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밀엄경>
보살이
인(人)과 법(法) 두 가지 무아를
잘 관찰하여 곧 버리면
진제(眞際)에 머물지 않습니다.
만약 진제에 머물면
곧 대비심(大悲心)을 버리는 것이니
공업(功業)이 모두 이루어지지 않아
정각(正覺)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해설 : 위 구절과 같이 공(空) 무아(無我)에 머물게 되면 대비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계속 얘기 했듯이 공(空) 무아(無我)에는 사랑과 자비가 없다고 했으며, 대비심을 품게되면 공사상을 여의게 됩니다. 진제에 머문다고 함은 중생구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보살도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대비심을 품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승밀엄경>
일체 모든 중생은
여러 가지 소견을 내나니
모든 소견을 끊게 하려고
공의 이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의 이치 듣고 진실이라 집착하면
모든 소견을 끊지 못합니다.
이 소견을 제거하지 못하면
병들어 버림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비유하면 불이 나무를 태움에
나무가 다 타면 불이 꺼짐과 같습니다.
나무가 만약 다 탔으면
공중으로 치솟던 불기도 없어집니다.
지혜의 불이 일어나면
모든 소견이 없어짐을 얻는 때입니다.
널리 모든 번뇌 태워 버리니
일체가 모두 청정해집니다.
모니(牟尼)께서는 이 지혜로써
밀엄(密嚴)을 이루고 해탈하셨습니다.
해설 : 공을 제일의(第一義 : 제일가는 뜻, 불교의 진리)라고 잘못 이해한 용수가 논서를 저술하였기 때문에 용수의 논서는 다 오류입니다. 제일의는 자비입니다.
자비를 품고 생사번뇌를 받아가며 보살도를 닦고, 최후에 부처의 지혜를 구족해야 진정으로 번뇌를 닦은 것이며 청정하다고 합니다.
공이 전부라고 착각하면 사랑과 자비를 버리게 되어 다시 생사번뇌를 받는것에 대한 두려움(미세망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생구제를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공과 청정의 차이입니다. 공에는 자비가 없고 청정에는 자비가 있습니다.
<대보적경>
제일의인 자비심 닦으라.
<대반열반경>
번뇌 허물 미리부터 아시지만
중생들을 위하여서 거기 계시며
오래전에 세간에서 해탈을 얻으시고도
생사에 나시는 건 자비의 연고.
<대보적경>
‘대성께서 말씀하심과 같이 우리는 그 뜻을 이어받고 서로 의논합니다. 만일 보살이 마음으로 우리들은 빨리 위없는 정진의 도를 얻어서 최정각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보살을 해태(懈怠)라고 이름하나이다.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정진하지 아니하고 생사(生死)를 싫증낸다면 이런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큰 도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살이 생사가 어렵다고 보면 곧 그 소견에 얽매여 멸도(滅度)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직 중생을 교화하므로 정각을 이루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