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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11 17:04
[한국사] 낙랑국과 낙랑군, 그리고 한사군의 실체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4,136  

중국은 본래 중원을 처음 통일한 진시황의 진나라에서 나라 이름 차이나China을 가져오고, 그 뒤에 천하를 제패한 유방의 한나라가 진정한 중국인들의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해서 한족(漢族)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한고조 유방이 죽자 그 아내 여태후가 공신들을 전부 숙청을 했다. 이에 노관은 흉노로 도망을 가버리고 위만은 갈 곳이 없으니까 조선옷을 입고 상투 틀고서 조선의 왼쪽 날개인 번조선의 마지막 왕, 75대 준왕에게 찾아와 거두어 달라고 했다. 그때 만주에는 이미 서력 전 194년 단군조를 계승한 북부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44년 전인 서력 전 238년에 47세 고열가 단군이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오가(五加)에게 나라를 공동 경영해라 해서 이후 6년 공화정, 공백 시대가 있었다. 그때 치고 나온 분이 해모수인데, 그분이 만주 지역에 나라를 열고, 단군조인 대부여를 계승해서 북부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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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BCE239~ BCE195) 단군은 임종하기 직전에 번조선의 준왕에게 “위만을 절대 받아주지 말아라. 네가 패망당한다.”고 만류했다. 그러나 준왕은 그 말을 듣지않고 위만을 받아들여서는 연나라와의 국경 지역[상하운장]을 지키는 수비대장을 맡겼다.
 
해가 바뀌자, 몰래 군사를 기른 위만은 왕검성을 쳐들어와 준왕을 쫓아내 버리고 왕위를 차지했다. 쫓겨난 준왕은 배를 타고 내려와서 군산 어래산(御來山)으로 들어와 한씨의 조상이 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병도 박사가 “위만은 조선족 옷을 입고 상투를 틀었으니 조선 사람이다.” 했다.
 
강단사학자들이 그 한마디를 추종해서 위만이 단군조선을 계승한 자다'라고 한 것이다. 이게 위만조선의 실체다! 그러면 위만이 번조선 왕조의 왕이 된 게 아니니까 위만정권 정도가 되는 것이다. 위만정권은 단군조선의 서쪽 구석을 잠시 차지하고 있다가 그 손자인 우거 때에 한 무제에게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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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 한사군의 진실
 
한 무제는 위만정권이 흉노의 침략 거점이 될 것이 두려워서 ‘위만정권을 아주 없애버리고 동북아 전체를 통일해야겠다.’ 이런 야망을 가지고 BCE 109년, 누선장군樓船將軍(수군)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육군) 순체荀?를 보내 위만의 손자 우거정권을 수륙 양군으로 협공하였다.
 
그런데 1년 이상끌던 전쟁은 우거정권 내부의 번조선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우거를 살해하고 한나라에 투항하면서 끝이 났다. 한마디로 우거정권은 한漢나라 군이 아닌 내부 쿠데타에 의해 멸망한 것이다.
 
 
BCE 108년 한무제는 그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옛 강역을 모두 차지하기 위해 동쪽으로 북부여를 침공하였으나 북부여의 5세 단군(BCE108~ BCE60) 고두막한에게 대패하여 물러갔다. 전쟁이 끝난 후 한나라 측 장군들은 모두 사형을 당했고, 누선장군 양복만이 막대한 몸값을 치르고 서인(평민)으로 강등되었다. 반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실질적으로 우거정권을 무너뜨린 번조선 귀족들은 전부 한나라의 제후諸侯로 봉해졌다. 이것이 사마천이 기록한 한사군 전쟁의 실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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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은 위만이 다스렸던 왕험성(번조선 말기의 수도로 지금의 하북성 창려)지역이다.
 
사대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을 구별하지 못하고 하북성에 있던 낙랑을 지금의 청천강 이남에서 자비령 이북으로 비정하여 한반도 내로 끌어들였다.
 
