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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5-03 21:50
너무 강한 일본인 (불멸의 이순신)
 글쓴이 : 처치
조회 : 19,120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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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롬멜 14-05-03 22:03
   
10vs1 드립은 뭐지;;
견룡 14-05-03 22:08
   
이거 좀 이상하네요.
실제 역사속 기록물에 왜군이 조선군보다 단병접전에 강하다고 기록되어 있나요?
10:1 이건 판타지 소설이 아닌이상 너무 터무니 없네요.
은근히 조선의역사를 깍아 내리고 사무라이 우상화 시키는듯한 표현이군요.

작가가 김탁환이고 왜곡 문제에 시비가 붙었나 봅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0&aid=0000224470
     
다이나 14-05-04 02:24
   
실제 기록에 있습니다...그것도 실록에...
          
술담배여자 14-05-04 08:29
   
보면 맨날 10:1로 비교하더라구요? ㅇ_ㅇ;;
저옛날 고서에보면 한족병사10명을 감당하는 무슨족병사고....
그병사10명을 감당하는 무슨족병사......
보면 흉노인지 여진인지  걔들은 한족 1000명쯤을 홀로막을수있다는 계산이나옴;;;;
          
견룡 14-05-05 08:23
   
실제 기록이라면 링크 알 수 있을까요?
♡유라♡ 14-05-03 22:15
   
불멸의이순신 오랜만이네요
망치와모루 14-05-03 22:18
   
아 저 지겨운 물수...
질질이 14-05-03 22:26
   
결국 육전보다 수전을 선택한 충무공의 선택이 옳았다라는 것을 무리하게 10대1 드립으로 ㅎㅎㅎ
하지만 왜군이 긴 전쟁 후 강했다는건 사실이었지요;
     
견룡 14-05-03 22:28
   
하지만 왜군이 긴 전쟁 후 강했다는건 사실이었지요;

무슨 뜻이죠?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나요?
아니면 혼자만의 생각 이신가요???
          
질질이 14-05-03 22:44
   
전국시대를 겪은 왜군이 평화로운 시대에서 군역조차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던 조선왕조 개창 200년

차이에서 아무래도 전쟁경험이 풍부한 장수와 그에 소속된 병사들이 전쟁에 강하는건 상식이
아닌가 합니다.

솔직히 조선은 북방 주둔군이 정예병이었을텐데 직업군인 조차 적었던 조선에게는 육탄전은
힘들었겠지요.
          
잉어 14-05-03 22:47
   
그리고, 공성전 또한 왜구들의 특기중 하나지요... 일본의 성을보면, 서양사람들도 감탄합니다... 철옹성과 같아서요... 그런곳을 매날 치고박고 점령하던 놈들이니.... 강할수 밖에요...
근데, 저 일본군과 조선군과의 10:1은 좀 아닌듯 싶군요.... 조총이나 전술을 통해 털리면 털렸지... 개인적으로 저런 피지컬 차이가 나기는 힘들죠
               
술담배여자 14-05-04 08:32
   
원래 저당시엔  상대적으로 강하면 10:1  운운했던거같아요
다른데에보면 거기도  한족 여진족 몽고족  병사들을 죄다 10:1을감당하다고 써놨던데....
그럼 몽고애들은 한족애들 100명인가  1000명인가를 혼자감당한다는 단순계산이나와버림 ㅋㅋ  말도안되지만
          
모래곰 14-05-03 23:26
   
원래 전쟁같은 경우는 경험이 많으면 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선군도 나중에 함경도 기병 3천이 내려와서 요격하는데
이 병사들은 엄청 잘 싸웠거든요.
그 이유가 변경에서 여진족과 끊임없이 싸워서
전투감각이 유지된 점이 큽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군은 강해지고 일본군이 약해진 것은
조선군은 본토에서 싸우는 점과 경험이 쌓이면서 강해졌고
상대적으로 일본은 초반 기습전이 끝난데다 조선도 전열이 갖춰지면서
상황이 바뀌는 겁니다.
그리고 일본성도 단점이 있어서 기요마사는 조선의 축성을 연구해서
일본으로 돌아가 성을 쌓는 점에서 일본성이 완전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투더리 14-05-03 23:33
   
견룡님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말하는 님이.. 좀 거시기 한겁니다. 아무리 국뽕을 한사발 들이키더래도 인정할건 인정해야죠. 현대 한국 육군 전력도 세계적으로 평가는 받지만 무기 순위라던가 이거저거 보면 약간 마이너하게 밀리는게 실전경험이 없어서에요. 미군이 왜 세계최강이라 불리는데요. 천조국다운 신기술의 장비,물량빨도 쩔지만 정말 다양한 실전경험이 토대가 되었으니 그렇죠.
               
불타는황군 14-05-03 23:51
   
견룡님은 단정지은게 아니라 질문 한거잔아요......에혀...
의도조차 제대로 파악못하고 다짜고짜 국뽕 어쩌구하는 님이 더 거시기 한겁니다.
                    
봄꽃춘 14-05-04 02:31
   
누가봐도 질문이 아니라 비꼬는 건데요?
그쪽은 누구한테 질문할때 근거가 있나요? 그쪽 혼자 생각아닌가요? 이런식으로 얘기합니까?
의도를 제대로 파악 못한건 황군님인듯
                         
불타는황군 14-05-04 03:06
   
글세요~ 비꼬는 걸로 안보이는데요~ 

그리고~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나요?
아니면 혼자만의 생각 이신가요???

이거랑

근거가 있나요?
그쪽 혼자 생각아닌가요?

이거는 얼핏 비슷한듯 하지만 매우다른 의미와 늬앙스인데요ㅋ
원문그대로라면 비꼬는게 아니죠~ 의문, 질문 이죠~ㅋ

그리고 님이 변형한 문구는 비꼬는것보다 따지는 도발에 가깝죠
미묘하게 변형해서 왜곡하지 마세요~ㅋ
아 다르고 어 다른게 한국어에요~
                         
덤벨스윙 14-05-04 19:53
   
지금 황군님 ~,ㅋ 남발하시는건 비꼬는거 맞죠?
     
불타는황군 14-05-03 23:03
   
왜군이 강해서라기보다 당시 조선군이 약했던거죠...

임진왜란당시 왜군의 무기로 조총이 많이알려졌지만 실상 주력은 장창부대 였습니다.
조선군은...투사체무기위주로 대응하다 근접전에선 지리멸렬했죠...
당시 조선군에는 장창부대를 대적할만한 병과가 전무했죠.....

조선의 주력이라고 해봐야 활과 기병인데
둘다 장창병과는 상극이라 밀릴수밖에 없었었다는....
거기다 잘훈련되고 실전경험도많은 왜군을 상대로
훈련도 안되고 무장도 빈약한데다
병과마저 상극인 조선군이 밀리는건 어쩌면 당연한 거였죠...

후에 의병들이 왜군을 상대로 조선 정규군보다 더잘싸운이유가
왜군의 병종조합에 대응하는 병종을 조합해서 싸웠고
정면 대결보다 게릴라전을 위주로한 전술을 구사했죠...

전반적으로 군인이 아닌 농민중심에 빈약한 무장을 감안하면
오히려 대단히 효율적으로 잘싸운거죠...
          
불타는황군 14-05-03 23:33
   
아~ 그러고보니 하나 생각난게...
 
당시 왜군에게는 조선의 의병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해할수없는 불가사의?ㅋ 였다고 하더군요~

왜의 전쟁은 군주의 항복이나 죽음으로서 그휘하의 병졸이나 백성은
당연하게 새로운 군주에게 굴복하고 조아리는게 상식이었는데...

조선은 정규군이 짧은 시간에 궤멸하고 왕이 도망가버리는 와중에도
농민들 스스로 일어나 왜군에 대항하는 자체가 이해안되는 두려움 이었다고 하더군요~

거기다 의병들의 전술이 게릴라전인것도 한몫해서...
이해할수없는 존재들의(의병) 시도때도없는 기습공격과 격렬한저항은
왜군의 사기에 크게 영향을줬다고 하더군요~

그 사기의 차이가 결국 인원, 경험, 훈련, 장비를 뛰어넘어
소수의 의병과 막무가내로 징집해서 머리수만 채운 조선군이
왜의 대군을 상대로 우새한 전쟁을 벌일수있는 원동력이 됐다는...
               
magnifique 14-05-04 21:28
   
왜놈들은 그당시 유교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전국시대 등 왜놈들 역사를 보면 충이란 글자는 희미합니다. 개나소나 성이니 군주니 공주니 왜왕은 있으나 마나였고요 심심하면 반란이고 강하고 뛰어난 리더가 살아남는게 상식이였는데 조선은 안그랬죠 왜? 유교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왜놈들도 유교를 원했죠 아주 다스리기 쉬운 방법이였거든요
          
helfenmir 14-05-04 05:19
   
장창부대는 크게 언급할 바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임란에서  대규모 회전이래 봐야 탄금대, 용인, 벽제관, 직산전투 정도입니다. 그 외에는 공성전이나 게릴라전 양상이라 크게 활약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실제로도 일본군의 총이나 칼에대한 언급은 여러 사서에 나오고 훈련도감에서도 검술이나 사격술을 가르쳤습님다만 나게야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술담배여자 14-05-04 08:33
   
그런건 우리도많으니까 ㅡ_ㅡ;;
아기건달둘 14-05-03 22:33
   
감사요
전쟁망치 14-05-03 23:01
   
일단 따른 사실은 잘 모르겠구

일본이 히데요시 통일전  전국시대일때 상당한 전쟁 경험과 베테랑 군인들이 많았다는건 그때 조선 보단 유리한

것이였을거 같네요...

그때 누구였지 아 역사좀 제대로 ...

정예 10만 양성 하자는 거 있었잖아요.

그뜻은 그 시대때 조선이 직업군인으로 10만이 안되었단 이야기 일텐데...

일본이 조선을 칠때 첫 대군이 10만이였죠.
기모찌이 14-05-03 23:08
   
과장되었다곤 생각합니다만,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이 무시되고, 당파싸움으로 사리사욕에 젖어있던 당시 조선의 모습은, 전후 선조와 대신들은 도망가고.. 대부분의 육군은 의병이었으니까요..
군사적 훈련도 받아본적이 없고, 농기구만 들던 자들과, 전국시대를 통일한 직후의 왜군과는 훈련이나 전투경험에서 비교가 안되었을거라고 생각하긴합니다.
모래곰 14-05-03 23:17
   
율곡의 10만 양병설은 확실한게 아닙니다.
진짜 주장했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요.
서류상에는 조선군은 아마 35만 정도는 됐는데
이미 나라가 평화가 오래되면서 실제로는 그만큼 징병이 안됐습니다만
전쟁 중에는 17만에서 30만까지 징병이 결국 됐고 전쟁을 겪으면서 정병으로 변해서
초반 1년만 일본에게 밀렸고 그 다음부터는 계속 일본이 밀린게 맞습니다.
조선이 전쟁준비를 안한 것보다는 그동안의 전례에 비춰봐서 그만큼의 대규모 침공을
예상하진 못했고 아마 1~2만 정도로 습격하는 것을 예상했던 것이 문제였을겁니다.
그리고 일본이 강했던 것은 말 그대로 내전이 오랫동안 계속된 탓에
경험이 풍부했다는 점입니다.
에도 막부가 개창되고 얼마 안되서 일본도 군대가 개판이 됩니다.
그래서 도쿠가와가 전쟁능력이 약화된 것에 불만을 표시하죠.
다 비슷한 것이 청나라의 팔기군도 중국에 들어가서는 금방 약체화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대규모 전투가 많았던 고려 초에는 경험이 많아서 강했죠.
그런 차이입니다.
일본에서도 내전 기간에는 무술이 크게 발전하진 못했습니다.
전쟁터를 경험하면 알아서 강해진다는 말도 있었죠.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갔던 강항의 저서에서는 오히려 신체적으로는
조선이 우세하지만 일본이 강한 것은 사회구조상 만약 전쟁에서 진다면
모든 것을 영주에게 몰수되고 인맥이 끊기는 이유로 전사하거나
아니면 할복이라도 해야 가족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썼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의 고위층과 친분이 있어서 기록에 신뢰성이 높습니다..
한류의힘 14-05-03 23:59
   
용인전투를 아시나요????

국사책에는 절대 나오지않는 전투죠.

선조는 의주에,,, 왜장 고니시는 평양성에 있을 때 한양에는 고니시 휘하의 와키자카가 주둔하고 있을 때,,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의 구병을 싹싹 긁어 모은 조선군 5만이 용인까지 왔을 때,,

드라마 이순신에서 자주 나왔던 와키자가(원래 수군 장수임)가 500명의 휘하 병사를 이끌고,,

조선군을 공격하여 일방적 학살을 하는 바람에  ,,,, 다시는 한양에 진격할 꿈을 못 꿈...

이 때 광주목사 권율도 참전 했는데,,,,, 개작살 나는걸 막을 순 없었슴...


1:10 이 아니라  1:100 으로도 일방적 학살 당함.....  이것이 현실임...

임진왜란 통틀어 육전에서 조선 + 명 연합군이 왜군을 공격해서 이긴 전투는 없었슴..

평양성 탈환은  전투없이 고니시가 일방적으로 후퇴 했었고,,,

한양성 역시 전투 없이 철수 했었슴....

행주대첩은  행주산성 방어 전투였고,, 왜군의 공격을 막은 걸,,,,

 대첩이라고  떠듦...
     
모래곰 14-05-04 00:19
   
와키자카의 그 전투는 일본에서는 쳐주지 않더군요.
그 5만이라는 숫자가 사실 군대라고 볼 순 없어서.
그리고 1500명이라고 아는데 아닌가요?
그리고 전에 니탕개의 난에서 보여준 조선 기마병의 모습은
일본군에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이 좀 안습이였던거죠.
행주대첩은 대단한 전투가 맞습니다.
그 전투로 전황에 영향을 미쳤고 적은 수로 대규모 적군을 막아낸 전투입니다.
별로 그렇게 비웃을 일은 아닌 것 같군요.
     
불타는황군 14-05-04 00:34
   
뭔가 잘못알고 계신것도있고 교묘하게 비틀린것도있네요~ㅋ

용인전투? 그때당시 끌어모았던 조선군은 80%이상이 무기도없는 징집한 농민 이었습니다.
진격하는 와중에 절반이상이 달아나버렸죠...ㅋ
그리고 와키자가가 500명으로 5만을 도륙한게아니고 선발대로왔던 소수의 징집된 농민을
기습해서 무기조차 제대로 가지지못한 농민들을 해산시킨거죠
아마 그의 의도는 부대가 모두 집결하기전에 조선군의 전력을 탐색하고
일부 병력이나마 소모시키기위한 일종의 무력정찰 같은거였는데...잭팟이 터진거죠~ㅋ

여튼~그로인해 조선군 본진?의 탈영병이 급속히 늘었고 징집한 농민만이 아니라
정규군마저 탈영하는바람에결국 부대 자체가 흐지부지 와해되버린거죠...
그게 뭔 500 VS 50000 이고 1 VS 100 인가요?ㅋ 학살?ㅋ

그리고 요즘 국사책엔 안나오나요? 전 국사시간에 배웠는데...
그때 국사선생님이 병,신같은 권율 등,신같은 조선 머저,리 선조라고
찰지게 욕하던게 생각나네요~ㅋ

또 육전에서 일본군을 이긴적이 없다구요?ㅋ
중증이시네.....정기룡 장군님이 웃습니다 그려.....에혀...

평양성 과 한양성을 전투없이 후퇴한게 심심해서? 조선군은 너무 약하니 양보하려고?ㅋㅋ
성을 중심으로한 의병 활동으로인해 보급이끊기고 시도때도없이 벌어지는 게리랄식 기습에
병령과 물자가 야금야금 갈아먹히니 어쩔수없이 퇴각한거죠......에혀....

그리고 행주산성 전투는 일종의 상징적의미거든요.....
군대가 박살나고 양반 관료들은 다토끼는 와중에 일부 양반과 백성들이 힘을모아
왜군의 전격을 거의 처음으로 저지한 전투가 행주산성전투고
그 시점을 기준으로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거세지게된 계기? 시초?를 제공한거죠,,,

쪽바리들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왜 비밀리에 처리한줄아시나요?
바로 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독립운동의 의미와 의지를 다지는 성지화가 될까봐서에요...

행주산성은 바로 임진왜란당시 왜군을 막고자하는 의지가 발현되고 이루어진
성지와도 같기에 의미가있는겁니다......그래서 대첩이라고 떠드는 거고요...에혀...
     
MeGaWeB 14-05-04 04:15
   
아니 학교를 안다녔나?

전교 1500명 운동장에 세워봐야 얼마나 많아보임?

근데 그 1/3밖에 안되는 500명이 그 100배를 학살했다고?

눈깔이 사시가 아닌 이상 딱 봐도 맨손으로 두드려 패도 우리가 이길 숫자 차이인데

누가 들으면 5만명 vs 500명 벌판에 세워놓고 맞짱 까고도 학살당한줄 알겠네

윗 분들 말처럼 여러가지 이유들이 종합되서 잭팟이 터졌다면 모를까 말같은 소리를 해야지
          
질질이 14-05-04 13:09
   
영화 삼백인가요? ㅎㅎㅎㅎ
     
helfenmir 14-05-04 05:30
   
일단 와키자카의 군세는 한국쪽에서는 1500, 일본쪽에서는 1900정도로 잡더군요.
다만 제승방략체제에서 조선군이라는게 임시징집된 농민병이라는 걸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방어전에서의 방어 성공은 승전이 맞습니다.
     
