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 사터에 기록된 평제탑 비문에는 백제 의 호수가 24만, 인구가 62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한호당 25명이 넘는 수치다. 무언가 오류가 있는게 아닌가 싶지만 기록이 잘못 기록했다고만 볼수는 없다. 『삼국사기』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백제가 한창 융성할 때 사비성의 민호는 15만 2,300이었다. 인구는 76만호 였다. 신라의 배이며 고구려를 뛰어넘는 수치다. 그렇다면 백제인구수를 봐서는 15만명 이상의 군대가 동원되어도 무리가 아니다.
당시 6세기로 되돌아 가보자. 한순간의 방심으 로 신라에게 대규모 군사를 잃으면서 성왕까지 전사하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는 양상은 바뀌 었다. 성왕 이후 , 신라를 공격하는 방식이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는 무왕과 의자왕대 신라에 대해 어떻게 공격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백제가 대규모 전쟁에서 왕이 전사하는 쓰라린 패배를 겪은 후부터는 되도록 대규모 전쟁은 삼 가하고 신라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국지전 위주 로 바꾸었다. 때문에 백제는 지방에 군대를 흩어 놓고 각지에서 효율적인 국지전을 벌이는 방식 으로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무왕대에만 무려 14번이나 국지전을 펼치는데 기존의 한방에 대규모군을 모아 치는 백제의 전략이
여러갈래로 나뉘어 치는 방식으로 완전하 수정된 것이다. 백제측에서는 각 지 방에 흩어져 성을 갉아먹으며 조금씩 진군하고 있는 있었는데 이런식으로 약 100여년간 군사적 우위를 지키며 신라를 압박하다 보니 , 마침내 신라가 풍전등화에 이르기까지 되었다. 김춘추는 당 황제에게 백제가 강성하여 자신들의 백성을 노예로 만들려 한다고 하였다
(백제는 무왕)진평왕부터 신라는 줄곧 백제에 게 공격당했을때 중국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한두번이 아니라 신라 혼자의 힘에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을때마다 고하였고 , 중국은 백제에 게 압력을 가하면서 백제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잠시동안 멈추면 신라는 몇번의 위기를 모면하 며 군대를 준비를 하는 식이었다.
사람들은 일반 적으로 6세기 후반~7세기에 마치 신라가 백제의 모든것을 압도하고 ,백제는 기울고 있었던걸로 알고 있지만 그와는 반대로 신라가 잘나갔 던 이 때에도 신라는 당군에게 진통을 호소했으며 반면 백제는 강성하고 있었다.
부러진 뼈가 붙으면 더욱 단단해지는 법이다. 백제는 과거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한성을 잃는 등 더 큰 시련을 겪은 적이
있기에 그 시련을 통해 무령왕대에 더욱 강해져 남제서에 '백제가 고구려를 이기고 다시 강성해졌다'고 기록될 정도였고,
성왕이 신라군에게 죽는 시련을 맞이할 때도 이후 무왕대에 더욱 강성해져 선덕여왕이 '백제는 대국이고 우리는 소국이라' 말하며
김유신의 출전을 만류했을 정도로 백제는 시련에 대한 빠른 회복력을 지니고 항상 더욱 강해져 돌아왔다
선덕.진덕.김춘추를 거치면서도 그대로였다. 신라쪽에서는 김유신을 앞세워 반격했지만 , 대 부분은 백제의 공세 신라의 수세였다. 의자왕이 40여개성을 함락시키자 신라는 곧바로 고구려 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성충이 연개소문에게 편지를 보내어 손 을 써두었고 ,안되자 당황제에게 빌어 의자왕이 신라를 공격치 못하게 하였다. 무왕대에도 신라 를 정리할 최종 카드로 4만을 두번이나 일으켰 지만 그때마다 신라의 고자질에 의해 좌절된 적 이 있으며, 의자왕이 당항성 공격하려다가 신라 가 당에 고하자 의자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어 황 제를 달래고 공격을 중지한 일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신라는 군대를 준비하여 허를 찌르는 식이 었다. 때문에 단재 신채호는 김유신의 공적이 과 장되었다고 평가했다. 김유신이 대단했다면 당 에게 도움 요청할것도 없이 신라의 힘으로만 삼 국을 통일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결론적으로 당군에게 도움을 받아 신라군이 마지막 국 운을 걸고 급속도로 사비성으로 진군하고 있었 고 ,13만 당군도 기벌포로 급속도로 남하하게 되 었다.
백제는 한때 대륙을 경영하기도 하며 언 제나 능수능란한 외교를 펼친 해상왕국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6세기 말 성왕 전사 이후 신라에 대한 복수감 하나로 인해 오로지 신라를 잡아먹겠다며 쌍 라이트를 켜며 국지전에만 힘을 쏫았다
과거엔 백제와 남북조.수당과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그러나 의자왕은 당군이 고구려에 처참히 깨지는 모습을 보고 더이상 당을 달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끈금없이 당나라 대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의자왕은 당황했으리라
전선의 군대를 불러모으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의자왕의 최종 선택은 사비성 안에 있는 군대로 일단 시간을 벌면서 각 지방에 고루 분포 되어있는 백제의 대규모 군대가 사비성에 합류 하는 전략을 노렸던 것이다. 의직의 군대가 당군 을 막고 , 계백의 군대가 신라를 막음으로써 지 방군이 합류하기까지 시간을 벌어보려 했으리라. 현재에 와서도 백마강룡의 전설이 전해질정도로 그들은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결국 숫적 열세 에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보다 멸망한 후, 훨씬 저 항이 강했던것도 바로 이런이유다. 백제군이 한곳에 집결 하기도 전에 수도가 함 락되어,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나라가 망했으니 허탈한 백제인들이 부흥운동으로 이어가기엔 당 연한 상황이었다.
부흥군의 규모가 짐작이 가는 대목이 기록에 나오는데 , 사비성에 머물러 있었던 당나라 군대를 백제부 흥군이 포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전쟁사에서 성이 포위되면 함락은 시간문제다 물자조달도 받지 못한채 고립되면 성은 아무기능도 할 수 없고
당군 수십만이 이땅에서 전멸하는 역사가 쓰여졌겠지만 당은 신라군의 도움으로 포위에서 벗어나 구사일생한다)
당나라 수십 만 대군이 머물러 있는 6km로 추정되는 사비성 을 포위한다면 어느 군대를 포위하는데 필요한 군사는 그 군사보다 훨씬 많아야 한다. 당군 십만을 포위하는데 적어도 훨씬 많은 숫자의 군대가 동원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웬만한 규모가 아니고서는 힘들다. 어찌 되었든 백제 멸망 후에서야 나당 연합군 18만이 백제 부흥군에게 무려 4년동안 고전을 면치못하고 있었던것만 보아도 백제에게 는 군사 부족이 아니라 , 군사 집결 시간이 부족 했던 것이 가장 타당한 결론이다.
나당 연합군의 초전박살 계획이 주효했으며 신라만을 상대하가 위해 병력을 지방에 분배했던 의자왕의 전략적 실패인 셈이다
의자왕은 고구려에 패한 당을 얕잡아보고 더이상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만약 의자왕이 아버지 무왕처럼 계속
사신을 보내어 당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면 어땠을까 의자왕은 현명한 왕이었지만 당의 힘을 얕잡아본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대한민국이 강성해지고 있다 하더라도 중국을 얕잡아보고 적으로 돌려선 안된다는 교훈을 주는듯 하다
어찌되었든 역사는 신라의 승리이기에 백제를 부패 타락 나약함 등의 수식어로 말하고 있으며 백제는 멸망했기에 아무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