한반도 평양 일대에 있었던 낙랑은 고조선 삼한(三韓, 번조선,진조선,마조선)중 번조선의 유민 최숭이 세운 최씨 낙랑국(BCE195~CE37)이며 낙랑군이 아니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선생이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에서 지적했듯이, 지금의 교과서에 나오는, 중국과 일본이 날조한 소위 한사군의 낙랑군은 낙랑국과 엄연히 다르다(한반도 북부에는 애초에 한사군이 없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 이야기는 바로 낙랑국을 무대로 한 것이다. 낙랑국을 세운 사람은 번조선의 유민인 최숭이다. 그가 한반도에 있던 마한(말조선)의 수도 평양으로 피난 온 것은 번조선이 망하기 1년 전이다. 이때는 해모수단군 재위 45년 병오(BCE195)년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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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검성은 창려현에 있고, 낙랑군 수성현은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갈석산 옆에 있다. 그 바로 위에 왕검성이 있다. 그것을 강단사학자들이 평양에다 갖다놓은 것이다. 땅 뜨는 재주를 부려서 지도를 조작해서 위만의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고, 한 무제가 위만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주변에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것을 강단사학자들이 평양에다 갖다놓은 것이다. 땅 뜨는 재주를 부려서 지도를 조작해서 위만의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고, 한 무제가 위만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주변에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를 보면 고구려 10세 산상 열제 때 낙랑과 현도를 점령해서 그곳을 완전히 평정했다 하는 기록이 나와 있다. 이것으로 보면 낙랑, 현도는 요서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낙랑, 임둔, 진번, 현도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던 것이 아닌데 평양에서 낙랑 유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유물을 근거로 중국의 식민지 군현이 평양 주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분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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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숭이 번조선의 난하 유역(낙랑산)에서 마조선의 왕검성(현제 평양의 대동강 유역)으로 이주하였다. 최숭이 한반도 전역에 자리 잡았던 마조선의 수도로 가게 된것은 북부여의 해모수 단군의 설득 때문이었다.
 
최숭은 진조선의 오가공화제(五加共和制)가 해체되면서 마조선에도 마지막 36대 단군 맹남을 끝으로 망하게 되자 막대한 재물을 갖고서 마조선의 도읍지인 대동강 부근으로 이주하여 이곳을 낙랑국의 새 도읍지로 삼았다.
 
한무제가 설치하였다는 낙랑군은 대동강이 아니라 난하 하류의 갈석산 부근에 위치하였다. 대동강 유역에 있던 국가는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아니라 북부여의 제후국인 낙랑국이었으며 낙랑군은 한반도 안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즉 낙랑군은 북부여와 가까운 만주지역에, 낙랑국은 대동강 유역에 그 중심지가 있었다.

 
그 유명한 고구려 대무신왕의 열째아들 호동왕자가 사랑하는 여인이 낙랑국의 공주였다. 낙랑국의 시조가 최숭인데, 최숭은 왕검성 창려현 쪽 낙랑산에 살던 재벌이었다. 번조선이 망하기 직전 그 재산을 다 팔고서 한반도 마한(말조선)의 수도 평양 쪽에 와서 나라를 연 것이다.

 
낙랑국의 마지막 왕 최리의 딸 낙랑공주가 고구려의 호동왕자와 사랑을 하면서 호동왕자를 위해 적의 침략을 알리는 북을 찢어가지고 낙랑국이 멸망을 당했다. 낙랑군과 낙랑국은 전혀 다르다. 낙랑군 수성현은 만리장성 쪽에 있었고, 평양 쪽에 있던 것은 낙랑국이다. 그런데 지금 강단사학자들이 우겨서 낙랑군 식민지 군현은 평양 부근에 있다가 313년에 패망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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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숭이 재산을 팔아서 옮겨올 때, 번조선 유민들이 함께 내려와 평양 주변 낙랑국에 살았고, 그들의 유물이 나오는 게 당연한 것이다. 이런 강단사학자들의 논리에 대해, 인하대 남창희 교수가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유물이 나오는 것만 가지고 낙랑군이라고 할 수 있느냐? 만일 그렇다면 저 오사카 주변에서 백제의 유물이 어마어마하게 나오는데, 거기를 백제의 식민지라고 해야 될 것 아닌가? 왜 그런 주장은 못 하는가?
 
