했을때 병력이 어디서 와서 어디서 집결하고 누구의 명령을받고 물자는 어떻게 하며 체제는 어떻게 갖추는데에 대한 일련의 메뉴얼화된 작계일뿐임. 현대 한국군을 계속 예로 들자면 북한군의 기습 진공으로 한국군의 동원체계가 붕괴되고 헛점이 들어났다면 그 헛점을 새롭게 개선시키겠지. 제승방략에서 진관체제와 속오군으로 바뀐건 그 동원체계와 정규군 운용 과정을 재승방략체제의 헛점이 들어나 변경한거지 무슨 제승방략체제랑 조선군을 동일시하고 있어;;
앞에서도 말했지만 제승방략이 곧 조선군이 아니다. 조선군은 일련의 초기 방어과정이 무너지고 나서도 분전했고 국토를 지켰다. 누가 그걸 부정하냐? 근데 니가 말을 못알아 먹고 있잖아. 아니, 애초에 지식이 없었구만. 제승방략은 그냥 동원 체계일뿐인데 조선군이 분전했던걸 예로들면서 제승방략이 잘돌아가고 있다고 하니깐 내가 반박을 할수 밖에 없지않나?
"우리는 해군및 육군에서 다양한 첨단 화약화력무기 및 점차 발동된 제승방략체제와 민관합심으로 전력을 갖추면서 이후 남부로 기어 내려와 수비로 전환한 " 내가 반박한건 줄곧 이거임. 당신은 지금 조선의 제승방략체제가 건제해 계속해서 유지되었다고 판단하고 말을 하는데 내가 반박하는건 그게 아니라는거다. 제승방략체계, 일련의 동원과정은 무너졌고 정유년만 해도 동원체계가 아예 바뀌어버린다. 제승방략은 각 지역의 군사가 일련과정을 거치며 집결하는 정교한 시스템이다. 신립이 제대로 병력이 갖추기 전에 적을 맞았다 하는데 병력과 물자는 제시간에 제대로 도착했다. 전 국토가 유린당한 상황에서 평시에서 전시로 전환되는걸 상정한 제승방략 작께가 계속 유지되면서 제 기능을 했을거 같나
?? 몰라서 묻는 것임??? 그럼 님은 조선은 이후 어떻게 왜구와 싸웠데요??
평양성,행주, 진주대첩이고 경주성 탈환 울산 전투고..뭔 도깨비들이 한 것임?" 여기서도 당신이 말하는게 들어나잖아. 조선군과 제승방략을 무슨 같은 궤로 두고 설명을 하는건데 초기 작전계획인 제승방략은 실패한거야. 제승방략체제대로 움직인 이일과 신립이 모두 패퇴했고 후방으로 밀려나 방어전으로 바뀌었는데 그 방어전이 제승방략 체제로 운용된다고 할수 있나? 다시 말하지만 제승방략은 초기 방어, 병력 및 물자동원 작계고 평양성까지 밀렸을때 이미 그 기능은 상실했다. 당신은 마치 조선군이 후방으로 밀렸을때 후방지역에서도 제승방략체제로 병력 충원이 운용되었다고 하는데 그 근거가있나? 이미 작계는 휴지조각이되서 조선 중앙에서 내려보낸 병력과 전라의 근왕군은 전부 와해되고 흩어져 밀려났는데 제승방략 체제가 잘 돌아가고 있었다는건 순전히 당신 추측아닌가?
고구려 예시로 들면서 말하는거 부터가 잘못되었다. 조일전쟁은 당신이 말하는대로 총력전이 맞아. 전쟁 중반부터 진관이든 제승방략이든 총력전 양상으로 흘러간것도 맞다. 근데 당신말대로 그렇게 되었기에 제승방략 체제가 무력화된거다. 제승방략과 진관체제 모두 전쟁초기 조선군의 대응과정을 망라하고 있는데 당연히 전쟁 초기 전선이 한달만에 서울까지 밀리면서 동원체제가 붕괴되었는데 제승방략이니 하는건 한성 내줄때 이미 망한거야. 그걸 두고 조선이 분전할때 버텼으니 제승방략또한 잘 버텼다고 하는데 이건 비약임. 고구려 이야기에서도 들어나고 완전히 상이한 제승방략과 진관체제를 혼돈하는것도 당신이 그 두 체제를 조선군 전쟁 전 과정에서 들어나는 작전교리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님?
