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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9-12 19:20
[중국] 최초 중국황제는 홍산인
 글쓴이 : 커피는발암
조회 : 4,751  

중국인의 조상 ‘황제’는 동이족었나::

일본의 역사는 한반도에서 이주한 도래인에 의해서 시작됐습니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역사도 홍산문화에서 남하한 한민족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역사가 한민족에 의해서 개화되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인데, 중국 최초의 역사시대가 한민족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하면 황당한 주장이라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한국의 주장이 아니라 중국학계의 공식 입장입니다. 저 동영상에서 보듯이 박물관도 세우고 중국정부에 의해서 지원받아 엄청난 돈을 쏟아붇는 탐원공정의 핵심 결론입니다. 다만 홍산문화가 중국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을 뿐 한민족 이야기는 안하고 있을 뿐이죠. 물론 고구려처럼 홍산문화를 중국것으로 날조하려는 시도입니다만 자기네들이 한족의 땅이 아닌 동북지역에 사는 한민족의 지배로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고고학적인 증거로 드러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이고 있는 사업입니다.

중국문명을 한민족이 개화하다니 설마 하고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텐데, 우실하교수도 이 내용을 줄기차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실하 교수 강의 못보신 분들은 꼭 보십시오. 물론 우실하교수는 홍산문화는 한중 어느쪽에 것도 아니라 공통의 것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미얀마계 언어를 쓰는 중국인과 알타이어를 쓰는 한민족은 너무나 이질적이라 공통문명이라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미얀마어와 알타이어의 공통조상은 아마 아프리카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이상 상상할 수 없을겁니다. 홍산문화는 분명한 한민족의 유적입니다.

중국 시조황제(黃帝)는 홍산인:
우실하교수 - 요하문명

그런데 문제는 이 중국학계의 결론 - 중국이라는 문명을 시작한 역사시대 최초의 황제가 한족이 아니라 홍산인 즉 한민족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도무지 사람들이 믿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미친 주장이냐 환빠냐 이런 반응이 대부분입니다. 일본문명은 한민족 도래인이 만들었다는 것을 쉽게 믿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정말 환빠라면 중국이 환빠겠죠. 또한 동북공정으로 무조건 날조하는 중국주장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도 있는데, 홍산문화의 발견으로 동아시아 최초의 문명을 세운 민족은 한민족이라는 것이 고고학적인 증거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문명이라는 것이 없는 중국대륙으로 홍산문화가 전파되어 중국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당연한 결론입니다. 

이를 두고 또 중국시조황제 한명만 홍산인이고 중국인에 동화되었으면 그냥 중국인 아니냐라는 사람이 또 있는데, 시조 한명이 아니라 그 밑 삼황오제가 줄줄이 다 홍산의 후예 동이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홍산에서 남하한 동이족은 나라를 세우고 그사람들의 문화를 고수하면서 많은 유물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을 알아야 갑골문을 만든 은나라가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이라는 것, 한자는 중국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조상이 만든 것이라는 것을 마냥 황당한 주장으로만 생각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습니다.

홍산문화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 중 핵심은 중국초대황제가 홍산인이며 삼황오제라는 그 밑의 황제들도 줄줄이 다 홍산의 후예 동이족이라는 것입니다. 중국민족의 시조가 한민족이라는데 역사학에서 이처럼 중요한 사건이 어디있습니까? 중국에서 모든 문화가 시작되었다는 잘 못된 편견을 버리고 새로 발견된 주장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진위를 떠나 중국이 한민족을 자신의 조상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것과 다를바 없는 이런 사건을 그냥 모른채 하고 있을 수 있습니까?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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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발암 15-09-12 19:55
   
홍산인은 절대 중국의 조상이 아니고, 한민족은 중국인과 아무런 친연관계가 없습니다. 알타이어 한국어와 미얀마어 중국어가 무슨 수로 가까운 조상따위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저 한민족의 직계조상인 홍산인이 남하해서 야만족의 땅 중국에 문명을 전파해서 중국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drizzt0531 15-09-15 01:57
   
모계에의한 연결고리가 있을수도 있지요...
흑요석 15-09-12 20:45
   
잘 보고 갑니다.
개갱이 15-09-12 20:51
   
이런건 사실이든 아니든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한국에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자기만족뿐..
     
뚜리뚜바 15-09-12 22:55
   
뭘해야 도움이 되는지 정도는 말할수 있지 않습니까? 의견 나누는 곳에서 주장도 못하는건 또 먼소립니까? 어그로들도 주장하는데 욕을 먹어도 주장할건 해야지
비좀와라 15-09-12 22:34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의견이 무엇 일까요?
     
막걸리한잔 15-09-12 22:35
   
딱 뉴라이트의 축소 왜곡 비하론??
한국에 도움이 되는게 아니고 일본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거겠죠 ㅋ
대한민국 친일파들의 세뇌 수준이죠..

일본 우익들이 유투브나 이런데에서 혐한을 퍼트리고 있을때..
반박해봤자다 반박하면 더 이상하게 생각한다..
가만히 있으면 일본인들을 더 안좋게 볼것이다..라고 말했던 사람들...