 
<삼국사기> 고국천왕 19년(197년) 조는 “중국에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한인(漢人)들이 난을 피해 내투(來投)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산상왕 21년(217)조에는 “한나라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이끌고 와서 의지하므로 그들을 받아들여 책성(柵城)에 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미천왕이 재위 3년(302) 현도군 사람 8천여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고, 재위 14년(313)에는 낙랑군 남녀 2천여명을 사로잡아 왔으며, 재위 16년(315)에도 “현도성을 쳐부수어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남 강서군 덕흥리(현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덕흥리) 무덤에서는 요동·현도태수를 지낸 동리( 冬利)라는 인물의 기록도 있다. 장수왕 24년(436)에는 북연(北燕) 왕 풍홍(馮弘) 등이 망명했는데 그 행렬이 전후 80리나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계 제국의 성격을 갖고 있던 고구려에는 많은 중국인 지배층들이 망명했다. 고구려 강역에서 중국계 유물이 나온다고 무조건 한사군 유물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한국 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의 주요 논리가 그대로 한국사의 정설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식민사학의 진정한 교주는 이병도의 와세다대 유학 시절 스승이자 만철(滿鐵)과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다. 일제는 가야를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라고 주장했으나 거꾸로 가야가 고대 일본을 지배했다는 물증이 속속 드러나면서 현재는 일부 국수주의자를 제외하고는 그런 주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역사 왜곡의 전반에 대해 1963년에 중국의 주은래 전前 총리가 북한 조선과학원 사절단 한 20명을 만나 이런 얘기를 했다. “사실 우리 중국이 대국주의 역사관, 쇼비니즘(국수주의)에 의해 중국 중심의 역사관으로 역사 서술한 건 잘못된 거다.” 그리고 또 “그런 대국주의 사관으로 동방 한국의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지후箕子之后다.’라고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건 아주 명백한 역사왜곡이다.”라고 고백을 했다.
 
 
 
 
 
중국사서 기록에 의한 낙랑군의 위치
‣ 반고 《한서》<설선(薛宣)열전>에는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북경 일대였다.
 
‣ 《후한서(後漢書)》<광무제 본기>에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현재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 《후한서》<최인 열전>에는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다. 고대의 어떤 사료도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이라고 쓰지 않았다.
 
‣ 《사기》<하본기 태강지리지>에는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고 했다.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3개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 역사학자들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병도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병도 역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일제시대 <사학잡지>에 쓴 ‘진장성동단고(秦長城東端考: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대한 논고)’에서 황해도 수안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으로 본 것을 비판없이 따른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발간하면서 이 지역을 정책적으로 낙랑군 태수가 근무하던 치소로 확정지었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의도가 낙랑군의 실제 치소를 찾자는 게 아니라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현재까지 정설로 떠받들자 중국은 ‘이게 웬 떡이냐’하고 동북공정에 그대로 차용해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과 일본은 예로부터 역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전통이 깊은 나라들이다. 중국은 고대부터 춘추필법이란 미명 아래 다른 민족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서술을 해왔다. 《한서》<위현(韋賢)열전>은 “동쪽 조선을 정벌함으로써 흉노(匈奴)의 왼쪽 팔을 끊었다”라고 적고 있는데 조선과 흉노의 연관성은 차치하고라도 다른 민족의 이름을 ‘오랑캐(匈) 종(奴)’이라고 적는 데서 중국인들의 비뚤어진 시각을 알 수 있다. 중화 패권주의 사관의 발로인 중국 동북공정은 20세기 일제 황국(皇國)사관의 21세기 판에 불과하다.
 
 
 
 

한국과 중국 학계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고대사 부분이 「한사군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도「한사군의 위치」에 바탕을 두고 논리를 개발한 것이다. 본래 번조선 영역이었던 위만조선이 BC108년에 무너지면서 제방이 터진 것처럼, 기원 전후에 만주와 한반도의 마조선으로 밀려온 번조선 유민들이 수 천 명에 이른다. 그리고 漢족들의 망명객 중에는 지배층도 많았다. 이들이 가지고 온 유물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 강역에서 漢족계 유물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는 동수(冬壽)라는 인물에 대한 묵서명(墨書銘)이 나온다. 《자치통감》<진기(晉記)>에 따르면 동수는 연(燕)나라의 왕위 계승 전쟁에 가담했다가 패배하자 곽충(郭充)과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 명문 기사가 없었다면 안악 3호분도 한사군 유적으로 둔갑했을 것이다. 고구려 강역에서 漢족계 유물이 나온다고 무조건 한사군 유물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에서 만주는 물론 한반도 북부까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이 갑자기 붕괴되는등 급변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 북한을 중국으로 흡수하기 위한 수법이다. 그런데 우리 사학계에는 한사군이 북한지역에 있었다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찬동하고 있다. 그들은 북한 지역에 있는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한사군 한반도설’의 결정적 근거로 삼고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1915년 <조선고적도보>를 간행하면서 낙랑·대방군 유적으로 못 박은 후 현재까지 정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는 임둔군이 요령성 금서시(錦西市)일대라는 증거
 
봉니(封泥)란 대나무 죽간 등의 공문서를 상자에 넣어 묶은 끈을 봉하고 도장을 찍은 진흙 덩이를 뜻한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150원을 주고 매입했다는 봉니가 200여개에 달한다. 이들은 요양(遼陽)일대 또는 그 서쪽에서 수집한 것이거나 위조품이라고 본다. 그런데 기존의 역사학자들은 이들 봉니가 평양일대가 낙랑이었음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제가 100원에 구입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봉니는 위조품이라는 결정적 증거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개국한 왕망(王莽)은 ‘낙랑군’을 ‘낙선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라는 관직명을 ‘대윤(大尹)’으로 고쳤다. 왕망 때 만들어진 봉니라면 ‘낙선대윤장’이어야 하는데 ‘낙랑대윤장’인 것은 위조품이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1780년에 청나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 쓴 《열하일기》에도 중국인이 위조품을 만드는 기술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지금도 중국은 위조품 천국이다.
 