타샤 14-05-04 07:53
   
3대첩중에 한산도 대첩을 빼면...
진주대첩 - 존나 많은 왜군과 싸워 진주성 털리고 양민도 학살당한 대첩
행주 대첩 - 행주산성 지킨 전투

공격형도 없고 내용도 좀 비참.

그런데 현실적으로 조선군이(군 이라는게 있었나?) 왜군을 이기긴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진주성 전투도 대첩이 되고, 행주성 전투도 대첩이 되는겁니다.


그리고 징집병이라는게 다 농민이지 뭐 직업 군인이 있는줄 아세요?

일본쪽은 이미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직업군인이 만들어졌습니다.
애초에 우리나라는 사농공상 이지만 그쪽은 무농공상 이었어요.
우리는 선비가 직업이며 계급이었지만, 그쪽은 사무라이가 직업이며 계급이었죠.

직업군인도 있고, 아예 사무리아기 지휘하는(그것도 대를 이어 전쟁만 하던...) 군대와
농민들 끌고 나온 문관 출신이 전투하면 누가 이길지 뻔한거 아닙니까?

스파르타 300 하고 같습니다.
거기의 페르시아 정예군으로 표현하지만, 그 당시에 정예군 따윈 없어요.
직업군인은 그로부터 한참후에 로마시대에 나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전부 정예군이 맞아요. 그쪽은 아예 병영국가 였으니까...
망치와모루 14-05-04 00:08
   
수천 명도 감당 못 하는 그당시 썩은 재정으로 후인들이 10만 양병설이 진실이라고 주장해봐야...
한류의힘 14-05-04 00:14
   
위에 '불타는 황군' 이 제대로 알고 있슴..

용인전투때,,,,,,,,    왜군 500명의 주력 병종은 장창부대였슴....

이들은 사무라이 밑에 있던 농민출신 일반 보병으로 이시카루 라고 불리는데,,,

이 장창병의 장창은 길이가 4.5M 임,,

  일본 전국시대 때,,  칼을 주병기로 하는 사무라이와 기병을 상대하기가 용이하여 일반 보병의 주력 무기가 됐슴.

이 장창병에 조선군은 대응을 전혀 못했슴...
모래곰 14-05-04 00:28
   
애초 일본에는 기마병이라는게 없다는게 맞습니다.
다케다 기병 어쩌구 말하는 것도 실제로는 이동수단으로 말을 탄게 맞고
조선이나 몽고같은 기마병은 아닙니다.
창을 주로 사용한 것은 이것을 익히는데 시간과 노력이 적어서 그렇고
찌르기가 아닌 내려치기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실제 칼이 전투에서 큰 도움이 안됐고 총은 활보다 익히기 쉬워서 도움이 됐다고 하더군요.
초반 일본에게 털린 것은 예상못한 대규모 침공과 경험이 원인입니다.
     
helfenmir 14-05-04 05:51
   
마상에서 싸우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편제가 중세식으로 장수하나에 병사 몇이라는 식이었기에 말탄 사람만 모아놓은 '기병부대'가 없었을 뿐이지요.
일본에서도 기사는 전통적으로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했습니다.
          
스코티쉬 14-05-04 23:29
   
일본에 뭐요?? 기사도?? 전통??
니토베 이나조의 날조서적에서 유례한 기사도의 카피인 무사도 말하는겁니까?

침략 전쟁당시 군국주의자들에게 유용하게 활용되고 꾸준히 날조된 개념인데요???
               
helfenmir 14-05-05 19:23
   
그 기사가 아니라 말타고 활쏘는 걸 뜻하는 기사(騎射)를 말하는겁니다.
한류의힘 14-05-04 00:35
   
당시 일본군 구성은

1. 다이묘 (장군)
2. 마상 사무라이 (기병 기사. 중급 기사신분)
3. 보병 사무라이 (보병 기사. 초급 기사 신분.      마상 사무라이의 지휘를 받음)
4. 장창 아시가루 (농민 출신. 장창 + 칼 로 무장.  마상 사무라이의 지휘를 받음)
5. 철포 아시가루 (농민 출신. 조총 으로 무장.      다이묘 직속부대임 )

일반적으로 마상 사무라이 1명은 보병 사무라이 5명과 장창 아시가루 10명을 거느림..
다이묘가 100명의 마상 사무라이를 거느릴 때,,, 철포 아시가루는 대략 20명 정도로,,  직속부대로 거느림
한류의힘 14-05-04 00:41
   
이런 구성으로 봐서,,,,  용인전투 때,,,

와키자카군은,,,

마상 사무라이 30명 (기병)  +  보병 사무라이 150명  +  장창 아시가루 300명 + 조총 아시가루 10명 정도로 추정됨..

이들에게 조선의 50,000 대군이 유린당함..
모래곰 14-05-04 00:46
   
말을 탔다고 기마전을 하는게 아닙니다.
조선에서도 제대로 된 기마병은 마상재를 익혀야 쓸모가 있지
그 외에는 그냥 '말 탄 보병'이라고 불렸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조선군의 핵심병종은 키우기가 너무 힘들다는
면이 있는데 기마병과 궁병은 키우기가 힘듭니다.
반면 창병은 키우기가 쉽다는 점에서 일본이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시기의 전투에서 일본군의 장점은 장창인건 사실.
기존의 조선의 우위였던 궁병을 조총병이 상쇄시켜서 일본의 단병접전이 유리한 것도 사실.
다만 조선에서는 화포가 일본보다 우위였고 조총도 연구해서 사실 조총 때문에 밀렸다기엔 좀...
단병접전은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한 훈련도감이 창설됐지만 이 병사들은 주로 후반에
도성을 수호하느라 실제 전투에는 참가하진 못했다는데 사실여부는 모르겠고
기존의 조선무예와 기효신서가 합쳐져서 도움이 됐다는 말은 있습니다.
근데 무예의 보급이 원인인지 전투를 치뤄가면서 실력이 쌓여서 그런지 평양성 전투에선
조선군이 그 전과는 달리 너무 잘 싸워서 이상하기도 하죠.
한류의힘 14-05-04 00:55
   
다시 한번 확인 함..

조선 육군은 일본군을  .......공격,공격,공격,공격,공격,,,,,해서 승리한 전투는 없슴..

단지 방어에 성공한 사례 약간 있슴 + 행주대첩과 1차 진주대첩등등  큰 거 두개정도만 생각 남..

그리고 용인전투는 급히 징집한 군대는 맞으나,,  와키자카 휘하의 수원 주둔군 수십명 상대하여 이긴 후라,,

사기가 높았슴..... 탈영 속출하여 몇 명 않남은 상태가 아니었슴...

권율은 수에서 우세하니 부대를 쪼개어,,,,,
 와키자카군의 예상 이동로에 나누어 배치하여 지형적으로 유리한 상태에서 맞아 싸우자고 했으나,,,,
 조그마한 승리해 취한 지도부에서 거부했었슴..
     
서리서라 14-05-04 02:19
   
그 당시 우리 육군은 썩어있던 상탠걸 좀 감안해보세요 ㅋㅋ 이래뵈도 수나라 망하는데 일조한 고구려핏줄이 우리며, 비록 영토를 좀 많이 뺏기긴 했었지만, 당나라와 맞짱 뜬 민족이 우리였으며,  몽고와 3차까지 맞짱뜨고 거란족과 맞짱떴으며, 한땐 원래 우리 땅이지만,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이 잠시 살던 땅을 다시 되찾았다가 갈곳없는 여진족들이 애걸복걸해서 또 관리하기 귀찮아서 머물도록 허락해준  민족이 우립니다. 일본이야 군사만들어 우리만 치면 끝이지만, 우린 모든 군사를 일본에 쏟아부울 수는 없죠. 옆에 중국이 있는데..  우리가 일본에 정신팔면 중국이 군사가 빈 한국을 가만둘까요? 반대로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개털렸더라면 우리처럼 다시 일어날수있었을까요? ㅋㅋ 저렇게 개인주의 팽배한 나라가.. 우리니깐 가능했죠.  그리고 아직 우리가 다 일깨워내지 못한 영웅만해도 셀 수 없어요. ㅋㅋ 일본이 우리같은 상황에 놓여 수나라니, 당나라니.. 거대나라들과 싸워봤다면 벌써-_- ㅋㅋㅋ 땅이 떨어져 있는 걸 천운으로 알아야죠ㅋㅋ 그리고 잊으셨나본데.. 이미 일본역사가 도래인들의 역사.. 즉 이미 고대시대에 한반도 우리 민족의 발아래 꿇려져있던 민족들입니다. ㅋㅋ 지금 좀 끈이 끊기고 역사적으로 악이 남아서 이럴뿐이지.. 저들 핏줄안에 저곳을 점령한 우리 핏줄이 흐름을 잊지 마세요. ㅋㅋ 이미 점령했던 땅임.. 일본 문화재며 고분이며 한국과 연관되지 않은 곳이 없음.
          
설설설설설 14-05-04 02:23
   
수당과 독단적으로 70년 이상을 맞짱뜬 나라가 고구려임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통일 시켜 전쟁떳으면 정말 모르죠 ㅋㅋ 지금도 그렇고 고대에도 짱꺠들은 머릿수가 많았음 ㅋㅋ 고대전쟁에서 군사의 수가 절대 무시 못할 요소인데 절대적으로 숫자적인 불리함을 안고도 고구려는 700백년 이상 존재했던 왕조임. 신체적인 강함과 정신력이 없었다면 그렇게 버티지도 싸우지도 못했을거임 용맹 그 자체였음.
한류의힘 14-05-04 00:57
   
임진왜란 때의 용인전투 조선군 5만 : 일본군 500 은 

병자호란 때의 쌍령전투 조선군 4만 : 청나라군 기병 300  과 더불어

조선의 양대 뻘짓 전투임이 틀림없슴.. 

- -- - - - - 도저히 쪽팔려서  역사책에 쓸 수 조차 없는 경우임.......... 
 - - - - - - - 근데,,, 용인전투 보다 쌍령전투가  한 수 위의 뻘 짓 .......
-- - - - 일일이 글 쓰기도 쪽팔리니 각자 함 검색해 보시길,,,,,,,,,,,,

그 유명한,,,,,,,,,,,,,,,,,,,,,,,,,,,,,,,,,, 쌍령전투........
     
불타는황군 14-05-04 01:30
   
저기요.....국사책에 나오거든요~ 아니 나왔거든요~ 지금은 모르겠수다~

그리고요~ 용인전투, 쌍령전투 다큐로도 있걸랑요~ㅋ
제목이 최악의 전투 어쩌구 뭐시기 였던거같은데...
그두개만 아니라 7~8가지 대패한 전투를 분석하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신경써서 재연했더라고요~
꽤 흥미롭게 봤던기억이나네요~ㅋ

다시한번 말하지만~ㅋ
용인은 5만을 정면 승부한게 아니라 무기도없이 앞세웠던 농민들을 죽인거고
후방에있던 부대는 탈영병때문에 스스로 와해한거고요~ㅋ
그와중에 지휘관들이 탈영병과 함께 도망간건 함정? 조선식 개그?ㅋ

쌍령은 용인과 비슷하게 선두의 오합지졸을 미끼로 내주고 적당히 후퇴시키다
추격하는 적을 후방의 정예가 화포와 조총부대로 격퇴하려던 작전이
화약고가 폭발하는바람에 역시 제풀에 부대가 와해된거거든요.....ㅋ
조총부대에 화약이없어~ 뚜둥~ㅋ

그리고 육전에서 이긴적이없다라...
정기룡장군님은 뭔가요? 심지어는 권율도 이긴적있는데요...
또 명나라 선봉장도 초반에 연승을 거둔걸로아는데~ㅋ
그럼 대체 무패의 일본군이 왜 후퇴했는데요?
약하디약한 조선군 죽이는게 지겨워서? ㅋ
     
helfenmir 14-05-04 05:46
   
쌍령은 흔히들 잘못알고 있는 경우입니다.
청태종실록을 보면 쌍령에 참전한 병력은 6000~7000정도로 봐야 합니다.
훗날의 승정원 일기등을 보더라도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병자록이나, 병자일기, 연려실기술이나 묘갈명등을 봤을 때 조선 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3만~4만 정도가 맞다고 생각됩니다만 청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역시 청쪽 사료가 좀 더 확실하죠.
한류의힘 14-05-04 00:58
   
그리고 용인전투는 절대 국사책에 않나오는 것 맞음...

단지 열받은 국사 쌤들이 학생들에게 따로 가르킴........................ 역사 되풀이 하지 말라고 ~ ~
나바보임다 14-05-04 01:02
   
육전 에서  이긴 적이  없다구요??~~  권율이  이긴 전투는  머죠??
용인  전투는  학살이 아니고  ~ 농민들이 도망 치거나 해산 정도 이겠죠~~  이전투도  양쪽이 뻥튀기 숫자일 가능성도 큽니다...행주 대첩  대첩이라고 불릴 정도 로 대단한 전투 맞구요~~  조총이 위협  적이라 그렇지~~  사실 왜구는  체구 가 작아 500백  병사로  5만  이길  정도느 아닙 니다
모래곰 14-05-04 01:03
   
인터넷 댓글에서 이런 말을 쓰는 것도 우습기는 합니다만...
요즘 생각한건데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데로 믿는게 서로 속이 편합니다.
모든 일은 그렇게 간단한게 아닌데
게임의 영향인가 영토확장이 땅 따먹기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전투도 어떤 영향으로 그렇게 됐는지 생각보다는 그냥 그게 옳다고 쓰는데
일단 본인도 전문가가 아니고 사람이란게 객관성이란게 있을 수 없으니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데고 생각하고 서로 정신승리를 하는게 좋다고 생각이 드는군요.
한류의힘 14-05-04 01:07
   
글을 잘 못 읽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씀..

조선 육군이  (((((((((  정규군을 말함.. ))))))))))
일본 육군을
 ,,,,,공격,,,,공격,,,, 공격 해서 성공한 사례가 없슴...

 굳이 꼽고 싶다면 10명 미만 적 수급을 벤 전투  약간은 있슴..

행주대첩은 행주산성 방어 전투였슴.... 함락 당하지 않았다고 대첩이라고 떠들기에는

전국토가 수년째  유린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좀 민망함...


멋지게 적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건이 한 건도 없다구요.....

조선군 단독은 커녕,,,

조.명 연합군 자체가 없다구요...

있으면 대보라능 ~ ~ ~
     
불타는황군 14-05-04 01:52
   
풉~ 멋지게???ㅋ 성을 점령한다라~ㅋ
공성전이란게 반드시 성벽 타고넘고 깃발꼽고~ 성문 때려부숴야 되는건가요?ㅋㅋㅋㅋㅋㅋ

청야작전 이란것도 있는데요~
게릴라 전으로 보급을 차단하고 야금야금 전력을 소모시켜서
후퇴할수박에없는 상황으로 몰고가면 그건 승리가 아닌가요?ㅋ

그리고 행주산성 방어 전투가 왜 승리가 아닌거죠?
앞도적인 수와 장비 물자를 앞세워 공격하던 이들을
물리쳐 포기하게만든게 승리가 아니면 뭐에요?
왜군이 못한게 아니라 안한거쯤 되나요? 귀찮아서 봐준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또 10명미만? 이긴적이 없어요?
뭐 정기룡 장군만 해도 7백명으로 60전 60승 무패에
최소 왜구 9천을 썰었고 후에 상주성까지 "멋지게" 탈환하고
잔존 패잔병과 낙오병 토벌까지 도맡아서 하신걸로 아는데요~ㅋ
          
불타는황군 14-05-04 01:56
   
그리고 정규군에 집착 하시는게 개그네요~ㅋ

님이 추앙하는 와키자키?ㅋ 의 부대는 농민군을 격퇴한게 자랑인데~
조선 의병의 승리는 가치가 없는거?

