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방송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 현지에서 녹음방송을 통해 자신이 마치 서울
에 체류 중인 것처럼 위장해 서울시민을 포함한 국민들에게 안심하라
고 연설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
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으며, 일선
에서도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
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나 리승만은..."
이 방송을 들은 일부 서울시민은 이 대통령이 경무대에 머물고 있는
줄 알고 피란길을 되돌아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전쟁 발발 66시간
만에 나온 이승만 대통령의 첫 육성은 국민을 속였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1시 무렵,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인민군 탱크
가 서울 미아리 방어선을 막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급보를 받
자, 그는 후퇴 중인 부하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보다 일단 인민군의
남하를 한강 이북에서 저지해야겠다는 판단이 앞섰다. 그는 즉시 공
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 명령을 내렸다.
한강교 곳곳에 미리 폭약을 설치해둔 채 발파 명령을 기다리던 공병들
은 이 명령이 떨어지자 즉각 폭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한강대교를
비롯한 3개 철교의 일부 교각이 큰 폭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한강교 폭파 시각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무렵이었다. 사
전 예고 없는 한강교 폭파로 일대의 숱한 피란민들은 그 자리에서 즉
사하거나 수장 또는 큰 부상을 입었다. 한강교 폭파로 서울시민들은
'독 안의 쥐처럼' 꼼짝할 수 없게 됐다.
1950년 7월 1일 새벽 3시, 대전에 머물던 이승만 대통령은 또다시 자
신의 신변을 불안해 했다. 그래서 소수의 경호요원과 비서를 대동하고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승용차를 타고 다시 대전을 빠져나갔
다. 그리고는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행로는 대전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통상적 경로가 아
니었다. 그의 승용차는 전북 이리로, 거기서 열차로 타고 목포로 갔다.
목포항에서 소해정을 타고 무려 19시간을 항해한 끝에 부산으로 갔
다.
7월 2일 오전에 부산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은 그때까지도 한강방어
선이 뚫리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그제야 "내가 잘못 판단했
어, 이렇게 빨리 부산으로 오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라고 말한 뒤, 7월
9일 대구로 갔다. 이후 8월 18일에는 대구에서 다시 부산으로 갔다.
그해 9월 28일 유엔군의 서울수복으로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정부는
적치하 시민들을 부역, 친공, 북한정권에 협력의 혐의로 처벌했다. 한
강을 용케 건넜던 '도강파'들은 개선장군처럼 당당했다.
이 대통령의 육성 방송을 믿고 서울에 남은 '잔류파'들은 '빨갱이' '불
순분자' '부역자'라는 의혹을 받으며 검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해 10월
4일부터 11월 13일까지 5만5000여 명의 부역자를 검거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박명림 지음 나남출판사 발간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임영태 지음 들녘 발간 <대한민국사> 강준만 지음 <한국현대사산책> 등 그밖에 문헌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