진짜 현대 주류 기성 사학에서 인정된 임진왜란때의 제승방략체제의 붕괴를 여기서 부정당하네.. 이렇게 말해도 애초에 당신이나 나하고 보는 시각이 다르기에 또 다른 소리 나올수 밖에 없다. 진짜 잘 들어오지도 않은 가생이에 로그인도 잘 안하는데 뭐하는꼴인지 모르겠네 당신이 이겼다고 정신승리를 하든 나를 욕하던 소귀에 경읽기였다고 생각하든 맘대로 생각하쇼
누가 교리를 설명한다고했나? 나는 그런 비슷한말도 한적없는데
대체 뭔소리를 하는거야...아주 상상의 나래를 펼치세요~ 븅신~
그래 니말대로 제승방략은 군사동원 하는거야~
내말도 그거거든 계속 헛소리할래?
니말은 제승방략이 완전히 실패한 체제였고
전황에 아무런 도움도 안됐다는거잔아
근데 용인전투에서 징집됐던 민간인이 패해서 부대가 와해됬지만
그인원을 다시 규합하고 전열을 정비해서 결국 전라도 방엉 성공했다가
그렇게 어렵니?
그인원이 어떻게 모였고 어떻게 방어에 성공한건데? 응? 땅에서 자라났냐?ㅋ
결국 최초 제승방략으로 징집했던 사람들인거잔아...
그러니 제승방량이 전혀 쓸모없었던건 아니었단거잔아~
뭐 전라도를 방어한 부대가 고도로 훈련된 조선 최정예라고 우기고 싶은거냐?ㅋ
전라도 전선 방어가 임진왜란에서 어떤의미를 가지는건지 감이안잡혀? 응?
무식하면 성격이라도 좋던가 멍청아~
지 상상과 착각을 거들먹거리면서 훈계하고 가르치려들다 안통하니까
이제는 남이 하지도않은말을 했다고 벅벅 우겨대는 꼬라지가 한심하구나~ㅋ
조명연합군의 공세 작계가 사로병진 작전으로 변경된것도 울산성에 병력을 몰아 붙이자 일본군 또한 병력이 집결되는 상황을 맞는 바람에 작전에 실패한게 원인임.
애초에 정유재란때는 일본군이 거진 철군해서 남주에 6만여명 밖에 남아있지도 않았다. 곧 죽을 히데요시는 제3차 원정군으로 10만명 이상을 더 준비하고 있었지
정유재란의 종결 과정에 대한 해석은 조선이 승리한 전쟁인가, 아니면 허울뿐인 승리였나 일본으로선 뭘 얻었고 뭘 잃었나, 이렇게 따져갈수 밖에 없기에 시선차이가 생길수 밖에 없음. 나도 여러가지로 생각하는게 있지만 이런 주제로 토론을 벌여봤자 분란만 커지기에 이만 생략..
