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 [오후 10:39] (전강선사 no.261) 이 몽뚱이를 쓰고 있지마는 그 마음대로 벗을 수가 있나? 마음대로 이 몸을 뭐 옷 벗기듯 벗을 수 있어? 암만 이무애(이치에 장애가 없다)는 되었어도, 이치로는 확철대오를 해 깨달랐지마는 사(事 현실적 일)는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여. 이치는 확 깨달랐지. 뭐 여불(부처와 같이) 무수(헤아릴 수 없이)허지. 이즉돈오 라, 이치는 몰록 깼다마는 사비돈제(事非頓除 일은 깨달아서 덜어낼 것이 아니다.)여. 사(事)는 몰록 제(덜 제)헐 수 없으니 몸뚱이 속에 든 불성을 그 마음을 내던져 버리고 어떻게 옷 벗듯이 벗어 번지고 나와? 그 못하는 것이여. 어디 마음대로 할 수 있나? (유전: 고통스러운 일(事)은 마음과 지혜로 이겨 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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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6)
[유전] [오후 8:06] 시공 불교사전
이사무애법계
[ 理事無礙法界 ]
사법계(四法界)의 하나. 본체와 현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서로 걸림 없는 관계 속에서 의존하고 있으므로 모든 존재는 평등 속에서 차별을 보이고, 차별 속에서 평등을 나타내고 있다는 화엄학의 관점.
[유전] [오후 8:08] 사비돈제와 이사무애가 모순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 사(事)는 방편으로 수 많은 방편 중의 어느 것을 사용해도 다 가능한 것이 진리의 방편으로 맞고 틀리고가 없습니다. 그에 비하여 이(理)는 절대적 진리와 항상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옳습니다.
[유전] [오후 8:23] (마태 4장 4절)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시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마침내 악마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
[유전] [오후 8:26] 예수도 하지 않은 시험의 때에 절벽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는 사탄의 유혹에 대해 요즘 신천지 교회 신도들이 대상이 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것은 신천지 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시험의 때에 이와 비슷한 체험을 겪게 될 것이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성령의 가피력을 받아 지혜롭게 이겨내면 사탄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저자
유재봉(성균관대학교)
한 영역의 대상, 속성, 개념, 법칙, 사실, 이론, 언어 등을 다른 영역의 그러한 것들로 대치하려는 사고의 형태이다. 환원주의는 수학, 과학, 철학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존재하며, 주로 과학과 관련된 것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화학, 생물학과 같은 개별적인 과학은 궁극적으로 물리학으로 환원된다는 과학의 통일성 주장, 과학철학에서 관찰이 불가능한 이론적 개념이나 법칙을 직접적으로 관찰이 가능한 경험명제(經驗命題)의 집합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실증주의적(實證主義的) 경향, 심리철학에서 공포, 고통, 불안 등의 정신적 현상을 자연적 혹은 물리적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경향, 관찰명제(觀察命題)에 대한 언어적 환원을 지향하는 논리실증주의의 주장 등이 환원주의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리고 심리학에서 여러 변수 중에서 중요한 것을 찾기 위해 중요변수를 순차적으로 찾아 나가는 것도 일종의 환원주의이다. 환원주의는 심리학상의 행동주의나 사회과학상의 방법론적 개체주의(個體主義)를 가지고 통일과학의 이상을 추구했으나, 여러 가지 난점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환원주의 [reductionism] (교육평가용어사전, 2004. 5. 31., 한국교육평가학회)
환원주의가 이러한데 이런걸 영성을 추구하는 나에게 계속 반복적으로 쓴다는 것은 팔상인의 지적 자랑질이 얼마나 천박한 체계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쟤보고 깡통 돌대가리라고 처음부터 말해 왔던 것입니다. 챙그랑 챙그랑. 소리만 요란한 깡통. 우물안 올챙이. 속좁은 좁쌀 영감. ㅎㅎ
야, 앞으로 환원주의 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무신론적 과학주의 자들에게나 써 먹어라. 다른데 가서 또 실수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