이게 무슨 해괴한 논리야.....ㅋ

오히려 반대 아닌가요?ㅋ
어중이 떠중이 농민군 이긴건 자랑할게 못되는거고
농민들이 단합해서 정규군을 상대하고 몰아낸게 오히려 대단한거 아닌가요?ㅋㅋㅋㅋ
하림치퀸 14-05-04 01:09
   
10:1에 발린 연출은 과장이 좀 심하긴 하네;; 더군다나 일본은 목검 들고있는데ㅋㅋ 근데 10년전 드라마라고 생각하면 걍 이해하고 넘어가야죠 뭐
나바보임다 14-05-04 01:25
   
공격 공격 성곡 한게 없고 조.명  연합군이 없고 멋지게 성  함락 시킨게 없으면~~  임진왜란때  일본이  이겼겠네요~~  그렇게 왜군이 강하면~~  이순신힘 쓰기도 전에  이미 조선은  왜군에 항복 했겠죠...역사 공부  다시 하세요
나바보임다 14-05-04 01:26
   
아~~  이번에  진주산성에  있는  진주 박물관 에  가서  임진 왜란  대해  다시 공부 하세요
설설설설설 14-05-04 01:36
   
출전 당시 와키자카 야스히루의 병력이 1600여명 정도였고 한양까지 이렇다할 전투없이 진격했으므로 전투손실은 없었을 것입니다. 와키자카의 부대는 편제상으로는 수준이었으나 일본의 해상 전략은 원칙적으로 적 수군의 격멸을 통한 적극적인 제해권의 확보가 아니라 부산과 큐슈간의 해상선을 유지하는 소극적은 전략을 고수했기에 조선수군의 저항이 없다고 판단되자 지상으로 이동하여 한양 수비에 투입 본대 1천명은 한양에, 600명이 한양 남쪽 용인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포진했습니다.
시루 14-05-04 01:38
   
저건 그당시 단병접전을 하면 일본이 우세하다는걸 좀 과장해서 표현한듯 하네요... 그만큼 해전을 중요시 하려는 의도... 주인공이 이순신 장군이니 말이죠... 현실에서 한놈이 두놈 상대하기도 힘든게 현실이죠...
설설설설설 14-05-04 01:38
   
이광이 이끄는 대규모 조선군이 북상하여 수원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퇴하고 용인 부근까지 진격하자 한양에서도 와키자카의 부대를 주축으로 출전. 여기서 조선군의 병력이 개전 이래 최대 규모인 5만명에 달했기에 일본군으로서는 상당히 긴장하지 않을수가  없었음. 고니시를 비롯한 주력 부대는 한양 점령 후 조선군의 저항이 예상외로 약하다고 판단 서로 경쟁적으로 북상했고 조선군 대부대의 한양 진격을 예측하지 못했기에 한양의 일본군 수비병은 그렇게 많지 않았겠죠. 즉, 허를 찔린 격이죠.
설설설설설 14-05-04 01:42
   
와키자카의 본대 1천명이 용인에 주둔한 병력 600명에 수원에서 철수한 병력, 그 외에 한양이나 그 인근에 주둔한 병력 등이 부랴부랴 동원되어 조선군을 저지하기 위해 출격 하지만 어차피 고작 3마나석짜리 소다이묘인 와키자카였다는 점에서 병력의 규모는 2천을 넘기기는 어려웠을겁니다. 한편 , 이광은 용인에서 소수의 일본군을 발견하고 공격명력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장거리 행군으로 병사들은 지쳐있었고 공격 할 태세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한 공격은 실패 백광언 이시지등이 전사 와키자카는 고니시 가토등에 비한다면 소다이묘에 불과하지만 히데요시 최측극 시동출신으로 "칠본창" 중 한명으로 불릴 만큼 매우 용맹 조선군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시간적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쟁 경험을 토대로 조선군의 포진 무질서한 지위 사기의 급격한 저하를 파악 아침 식자중인 조선군을 재빨리 기습 와키자카는 전술가로서 대단한 결단력과 지휘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죠. 그정도로 대단한 전술가이자 용맹한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수군에서 이순신 장군께 개털렸죠. 정말 이순신 장군님은 대단하고도 정말 정말 대단한 장수이신분..
설설설설설 14-05-04 01:49
   
와키자카가 이끈건 기병 1500 용인에서는 5만의 조선군이 밥먹고 있을때 돌진해 들어갔기 때문에 한방으로 박살내 버릴수 있었죠( 적은수로 몇십배에 달하는 적을 기습한다는 이 부분 정말 대단한 전술가임)
그때 조선군 지휘관이 문관출신이라 정정당당하게 붙었어도 아마 조선군의 참패는 피하지 못했을겁니다.

다만,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은 재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조리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부분 목숨을 건질수 있었고, 이들은 이후 전라도 수비에 많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일본군은 이후 엄청난 혈전을 겪으면서도 조선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해 전라도진입을 포기하게됨
설설설설설 14-05-04 01:57
   
초창기 조선군이 진짜 개털린건 균율이 엄격하지 못했고 이 부분이 제일큼 실전경험이 후달렸음 그에 반해 오랜 내전으로 전쟁에는 도가 튼 녀석들이 왜구들 그리고 임진왜란이란 이 전투를 일본에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음 흑역사라면 흑역사인 부분이니깐요. 30만 대군을 출병시켰는데도 살생과 약탈만 했을뿐 소득을 얻은 전투도 아니였음 그래도 이득이라면 도공과 학자들을 잡아가 도자기 문화를 꽃피운 부분에서 이득이라면 이득이겠죠 사실 우리도 임진왜란이 터지기전 나름 전쟁준비를 해왔음 계속해서 정보를 얻었고 왜구들이 쳐들어올 가능성이 높다는 첩보도  얻었구요. 그래서 전력을 나름 분석했는데 규모는 1~2만 이 정도 규모로 쳐들어올줄ㄹ 알았음 ㅋㅋ 조선 정부에서는 아 그래? 그정도수면 그냥 막음 ㅎㅎ 개깔봤다가 막상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의 규모는 20만 완전 대병을 끌고왔음 ㅋㅋ 그래서 초기에 개털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류의힘 14-05-04 01:59
   
일본 육군에 의해 조선 육군,,,,,,,, 일방적 학살 당함..

일본 육군 뛰어난 거 맞음...... 조선 육군 개쓰레기 맞음
.
.
.


조선 수군에 의해 일본 수군 ,,,,,,,, 일방적 학살 당함..

전국시대를 거치며,,,, 승리하여 살아남은 일본 수군,, 뛰어난 거 맞음.......

이런 뛰어난 일본 수군을,,,,  일방적 학살한 조선의 이순신은  ?????????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 TOP 3 맞음 .
     
불타는황군 14-05-04 02:26
   
조선육군 일본육군에 개털림 근데 일본육군 조선 농부들에게 개털림~ㅋ

일본수군 우물안 개구리처럼 지네들끼리 투닥거리며 지네가 최강인줄자뻑함~ㅋ
 
그러다 이순신 장군에게 단련된 뛰어난 조선 수군에게 개털림~ㅋ

고로 조선이 방심만 안하고 이순신, 정기룡 같은 장수를 중용해 미리 대비했다면
 
쪽바리들은 감히 언감생심 덤빌 꿈도꾸지 못했을것임~ㅋ

율곡 이이가 왜를 경계해야한다고 주장했을때 반대했던이들의 논리는

왜는 예로부터 한민족의 동생과같은 존재이다 비록 소수의 왜구가

조선의 해안을 침범하긴하나 감히 천륜을 거스르는 패륜(본격적인 침공, 전면 전쟁)은

저지르지 않을것이다~ㅋ

근데 그건 사람한테나 통하는거였단게 임진왜란으로 증명됨.

조선의 믿음과 은혜를 저버리고 저지른 임진왜란은???????

쪽바리가 사람의 탈을쓴 짐승 이란걸 스스로 증명한게 맞음.
     
자기자신 14-05-05 02:23
   
조선육군이 뭐가 쓰레기인가요? 이치전투.행주산성전투.독고산성인가 독왕산성에서도 이긴적이 있습니다 권율장군휘하의조선관군이요 일본수군이 뛰어났다고요? 그렇게 뛰어났어 조선수군에게 개털렸나요 그것도 23번이나 ㅋㅋㅋㅋㅋㅋㅋㅋ이순신이라는 조선장수 하나 못이기군요
ckseoul777 14-05-04 02:33
   
불멸의 이순신을 보니 김명민이 생각이나네요~
정말최고의 명연기였는데 다시한번 보고싶어지는군요~잘보고갑니다
다이나 14-05-04 02:35
   
임진,정유재란 당시 조선군의 단병접전능력은... 그냥 쉽게 개념자체가 없었습니다... 1:10 이야기도 임난이전 중종실록에 이미 1:10 이야기가 나왔고. 선조실록에도 칼만 들면 조선군이 튀었다는 기록도 있죠. 명군참전이후 명군이 왜구를 소탕했던 절강병법에서 몇개 급히 차용하여 살수(암살자가 아닌 단병접전을 할 병사들)를 키웠지만... 항왜들이 그것을 보고 아이들 놀이라 할만큼 열악했구요... 기존의 왜구는 단병접전에 능하다라는 공포심과 실제 열악한 단병접전 능력으로 인해 칼만든 왜군에게 속절없이 무너지거나 도망간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20의 왜군에게 140의 수군이 도륙당한 기록도 있고...
 당시 조선수군이 함대함 결전을 지향했는지도 여기서 이유를 찾을수 있죠.
포카즈모단 14-05-04 02:46
   
진짜 뜬금없긴 한데요...제가 집단전(?) 해봐서 몸으로 아는데
훈련과 규율 차이도 크고, 한번 일방적으로 당하기 시작하면 숫자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한번 패닉 빠지면 오히려 숫자 많은게 더 안좋게 작용하죠
박효신 14-05-04 04:21
   
10:1 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일본인이 접근전에 강하고 검술이 뛰어났던건 역사적 사실 아닌가요?
실제로 김체건이 일본에 잠입해서 배운 검술로 검선이라는 칭호를 얻었죠.
그 아들 김광택도 아버지 김체건의 뒤를 잇는 검객이 되었고요.
     
helfenmir 14-05-04 05:56
   
대규모 단병접전은 개개인의 역량차이를 감소시킵니다. 그 보다도 사기와 군기가 중요하죠.
실제로 일본쪽에서도 전국시대 무장중에는 도검을 쓸모없다고 생각한 경우도 많았죠.
핏자와 14-05-04 06:15
   
내가 볼땐 왜군이 육탄전에 강했던것도 있겠지만 조선군이 형편없이 약했던거 같은데
10:1로 싸우고도 쳤으면 진 쪽이 형편없이 약한거임
흑룡야구 14-05-04 07:12
   
병장구류 고증 다시 해서 임란이나 이순신 장군 회고록 같은 드라마를 특집극 형식으로라도 다시 찍어야 합니다.

수군이 갑옷도 미착용하고 당파를 들었다는 것자체가 모순이죠.
     
히힛 14-05-04 07:53
   
수군뿐만 아니라 육군도 장수빼곤 갑옷은 없겠죠
자유생각 14-05-04 08:00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이 육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린 건 맞지만 너무 자학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용인전투는 조선군이 5만이라 하지만 대부분 급히 모은 농민이 대부분이었고 5만명이 다 전사한게 아니라 대부분 와해되어 도망갔다고 봐야 할 겁니다.  지휘부도 도망가기 바빴으니까요.  얼마 안되는 정예병은 신립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으로 다 죽였고... 그나마 용인전투에서 권율 정도가 지휘권을 유지하여 휘하 병력을 큰 피해 없이 후퇴시켰고, 이 점이 눈에 띄어 향후 지휘권을 잡게 되죠.

사실 육전에서 조선의 승전이라고 할 수 있는건 수성전으로 진주대첩과 행주대첩이 있고, 야전에서는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막아낸 계기가 된 이치전투, 웅치전투, 슬치전투가 있습니다.  각각 다른 전투로 볼 수도 있지만 이치, 웅치, 슬치전투는 지역을 바꿔가며 펼쳐진 하나의 전투라고 하는게 맞을 겁니다.  그래서 3가지 전투를 대표해서 이치전투로 부르기도 합니다.  권율이 지휘한 이치전투는 왜군도 조선의 3대 승전 중 하나로 기록할 정도니까 조선의 승전이 분명하죠.  이 전투를 통해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바다의 이순신과 함께 육지의 권율이 막아냈으니까 임진왜란 전체 전황에 끼친 영향이 큽니다.  권율 하면 행주대첩이 유명하지만 오히려 이치전투가 더 중요한 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임진왜란 전체를 놓고 보면 왜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했다고 할 만한 전투는 전쟁 초반의 탄금대 전투와 용인과 쌍령의 조선 입장에서 한심한 패배 말고 별로 없습니다.  의주까지 일사천리로 도망친데다 명군이 오기 전까지 의병의 게릴라전을 빼면 왜군에 대응할만한 조선군이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타샤 14-05-04 08:06
   
전투에서 승패를 가장 크게 좌우하는게 공포에요.
몽골군이 대표적이죠. 몽골군은 처음 나가서 무조건 몰살이었어요. 군인은 물론 마을 자체를 말려 버렸죠.
그러다보니 그 다음은 승승 장구죠. 왜냐하면 그 무서운 몽골군이 항복하면 그냥 지나가는데 항복 안하면 씨를 말린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친일 논쟁의 중심에 있는 백인엽 장군의 "장정" 에도 나옵니다.
당시 춘천에 있던 한국군 1개사단, 미군 1개사단이 있었고, 여기에 미군 기계화 연대가 1개 더 있었죠.
근데 갑자기 중공군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겁에질려 원주까지 도망가죠.

나중에 알고보면 중공군은 3개 연대였어요. 3개 연대에 2개 사단이 넘는 부대가 100킬로 가까이 도망치면서 군수품 놓고 가고(중공군은 군수품이 제대로 없었어어요. 아주 횡재했죠) 뿔뿔이 흩어지고 죽고... 한 겁니다.


무기도 제대로 없는 농민군으로 사무라이를 어떻게 이기냐고요?
그게 알아야 하나요? 우리가 농민군이라 불리했다는걸 알아야 하나요?
왜요? 후세인의 이라크 군도 대단한 미군에 반항했으니 엄청 대단하겠군요.

그런건 따질 필요가 없는 겁니다. 우린 정규군 자체가 없었어요. 농민군 아니면 쓸 군인이 없었다는 뜻이죠.
그 상태에서 어떻게 이기냐고? 그럼 왜군이 우린 정규군이 없으니 좀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미군이 오합지졸 이라크군을 상대로 미사일만 수천개 날린거 알죠?
미사일 몇개 없는 이라크군을 상대로 너무한거 아닌가요? 좀 봐줘야죠?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싶은건가요?


전쟁에서 그런거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졌고, 그래서 우린 100:1 로 붙어도 힘들었고, 그래서 우린 공포에 휩싸여서 1000:1 도 힘겨운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왜군이 강하기도 했지만, 조선엔 군대란게 없었어요.

여러분 마을에 인민군이 쳐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할건가요? 도망가아죠. 총도 없는데....
인민군이 30명이 왔어요(1개 소대죠)
근데 마을엔 장정이 3천명이 넘어요.. 그럼 붙을건가요?
아닙니다. 총도 없는데 도망가야죠.
항복하던지...


그 사실이에요.
Deadpool 14-05-04 09:03
   
임진왜란에서 관군이 이긴 전투가 없다니 무슨 뽕을 맞아야 저런소리가 나올까?

그럼 일본군이 조선에 소풍왔다가 간거여?

http://blog.naver.com/rjsung/30022122721

한국전쟁사 관련 블로그니 임진왜란에 무슨무슨 전투가 있었는지 잘보셈
짜리콩 14-05-04 09:28
   
음습체는 쓰지 맙시다.
한류의힘 14-05-04 09:37
   
deadpool 님 글 잘 보았슴.......

난 잘 읽었는데,,,, deadpool 님은 그 글 않읽어신게 틀림없슴..

그 글 잘 읽어보셈...  어디 전투해서 평양성,  한양성에서 일본군이 패해 후퇴 했다는 글 있는지  !!!!!

전투는 없었슴..

일본군,,  ''''''평양 철수''''...

''''''한성 포기'''''    라는 말만 있슴......  조.명 연합군의 공격에 일본군이  패해서 일본군 물러났다는 말 없슴..

조.명 연합군과  왜군의 대규모 전투는 ,,,,

딱 하나,, 있슴...  울산성 전투....

조.명 연합군이 울산성을 공격 했으나,,,,,,,  죽사발됨......

조선 육군과 명 육군의 수준,,,,,,,,,,,,,,,,,,,,,,,,, 개한심 수준이었슴...
     
불타는황군 14-05-04 13:32
   
평양성에서 일본군이 스스물러난게 아니고 평양성 성벽과 성문이 함락되고도
왜구가 투항하지않고 민간인을 방패삼아 저항하자 명군이 마구잡이로 불을질렀죠~

그시점에 이여송이란 장수가 토굴에숨어있던 왜장 고니시를 보고 항복을 권유했는데
고니시가 스스로 병력을 정비해서 퇴각할테니 보내달라고 요청하죠

이에 인명피해가 커지는걸 걱정한 이여송이 왜장의 요구를받아들여서 보내준거죠~ㅋ

평양성 시가전에서만 도륙당한 왜구가 1만이넘고 이여송이 놔줘서 도망간왜구를
조선군이 단독으로 추격해서 다시 1천명이 넘게 죽였고
적장은 갑옷도 벗어던지고 일반병사 사이에 숨어서 도주했네요~ㅋ

사실 평양성의 견고함과 왜구의 수로봐선 공격개시 하루만에 끝날싸움이 아니었는데
명군의 본진이 도작할때까지 지속적으로 왜군의 진을빼고 보급을 차단한
조선군과 의병들의 작전이 잘조합된 연합작전이었죠~ㅋ
나바보임다 14-05-04 09:41
   
일본 검술이 강하다?    우리가  초반 임진왜란에서  밀린건  검술  칼 이 아니라 조총 과  숫자에서  밀렀지  백병전과 검술 에서    밀린건  아닙니다  이치 전투에서 보듯이  왜구는 체구가 작아  충분히  제압 할수 있는 상대 이고    임진 왜란은  왜구가 조선을  많이  유린했지만  결국은 우리가 이긴 전쟁 입니다
흐아앙 14-05-04 11:18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군의 연속된 패배의 이유를 조총을 드는 분들이 아주 많은데
(무기만 동등했다면 모르는거다 라는 생각이 깔린것으로 보임)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그때당시 조총이 활보다 강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활은 위력이 좋았기에 전투가 벌어진 시점에서 무기 화력의 차이를 탓하긴 무리가 있습니다.
조총의 장점은 필요한 훈련 기간이 짧다는것이 전부이고 오히려 날씨에 따라 사용 못하는 경우도 많기에
화력에 억울하게 당한것은 절대 아닙니다.
삼백년 뒤에도 사용되던 머스켓총으로도 유효사거리가 짧고 명중률도 형편 없어서
일렬로 상대방 공격하든 말든 맞으면서 최대한 붙은 후 일제사격을 하는 전술을 사용한 이유입니다
하물며 300년전 조총이 얼마나 강력했으려구요
윗분이 체구를 근거로 들었는데 물론 붙어서 개싸움 날 경우엔 피지컬적인 차이로 압도가 가능하지만
무기를 들고 훈련받은대로 경험한대로 싸웠을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향료전쟁이란 책을 보시면 서양인들은 백병전에서 일본 해적 한명의 전투력을 유럽 병사 7명과 비교했을정도로
일본은 실제로 전투력이 우월했구요.
그리고 조선군은 말만 군대지 그냥 농민들 불러다 세워놓은게 전부입니다.
중앙군과 정예군은 남쪽전선에 있지도 않았고 수도 얼마 없었죠
그리고 조선군 병사의 개인 장비들은 그냥 흰 일상복에 농기구나 몽둥이 들고 나왓 ㅓ싸웠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구요? 말이 안되죠. 근데 조선은 그런나라였어요.
가끔 조선군 병사의 개인장비들 줄줄이 나열하면서 거품무는 분들 계신데
그건 국가 문헌상 권장사항이지 절대로 그렇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개인병기를 주면 그걸 먹을거로 바꾸는 경우가 빈번해서 실제 전투에선 집에서 쓰던 농기구 쓰거나
그나마 여유있는 사람은 그거 녹여서 대체무기나 만들어 썼죠.
조선시대 세율이 생산량 10%였습니다. 이걸로 법제상 농병일체였던 조선군의 개개인의 병기 지원이 가능했을까요?
지방관들이 개인적으로 슈킹했던 농민 재산들 때문에 어마어마한 부담을 농민이 지고 살았던거지
공식적으로 나라가 가져가던 세금은 저게 전부였습니다.
가끔 일본도는 잘부러져서 두세개씩 차고다닌다고 비웃는 분들 있었는데
전쟁용 칼한자루 못쥐어주던 나라가 조선이란걸 좀 알아두셧으면 좋겠음.
한심한 나라였습니다. 부정할 필요 없어요
이런 한심한 나라에서 나라지키려고 목숨바친 이순신장군님 같은 분들이 이래서 대단한거죠..
참고로 조선 포졸이 사극에서 허구헌날 들고다니는 삼지창은 왜란 이후 명나라로부터 들여온겁니다.
삼지창이요.. 조선이 이런 나라였습니다.
     