1997년 중국 요령성 금서시(錦西市) 연산구(連山區) 옛 성터에서 발견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는 조작 시비가 일지 않는 유일한 봉니이다. 길림대 고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복기대 박사는 <백산학보 61집>(2002)에 ‘임둔태수장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를 발표했다. 봉니 출토지는 물론 근처의 대니(大泥) 유적과 패묘(貝墓) 유적의 출토 유물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논문이다. 그는 전국시대(서기전 475~221)에는 금서시 유적에서 고조선 계통의 유물들이 주로 발굴되다가, 전한 중기부터 후한 시기에 이르면 고조선의 특징은 약해지고 중국 특징의 유물이 주류를 이룬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 요령성 금서시에서 1997년 발견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가 '임둔군이 요령성 금서시 일대 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점제현신사비
점제현 신사비는 일본인 고고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913년 평남 용강군 해운면 운평동(현재 평남 온천군 성현리 어을동)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이 신사비가 있는 용강군이 낙랑군 지역이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석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대동강 유역에서 생성된 화강암이 아니라는 점이다.《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 비석이 발견된 지역은 그시기에는 본래 물이 들어왔던 곳으로 비석을 세울 수 없는 지역이라는 점이다.(손보기>
 
 
지금도 온천군 부근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아 평양일대에서는 이 화강암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비석을 만드는 석재를 가까이 있는 자기 지방의 것을 사용하지 않고, 먼 다른 지방에서 가지고 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0년 전의 비석 기초에 시멘트를 사용했는데, 이는 결정적 조작의 증거로 본다. 비문 내용에 의하면, 비석을 세운 곳에는 이미 사당과 왕릉이 있었는데, 대동강변 토성동 일대에서 그러한 유적이 발견된 일이 없으며, 또 풍수지리상 사당이나 왕릉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비석이 발견된 지역은 현재 온천군인데서 알 수 있듯이 유명한 휴양지이고 비석이 있던 곳도 사방이 탁 트인 평야 지대임에도, 이런곳에 2000년 동안 서 있던 비석을 아무도 못 보았으나 세키노가 단번에 발견했다는 자체가 의문이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일제가 점제현신사비를 다른 곳에서 옮겨다 놓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비석을 발견한 다음, 동네 아이와 찍은 사진을 정상적 시각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 역사적 유물을 획기적으로 발견하고 찍은 사진이 정상이 아니다. 비석을 최초로 발견한 세키노 등 주역들은 빠지고 어린아이를 증인으로 하여 찍었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마치 히말라야 정상을 등정한 산악인이 셀퍼에게 깃발을 들게 하고 찍은 기록사진을 보는 것처럼 해괴한 일이다.
 

또한 치소(治所)는 방어에 유리한 지형에 있기 마련인데,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사방이 탁 트인 낮은 구릉지로서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라는 점이다.
 
 ⇒ 《사기》<조선 열전>에 서한(西漢)이 5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자, 위만조선의 "우거왕(右渠王)은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대항했다.(右渠發兵距險)"  그리고 우거왕은 지키고 있던 왕험성(王險城: 왕검성)을 나와 적을 공격하니, 적군들은 흩어져 도주하고 양복(陽僕)장군은 "산 속으러 들어가 10여일을 숨어지냈다.(遁山中十餘日)"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대동강변 토성 주위에는 험준한 지세나 10여일간 숨어지낼 깊은 산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 《사기》에는 “우거왕이 견고하게 성을 지키니, 여러 달이 되도록 성을 함락할 수 없었다.”고 적고 있는데, 대동강변 토성은 반나절도 지키기 어려운 곳이다.
 
