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잔치는 끝났다
2월 25일 / 조선일보
이제 실크 두루마기를 벗고 민망한 분칠도 지울 때가 됐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누가 뭐래도 전쟁의 위기가 어느 때보다 고조되는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점에서 우리는 성숙된 철학과 정체성을 지닌 대통령을 원한다.
나머지 1300만명의 절대적 박탈감, 그 깊은 상처를 덧찌르며 지난 두 달여간 새 대통령과 대통령을 만든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TV 또는 매체를 통해 온갖 수사적 표현의 남발과 열정 혹은 솔직함으로 미화시키려는 미숙함과, 자신들 패거리 이외의 모든 사람과 매체를 적으로 간주해 국민들을 단순 이분법해서 분열시키는 비논리적·일방적 언어의 테러를 보면서 우리에게 과연 내일이 있을지 암담해질 뿐이다.
그래도 그때는 어디까지나 당선자 시절이었다. 봐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연습해보는 자리가 결코 아니다. 새 대통령은 특히 소외계층에 신경을 쓰겠다고 했다. 대선 패배의 상실감에서 상처를 깊이 느끼는 절반의 국민들 역시 아직은 정신적 소외계층이다. 15년 전의 ‘땡전(全) 뉴스’를 상기시키며 떠들썩하게 전국을 도는 당선자의 웃음에 승자로서 나머지 1300만명에 대한 아량과 위로와 배려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TV를 껐다고 한다.
자신들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그외에는 잔인하게 대할 적(敵)으로 몰아가는 단순분리법은 유치한 아이들의 전쟁놀이 논리다. 일국의 대통령이나 정권이 취할 태도가 절대 아니다. 비록 50%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도, 그 50%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나머지 50%의 대통령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 대통령에게 충정으로 제언한다. 인사청탁하면 본전이 아니라 패가망신하게 된다고 했다. 대통령의 말이 그냥 가벼운 말로 끝나지 않고 말 한마디가 곧 사려깊은 고뇌의 결론이며, 고고한 철학이라는 것을 이 기회에 꼭 보여주었으면 한다. 자신에게 먼저 엄격한, 신뢰할 수 있는 대통령을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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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취임에 맞춰)
발행일 : 2003.02.25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03&M=02&D=25&ID=0302253101
10년 전 조선일보 사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