정유재란 당시 전개과정좀 제대로 보고와라. 협상 결렬되고 정유재란 시작하자마자 명군은 남원, 전주, 충주 등에 분산돼 있다가 각개격파 당하거나 도망쳤다. 조선군은 각개격파되어 산성에 고립되거나 흩어졌고 오히려 진격은 임진왜란보다 수월했다.. 협상직전 조선군은 13만으로 불어있었지만 협상와중에 3만으로 줄고 육군의 대부분을 명군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명군의 직산전투와 충무공의 명량해전이 정유재란 당시의 일본군의 진격을 멈춰세우고 전선을 고착화시켰을 뿐이고 일본군이 개털리면서 도주했다는건 개소리다. 울산성전투까지 고착화되어있었고 울산성 공략도 결국 실패,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있다 히데요시의 병사로 전쟁이 급격하게 종결된거 뿐이다. 일본군이 뚜렷한 패배를 거둬 후퇴한게 아니다. 히데요시가 죽지 않았다면 제 3진 15만여명의 병력이 3차침공을 벌였을거다
내 글은 당신의 "그런 압도적 왜구전력으로 승승장구했다면 7여년의 기간도 왜구들이 수세에 몰리다 노량해전에도 마지막까지 그렇게 개털리면서 도주할 일도 없었을 것임은 두말이 필요없는 것 아님?" 에 대한 반박인데 갑자기 웬 조선군의 규모타령임? 어떻게 생각하라고? 반박을 할거면 내말에 반박을해 쉐도복싱하지 말고
이괄의 난때 이괄이 가장 신뢰하던 부대가 임진년,정유년때 항복한 항왜무리였고 반대로 그 이괄의 난에 큰 공을 세운 장수중에 하나도 항왜 김충선이었지. 당시 이괄의 난때 인조가 피난가고 한양이 반란군에 함락되고 지랄할때 선봉의 항왜부대가 하도 강렬하니깐 동래 왜관에 일본인들을 빌려올려고도 했었음. 실록에 있다 찾아봐라.
위의 글은 당신네들 글이고(대충 읽어보다 중간중간 헛소리에 그냥 내렸지만) 여기서 촉발된 논쟁은 새롭게 밑에서 전개된 제승방략 체제 관련 논쟁인데, 위에 것 읽어서 뭐함? 떼쓴다고? 도대체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논제를 다밝혔는데 거기에 대한 반박은 없고 12살짜리애가 귀막고 눈감고 자기 할말만 한다고 소리지른다라, 내가 자기 할말만 하는것 처럼 보이는건 그쪽이 반박의견을 내세우지 못하니깐 내 글이 부각되는거고. 억지는 누가 부리는거임? 논쟁할 여지는 이제 없어서 감정론이나 들먹이는데 그 말을 왜 당신한테 들어야되는지 모르겠네 ㅋ
상상으로 부풀린 양념을 가미한 자위라고 판단한걸 논파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판단한 그 상대보다 더 형편없다는걸 입증하는 꼴이 아닌가? ㅋㅋㅋㅋ 진짜 어린애들 데리고 손가락만 아프게 뭐 했는지 모르겠다. 가서 역사 공부나 좀 더 하고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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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원칙 3항 상습위반 블럭
미개한 쪽빠리들은 칼싸움 잘하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군요. 천박한 것인데. 미개한쪽빠리들과 달리 조선은 생명을 가벼이 여기지 않기 때문에 칼싸움이라든가 하는 천박한 짓은 상대적으로 덜 발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겠지요. 다만 칼질보다 훨씬 세련되고 교양있는 우수한 활솜씨라든가 포라든가 이런 것들은 확실히 발달했기 때문에 쪽빠리들이 결국 패배한 것입니다.
필요하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이지 천박하냐 아니냐의 문제로 따질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다 사람잡는 기술에 세련이나 교양찾는게 우스운 일이죠.
그런 식이면 기습이나 모략도 천박하다고 매도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전국시대 일본군역시 활과 총에의한 사상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당연히 장수들도 활과 총의 중요성을 알고 적극적으로 도입했지요. 야리 아시가루의 비율이 뎃포아시가루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건 단지 뎃포가 비싸고 만들기 어려워 생기는 보급의 문제에서 비롯한겁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검술이 크게 융성하는 건 전국시대와 임란이 끝나고 난 후인 에도시대입니다.
한가지 더 말하자면 철저하게 원거리전을 지향하는 전투교리를 가진 조선군이 그래서 초반에 얼마나 고전했습니까. 몽골군도 충격전술에 사용하는 중기병을 운용했고 점령지에서 나오는 보병을 바탕으로 한 단병접전으로 몰고가는 전술도 사용했습니다. 그런 유연성이 그들을 한 시대의 절대강자로 만들었습니다. 극단적인 전투교리는 결국 승리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