 
조선총독부에는 한반도의 역사를 조작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는 점이다.
 ⇒ 첫째, 조선총독부는 평양일대의 유물은 최씨의 낙랑국 유물임에도, 漢의 낙랑군 유물이라고 집요하게 주장하고, 1915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발간하면서 이 지역을 정책적으로 낙랑군 태수가 근무하던 치소로 확정지었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의도가 낙랑군의 실제 치소를 찾자는 게 아니라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은 예부터 역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전통이 깊은 나라들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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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16-04-11 17:54
   
현재 요하를 기준으로 나뉘어지고 있는 요동,요서의 구분이 고대시기에는 그 범위에 차이가 있다는

부분에 어느정도 동의하지만.........

고대시기 요동의 범위 또한 현재의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랴오닝성동부에 국한되지 않은

적어도 고구려지역 전체면적, 넓게는 만주와 한반도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광대한 개념이었습니다.

형식적이지만 고구려국왕을 요동군왕에 책봉한 사실이 그렇습니다.

또한 참고로 한반도내부에 위치한 백제, 신라 왕들에게는 대방군왕, 낙랑군왕에 책봉하기도 했듯이

당시 낙랑이나 대방의 개념 또한 한반도서북부에 한정되었던 낙랑,대방의 직접통치구역을 넘어

낙랑-대방이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한반도 중남부 지역전체를 포함하기도 했습니다.
촐라롱콘 16-04-11 18:06
   
낙랑 유물과 유적은 일제시기보다도 현 북한정권 시절에 훨씬 많은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었습니다.

또한 유물은 교류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한나라 등 중국양식의 관리나 지배층의 묘가

다수 발굴된 것은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 일제가 일제시기로부터도 수 십년이나 지난 시점에서도 출토될 것을 가정하고 유물-유적을 조작하여

다시 묻어놓고, 그로부터 수 십년 후의 현대역사-고고학계의 과학적인 연구성과도 속일수 있을만큼

일제의 역사-고고학학문과 기술이 더욱 발전하지 않았다면 말이지요~~~ 

그리고 일제시기 당시 일제가 만약에 한국고대역사를 왜곡할 의도가 충분히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일본고대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 가야지역을 포함해 신라-백제 등 한반도 남부지역이 우선적인 대상이지

일본과 큰 관련이 없고, 중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한반도서북부의 낙랑을 대상으로 에너지를 낭비한다는

것은 정말 비상식적인 가정입니다.
대한국 16-04-12 02:22
   
아직도 한반도낙랑군대방군이있다고 개소리하는사람들이넘치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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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한국사] 조공무역은 조공이고 근대적 속국이 아닌 속국도 속… (73) 수학 04-13 1912
132 [한국사] 어그로가 풍년인데 (51) 카노 04-13 2327
131 [한국사] 중국은 과거 세계최강국이라니까 토다는 인간들에게 (40) 상식2 04-13 2769
130 [한국사] 제가 밑에글 요약한게 맞나좀 봐주세요 (24) Marauder 04-13 1562
129 [한국사] 조공을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2 (114) 수학 04-13 2035
128 [한국사] 조공을 미화할 필요없습니다 (60) 수학 04-13 2481
127 [한국사] 단군조선, 러시아가 부활시키다 (5) 마음울림 04-13 3209
126 [한국사] 광개토태왕 비문 해석 而倭以辛卯年 (19) 양원장 04-12 2864
125 [한국사] 레알 진지합니다. 몰라서 질문하는 겁니다.. (84) 에치고의용 04-12 2714
124 [한국사] 사신도보면 왜국사신은 신발도 안신고있는데... (20) 이궁놀레라 04-12 3177
123 [한국사] 칠지도 연대 문제 (6) 룰루랄아 04-12 2567
122 [한국사] 칠지도,백제,일본 그리고 가야. (264) 득운 04-11 2910
121 [한국사] 한글의 기원, 춘추전국 연나라에 대한 질문 (14) 아스카라스 04-11 2839
120 [한국사] 낙랑국과 낙랑군, 그리고 한사군의 실체 (3) 스리랑 04-11 4137
119 [한국사] 실제로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는 컸고 고려는 그리 작… (2) 보조도조도 04-11 2465
118 [한국사] 제 나이 22살, 주변을 둘러보면 국까만이 넘쳐납니다 (25) 아스카라스 04-11 2278
117 [한국사] 조선 화폐 질문요. (10) 솔루나 04-11 1898
116 [한국사] 조선이 신하국이었던 것 인정합니다. (14) 솔루나 04-10 2947
115 [한국사] 명 청에 대한 조공 (30) 룰루랄아 04-10 2514
114 [한국사] 고려와 조선인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증거 (13) 나치 04-10 4090
113 [한국사] 한국인들의 모순성 (9) 나치 04-10 2447
112 [한국사] 조선은 중국의 영원한 속국 (10) 나치 04-10 4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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