아다나 14-05-04 12:01
   
조총의 무서운점은 님이 말하는 성능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소리였죠. 쾅 하는 소리말이죠. 우리군 정규군은 북쪽에 몰려있고 왜놈들과 싸운건 끌어모은 농민병과 징집병들 이었습니다. 그렇게 훈련이 안되서 집단전에 사기와 군기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는 것이 징집병들인데 달려가는도중에 쾅하는 소리가 났더니 옆에사람이 죽으면 그주위는 순식간에 패닉에 빠지는거죠. 하물며 일제사격이라도 했다면 그 패닉은 더 커지겠죠. 조총수가 달랑 10명이라도 징집병들을 패닉에 빠지게하는데는 충분했을겁니다.
          
임진강 14-05-04 12:18
   
소리도 있지만 양산할수있는 훈련의 편이성도 있지요.

활같은경우 긴 훈련을 받아도 재능이 없으면 힘듭니다.

  그에 반해 총은 짧은 훈련기간에도 재능이없어도 제몫은 하거든요.

현대에서도 활 석궁 무시 못합니다. 방탄복으로도 못막는게 이것들이거든요.

다만 옛과 마찬가지로 훈련의 고됨에도 불구하고 재능이 없으면 활용하기 어려운 문제가

가장 크다고 봅니다.



긴 평화기에 무를 소홀이 하고 문을 우대시했던 나태해진 조선군은 긴 통일 전쟁으로 인한

포화상태인 쪽국 정예군의 기습성 통수를 상대로 힘들었지만 잘 이겨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민병위주의 조선과 긴 전쟁으로 인한 양성된 정예군이었던 쪽국하고 싸워 이정도면

선방한거 아니겠습니까.


역사는 승리자의 역사로 승리자가 기록 같은걸 다 지워내고 새로 만들어내니 뭐

그나마 조선시대때의 편집증적인 기록문화같은게 방비까지 잘 되어있어서 덜 왜곡되어

수 많은 문화유산이 후대까지 전해내려올수있었다고 봅니다.
흐아앙 14-05-04 12:25
   
실제로 조선군은 전투 시작하면 그렇게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군은 의병 전투력이 훨씬 높을 수 밖에 없어요
어짜피 의병이나 징집병이나 훈련상태는 똑같은데
맨날 재산이나 빼먹던 지방관이 끌고온 사람보다 어떠한 동기부여가 되어있는 자발적인 전투원이
당연히 더 잘싸울 수 밖에 없음
왜놈이 보급끊겨서 양민들 건드리지 않았으면 의병활동도 이정도로 안커졌을 수도 있었죠..
진짜 이이 말대로 천운이 따른겁니다 조선입장에선
     
불타는황군 14-05-04 13:00
   
태클은 아닌데 순서가 약간 바꼈어요
왜군의 보급이 끊겨 민간을 약탈...그로인해 의병활동 증가가 아니고...
의병들의 게릴라 전술과 청야작전으로 보급이 차단된거죠~

꼭 농기구나 조악한 무기들고 왜구와 싸워야 의병활동은 아니죠
청야작전은 절대적으로 농민의 일방적인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건데
그런분들도 어떤의미에선 가장큰역할을한 의병인거죠...
 
또 의병이라는 존재자체가 왜구들에게는 이해할수없는현상 이었죠
왜구들의 싸움이란 대장이 도망,사망 혹은 수도(본거지)를 저령하면 끝나고
모든 백성은 새로운 군주에게 알아서 조아리는게 상식인데
조선은 개전초반에 정규군이 궤멸하고 왕은 도망가버렸는데
일반 농민들이 스스로 의병활동하며 거세게 저항하는게 이해안되는 일종의 공포였죠...

그런것들이 사기(의지)로 이어져서 조선 정규군보다 농민 의병이
왜구와 더잘싸우는 웃기는 그림이 나오게된거죠...
굿잡스 14-05-04 13:21
   
한류의 힘이라는 저분은 진짜 뭘 알고 저리 떠드는지? ㅋ 아이디만 한류 어쩌고 그럴싸한 (예전 대만 ppp드립으로도 어쩌고 열심히 떠들더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VS 일본군 전적 (65:40)


임진왜란때 승패의 전적이 정리된 사이트가 있어 다시 재 정리했으니 보시기 바랍니다

임진왜란은 오직 명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이긴 것으로 기억되고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통계를 보고 그런 생각이 바로잡혔으면 좋겠습니다.

임진왜란 기간 중 벌어진 크고 작은 전투는 약 105회로 집계됩니다. 이 중  조선군이 공격전을 벌인 게 68회,

방어전을 벌인게 37회로 조선군이 훨씬 공격적 이었습니다. 조선군의 승리가 65회, 패배가 40회로 조선군의

우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승전 65회의 전투 중 조선 관군의 단독전이 38회로 압도적이었으며 의병의 참전 아래 관군이 주도한 전투가 11회, 그리고 의병 단독전은 10회, 관군의 참전 아래 의병이 주도한 전투는 6회였습니다.이 통계로 보아 관군이 전투를 주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연도별로는 개전 첫해인 1592년 9개월동안 70회가 집중적으로 벌어졌는데 이 가운데 조선군의 공격전이 43회, 방어전이 27회, 승리 40회, 패배30회로 평양까지 몰린 개전 초기를 제외하고는 첫 해부터 승세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그 다음해부터는 조선이 일방적인 공격을 가했으며 명군 참전은 105회의 전투 중 8회에 그쳤습니다.>

 

좀더 흐름을 설명하면 1592년 4.14부터 5.2까지 한달까지만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였습니다만

이후 1592년9월까지 전세가 역전이 되어 31승 19패의 전적으로 거의 앞서다가

1592년 10월 이후부터 1593년까지는 거의 전승 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1593년 1월의 평양성 탈환은 조선의 승전분위기 속에서 일으난 하나의 승전일 뿐입니다

다시말해 명의 평양성탈환으로 전세가 역전된것이 아니라 이미 전세는 역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1594~1597년까지 큰 전투한번없는 소강상태이다가 정유재란 발발한
1597년에는 거의 4:4정도로 승패 우위가 없다가 1598년에는 또 일방적인 조선,명군 연합군의 승리입니다



상처뿐인 승리가 아닙니다 실제로 일본은 초기 1달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방적인 수세에

몰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의병의 역할이 그렇게 큰것도 아니었습니다. 주요 전투는 거의 조선육군이 담당하고

일방적인 승리를 했던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실제와는 다르게 조선군은 무력했다는 선입견이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것 같습니다



승리한 부대 승리 회수
조선 육군 22
조선 육군,의병 10
의병 10
명군  1
조선 수군 12
조선육군,수군 1
일본  40

 

 

 

구분/연도별 1592 1953 1957 1958 계
전투횟수 70 17 10 8 105
조선측 승리 40 14 5 6 65
일본측 승리 30 3 5 2 40
관군 단독전 19 8 5 6 38
의병 단독전 9 1 - - 10
관군主 의병助 6 5 - - 11
의병主 관군助 6 - - - 6
朝-明 연합전 -1 -2 -2 -3 -8

 

 

 검은색이 승리한 국가, 붉은색이 패배한 국가입니다

 

회차 년 월일 전장 공격군 주장 구분 방어군 주장 구분 결과 승리
1 1592 4.14 부산진성(경상) 고니시 일본 1군 정발 조선육군 부산진성 함락 일본
2 1592 4.15 동래성(..) 고니시 일본 1군 <st1:personname w_x003a_st="on">송상현</st1:personname> 조선육군 동래성 함락 일본
3 1592 4.18 밀양성(..) 고니시 일본 1군 박진 조선육군 밀양성 함락 일본
4 1592 4.19 김해성(..) 구로다 일본 3군 서례원 조선육군 김해성 함락 일본
5 1592 4.21 경주성)..) 가토 일본2군 박의장 조선육군 경주성 함락 일본
6 1592 4.24 상주성(..) 고니시 일본1군 이일 조선육군 상주성 함락 일본
7 1592 4.26 문경(..) 고니시 일본 1군 <st1:personname w_x003a_st="on">신길원</st1:personname> 조선육군 문경 상실 일본
8 1592 4.28 탄금대(충청) 고니시 일본 1군 신립 조선육군 충주성 함락 일본
9 1592 4.28 추풍령(경상) 구로다 일본 3군 조정.정기룡 조선육군 추풍령 돌파 일본
10 1592 5.2 한강(경기) 가토 일본 2군 <st1:personname w_x003a_st="on">김명원</st1:personname> 조선육군 서울 함락 일본
11 1592 5.7 옥포(경상) <st1:personname w_x003a_st="on">이순신</st1:personname> 조선수군 등당고호 일본수군 일 전함 26척 격파 수군
12 1592 5.7 합포(..) <st1:personname w_x003a_st="on">이순신</st1:personname> 조선수군 와키자카 일본수군 5척... 수군
13 1592 5.8 적진포(..) <st1:personname w_x003a_st="on">이순신</st1:personname> 조선수군 와키자카 일본수군 11척 수군
14 1592 5.16 해유령(경기) 신각 조선육군 와키자카 일본육군   육군
15 1592 5.18 임진강(..) 가토 일본 2군 <st1:personname w_x003a_st="on">김명원</st1:personname> 조선육군   일본
16 1592 5.29 사천(경상) <st1:personname w_x003a_st="on">이순신</st1:personname> 조선수군 와키자카 일본수군 일 전함 13척 격파 수군
17 1592 6.2 당포(..) <st1:personname w_x003a_st="on">이순신</st1:personname> 조선수군 와키자카 일본수군    21척... 수군
18 1592 6.5 당항포(..) <st1:personname w_x003a_st="on">이순신</st1:personname> 조선수군 와키자카 일본수군 26척... 수군
19 1592 6.5 용인(경기) 이광. 윤선각 조선육군 와키자카 일본수군. 서울수비대 5만군사 1600명 에게 분산 일본
20 1592 6.5 회양성(강원) 모리 일본 4군 김연광 조선육군 회양성 함락 일본
21 1592 6.6 무계(경상) 김면. 정인홍 조선 의병 모리휘원 일본 7군   의병
22 1592 6.7 율포(..) <st1:personname w_x003a_st="on">이순신</st1:personname> 조선수군 내도통구 일본수군 일 전함 7척 격파 수군
23 1592 6.1 여주(경기) 원호 조선육군 모리길성 일본 4군   육군
24 1592 6.11 동대원(평안) 고니시 일본 1군 송언신 조선육군   육군
25 1592 6.12 철령 모리길성 일본 4군 이혼 조선육군   일본
26 1592 6.14 왕성탄 고니시 일본 1군 고언백 조선육군 평양성 함락 일본
27 1592 6.15 예천(경상) 모리휘원 일본 7군 우복룡 조선육군   육군
28 1592 6.? 마탄(경기) 원호 조선육군 모리길성 일본 4군 한강수비대 급습 육군
29 1592 6.19 금화(강원) 원호 조선육군 모리길성 일본 4군   일본
30 1592 6.25 운암(전라) 양대박 조선의병 ? ?   일본
31 1592 6.7 초계(경상) <st1:personname w_x003a_st="on">손인갑</st1:personname> 조선의병 모리휘원 일본 7군 일본군 수송대 기습 일본
32 1592 7.8 웅치(전라) 소조천융경 일본 6군 정담 조선육군 웅치 돌파 일본
33 1592 7.8 이치(..) 소조천융경 일본 6군 권율.황진 조선육군 이치 사수 육군
34 1592 7.8 한산도(경상) <st1:personname w_x003a_st="on">이순신</st1:personname> 조선수군 와키자카 일본수군 일 전함 56척 격파 육군
35 1592 7.9 금산성(전라) 고경명. 곽영 조선 의병.관군 소조천융경 일본 6군 전라도 방어 성공 일본
36 1592 7.1 안골포(경상) <st1:personname w_x003a_st="on">이순신</st1:personname> 조선수군 구괴가륭 일본수군 일 전함 20척 격파 수군
37 1592 7.10(?) 우척현(경상) 김면.김성일 조선 의병.관군 소조천융경 일본 6군 매복전으로 일군 격퇴 육군,의병
38 1592 7.17 평양성(평안) 김명원. 조승훈 조. 명 육군 고니시 일본 1군 최초의 연합전 일본
39 1592 7.18 해정창(함경) 가토 일본 2군 한극함 조선육군 조선군 전멸. 일본
40 1592 7.27 영천(경상) 권응수. 박진 조선 의병.관군 복도정칙 일본 5군 영천성 탈환.  육군,의병
41 1592 7.? 의령(..) <st1:personname w_x003a_st="on">곽재우</st1:personname> 조선의병 소조천융경 일본 6군 기강. 진 유격전 의병
42 1592 7.? 현풍(..) <st1:personname w_x003a_st="on">곽재우</st1:personname> 조선의병 우시수승 일본 9군 현풍성 탈환. 의병
43 1592 7,? 영산(..) <st1:personname w_x003a_st="on">곽재우</st1:personname> 조선의병 우시수승 일본 9군 영산성 탈환. 의병
44 1592 7.? 안성(경기) <st1:personname w_x003a_st="on">홍계남</st1:personname> 조선의병 복도정칙 일본 5군 유격전 전개 의병
45 1592 8.1 평양성(평안) 김명원. 이원익 조선의병 고니시 일본 1군 평양성 탈환전 일본
46 1592 8.1 청주성(충청) 조헌. 영구 조선육군 복도정칙 일본 5군 청주성 탈환 육군
47 1592 8.2 경주노곡(경상) <st1:personname w_x003a_st="on">김호</st1:personname> 조선 의병. 관군 복도정칙 일본 5군 언양 주둔 일군 기습 육군,의병
48 1592 8.3 거창(..) 김면. 김시민 조선의병 소조천융경 일본 6군 사랑암에서 조우전 의병
49 1592 8.18 금산성(전라) 조헌. 영규. 양응춘 조선 의병. 관군 소조천융경 일본 6군 조선군 700 전멸.. 일본
50 1592 8.2 경주성(경상) 박진. 정세아 조선 관군. 의병 복도정칙 일본 5군 조선군 전멸 일본
51 1592 8.21 성주성(경상) 김면. 정인홍. 남간 조선 의병. 관군 모리휘원 일본 7군 성주성 탈환 실패 일본
52 1592 8.22 봉화(경상) 한효순. 유종개 조선육군. 의병 모리길성 일본 4군   육군,의병
53 1592 8.25 영원산성(강원) 모리길성 일본 4군 김제갑 조선육군 김제갑 전사. 일본
54 1592 8.28 연안성(황해) 구로다 일본 3군 이정암 조선의병 일군 공격 격퇴 의병
55 1592 9.1 부산포(경상) <st1:personname w_x003a_st="on">이순신</st1:personname> 조선수군 모리휘원 외 일본육군.수군 일 전함 100여척 격파 수군
56 1592 9.8 경주성(..) 박진 조선육군 복도정칙 일본 5군 경주성 탈환 육군
57 1592 9.11 성주성(..) 김면. 정인홍. 배설 조선의병. 관군 모리휘원 일본 7군 성주성 탈환 실패 일본
58 1592 9.16 경성(함경) 정문부. 정견룡 조선 육군 가토 일본 2군 경성 탈환 육군
59 1592 9.2 인동(경상) 장사진 조선의병 복도정칙 일본 5군 일군 수비대 기습 의병
60 1592 9.27 창원성(..) 진주성 공격군 일본육군 유숭인 조선육군 노현에서 저지전투 일본
61 1592 10.1 진주성 외(..) 진주성 공격군 일본육군 유숭인 조선육군   일본
62 1592 10.1 진주성(..) 진주성 공격군 일본육군 김시민.곽재우 조선육군. 의병 진주성 방어 성공 육군
63 1592 10.18 상녕(경기) 모리길성 일본 4군 심대 조선육군 심대 전사 일본
64 1592 10.3 길주성(함경) 정문부. 한인제 조선의병. 관군 가토 일본 2군 일군 보급대 섬멸 육군,의병
65 1592 11.1 함흥(..) 성윤문 조선육군 가토 일본 2군 함흥 주둔 일군 기습 육군
66 1592 11.12 이원(..) 이성임 조선육군 가토 일본 2군 이원성부근 기습 육군
67 1592 11.? 상주 용화동(경상) <st1:personname w_x003a_st="on">정기룡</st1:personname> 조선육군 복도정칙 일분 5군 일본 보급대 기습 육군
68 1592 12.? 중화(평안) 고니시 일본 1군 임중량 조선의병 의병 기지 습격 일본
69 1592 12.1 길주 쌍포(함경) 정문부. 정견룡 조선육군. 의병 가토 일본 2군 길주성 주변 토벌 육군,의병
70 1592 12.14 성주성(경상) 김면.최경회. 정인홍 조선의병 복도정칙 일본 5군 성주성 수복 의병
71 1592 12.? 독성산성(경기) 우기다 일본 8군 <st1:personname w_x003a_st="on">권율</st1:personname> 조선육군 일본군 격퇴 육군
72 1592 12.? 함창(경상) 정기룡. 정경세 조선육군. 의병 모리휘원 일본 7군 일본군 습격 육군,의병
73 1593 1593.1.9 평양성(평안) 김명원.이여송 조.명 연합군 고니시 일본 1군 평양성 탈환 조,명
74 1593 1.19 길주 남문밖(함경) 원충노 조선의병 가토 일본 2군 일군 기습 의병
75 1593 1.23 단천(..) 구황.강찬 조선육군. 의병 가토 일본 2군 일군 기습 육군,의병
76 1593 1.27 벽제관(경기) 이여송.고언백 조.명 연합군 우기다 일본 육군 일본군 역습 일본
77 1593 1.28 백탑교(함경) 정문부. 한인제 조선육군.의병 가토 일본 2군 길주성 수복 육군,의병
78 1593 1.3 죽산성(경기) 변이중 조선육군 복도정칙 일본 5군 공격 실패 일본
79 1593 2.12 행주산성(..) 우기다 일본육군 권율. 처영 조선육군 행주대첩 육군
80 1593 2.3 죽산. 음죽(..) 황진 조선육군 복도정칙 일본 5군 죽산.음죽성 탈환 육군
81 1593 3.6 웅천(경상) <st1:personname w_x003a_st="on">이순신</st1:personname> 조선수군 협판안치 일본수륙군 일 전함 10척 격파 수군
82 1593 3.27 노원평(경기) 이시언.고언백 조선육군 우기다 일본육군 일 보급대 소탕 육군
83 1593 6.29 진주성(경상) 우기다 일본육군 최경희.서례원 조선육군 조선군 전멸 일본
84 1593 8.6 경주성(..) 가토.모리길성 일본 2.4군 고언백.왕필적 조.명 연합군 일군 공격 격퇴 조,명
85 1593 9.29 함안.웅천(..) 선거이.최강 조선육군.의병 고니시 일본 1군 일군 보급대 소탕 육군,의병
86 1593 10.27 영선(..) 이빈 조선육군 고니시 일본 1군 일군 보급대 소탕 육군
87 1593 12.2 안강(..) 고언백.오유충 조.명 연합군 가토 일본 2군 일군 보급대 소탕 조,명
88 1594 1594.3.4 당항포(..) 이순신.김덕룡 조선수륙군 복도정칙. 5군 일본수륙군 일전함 31척 격파 육군,수군
89 1597 1597.7.16 칠천량(..) 원균 조선수군 와키자카 일본수군 朝 전함 전멸 일본
90 1597 8.15 고령(..) <st1:personname w_x003a_st="on">정기룡</st1:personname> 조선육군 소조천수추 일본육군.재침군 일군 일부 격퇴 육군
91 1597 8.16 황석산성(..) 가토 日육군우군 곽준 조선육군 산성 함락 일본
92 1597 8.16 남원성(전라) 우기다 日육군좌군 이복남.양원 조.명 연합군 남원성 함락 일본
93 1597 9.7 직산(충청) 구로다 日육군右군 해생 명군 일 선봉 격퇴 명군
94 1597 9.14 금구(전라) 원신 조선육군 우기다 일본육군.左군 일군 기습 육군
95 1597 9.16 명량(..) 와키자카, 가릉가명 일본수군 <st1:personname w_x003a_st="on">이순신</st1:personname> 조선수군 朝전함13척,일군 전함 200척 격퇴 수군
96 1597 12.28 광양(..) 이광악.김응서 조선육군 고니시 일본육군 보급대 공격 실패 일본
97 1598 1958.1.4 울산(경상) 권율,양호 조.명 연합군 가토 일본육군 울산성 탈환 실패 일본
98 1598 3.24 삼가성(..) 정기룡.하생 조.명연합군 소조천수추 일본육군 일군 격퇴 조,명
99 1598 4.8 무주성(전라) 이광악.이령 조.명연합군 도진의홍 일본육군 일군 격퇴 조,명
100 1598 4.2 함양(경상) 정기룡.이령 조.명 연합군 도진의홍 일본육군 함양 사근역 일군 격퇴 조,명
101 1598 6.? 순천(전라) 이광악 조선육군 고니시 일본육군 순천부근 日 격퇴 육군
102 1598 9.25 울산(경상) 김응서.마귀 조.명 연합군 가토.구로다 일본육군 연합군 총공격 조,명
103 1598 10.1 사천(..) 정기룡.동일원 조.명 연합군 도진의홍 일본육군 연합군 총공격 조,명
104 1598 10.24 순천(전라) 권율.유정 조.명 연합군 고니시 일본육군 연합군 총공격 조,명
105 1598 11.19 노량(..) 이순신.진린 조.명 연합군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rcticguy&logNo=50165479298
굿잡스 14-05-04 13:42
   
