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이것이 옳은가?
이것이 옳다.
이것이 정말 옳은가?
이것이 정말 옳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이것이 옳은 것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추궁하면서 글쓴이가 우선 찾고자 했던 것은 "어떠한 이유" 이것 이다.
극단적인 사례들을 통하여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명백한 사례들을 통하여 그것이 옳다면 어떠한 이유로 그것이 옳은 것인가를 먼저 찾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그 어떠한 이유가 명백히 밝혀진다면 그 어떠한 이유가 도출되는 과정을 살피고 그 원리를 인간에게 적용시켜보고자 한다.
그 어떠한 이유가 도출되는 원리. 그 인과관계를 먼저 찾아서 그 원리를 인간에게 적용시켜 보고자 하는 것이다.
경찰에게 있어서 옳은 것이란 도둑을 잡는 것이다.
이것이 옳은가?
옳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경찰에게 있어서 정의가 도둑을 잡는 것이 되는 것인가?
경찰이라는 신분을 만든 이들의 요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경찰이라는 직업을 만들었다면
국민들이 경찰이라는 직업을 만든 이유는 치안활동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만들어진 경찰이란 신분을 가진 이에게 있어서 옳은 것이란 경찰이라는 신분을 만든 국민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 된다.
즉
만든 존재는 어떠한 필요에 의해 무언가를 만든 것이고
만들어진 존재는 그 필요에 쓰여지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므로
만들어진 것에 있어서 옳은 것이란 만든 존재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한번 더 살펴보자.
도끼는 왜 만드는 것인가?
도끼는 나무를 베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도끼에게 있어서 옳은 것이란 무엇인가?
도끼에게 있어서 옳은 것이란 나무를 베기 위함에 쓰여지는 것에 있다.
도끼를 밭을 가는데 쓰는 것은 옳지 않다.
도끼에 있어서 가장 옳은 것은 나무를 베는데 쓰여지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그 어떠한 이유가 도출되는 원리를 찾을 수 있었고 수 많은 사례를 통하여 이 원리에 보편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 원리란
창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에 있어서
창조물이 옳음을 행하기 위해서는
창조주가 창조물을 창조한 이유에 부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점이 있다.
인조물의 경우에는
만든이와 만들어 진것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힐 수 있다.
즉 만든이가 어떠한 이유에서 그것을 만들었는 지를 명확하게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물이나 자연의 요구와 인간의 요구가 혼합하여 만들어 진 혼합물 같은 경우에는 창조주의 요구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주제의 핵심인 인간은 자연물로 볼 수도 있고 어떠한 경우에는 혼합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우리가 어떠한 물건등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른다면 그 물건등을 만든 이에게 왜 이 물건등을 만들었는가를 물어봄으로써 그 물건등의 올바른 쓰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찮가지로
인간이라는 자연물이 스스로가 어떻게 쓰여지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모른다면 인간을 만든 존재에게 왜 인간을 만들었는가를 물어봄으로서 인간에게 있어서의 옳음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포유류란 신분을 가진 생명체 또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신분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서 옳은 것이란 무엇일까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창조의 이유를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끝까지 이 문제를 추궁해 보고 싶은 이가 있다면 글쓴이가 쓴 존재의 이유와 창조의 이유를 살펴보길 권한다.
그에 대한 이해가 전제 되어야만 다음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창조의 이유에 부합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라고 하였다.
또한 글쓴이는
창조의 이유에 부합하는 것이 옳음이라 하였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정의란
존재의 이유를 달성하는 것이 된다.
정의란
존재의 이유를 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글쓴이는 존재의 이유를
전제적 존재의 이유와 궁극적 존재의 이유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리고
전제적 존재의 이유는 존재하는 것이라 하였고
궁극적 존재의 이유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 하였다.
이 전제적 존재의 이유와 궁극적 존재의 이유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전제적 존재의 이유 끝에 궁극적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고 궁극적 존재의 이유 끝에 궁극적인 것이 있는 것이므로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전제적 존재의 이유는 존재하라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에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형태로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인류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이 살아가고 있는 것 이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살아가는 형태가 양호한가 양호하지 않은가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 어떤 형태의 삶이든 단순화시켜 살펴보면 모든 이들은 단지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살아감으로써 전제적 존재의 이유를 달성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한 어떻게 살아가야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이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궁극적 존재의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존재의 이유는 궁극적 존재의 이유를 달성하기 위함에 있는 것이지 전제적 존재의 이유를 달성하기 위함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제적 존재의 이유는 궁극적 존재의 이유를 달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적 존재의 이유는 깨달음을 얻는 것에 있고 이에 인간은 궁극적 존재의 이유인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고 있던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도(道)는 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인간의 마음은 존재을 전제하기 위하여 또는 살아가기 위하여 악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부분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글쓴이가 쓴 대학지도편을 살펴보기 바란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곳이 악(惡)은 아니다.
또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곳이 선(善)인 것도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곳은 선과 악의 균형점인 중(中)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악에서 출발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여 우리의 마음에서 음과 양이 균형을 이루게 하여야한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서 음과 양 또는 선과 악이 균형을 이루게 되면 이러한 상태를 덕(德)이라 하고 이치요소상으로는 황극이라 한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옳은 것인가?
인간은 선하게 살아가야 옳은 것이다.
왜 인간은 선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위와 같은 이유로 인간은 선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저 불교에서 또는 기독교에서 선하게 살라고 하였기 때문에 또는 막연히 선하게 사는 것이 옳은 것 같기 때문에 또는 천국에 가기위해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구체적이고 절대적인 이유가 있기때문에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옳바른 삶에 있어서 그 첫 걸음은 지어지선, 즉 지극한 선에 머무름에 있다 하겠다.
위에서 말한 황극은 순리로서의 삶에 있어서 정점이다.
이 황극을 지나면 역리로서의 삶이 펼쳐진다.
황극 너머에는 무극의 경지가 있고 무극 너머에는 허극의 경지가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부분적인 정의는 개별적인 상황마다 모두 달라질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바탕이 되는 정의는
도(道)를 알고 리(理)를 알고 그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는 것.
이에따라 존재의 이유를 달성하는 것 그것이 정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