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은 제가 발제한것으로부터 시작된 논쟁입니다
제본문에선 분명히 '사태'로 보고있습니다. 왜 폭동이 그들입에서 나오는진 모르겠네요.
쭉 나열해보겠습니다.
민주화운동이라기엔 그 목적이 불분명했다.
이유? 특정 정치인 석방을 연호하며 거리를 돌아다니며 (궁극적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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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이라기엔 그 목적이 불분명했다.
분명히 이렇게 말함
이 사람은 자기가 한 말 다음에 꼭 자기 말을 스스로 뒤집는
괴이한 짓을 반드시 해 도저히 이해가 안 됨
그 목적이 불분명했다고 분명히 자기 입으로 말한 바로 뒤에
정치인 석방을 연호하며 그것이 궁극적 이유라고
쓰며 5.18민주화운동이 궁극적 목적이 김대중 석방을 위한 목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음 바로 뒤에 말하고 있음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자기 말 뒤에 스스로 자기가 한 말을 뒤집는 멍청한 자
하지만 더 이해가 안되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비논리적 인간에게 동조하는
더 멍청하고 한심해 보이는 인간들
그럼 정말 이 멍청한 인간이 말한 것 처럼
5.18 민주화 운동이 목적이 김대중 석방이였나?
아님
절대 아님
1979년
8월 20일
천주교 정평 김수환 추기경 유신철폐, 독재타도 외치며 서울시경까지 시위행진
9월 4일
대구 경북대 영남대생들 유신철폐 요구 선언문 낭독 후 학생 다수 구속
9월 20일
서울대생 1000여명 학원 민주화선언 낭독한 뒤 기동경찰과 투석진
9월 26일
고려대 이화여대 연대생등 수천 명 유신철폐 외치며 데메
10월 4일
국회 신민당의원 따돌리고 본회의장 아닌 146호실에서
민주공화당의원 159명들만으로 김영삼 총재 징계 전격 처리,
30년 의정 사상 최초의 의원제명 사건 발생
10월 16일
부마항쟁 시작, 부산대생 5000여 명 유신철폐 독재타도 외치며 시내 진출
10월 18일
부산대 동아대생 시민과 합세 대대적 시위, 정부 부산에 비상계엄령 선포
마산에서 경남대 마산대 등 계엄령 반대 외치며 데모, 공화당사 파괴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격으로 박정희 대통령 피살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
12월 12일
12.12 군사 쿠데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정승화 계엄사령관 강제 연행 총격전
1980
4월 3일
서울대생 제반 학내 자율 활동허용 요구하며 농성 돌입
4월 21일
사북사태, 강원도 사북광업소 광부 7백 여명 경찰과 충돌
4월 24일
서울지역 14개 대학교수 3백 61명 학원사태관련 성명 발표
5월 4일
국민연합 성명발표, 학원민주화와 계엄령 해제 요구
5월 14일
전국 27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가두시위를 결의
5월 15일
시울시내 30개 대학 7만 여명 밤늦게까지 도심서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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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대 학생처장 이수성. 전 총리도 참석
이수성 전 총리의 인터뷰내용 중
“당시 광화문과 효창운동장 일대에 군부대가 대기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어요
급히 서울역으로 가서 학생 대표들 20여 명하고 버스 안에서 회의를 했죠
청와대로 간다 안 간다 한창 논쟁을 벌이는데 내가 나서서 학생들을 설득했어요
수많은 학생들이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사적으로 청와대 행을 말렸죠.”
학생 대표들은 그의 의견을 수용해 일단 해산을 결정
이것이 ‘서울역 회군’ 사건
그런데 문제는 며칠 뒤 터짐.
이수성 보안사로 끌려감
이유는 시위학생들에게 동정적이라는 것.
“시위를 마친 수천 명의 학생들이 비를 맞으면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학생들에게 밥 먹이라고 학교 식당에 지시했습니다. 쌀이 모자라 라면까지 끓였습니다.
이게 당시 신군부의 눈 밖에 났나 봅니다. 빨갱이 놈들에게 밥 먹이는게 말이 되냐고...
결국 보안사로 끌려갔죠. 그런데 조사내용이 황당했습니다.
김대중한테 돈 받아서 학생데모 지원했다고 시인하라는 겁니다.
며칠이 지났을까, 조사관 한 사람이 오더니
‘내일 신문에 당신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기사가 나갈 것’이라며
‘우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냥 인정해라’고 회유 협박하는 겁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 한가지, 차라리 xx하기로 결심했죠
안경을 깨 동맥을 자를 작정이었습니다.
2003년 6월 인터뷰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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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7일
신군부 전국에 계엄령을 실시
전국 55개 대 학생대표 95명, 전국 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 중 연행
당시 국민연합 공동의장이던 김대중과 그 지지세력 24명을 내란음모나 국가보안법,
계엄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
5월 18일
09시 40분
5월 14일에서 16일까지 평화로운 민족민주화성회에서 광주학생과 시민들
비상계엄이 확대되면 도청 앞 분수대에서 모이자고 약속
이 약속을 기억한 전남대 학생들이 도서관으로 향하다 광주에 진주한 7공수부대와 접전
10시00분
학생들이 “계엄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
10시 15분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10시 20분
“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
15시 40분
유동 3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무자비한 진압작전 감행
19시 02분
계엄사령부, 광주지방 통행금지 시간 저녁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
보시다싶이 5월 18일 이전부터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이 같은 구호 같은 목적을 가지고
시위를 하고 참석했음
김수성 전 총리를 빨갱이로 몰 생각이 없다면
신군부가 이미 광주에서 무자비한 진압을 하고 그 죄를
김대중에게 내란죄라는 명목으로 뒤집어 씌우기 위한 공작을 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박정희가 암살당한 이후, 참다운 민주주의를 실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환호
그러나 전두환을 대표로 한 신군부 세력이 다시 유신독재체제를 연장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킴
국민들은 이에 항의하며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
그러자 신군부는 계엄령을 선포
계엄령 선포와 함께 다른 지역에서의 시위는 잦아들었지만,
광주지역에서는 시위가 계속됨
신군부는 광주를 외부와 완전히 고립시킴
폭도들을 진압한다는 미명 하에 광주시민들을 학살
더불어 정적인 김대중 내란죄를 씌우고
그 이전부터 작정을 하고 공작을 한
광주의 학생들을 뒤에서 조정해 폭동을 일으켰다 뒤집어 씌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