임진왜란 시기에 초기 한달 여간 잽의 파죽지세의 형상이 드라마등에 의해 대규모로 각인되다

보니 마치 육진에서 조선군은 완전 캐털린 듯 보이지만 실제 기록은 그렇지 않음.(물론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이 조선군의 전황 분위기를 바꾼 분기점이긴 하죠)

우선 임진왜란시기 조선의 제승방략체제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해 보이군요.

이건 기존의 각지역 수령들 자체방어의 진관체제에서 일정전략 거점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수령들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중앙지휘관이 내려오면 함께 힘을 모아 집중력을 발휘하는 체재로 바꾸었는데

문제는 기존의 해안가 소수양아치 정도의 수적질을 하던 왜구로 안이하게 대처하다보니

대규모 기습전에서는 상당한 취약점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는 점임. (물론 조선의

정예병도 남부보다는 여진등 북쪽 방어에 몰려 있었고)

앞선 설명에도 알겠지만 이런 제승방략체제는 일정 거점으로 모여야 하는

시간부터 다시 중앙지휘관과 군대를 기다려 합류해야 하는 점등에서 상당한 시간이 걸리다 보니

경상도등 남부지역에서는 왜구의 대규모 기습전에 매우 빠른 속도로 밀려버리게 된 것이죠.


그러나 윗 실제 기록에서도 보이듯 이런 조선의 제승방략체제가 본격적으로 돌아가자 왜구도 초기 이외에는

별다른 승과를 내지못하고 조선의 실제 정예병과 본격적으로

맞붙게 되자 밀리면서 수세적으로 이후 남부에 내려가 왜성을 쌓고 수비방비만 쳐하면서

전황이 거의 소강상태로 지지부진해지게 됨. 문제는 이렇게 되다 보니 그 인근지역의 왜군의 약탈부터

아직 안정화되지 않는 민심과 생활상에 일년만 제대로 농사를 짓지 않아도 논밭에 잡초가 자라면서 농사

짓을 토지량이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는 거죠.(기타 제대로 시신을 장례 치르지 못하면서 생기는

각종 전염병등)
굿잡스 14-05-04 13:52
   
그럼 제승방략체제가 본격적으로 돌아가고

조선 수군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왜 왜구를 일거에 쓸어버릴 수 없었는가?

여기에는 제승방략체제가 가지는 이런 단점속에서 초기 너무 급격히 밀리다 보니 선조가 몽진을 택하고

이후 너무 빨리 명에게 군사요청을 한게 도리어 임진왜란을 초기에 끝낼 수 있었던 부분을 지지부진하게

한 또다른 요인이 됨.


무슨말인가 하면 조선의 대표적 곡창지대인 호남쪽에는 임진왜란 시기에도 평작의 소출이 가능했고

점차 모인 대규모 군세를 통해 조선의 군사력이 결집되면서 급격히 북진하면서 고립된 왜구를

일거에 물리칠 수 있었음에도 도리어 명군은 왜구에 대한 적극적 종결보다는 전쟁을 조선내로 국한

시기는 소극적 협상으로 고립된 왜군들은 너무도 쉽게 남부로 내려올 수 있었고 무엇보다

명의 대군은 따로 자체 식량을 가져 오지 않다보니 조선에 결집된 군대를 도리어 해산시키고 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해야 된 상황이였음. 그렇다고 명나라가 조선을 위해 왜와 적극적으로 전쟁을 치룬것도 아니고

도리어 조선내에 왜 못지 않게 마을 여기 저기에서 악랄한 행패를 보이고

왜에 뇌물까지 쳐먹으면서 번번히 조명 합동군사작전에서 시늉만내다보니 수군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하면

서 전황이 질질 길어지는 양상이 된 것임.
굿잡스 14-05-04 15:20
   
화살과 화승총 격발 실제 비교 영상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military&wr_id=132799&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1%B0%EC%B4%9D&sop=and

윗영상비교를 보면 알겠지만 뭔 잽극우 무식한 것들은 당시 조총위력이 무슨 현대 핵무기급 어쩌고 헛소리

까지 하던데 ㅋ 당시 조총의 장점이라는건 궁사보다 습득기간이 짧고 관통력이 높다뿐 실제 빠른 연사력도

매우 저급한 수준이고 도리어 울나라 편전보다 유효 사거리가 짧고 그기에 뭔 습할때는 제대로 쏴지지도

않는등 도리어 단점이 많았음. 그리고 잽 역시도 이런 조총이 대규모 주력도 아니였고.


이런 조총 정도의 위력은 이미 선조등 조정내에서도 알고 있던 상황으로 딱히 그렇게 위협적으로 보지도

않았던.(물론 적을 안이하게 본건 분명 실책임)

 16세기 임진왜란 시기에는 이미 조선내에서는 왜구가 조총 정도에 국한된 것에 비해

각종 다양한 근대적 개념의 발달한 첨단 화약무기들을 발명 구축해 놓을 만큼 높은 수준의 문

화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음.

수군에서는 이미 다들 알 듯 거북선같은 세계최초의 철갑선이 등장해서 종횡하고 근대적 함포해전

양상이 임진왜란을 관통하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 수군을 통해 세계최초로 완전히 재현된 상황이였음

(이 당시 서구의 해전양상이라는 건 그냥 철공을 날리는 수준에 백병전이 여전히 주류였던데 비해 이미 우리

는 고려말 진포대첩에서 세계최초의 근대적 화약 무기해전을 통해 대승을 거둔 전력을 가지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수군은 강력한 근대적 함포공격력을 자랑)

그외 육군에서도 우리가 잘아는 행주대첩 역시 조선 기술력의 총아를 보여주는 전투양상이였죠.

단순히 민간아낙네들의 자발적 행주치마뿐 아니라 고작 민관 2300여명이 3만의 왜군을 단지 하루 7차례

의 격전속에서 전멸시킨 배경에는 이미 세계최초의 2단 로켓의 원형인 오늘날 다연장포같은 신기전부터

세계최초의 시한 폭탄인 비격진천뢰, 천자,지자,현자,황자총통같은 대형대포 및 중완구, 조화란등 다양한

첨단 화약화력 무기를 통해서 이루여 낼 수 있었던 대승임. 이를 통해 이치 전투, 수원 독왕산성 전투, 행주대

첩에 이르기까지 잇따른 승리를 거두면서 조선총사령관에 오른 인물이 육군의 권율장군이죠.


이중 세계최초의 시한폭탄격인 비격진천뢰는 경주성 탈환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무기로 왜구들에게는

일명 귀신 폭탄으로도 불린 위력적 무기였음


비격진천뢰 실물사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8078&cid=1608&categoryId=1608
     
helfenmir 14-05-05 19:28
   
습할땐 합성궁도 쓰기 어렵습니다.
퍼쿠션캡이 없던 시기니 우천시 사용불가는 큰 단점입니다만, 어차피 조선 쪽 합성궁도 우천시나 덥고 습할 때는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활 쏘는 솜씨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니 단일재료로 만든 활을 쏘는 건 가능하지만요.
굿잡스 14-05-04 15:43
   
그리고 좀더 역사를 지극하고 당연한 상식적 시각에서 본다면

수군에서 우리가 아는 유명한 한산도,명량대첩만을 보고 이 몇개의 수전만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식으로 육군을

봐서는 전혀 안되죠. 이미 이순신제독 역시 해전에서 23전 23승의 불멸의 신화속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지루었듯 육군에서도 행주,진주대첩 외에도 크고 작은 전투에서 관군이 주도로 의병등 민간이 합심해서

초기 왜군이 작정하고 기습 대규모전에 제승방략체제가 허점을 드러내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1달여 이후부터는 점차 조선의 육군 군세도 본격적 발동을 시작하고 북쪽에 있던 조선의 정예병까지 가세하

자 왜군들은 급격히 밀려나 남부에서 왜성을 쌓고 수세적으로 지리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좀더 제대

로 인지했으면 하군요.(이후 7여년을 끌다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500여척 중 200여 척 이상

이 괴멸시키고 150여 척이 파손되면서 패색이 짙어진 도주하던 150여 척의 왜구 함선 중 10

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하면서 종결)
한류의힘 14-05-04 15:45
   
굿잡스님이 위에  00 대 00  으로  조선 육군이 이긴횟수가 많으니 조선육군  Good  ~ ~ ~..

이라는데 참,,,,, 민망함....

몇개 지방성을 탈환했다고 하는데,,  용인전투 때 보더라도,,

와키자카군 배치는 한양 1,200명,,  용인 300명 ,,, 수원성 30명이었슴..

지방 성 수비병력 이래봐야 수십명,, 많아야 100~200명 인데,,, 그걸 1승,,  용인전투 1패, - - - - -

이런식이면 민망하지 않을 수 없슴...
     
굿잡스 14-05-04 15:53
   
님은 뭔 하나 제대로 알지도

사료에 근거하거나 고고학적 내용도 없이 본인 자의적 헛소리로

뻘소리하는 건 좀 삼가하지요 ㅋ(뭐 본인 수준 팍팍티내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 역사 운운할 거면 본인 혼자 어쩌고 어디서 겉핥기로 잽 2초이나 화교급들

찌라시류 헛소리 들고 어쩌고 그만 허접소리하길 바람.(제대로 아는 것도 알맹이도 없이

뭔 어쩌고 저쩌고 )
한류의힘 14-05-04 15:48
   
다시 확인하지만,,,,

조선 육군이 참전한 대규모 공격은 명군과 연합 공격한 울산성 전투가 유일함.....    근데,, 패했슴..

명군 단독 공격은 평양성 공격과,,  벽제관 전투 이 2건인데,,,

평양성은 전투 없이 고니시군이 철수했고,, 

벽제관에서 민친 이여송이 꼴랑 기병 3,000기 만으로 단독 출전했다..

전멸 당해,,, 한양성 진군은 포기해 버림
     
굿잡스 14-05-04 16:08
   
조선 육군이 참전한 대규모 공격은 명군과 연합 공격한 울산성 전투가 유일함.....    근데,, 패했슴..

명군 단독 공격은 평양성 공격과,,  벽제관 전투 이 2건인데,,, >??

명군 단독 공격 평양성?? ㅋㅋ 뭘 좀 알고 떠드세요(저 위에서 부터 혼자 겉핥기 허접웃긴

소리나 계속 쳐하는)


평양성 2차전투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1월 6일부터 9일까지 평양에서 조·명연합군과 왜군이 벌인 전투.

명은 원군으로 파견하였던 조승훈의 군대가 1차 평양성전투에서 왜군에게 패하고 돌아오자 일본과의 잠정적인 휴전을 하면서 시간을 버는 한편, 요동지방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격퇴하기로 하고 이여송에게 4만의 군사를 주어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온 명군은 1월 6일 이른 아침 조선의 관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고 성문 밖에 진을 쳤다.

조선에서도 도원수 김명원을 비롯하여 이일·김응서의 군대와 휴정·유정의 승군도 합세하였다. 이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연광정의 토굴로 쫓겨 들어가고 칠성문·보통문·모란봉 등지의 제장들도 여기에 모여서 응전하였다. 이여송은 이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으나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막다른 지경에 빠진 왜적들이 발악할 것을 염려하여, 성 밖으로 군사를 거두고 고니시에게 길을 열어줄 테니 퇴각하라고 하였다.