결국 대응하지 않은 결과는 일본우익들이 퍼트린 왜곡자료들이 진실인듯 전세계에 퍼지게 되어버렸습니다.

대응하지 않는 순간 역사고 뭐고 진실이고 모든것을 잃게 되는것은 당연한 결과인거죠..

하지만 그들은 대응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이명박정부 들어서 사이버 외교사절단인 반크에 지원을 대폭 줄이면서 사라질 위기까지 갔었습니다..
이러니 혐한에 대응 못하고 한류가 힘을 잃게 되는거죠..

더군다나 일본은 아베가 쿨 재팬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혐한 알바짓을 하고 있는 현실이고요..
한류를 없애고 일류를 퍼트리겠다는 심산이죠..
          
두근두근 15-09-13 04:41
   
한류 없애고 일류 퍼트리겠다는건 방숭이들의 망상일뿐이고용 세상일이라는게 자기마음대로 할수있는게 아닌것이 세상이치이거늘 일본 쪽발이 우익들 견제한답시고 한다는데 저런 날조 자료나 올려서 어그로 끄는거라면 안하는게 더 좋다고 생각하지 않음?
               
막걸리한잔 15-09-13 23:01
   
어디가 날조죠?
중국 역사서가 중국 어순으로는 해석이 안되는것 모르나요???
홍산인이라니까 비약이 심하군요..
비좀와라 15-09-13 06:02
   
솔본이라는 분이 coo21에 쓰신글을 윗 발제글과 상관이 있어서 링크로 퍼올려고 했는대 실패해서 그냥 댓글로 복사합니다.
     
비좀와라 15-09-13 06:02
   
솔본 (2006-11-07 00:00:30, Hit : 15363, Vote : 205)


 漢족이 숨기고 싶어하는 비밀


漢족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으며 또 언제 동아시아대륙에 들어 온 것일까?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한 이 질문에 많은 漢족(지나족)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한족은 수십만년전, 그러니까 북경원인시절부터 이곳 중원에 살아왔다'

하지만 오늘날 분자유전학과 유전자인류학이 밝히는 지나족의 기원은
그들의 믿음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현대유전자 인류학이 말하는 현 지나인의 조상은 그들이 믿는 것 처럼 40만년전의
베이징원인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지나인들의 유전자를 추적해 보면 그들이 동아시아 대륙에 들어 온 것은 채
5만년이 넘지 않습니다.

유전자 인류학자들은 지나인들이 남방루트인 베트남과 태국의 순다대륙을 통해
동아시아 대륙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이 남아시아인의 공통된 치아구조
즉 순다돈트(sundadont)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언어학자들 역시 지나인들의 언어가 베트남이나 태국과 유사하다고 믿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티벳어와 계통적으로 일대일 대응관계가 성립된다는 점을 발견했던 것이죠.

그래서 지나어를 한-장어계통으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복단대 인류학 연구센터가 밝힌 한족의 계통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 복단대 인류학센터 / 오마이뉴스 재인용]

이를 해석해 보면 아시아로 이주해 온 공통의 현생인류 가운데 가장 먼저
북방계 알타이와 남방계인들이 분화되었고 그 알타이인의 공통조상으로 부터
몇단계의 분화를 거쳐 오늘날 지나족, 즉 한족과 티벳족이 성립된 것이죠.

다시말해 우리 한겨례와 같은 알타이제족이 바로 지나족의 큰 할아버지뻘 되는 조상이라는
겁니다.

복단대 인류학 연구센터 이휘박사가 밝히는 지나족과 티벳족의 분화는 지금으로부터
5-6천년전(B.C 2~3)입니다.

이때 이르르면 지나족은 동아시아 동남쪽 귀퉁이를 차지하게 됩니다.


[출처 : 복단대 인류학센터/ 오마이뉴스에서 재인용]

이러한 결과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추연의 지리학설을 인용하며 '지나인의 중국은
구주의 동남쪽 귀퉁이에 그것도 구주의 1/81밖에 안되는 지역에 있었다'고 고백한
내용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무렵 동북아에서는 홍산문화가 그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홍산문화를 비롯 반파,신락, 대문구 문화가 결코 지금의 지나족의
문화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지나족의 문화는 바로 하모도문화입니다.


[우실하교수제공]

결국 지나족이 주장하는 중화, 중국이란 그들의 이상적 지향점이었을 뿐
실제로 그들은 변방에 거주하던 별볼일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漢대에 이르러 흉노가 분열하면서 그 틈을 이용해 중원을 차지했던 것이죠.
원래 동이와 구려에 주눅 들어 살던 한족은 이때부터 큰소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과는 일찌감치 분화되어 먼저 선진문화를 가꾸어 온 알타이제족의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불쌍한 족속들...

그런데 여기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한서대 중문과 교수인 오세준 박사가 발표한 불후의 논문 "한자창제에 있어서 알타이제어의 역할"
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한자는 중국인들의 한-장어 음가를 반영하여 창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장어의 특징은 단음절,성조어,고립어의 특징인데 한자의 원고음은 알타이어의 특징인
복음절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가?