고니시는 군량·무기가 다하여 없어지고 원군도 오지 않아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여송이 이 사실을 조선 진영에 통보하자 조선측은 복병을 철수하고 길을 열어주었으며, 이에 고니시는 밤중에 남은 군사를 거두어 서울로 후퇴하고 조선은 비로소 7개월 만에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5107&cid=4513&categoryId=4513


벽제관전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6197&cid=1592&categoryId=1592


임진왜란 울산성 전투

http://blog.naver.com/blackcjw?Redirect=Log&logNo=120093472779


여기서 혼자 허접 자위막무가내 글이나 양산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책이나 보시든지

망글은 혼자 일기장에 올리기 바람(딱 글의 패턴도 어디 넷상에서 2초이급이나 화교급들

소스만 뽑아서 어쩌고 쩌저고 참 패턴도 식상하지 즛)
     
불타는황군 14-05-04 16:44
   
이보세요~ 평양성은 조명연합 VS 왜구 싸움이었고
조선의 부대가 크게 3번 자잘한 국지전은 수없치 치뤄서 왜군의 피로를 가중시켰고
의병들을 중점으로 보급을 철저히 차단해 왜구들이 평양성 백성들의 인육을 먹었다는설도있음

그러다 명 본진 4만이 도착하고 그동안 왜군 진을빼놓던 조선군은 뒤로물러나고
본격적으로 명군이 평양성을 공략 반나절만에 성문과 성벽이 함락
이에 왜구는 민간 거주지로 숨어들어 백성들을 방패막이로 사용

명 장수 이여송이 토굴에 숨어있던 왜장 고니시를 발견 투항을 권했고
고니시는 병력을 뺄테니 보내줄것을 요구 이에 백성들의 피해가 큰것을 감안한 이여송이
보내줬죠 평양성 시가전에서만 1만이넘는 왜구가 명군에게 썰렸습니다....

또 도망가는 왜군을 조선군이 단독으로 추격해서 천명이넘는 왜구를 베었고
적장 고니시는 갑옷도 말도 버리고 일반병사틈이숨어 도주했고요~
이게 전투가 없는건가요?ㅋㅋ

오히려 왜구가 평양성을 함락할때 전투가없었죠
성의 규모에비해 조선 군사가 턱없이 모자라 일반백성에게까지 피해가 갈것을 우려해
왜구가 도착한직후 기습공격을 몇번하고 성을 버리고 퇴각했습니다.
왜구는 성이 비었는데도 그걸모르고 하루뒤에야 성으로 진입했고요~

조선군이 성을 버리고 퇴각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구의 특성상 점령한곳은 자신들의 세력이라 여기기에
일반 백성에게 큰위해를 가하지 않을거라 계산에 과감하게 퇴각한건데
예상과는 다르게 왜구는 평양성 백성에게 작악하게 굴었죠
 
평양성 탈환후 조선백성 생존자가 고작 천명도 안됐다니
왜구가 얼마나 포악하고 잔인한 족속이었는지 알만하죠.....

도망가는 왜구를 추격했던 황인엽? 조선 장수가 평양성의 몰골을 보고
모조리 몰살시키지않고 적당히 추격하는 흉내만 내다 보내주게 분해서
이를갈다 이가 세개나 부러졌다죠...

그리고 일본의 전쟁은 단순 무식 그자체죠 그들의 관해상
적장을 잡거나 죽이거나 수도를 함락하면 끝나는건데
조선은 달랐죠 왕이 도망가버리고 군대는 무너지는데 백성들은 스스로일어나 투쟁하고...
그덕에 오로지 수도만 바라보 송곳처럼 파고들었다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버린게 왜군의 현실이었죠
오죽하면 선두는 중북부까지 치고올라갔는데
후방부대는 전라도조차 뚫지못하고 오리혀 허리가 끊겨
보급도 차다당하는 기형적인 전선이 야기됐으니 말이죠...

뭐 조선 정규군ㅋ 이 일본군으 상대로 이긴적이 없다고 주장하시는데
현실은 반대에요 개전 초기 1~2달 동안 송곳처럼 파고드며
준비간안된 조선군을 기습으로 이기다
조선군의 전열이 정비되고 후방이 의병들이 거병한후론 쭈~욱~ 연패였습니다.
보급과 사기가 꺽인 왜구스스로 대구모 전투를 철저히 피해 다녔죠...

또 명군의 가세도 오히려 독이됐죠 명군의 유지는 조선이 부담해야했기에
조선군이 제대로 전열을 정비할수가 없었고 명군은 일본군과의 결전을 피하며
오히려 조선 백성을 약탈하기도하면서 단물을 뽑아먹으려들었기에
시간만 질질끄는 양상이 되버린거죠 만약 조선군만으로 대항했으면
7년이나 갈없이 애초에 끝났을 전쟁이었죠...
한류의힘 14-05-04 16:03
   
일본 육군이 대규모 근접전투에서 압도적 우위 인데,,

왜 이토록 소극적으로 점령지 평양성과 한양성을 다시 내 줬는지 의아할 것임...

이것은 일본군 내부의 문제로 보임..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점령지를 각 점령 장군들에게 나누에 봉토로 하사함....

문제는 의병들이 일어나고,,, 조선 백성을 각자 자신의 백성으로 유지하며,, 통치하기가 어렵다고 깨닫게 됨..

그런 와중에 다이묘들은 자신의 병력이 손실 당하면,,,, 경쟁 관계의 다른 다이묘들에게 일본에서 위협을 당하게 될 가능성에 몸을 극도로 사리게됨..

고니시 입장에서는 명군의 주력과 맞서고 있는데,, 함경도 방면으로 진출한 가토 군이나,, 남쪽에 머물던 구로다군은 별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고니시를 도와 주지 않음...

당연히 고니시 입장에선  ,,,,자신의 군대만 소모될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임...

따라서 고니시는 영토 대신 다른 방면에서 이득을 취하기 시작함....

노예 무역임.....

수십만의 조선인을 본국으로 끌고가 노예로 파는 것이 전쟁을 수행하며,, 영토를 획득 유지하는 것도바 이익이 더 나았슴... 

전쟁이 장기화 될 수록 일본 다이묘들은 조선군에 대해 공격을 않하는 것을 볼 수 있슴...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각자의 군대를 이끌로  토요토미 아들 쪽과 도쿠가와 쪽으로 나뉘어 싸움..

그 결과,,

고니시는 도쿠가와 에게 잡혀 처형 당하고,,,,,
가토는 독살당하고,, 
구로다는  도쿠가와 쪽에 붙어  잘 살았고,,,
C급 규모 다이묘 였던 와카자키 역시 도쿠가와 쪽에 붙어 자신의 영지를 본존하였슴..
     
굿잡스 14-05-04 16:11
   
일본 육군이 대규모 근접전투에서 압도적 우위 인데,,

왜 이토록 소극적으로 점령지 평양성과 한양성을 다시 내 줬는지 의아할 것임... >????

ㅋㅋㅋㅋㅋ(정작 본인이 말한 울산성 전투등 왜군이 얼마나 수세에 몰리면서 마지막

발악에 몸부림친지도 모르고 헛소리 남발만 쳐하니)


이건 뭔 어디 잽애니로 역사 공부하셨남 ㅋㅋ 혼자 망글양산 작렬하군.. 에구..

뭐하나 제대로 맞는 팩트도 기록도 없이 중구난방에 뭐가 진실이고 뭐가 실체인지도

없이 혼자 열심히 싸지르는 쯧.


저기요 당신 이전글에서도 그렇고

무슨 대만 PPP 드립론으로 어쩌고  이전글에도

열심히 올리던데 최소 울나라 국사이야기 거낼거면 제대로 된 사료 기록이나

실체나 좀 확인하고 어저고 허접소리 남발하길 바람.
     
굿잡스 14-05-04 16:27
   
잽이 제대로 총아적 국가력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은

그토록 불안전하게 겨우 어찌 어찌 구색으로 맞춘 도요토미 시기가 아니라

조선통신사를 통한 본격적 관료 중앙 집권기인 에도시대를 지나고 명확한 명치유신 시기임.

뭔 소리인줄 본인 스스로 내용에 써고도 잽이 압도적??

헛소리 계속쳐하십니다.

애초에 왜군은 작정하고 대규모 기습전으로 조선의 초기 제승방략체재의 허점과 남부의

안이한 방비로 초기가 주효했던 것이지 잽 내부적으로 정리 정돈 안된 미성숙한, 중앙집권적

통일 국력도 제대로 못정비한 상태에서 이미 완연한 중앙집권적 그것도 문화경제적 수준이 훨씬

높은 조선을 제대로 압도적 우위에서 어쩌고?? 이미 수군에서도 이순신제독에게 털리면서

제대로된 물자 보급도 안되는 부대가 그것도 적지에서

고금을 통해서 어떻게 압도적 우위 어쩌고 전력울

논할 수 있남???(2차대전때도 그렇고 잽의 인명경시 반자이 만쉐 무대포 가미가제 돌격마냥 그냥 자국민들

사지로 쳐넣는 막장 전투식이지) 참 밀터 기초도 역사에 대한 사료기록이나 제대로 쳐보고 이런

뻘글 양산에 열올리시남?
한류의힘 14-05-04 16:31
   
..............................결론...........................
           
역사의 진실 :  7년간의 전란동안 대규모 적 주력부대 공격 후 승리 -- -  0 건  - - > 조선 육군 개쓰레기

일부 네티즌 :  ...............소규모 적 수비대,, 공격 후 승리          - -  -몇건  - - > 조선 육군 Good


각자 판단 하시길  ~ ~ ~ ~
     
굿잡스 14-05-04 16:34
   
ㅋㅋ 당신 논리대로면 조선군이 그리 쒸레기급인데 그런 조선군도 제대로 못이기는

왜구는 그냥 똥이구만 ㅋㅋ



허접 무식한 소리로 뻘글 양상한다고 고생많음 ㅋㅋ

그리 관심 받고 싶음?? ㅋ(딱보니 어디 역사를 저 2초이급이나 어디 화교들 찌라시류로

배운.. 쯧.)
     
불타는황군 14-05-04 16:54
   
와우~ 이건뭐야~ ㅋ
자뻑도 정도껏 해야지~ ㅋ
개물고기 14-05-04 16:53
   
정유재란 당시에 거제도에 나무 베러왔던 왜병 20여명이 고성현령 조응도가 지휘하는 판옥선에 기어올라 사부와 격군을 포함한 140여명을 모두 몰살시킨 사건이 있었음. 일본군이 단병접전에 강한건 맞음. 카더라긴 하지만 조선수군에 왜병이 한명이라도 배로 기어올랐을시 갑사 10명이 그를 당해내지 못한다라는 말까지 돌았던거 보면..
개물고기 14-05-04 16:54
   
한학자 이시언이 도산전투 당시 명군 소속 몽골 용병들에게 패퇴하는 일본군을 보고 '조선군 도망치듯이 한다'라고 자조적으로 뇌까렸던거 생각하면 뭐.. 물론 조선군이 임진년 와중에 잘싸운 전투도 있고 분전한것도 많지만 일단 군대의 질적 수준은 당연히 전국시대를 거쳐온 일본군이 우수했지. 그건 당연한거임.
개물고기 14-05-04 16:56
   
솔직히 조선군 수준이 http://lyuen.egloos.com/4649265 이 수준이었던걸 감안하면 오히려 잘싸우는게 대단한수준
     
불타는황군 14-05-04 17:13
   
대규모 전투에선 개인의 무력은 의미가없죠~
왜군이 개전초기를 제외하고 대규모전투를 철저히 피해다닌 이유도 그거죠
단병접전과 백병전에는 강하지만 전술에는 밀렸으니까요~

그리고 위에 20명으로 140 이겼다는것도 딱 140명 준비하고있는데 시작! 해서 이긴게아니라
기습이었죠 아마 동시에 상대한건 1:1도 안됐을거임 그리고 조선 수군이란게 갑옷은 커녕
주무기가 활과 포죠 도검을 소지한 병사는 소수이기에 나머지는 맨몸이나 마찬가지였죠...
          
개물고기 14-05-04 17:16
   
개전초기를 제외하고 대규모 전투를 피해다녔다니. 거기에 대한 근거가 있나요? 오히려 전선을 고착화시킨 원인이 명군이 벽제관에서 왜군에게 대패한건데
               
불타는황군 14-05-04 17:33
   
전선고착의 원인은 벽제관의 전투가 기점이긴한데 왜구가 무서워서가 아니죠 ㅋ

명은 명대로 남의 싸움에 전력을 소비하기 싫었고
조선은 명의 부대에 보급을 해줘야 해서 제대로 전열을 정비할수가없었고
왜구는 보급선이 차단되어 한번 손실을 입으면 회복하는게 더디고 힘들수밖에없었죠
그래서 자연스레 전선 자체가 고착되고 서로서로 대규모 전투를 피한거죠

사실상 벽제관 이후로 요충지 공방 외에는 이렇다할 큰전투가 드물죠
오히려 명군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조선군과 의병들의 중소규모의 국지전이 많았죠
위에 굿잡스님이 정리해논거 보면 잘나와있네요~ㅋ

그리고 전투를 가장 기피한쪽은 왜구죠
같은 왜구라도 각 장수끼리 연계하고 업합하고 지원하는일은 드물었습니다....
다이묘? 라는게 중세 봉건영주와 비슷한 개념이라
병사와 물자의 소비는 자신의 힘을 소모하는거기에...

명에 뇌물도 많이쓴걸로 알고있음 그덕에 명은 명나름대로
적극적인 공세보다 이득과 실리를 챙기기에 주려했고요...
오죽하면 조선 백성을 약탈하고 전공이라 속이는 일도 빈번했으니까요~
굿잡스 14-05-04 17:02
   
역사 스페셜 울산전투

고립된 왜구들은 전멸되지 않기 위해 종이와 흙을 쳐먹고 말피와 오줌으로 물 대신 마시며 버티기 ㅋ(저 위에 누구 말처럼 왜구들 진짜 압도적 전력이군여 ㅋ)

http://blog.naver.com/naruluiha?Redirect=Log&logNo=120178368099


임진왜란의 종결로 치닫게한 울산성 전투

http://blog.naver.com/blackcjw?Redirect=Log&logNo=120093472779


울산성 전투의 진행과정
http://blog.naver.com/chosun4?Redirect=Log&logNo=80007565487

울산선 전투의 결과

http://blog.naver.com/chosun4?Redirect=Log&logNo=80007565415
     
개물고기 14-05-04 17:07
   
울산성 전투는 가토를 궁지로 몰아넣긴 햇지만 작전자체는 실패임. 일본군이 축조한 왜성이 너무 견고하고 조명이 알던 기존의 성곽 축조방식과 달라 공성이 난항을 겪었음. 2차 울산성 전투는 피해 규모가 불명이지만 1차는 조명 연합군이 피해를 더 많이 받았다. 가토를 고사시키는 작전으로 변경된것도 일본군의 강력한 수성으로 피해가 너무 커지자 전략을 바꾼거임. 1차때는 그래도 가토를 궁지로 몰아넣은게 있어서 조명연합군이 아깝게 함락못시켰으니 다시 재공격가자, 해서 2차 울산성 전투를 벌였는데 패배했다. 울산전투는 승전이 아니라서 반박으로 올릴만한 거리는 아닌데..
               
개물고기 14-05-04 17:17
   
솔직히 위에 널린 뎃글들은 귀찮아서 못읽겠는데 조선군이 약하다고 자학필요는 없지만 필요이상으로 커버칠 필요도 없음. 잘싸운 전투는 잘싸운거고. 못싸운 전투는 못싸웠다 하는거지. 일본군 또한 폄하할필요도 없고 지켜세울 필요도 없음
                    
굿잡스 14-05-04 17:20
   
당연한것 아님? ㅋㅋ

자의적 해석보다 그냥 저 위에 올린 전쟁 기록들을 쭉 보는게 명확하고

더 달것도 덜 달것도 없음.(실제 왜구의 파죽지세 어쩌고 전력이란 임진발발 거

의 1달여여 정도였으니)


왜구들은 백병전이나 개인무기류인 조종에서 우위를 가졌고

우리는 해군및 육군에서 다양한 첨단 화약화력무기 및 점차 발동된 제승방략체

제와 민관합심으로 전력을 갖추면서 이후 남부로 기어 내려와 수비로 전환한 왜

군과는 지리한 전개 양상.
                         
개물고기 14-05-04 17:31
   
임진년을 거치며 붕괴한 제승방략이 점차 발동되었다고? 어디서 나오는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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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원칙 3항 위반 경고1
                         
굿잡스 14-05-04 17:36
   
?? 몰라서 묻는 것임??? 그럼 님은 조선은 이후 어떻게 왜구와 싸웠데요??

평양성,행주, 진주대첩이고 경주성 탈환 울산 전투고..뭔 도깨비들이 한 것임?
                         
불타는황군 14-05-04 17:38
   
제승방략이 제대로 발동되었다는.....

처음 막무가내로 끌어모은 농민들이 패하면서 혼란에빠졌지만
점차 스스로 거병한 의병들이 늘어나고 그의병들이 제승방략으 편제로 재편되면서 끌려온부대가 아닌 참전한 군이이 되간거죠~

그리고 백병전에 일본군이 강하다지만 체격조건이 월등히좋은 조선인들도
시간이 지나며 점점 강해져서 왜구를 상대하는 요령을 알아간것도 주요한거죠~ㅋ
                         
개물고기 14-05-04 17:56
   
제승방략은 이미 한계를 노출해 임진년 중간에 붕괴되고 그랬기에 전란이후 속오군 체제로 변경된건데 이미 이일 신립 다 박살나고 제승방략 체제가 실질적으로 붕괴해 명군 참전전깢 파국을 맞았던건데 그게 건재해서 다시 발동했다니. 예토전생이라도 한모양?
                         
불타는황군 14-05-04 18:03
   
제승방략이라는 체제 자체가 붕괴한게 아니고
초반에 의지도 명분도없는 농민을 무기도 제대로 안주고
마구끌어모았다가 그 부대가 박살나거죠~ㅋㅋㅋㅋㅋ
초반 왜구가 연전연승 할수있었던 이유이기도하고요~ㅋ

그후 스스로 거병한 의병들이 뭉치고 커지면서 자연스레 제승략방으로
전환되면서 정규군화가 되어간거죠~ㅋ

예를들면 용인 전투에서 패해 흩어졌던 농민들을 다시 규합해서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봉쇄한게 뭔데요?
그게 바로 제승방략이에요~ㅋㅋㅋㅋㅋㅋ

머 전쟁이 게임인가요? 제승방략 카드 사용하면 사라져서 다시 못쓰는거?ㅋ

그리고 속오군과 제승방략은 아예 개념자체가 다른건데요.....

또 명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이 구원받은게 아니라 명군으로 인해
오히려 전쟁이 장기화되고 고착화되는 양상이 되버렸죠~ㅋ
          
개물고기 14-05-04 18:19
   
제승방략체제가 지방군이 한 지점에 집결해 있다가 중앙 지휘관이 내려와 지휘권을 수습하는 방식이고 이 체제가 제대로 발동하기 위해서는 평시에도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했는데 사실상 훈련은 커녕 수준이 형편없었기에 일본군에게 야전을 벌이다 패퇴한거지 체제 자체는 잘 발동했음. 각지의 병력들은 잘 집결했고 물자등도 메뉴얼에 맞게 동원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승방략체제가 가진 단점이 부각된데다 낮은 훈련도 까지 겹쳐 전쟁당시 한계를 들어냈다.  그랬기에 상비군 체제인 속오군과 훈련도감 체제로 바뀐거다. 속오군이 처음 편성된게 선조 27년 전쟁중이고 진관체제가 다시 복구되어 정유재란때 동원된다. 이미 개박살나서 전쟁중에 체제자 진관체제로 다시 돌려졌는데 이미 뒤진 제승방략이 제대로 다시 발동해다는건 개소리임
사실상 조선군은 와해된 상태였고 명군을 그토록 폄하하지만 명군 참전이후에 조선육군에 숨통이 트인건 사실이다. 적어도 평양성 전투까진 제대로된 역항르 해냈고. 명군이 조선에 들어와 온갖 패악질을 벌인것도 사실이지만 공도 있는건 사실이다. 명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조선 육군에 일본군을 모두 몰아낼 힘이 있었나?  정유년때 조선군은 3만이었고 육전은 사실상 명나라가 수행했다. 전선을 고착화시킨 책임이 명군에게 있는것도 사실이고 패악질을 자행한것도 사실이지만 평양성 수복으로 물꼬를트고 정유년 왜군의 공세를 직산에서 저지시킨것도 명군이지
               
굿잡스 14-05-04 18:31
   
님은 뭔가 편제에 대해 좀 이분법적으로 착각이 있는것 같군요.

과거 고구려시대에도 요동성에만 50만석 적재해두고

오골성이 몇만 단위가 주둔할 수 있을 만큼 각개 성방어를 곤고히하여 적이 쳐들어 올

때 발을 묶고 중앙군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서 성내외에서 합동 육박전을 벌였음.

(중세 고려도 다르지 않고)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사실 따로 무슨 제승방략체제니 진관체재니가 있는게 아니란

말임. 당시 임진왜란이라는게 조왜간에 총력전 양상이였고 (왜군도 정규병만이

아니라 상당수가 농민들도 참여했던 것처럼) 제승방략체재가 완전히 무너졌다기 보다

기존의 문제점을 통해 지방병력을 정비하는 속오군과 훈련도감을 통한 중앙 병력을

정비했다는 표현이 적절함. 님처럼 액면 그대로 제승방략체재가 무너져

완전히 와해되었다면

그에 따른 진관 체재로 속오군이니 하는 것 자체가 따로 정비하고 전력을 만들수

없었다는 소리임.(탄금대 이후 평양성 함락을 위한 조선군여력도 제승방략체제가

완전히 와해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개물고기 14-05-04 18:45
   
제승방략체제니 진관체제니 따로 있는게 아니라니? 두 체제가 전시에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인터넷에 좀 찾아보고라도 와라;; 내가 뒤에서도 말했지만 제승방략체제는 현대 한국군의 작계와 같은 메뉴얼화된 병력 동원 계획, 즉 작전계획이지 조선군 그 자체가 아니다. 너야말로 뭔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데, 제승방략이 붕괴되었다 해서 조선군이 붕괴되었다는게 아니다. 조선군의 병력 동원체계가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전을 맞으면서 한계를 여실히 들어냈기에 상비군 체제인 속오군, 훈련도감이 편성되고 과거의 거점 수비 위주인 진관체제를 약간 손본것으로 대체된다.
다시 말하자면 제승방략이 붕괴 = 조선군이 붕괴 이게 아니라는거다. 도대체 제승방략을 뭐라고 이해하는거냐?  실록에도 기존의 체제인 제승방략을 구체제인 진관체제로 교체하는 내용들이 실려있는데 니말대로 하면 사실상 차이가 없는 체제를 두고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해댄거냐? 진관과 제승방략은 아예 뿌리부터 다른 방어체계다
                    
개물고기 14-05-04 18:53
   
"오골성이 몇만 단위가 주둔할 수 있을 만큼 각개 성방어를 곤고히하여 적이 쳐들어 올
때 발을 묶고 중앙군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서 성내외에서 합동 육박전을 벌였음. "
이게 니가 말한 진관체제다. 각 지방의 거점이 제 역할을 하며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중앙군이 내려와 적을 격멸하는게 진관체제의 주 골자다. 웃기지도 않은 예시를 들어놓고 제승방략이니 진관체제가 있는게 아니라고 하는데 도대체 뭘보고 아니라고 판단하라는거임? 애초에 두 체제의 뿌리부터 다른게 진관체제는 그야말로 각 지방의 최소 단위인 진(鎭)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향토 방위체제이고 양인개병과 자영농을 바탕으로 운용되는 체제이고 제승방략으로 바뀐것도 향토방위중심에 각개격파당하기 딱좋은 진관체제에 한계를 느낀것도 있지만 당시 조선 농민층이 자영농에서 지주전호로 바뀌어버리고 진관체제를 먹여살릴 병역을 지는 보인의 숫자가 급감함에 따라 진을 유지할수가 없었기에 뿌리부터다른 제승방략으로 선회한건데 뭔 차이가 없어? 진관과 제승방략은 조선사회와 경제와도 연관이 있는 사회 변화이다.  군 운용 또한 독립된 작전권을 가진 진관과 다르게 제승방략은 분군법(分軍法) 운용에 의한 중앙집중, 야전중심으로 바뀌는데 퍽이나 똑같겠다
                         
굿잡스 14-05-04 19:28
   
개물고기 14-05-04 17:56  제승방략은 이미 한계를 노출해 임진년 중간에 붕괴되고 그랬기에 전란이후 속오군 체제로 변경된건데 이미 이일 신립 다 박살나고 제승방략 체제가 실질적으로 붕괴해 명군 참전전깢 파국을 맞았던건데 그게 건재해서 다시 발동했다니. 예토전생이라도 한모양? >>

개물고기 14-05-04 17:31  임진년을 거치며 붕괴한 제승방략이 점차 발동되었다고? 어디서 나오는 소리냐?

>>>


 참  이양반은 자기가 이렇게 처음에 적어 놓곤 난독증임?

1592년 4월 부산 상륙 이후 28일 탄금대 전투이후

1594년(선조 27) 류성룡이 속오군  건의

그사이에 제1차 진주성전투인 1592년 10월 진주 목사 김시민과 진주성을 지키

는 군대 4,000여 명이 3만여 대군의 왜군을 상대로 7일간의 격전 끝에 적을 격

퇴,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6월

평양성탈환 2차 전투(1593년 음력1월6일)

이런건 다 뭐임??  당신이야 말로 뭔가 대단히 착각을 하는데 신립의 탄금대

당시도 너무 시간이 급박해서 제대로 제승방략체제가 가동된게 아님.

그런데 이걸 두고 그냥 와해되었다??? <이건 와해가 아니라 이런 군사운용

편제방식에 분명한 약점이 드러났다고 말하는게 정확한 거지.>

뭔 소리인줄 알겠음?

류성룡이 다시 속오군 어쩌고 완비하기까지 임진발발 이후

점차 이런 제승방략체제는

시간이 걸렸을 뿐이지 각거점 지역에선 나름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가

정확한 해석일 것임(이리 말해줘도 대뇌에 인지 못하면 할 수없고)
                         
개물고기 14-05-05 00:23
   
제승 방략체제는 조선군의 전투시 '교리'를 말하는게 아니라 전쟁 초기 조선군의 동원을 메뉴얼화 하고 체계화한 '작계'를 말하는거임.
제승방략체제는 전쟁 발발시 분군법에 의해 나누어진 군대가 중앙집중화되어 올라오는 적군을 상대로 야전을 벌이는걸 상정한거지 조선군 전체의 전략 전술을 말하는게 아님 -_-
진짜 당신하고 나 사이에 계속해서 이렇게 헛소리도 틀어지는게 그거 때문임. 조선군 제승 방략체제의 끝은 임진왜란 전체와 궤를 같이 하는게 아니라, 이일과 신립과 용인에서 근왕군이 개발살날때 이미 그 체제는 깨진거임. 이후 패잔병이나 와해된군대가 전라도와 북방에서 분전한건 제승방략체제라는 교리에 의해 방어전을 펼친게 아니라 완전히 중앙, 야전군화되어 전선군으로서 기능을 한거지 제승방략을 들먹일게 전혀 아님. 제승방략은 현대 한국군으로 치면 예비군과 현역의 동원 과정을 아우르는 거국적 동원체계를 말하는거지 당신이 말하는 전투를 아우르는 군사 작계를 말하는게 아님
                         
개물고기 14-05-05 00:30
   
현대 한국군으로 설명하면,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켰을때 현역 군대의 동원과 예비군의 일제 소집, 전 후방 전시 동원체제로의 전환 여기까지가 조선시대의 제승방략임. 조선군의 전투와 전투 내용에 관해서는 진짜 상관이 없는거임. 제승방략을 무슨 조선시대 병법 교리 이런걸로 생각하나? 제승방략은 전시에 돌입했을때 병력이 어디서 와서 어디서 집결하고 누구의 명령을받고 물자는 어떻게 하며 체제는 어떻게 갖추는데에 대한 일련의 메뉴얼화된 작계일뿐임. 현대 한국군을 계속 예로 들자면 북한군의 기습 진공으로 한국군의 동원체계가 붕괴되고 헛점이 들어났다면 그 헛점을 새롭게 개선시키겠지. 제승방략에서 진관체제와 속오군으로 바뀐건 그 동원체계와 정규군 운용 과정을 재승방략체제의 헛점이 들어나 변경한거지 무슨 제승방략체제랑 조선군을 동일시하고 있어;;
앞에서도 말했지만 제승방략이 곧 조선군이 아니다. 조선군은 일련의 초기 방어과정이 무너지고 나서도 분전했고 국토를 지켰다. 누가 그걸 부정하냐? 근데 니가 말을 못알아 먹고 있잖아. 아니, 애초에 지식이 없었구만. 제승방략은 그냥 동원 체계일뿐인데 조선군이 분전했던걸 예로들면서 제승방략이 잘돌아가고 있다고 하니깐 내가 반박을 할수 밖에 없지않나?
                         
개물고기 14-05-05 00:41
   
"우리는 해군및 육군에서 다양한 첨단 화약화력무기 및 점차 발동된 제승방략체제와 민관합심으로 전력을 갖추면서 이후 남부로 기어 내려와 수비로 전환한 " 내가 반박한건 줄곧 이거임. 당신은 지금 조선의 제승방략체제가 건제해 계속해서 유지되었다고 판단하고 말을 하는데 내가 반박하는건 그게 아니라는거다. 제승방략체계, 일련의 동원과정은 무너졌고 정유년만 해도 동원체계가 아예 바뀌어버린다. 제승방략은 각 지역의 군사가 일련과정을 거치며 집결하는 정교한 시스템이다. 신립이 제대로 병력이 갖추기 전에 적을 맞았다 하는데 병력과 물자는 제시간에 제대로 도착했다. 전 국토가 유린당한 상황에서 평시에서 전시로 전환되는걸 상정한 제승방략 작께가 계속 유지되면서 제 기능을 했을거 같나
?? 몰라서 묻는 것임??? 그럼 님은 조선은 이후 어떻게 왜구와 싸웠데요??
평양성,행주, 진주대첩이고 경주성 탈환 울산 전투고..뭔 도깨비들이 한 것임?" 여기서도 당신이 말하는게 들어나잖아. 조선군과 제승방략을 무슨 같은 궤로 두고 설명을 하는건데 초기 작전계획인 제승방략은 실패한거야. 제승방략체제대로 움직인 이일과 신립이 모두 패퇴했고 후방으로 밀려나 방어전으로 바뀌었는데 그 방어전이 제승방략 체제로 운용된다고 할수 있나? 다시 말하지만 제승방략은 초기 방어, 병력 및 물자동원 작계고 평양성까지 밀렸을때 이미 그 기능은 상실했다. 당신은 마치 조선군이 후방으로 밀렸을때 후방지역에서도 제승방략체제로 병력 충원이 운용되었다고 하는데 그 근거가있나? 이미 작계는 휴지조각이되서 조선 중앙에서 내려보낸 병력과 전라의 근왕군은 전부 와해되고 흩어져 밀려났는데 제승방략 체제가 잘 돌아가고 있었다는건 순전히 당신 추측아닌가?
                         
개물고기 14-05-05 00:49
   
고구려 예시로 들면서 말하는거 부터가 잘못되었다. 조일전쟁은 당신이 말하는대로 총력전이 맞아. 전쟁 중반부터 진관이든 제승방략이든 총력전 양상으로 흘러간것도 맞다. 근데 당신말대로 그렇게 되었기에 제승방략 체제가 무력화된거다. 제승방략과 진관체제 모두 전쟁초기 조선군의 대응과정을 망라하고 있는데 당연히 전쟁 초기 전선이 한달만에 서울까지 밀리면서 동원체제가 붕괴되었는데 제승방략이니 하는건 한성 내줄때 이미 망한거야. 그걸 두고 조선이 분전할때 버텼으니 제승방략또한 잘 버텼다고 하는데 이건 비약임. 고구려 이야기에서도 들어나고 완전히 상이한 제승방략과 진관체제를 혼돈하는것도 당신이 그 두 체제를 조선군 전쟁 전 과정에서 들어나는 작전교리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님?
                         
개물고기 14-05-05 00:52
   
진짜 현대 주류 기성 사학에서 인정된 임진왜란때의 제승방략체제의 붕괴를 여기서 부정당하네.. 이렇게 말해도 애초에 당신이나 나하고 보는 시각이 다르기에 또 다른 소리 나올수 밖에 없다. 진짜 잘 들어오지도 않은 가생이에 로그인도 잘 안하는데 뭐하는꼴인지 모르겠네 당신이 이겼다고 정신승리를 하든 나를 욕하던 소귀에 경읽기였다고 생각하든 맘대로 생각하쇼
          
개물고기 14-05-04 18:22
   
뭔가 잘못아는건지 착각하는건지는 모르겠는데 제승방략체제는 병력 동원체계일 뿐이지 조선군 그 자체가 아니다. 병력 동원 체계에 한계를 느끼고 계획을 바꾼거 뿐인데 조선군과 동일시하고 있어
          
개물고기 14-05-04 18:29
   
용인에서 와해된 근왕군이 재집결해서 싸운게 제승방략이라고? 무슨 제승방략체제가 흩어졌다 모여싸우는 작전교리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웃음만 나온다 ㅋㅋㅋㅋㅋㅋ 제승방략체제가 뭔지는 정확하게 아니?
               
굿잡스 14-05-04 18:38
   
?? 개물 어디서 반말 찍찍임?(이양반 대화의 기본도 안되남?)

당신 말맞다나 제승방략체제란 병력 동원 체계지 ㅋㅋ 그걸 알면서 뭔소리 하시남?

여러 고을 수령이 함께 거점에 모이고 다시 중앙쪽에서 지휘관이 와야하고.. 단순히

병력 규모의 운용 문제만이 아니라 속도적으로 여기 저기 들쑤시고 진격하던 왜구에게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문제들이 발생하니 그렇지.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이고 기록만

봐도 초기보다 점차 군의 규모가 불어나는게 명확히 보이는데 무슨 어쩌고 허접

말장난 계속쳐하시남.
               
불타는황군 14-05-04 18:48
   
정확히 아네  제승방략체제는 병력 동원체계일 뿐이지~
제승방략으로 모았던부대가 와해됬지만
지휘관이 다시 규합해서 성공적으로 대응하거잔아~ㅋ
체제 잧의 헛점이 있을지언정 그걸 활요해서 잘써먹었으면 된거지
뭘바라는거야대체...ㅋ
                    
개물고기 14-05-04 18:53
   
전쟁중에 붕괴된 제승방략 바지끄랭이를 붙잡고 제대로 운용되었다고 고집하는게 누구냐?
                    
불타는황군 14-05-04 19:18
   
진짜 바본가?......제승방략이 허점많고 불안정한 체제인건 맛지만
최소한 그 체계를 활요해 전라도 방어선을 구축하고 성공했으니
제승바략 자체가 완전 쓸모없었더건 아니라는데 뭔 헛소리야.....

가만 보면 알면서 인정못하고 우기는 사람은 많이보는데....
댁은 정말 이해를 못하는거같아......ㄷㄷ;
                         
개물고기 14-05-05 00:25
   
진짜 제승 방략에 대해 모르니깐 이런 소리를 계속하지. 제승방략은 현대로 치면 현역의 동원과 예비군을 동원하는 동원 작계일 뿐이다. 제승방략의 역할은 거기까지 뿐이고 조선군의 전투 교리를 설명하는게 아니야 진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오..
                         
불타는황군 14-05-05 01:04
   
누가 교리를 설명한다고했나? 나는 그런 비슷한말도 한적없는데
대체 뭔소리를 하는거야...아주 상상의 나래를 펼치세요~ 븅신~

그래 니말대로 제승방략은 군사동원 하는거야~
내말도 그거거든 계속 헛소리할래?

니말은 제승방략이 완전히 실패한 체제였고
전황에 아무런 도움도 안됐다는거잔아

근데 용인전투에서 징집됐던 민간인이 패해서 부대가 와해됬지만 
그인원을 다시 규합하고 전열을 정비해서 결국 전라도 방엉 성공했다가
그렇게 어렵니?
그인원이 어떻게 모였고 어떻게 방어에 성공한건데? 응? 땅에서 자라났냐?ㅋ
결국 최초 제승방략으로 징집했던 사람들인거잔아...
그러니 제승방량이 전혀 쓸모없었던건 아니었단거잔아~
 
뭐 전라도를 방어한 부대가 고도로 훈련된 조선 최정예라고 우기고 싶은거냐?ㅋ

전라도 전선 방어가 임진왜란에서 어떤의미를 가지는건지 감이안잡혀? 응?
 
무식하면 성격이라도 좋던가 멍청아~

지 상상과 착각을 거들먹거리면서 훈계하고 가르치려들다 안통하니까
이제는 남이 하지도않은말을 했다고 벅벅 우겨대는 꼬라지가 한심하구나~ㅋ
     
개물고기 14-05-04 17:09
   
조명연합군의 공세 작계가 사로병진 작전으로 변경된것도 울산성에 병력을 몰아 붙이자 일본군 또한 병력이 집결되는 상황을 맞는 바람에 작전에 실패한게 원인임.
애초에 정유재란때는 일본군이 거진 철군해서 남주에 6만여명 밖에 남아있지도 않았다. 곧 죽을 히데요시는 제3차 원정군으로 10만명 이상을 더 준비하고 있었지
          
굿잡스 14-05-04 17:18
   
이건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님의 내용을 정독하시길.

(우리 자체내의 기록에서는 그렇지만 왜구들 입장에서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받은)

윗그림이나 기록처럼 마침 뒷늦게 구원병이 와서 어찌 어찌 함락이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왜군은 성내에서 엄청난 고초를 겪으면서 내부적으로 사기가 바닥을 기게 됩니다.

이를 통해 남부로 내려와 몰린 수세에서 더욱 해안가로 후퇴하면서 결정적으로

북진보다는 자체내에서 더이상의 전쟁 수행은 못하게 한 종결의 전환점이 된 거죠.


그리고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려던 왜구와 구원병까지 쓸어버리면서 실질적 임진왜란의

종결을 지은게 노량해전임  이건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님의 내용을 정독하시길.

(우리 자체내의 기록에서는 그렇지만 왜구들 입장에서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받은)

윗그림이나 기록처럼 마침 뒷늦게 구원병이 와서 어찌 어찌 함락이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왜군은 성내에서 엄청난 고초를 겪으면서 내부적으로 사기가 바닥을 기게 됩니다.

이를 통해 남부로 내려와 몰린 수세에서 더욱 해안가로 후퇴하면서 결정적으로

북진보다는 자체내에서 더이상의 전쟁 수행은 못하게 한 종결의 전환점이 된 거죠.


그리고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려던 왜구와 구원병까지 쓸어버리면서 실질적 임진왜란의

종결을 지은게 노량해전임
               
개물고기 14-05-04 17:23
   
정유재란의 종결 과정에 대한 해석은 조선이 승리한 전쟁인가, 아니면 허울뿐인 승리였나 일본으로선 뭘 얻었고 뭘 잃었나, 이렇게 따져갈수 밖에 없기에 시선차이가 생길수 밖에 없음. 나도 여러가지로 생각하는게 있지만 이런 주제로 토론을 벌여봤자 분란만 커지기에 이만 생략..
                    
굿잡스 14-05-04 17:33
   
정유재란의 종결 과정에 대한 해석은 조선이 승리한 전쟁인가, 아니면 허울뿐인 승리였나 일본으로선 뭘 얻었고 뭘 잃었나,>??

지금의 논점은 이게 아닙니다만 ㅋ

당연히 전황 자체가 조선내지에 이루어지다 보니

단순히 인명사상뿐 아니라 국토의 황폐화

등으로 조선은 이후 영정조 이전까지 거의 100여년을 전란의 후유증에 시달렸고

이런 과정에서 대동법의 시행 및 실학사상의 대두 배경이 된 것이고.


왜국은 뭐 아는 도요토미세력쪽이 와해되면서 도쿠가와로 정치세력이 바뀌는

일대 전환점이 된 사건이고.(서토도 명청 교체기)


이런걸 말하는게 아니죠 임진왜란의 실질적 엄연한 전개 양상과

실체들임 . 단순히 왜구들이 초기 대규모 기습전으로 파죽지세로 1달여동안

무서운 전과를 올렸다고 조왜간의 7여년의 전쟁이 그런 양상으로 왜구가 압도적

우위를 보이면서 전개되지도 전혀~~ 안았을 뿐이고


저 위에 무식한 종자처럼 그런 압도적 왜구전력으로 승승장구했다면

7여년의 기간도 왜구들이 수세에 몰리다 노량해전에도 마지막까지

그렇게 개털리면서 도주할 일도 없었을 것임은 두말이 필요없는 것 아님?
                         
개물고기 14-05-04 18:05
   
정유재란 당시 전개과정좀 제대로 보고와라. 협상 결렬되고 정유재란 시작하자마자 명군은 남원, 전주, 충주 등에 분산돼 있다가 각개격파 당하거나 도망쳤다. 조선군은 각개격파되어 산성에 고립되거나 흩어졌고 오히려 진격은 임진왜란보다 수월했다.. 협상직전 조선군은 13만으로 불어있었지만 협상와중에 3만으로 줄고 육군의 대부분을 명군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명군의 직산전투와 충무공의 명량해전이 정유재란 당시의 일본군의 진격을 멈춰세우고 전선을 고착화시켰을 뿐이고 일본군이 개털리면서 도주했다는건 개소리다. 울산성전투까지 고착화되어있었고 울산성 공략도 결국 실패,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있다 히데요시의 병사로 전쟁이 급격하게 종결된거 뿐이다. 일본군이 뚜렷한 패배를 거둬 후퇴한게 아니다. 히데요시가 죽지 않았다면 제 3진 15만여명의 병력이 3차침공을 벌였을거다
                         
굿잡스 14-05-04 18:53
   
이양반은 아이디가 개물이라고 입도 캐걸레 물고 단니시남  쯧.

그러니까 이양반아 왜 조선군이 그렇게 대규모로 점차 불어났는지

그리고 이후 왜 줄어들 수 밖에 없이 육군에서 명에 의존하게 되면서

지리한 양상으로 가게 되었는지

당신 머리에도 대뇌세포가 있으면 생각좀 하길바람. 쯧.
                         
개물고기 14-05-04 18:56
   
내 글은 당신의 "그런 압도적 왜구전력으로 승승장구했다면 7여년의 기간도 왜구들이 수세에 몰리다 노량해전에도 마지막까지 그렇게 개털리면서 도주할 일도 없었을 것임은 두말이 필요없는 것 아님?" 에 대한 반박인데 갑자기 웬 조선군의 규모타령임? 어떻게 생각하라고? 반박을 할거면 내말에 반박을해 쉐도복싱하지 말고
                         
불타는황군 14-05-04 19:08
   
에지간히좀 하시죠...이해시키라고 떼쓰지말고 위에 글들이라도 좀 보고오던가...
꼭 12살짜리 여자애가 귀막고 눈감고 자기 할말만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싸우는거 보는느낌이네요...
                    
불타는황군 14-05-04 17:42
   
이거 뭐... 좀더있으면 인간에게 전쟁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이라도 쓰실기세네요~ㅋ
개물고기 14-05-04 17:03
   
이괄의 난때 이괄이 가장 신뢰하던 부대가 임진년,정유년때 항복한 항왜무리였고 반대로 그 이괄의 난에 큰 공을 세운 장수중에 하나도 항왜 김충선이었지. 당시 이괄의 난때 인조가 피난가고 한양이 반란군에 함락되고 지랄할때 선봉의 항왜부대가 하도 강렬하니깐 동래 왜관에 일본인들을 빌려올려고도 했었음. 실록에 있다 찾아봐라.
한류의힘 14-05-04 18:07
   
개물고기,,,, 굿잡스,,, 관계가 사제지간임 ??????...

호통 ~ ~ ~,,,,,,,,,,,,,
굽신 ~ 굽신 ~............
     
굿잡스 14-05-04 18:49
   
ㅋㅋ 하긴 어글로형들은 본인들이 뭔 개념이 없는지 모르기 하더군.
     
불타는황군 14-05-04 18:52
   
응? 내용 이해는하니?
          
한류의힘 14-05-04 21:33
   
ㅋㅋ,, 시건방 떨기는 ~ ~
               
불타는황군 14-05-05 00:43
   
염병~,ㅋ
     
개물고기 14-05-04 18:54
   
나도 완벽히 아는게 아니라 닥치고 있는건데 진짜 얼치기로 역사 훓은 놈들이 인터넷에서 어줍잖은 지식으로 글 싸대는거 존나 역겹다
          
굿잡스 14-05-04 18:56
   
개물>본인 저급한 수준 나오시남 (한심한 여기서 논점이 뭔지  그리고 본인이 적어 놓고도

제승방락체제가 뭔지 중구반방에 )
               
개물고기 14-05-04 18:59
   
중구난방이라 생각되면 차례대로 반박근거를 들어 나를 논파해라. 내 생각이 틀렸다는걸 알면 깨끗히 물러남 오케이?
          
불타는황군 14-05-04 19:01
   
그레게나 말이에요~ 제대로된 사료를 바탕으로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상상으로 부풀린 양념을 가미해서 정신자위하다
저돌적이고 과격한 언사로 가르치고 훈계하듯이 싸지르는 인간 정말 역겹죠~ㅋ

근데 그런인간들 자세히보면 자기가한말을 스스로 부정하고
이해못하고 상대에게 고대로 뒤집어씌우곤하죠~ㅋ
               
개물고기 14-05-04 19:05
   
반박도 못하는 마당에 내 의견을 상상으로 밀어부쳐 봤자 제살깎아 먹기 아닌가? 결국 제대로된 반박은 못하고 이렇게 상대방을 자위한다고 밀어붙이지. 사실상 근거는 못대고 정신승리하며 자위하는건 그쪽인데도
                    
불타는황군 14-05-04 19:09
   
저기요 이양반아 에지간히좀 하시죠...
이해시키라고 떼쓰지말고 위에 글들이라도 좀 보고오던가...

꼭 12살짜리 여자애가 귀막고 눈감고
자기 할말만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싸우는거 보는느낌이네요...
                         
개물고기 14-05-04 19:18
   
위의 글은 당신네들 글이고(대충 읽어보다 중간중간 헛소리에 그냥 내렸지만) 여기서 촉발된 논쟁은 새롭게 밑에서 전개된 제승방략 체제 관련 논쟁인데, 위에 것 읽어서 뭐함? 떼쓴다고? 도대체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논제를 다밝혔는데 거기에 대한 반박은 없고 12살짜리애가 귀막고 눈감고 자기 할말만 한다고 소리지른다라, 내가 자기 할말만 하는것 처럼 보이는건 그쪽이 반박의견을 내세우지 못하니깐 내 글이 부각되는거고. 억지는 누가 부리는거임? 논쟁할 여지는 이제 없어서 감정론이나 들먹이는데 그 말을 왜 당신한테 들어야되는지 모르겠네 ㅋ
                         
불타는황군 14-05-04 19:38
   
그건 마찬가진데 이해를 못하는거까진 좋은데
자신이 부족한 이해력을 탓해야지 왜 남탓을하나 이사람아~

제승방략이 허점많고 불안정한 체제인건 맛지만
최소한 그 체계를 활요해 전라도 방어선을 구축하고 성공했으니
제승방략 자체가 완전 쓸모없었더건 아니었고

후에 일부 의병들도 제승방략의 기준에 의해 정규군화 됐으니
나름 잘써먹은거 아니냐는게

이게..... 그렇게도 이해안가나? 이해시켜달라니 뭐 더이상 어떻게?ㅋ
개물고기 14-05-04 19:08
   
상상으로 부풀린 양념을 가미한 자위라고 판단한걸 논파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판단한 그 상대보다 더 형편없다는걸 입증하는 꼴이 아닌가? ㅋㅋㅋㅋ 진짜 어린애들 데리고 손가락만 아프게 뭐 했는지 모르겠다. 가서 역사 공부나 좀 더 하고 와라
-------------------
운영원칙 3항 상습위반 블럭
     
불타는황군 14-05-04 19:10
   
너나 하세요~ㅋ
처음에 댁이 말했지 위에 널부러진 리플들은 안본다고~ 그거부터 정독해~ 에휴.....

가만 보면 알면서 인정못하고 우기는 사람은 많이보는데....
댁은 정말 이해를 못하는거같아......ㄷㄷ;
     
굿잡스 14-05-04 19:33
   
이 개물이라는 양반은

제승방략체제의 허점이 드러났다고 말해야지

마치 조선군이 와해되었다는 식으로 제승방략체재가 와해?? 어쩌고 허접소리 계속 쳐하는

도대체 그럼 1594년(선조 27) 류성룡이 속오군을 건의하기 전에

조선의 3대 대첩중 행주대첩이나 진주대첩 그리고 평양성 탈환등은 어떻게 해서 군사편제가

운용되어 작동하고 방어했담???? 참나. 진짜 본인 뭔수준 팍팍 드러내는 쯧.(이리 말해줘도

반말 찍찍에 욕짓거리로 말장난이나 하겠지만)
          
불타는황군 14-05-04 19:41
   
그러게요 제승방략의 와해 = 조선군의 와해 란식으로 말하면서
그래도 불안정한 체제지만 나름대로 잘써먹은거 아니냐는 의견을 가지고
혼자 흥분해서 지랄발광하네요~ ㅋ
설설설설설 14-05-04 19:33
   
와 댓글 장난아니네;;;; 하하하하한한한하한하나나한한
구리 14-05-04 19:40
   
미개한 쪽빠리들은 칼싸움 잘하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군요. 천박한 것인데. 미개한쪽빠리들과 달리 조선은 생명을 가벼이 여기지 않기 때문에 칼싸움이라든가 하는 천박한 짓은 상대적으로 덜 발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겠지요. 다만 칼질보다 훨씬 세련되고 교양있는 우수한 활솜씨라든가 포라든가 이런 것들은 확실히 발달했기 때문에 쪽빠리들이 결국 패배한 것입니다.
     
helfenmir 14-05-05 19:40
   
필요하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이지 천박하냐 아니냐의 문제로 따질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다 사람잡는 기술에 세련이나 교양찾는게 우스운 일이죠.
그런 식이면 기습이나 모략도 천박하다고 매도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전국시대 일본군역시 활과 총에의한 사상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당연히 장수들도 활과 총의 중요성을 알고 적극적으로 도입했지요. 야리 아시가루의 비율이 뎃포아시가루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건 단지 뎃포가 비싸고 만들기 어려워 생기는 보급의 문제에서 비롯한겁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검술이 크게 융성하는 건 전국시대와 임란이 끝나고 난 후인 에도시대입니다.
한가지 더 말하자면 철저하게 원거리전을 지향하는 전투교리를 가진 조선군이 그래서 초반에 얼마나 고전했습니까. 몽골군도 충격전술에 사용하는 중기병을 운용했고 점령지에서 나오는 보병을 바탕으로 한 단병접전으로 몰고가는 전술도 사용했습니다. 그런 유연성이 그들을 한 시대의 절대강자로 만들었습니다. 극단적인 전투교리는 결국 승리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봅시다.
열등왜구 14-05-04 19:58
   
임진왜란은 왜군이 지고 패퇴한 전쟁이라는 면에서 일본에서는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한답니다. '도요토미의 조선출병' 일본교과서에는 이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덤벨스윙 14-05-04 20:10
   
한류의힘 저 사람 친일파인가요?
솔로윙픽시 14-05-04 20:29
   
아 진짜 음슴체에 반말 지껄이는 것들이 왜이리 많아
동전한잎 14-05-04 23:34
   
댓글수 후덜덜하네
반달곰 14-05-04 23:56
   
댓글무섭다....
임진강 14-05-05 01:55
   
식민사학 기어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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