오교수는 黑(흑)자를 통해 설명합니다.

이 黑자의 고음은 [hm@k / sm@k]으로 재구됩니다.
즉 '흐먹/스먹'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복음절은 검음을 뜻하는 알타이어 [k@m@k]/커먹,카막
에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저 솔본이 일전에 쓴 '한민족의 비밀은 한자의 옛음가에 있다'를 참조하시면
이해가 빠르실 것입니다.

[참고 : 風의 상고한음은 'pr@m'/프람 , 현재한음은 'feong'펑]

오교수는 그의 논지에서 결국 중국학자 '진리쉬안'의 고백을 끌어 냅니다.
그는 말하길 "고대 한자는 한어의 발음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고한어의 한 단어
혹은 한 어절과 등가에 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결국 한자의 원고음은 지나족의 음가를 반영하여 창제된 것이 아니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다시말해 한자는 그 창제에 있어 복음절의 구조를 갖춘 알타이어를 반영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고 여기에 우리 한국어만큼 대응되는 어족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한족의 언어는 단음절로서는 한자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후대에 이르러 성조를
발전시켜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어와 같은 복음절어는 한자의 한 글자라도 두개의 자음을 통해 발음하여 그 뜻을 구별할
수 있지만 지나어같이 단음절은 성조를 달리하지 않고서는 한자의 뜻을 전달히기 어려웠던
것이죠.

결국 지나인들은 우리 한겨례선조들이 만든 한자에 그들의 발음을 적용하느라 오늘날
그 시끄럽기 짝이 없는 성조를 만들어 낼 정도로 피맺힌 노력을 해왔다는 것이죠.

한때 우리 알타이제족을 조상으로 하고 그 지배에 눌려왔던
바로 오늘 중화를 자처하는 지나- 한족의 안쓰러운 과거인 것입니다.


-솔본-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11-12 10:00)





한민족 (2006-11-07 00:14:37)
오...솔본님...오랜만입니다..
님 글은 아주 잘 애독하고 있답니다. 자주 좀 글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솔본 (2006-11-07 00:18:57)
참고로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재야사학의 주장을 하나도
근거로 하지 않았습니다.

학제적 연구로도 충분히 지나족과 우리 배달족의 구분이 가능하고
그 지배적 관계에 대한 입증이 가능합니다.

굳이 재야사학의 거두를 자처하는 어느 분처럼
지나의 사서의 문장을 왜곡 해석해가면서까지 주장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솔본 (2006-11-07 00:24:44)
한민족/

저도 그러고 싶지만 안타깝군요..



한민족 (2006-11-07 01:13:51)
한족의 발원지가 하모도문화권이면 지금의 저장성에 해당한단 말인가요?

그럼 황토고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건가요?



솔본 (2006-11-07 01:58:54)
한민족/

흔히 우리가 지나족을 서토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더욱 후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은,주,를 거쳐 진에 이르기까지 지나족이
중화라는 개념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주족의 중화는 지금 한족의 중화가 아닐 수 있는 것이죠



미모사 (2006-11-07 06:48:07)
솔본/ 지나 사서의 문장을 왜곡하면서 주장한다는 그 학자와 왜곡부분을 알려주면 좋겠네요. 정보를 공유해야 정확성을 높일수 있지 않나요. 개인적으로 여러학자들의 주장이 틀려서 헷갈리기도 하고....



카오스 (2006-11-07 10:17:31)
솔본님> 좋은 글이시군요.

그런데 카오스는 얼마전 모든 한자를 단음절로 발음할 수있는 사람들은 우리 한국인들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조상의 일부가 원시(초기) 한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쪽에서 이동해온 초기 중화인들이 이 한자 단음절을 너무 모방(음독+훈독)하다가 원래는 자연어였던 그들의 고유 언어를 잃어 버려서 오늘날의 중국어와 같이 용언이나 조사 등의 어미 변화가 전혀 없는 이상한 언어(절음발이 언어)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니냐 하는 취지의 글을 쓴적이 있습니다. 자연어라면 용언의 어미변화가 없을 수 없다는 발상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글의 또 다른 바탕에는, 한자를 처음 창제했던 우리조상들(소수)과 한반도 토착언어를 가지고 있었던 우리조상들(다수)이 언어융합을 이루어서 현재의 한국어(일본어 포함)가 탄생된 것이 아니냐 하는 추정에서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학술적인 연구의 결과가 아니고 순전히 카오스의 상상력에 의존한 추측이기 때문에 고집을 하지는 못하지만, 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나하는 생각도 드는데 솔본님의 견해는 어떠신가요? 카오스의 상상이 어디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일까요?



카오스 (2006-11-07 10:19:10)
그리고, 저 하모도문화가 있는 곳은 '越족'의 본거지가 아닌가요? 越족과 漢족의 관계가 어떠한가요?



솔본 (2006-11-08 01:45:55)
카오스/

한족과 가장 유전적인 상사성을 가진 제족이 백월족입니다.
     
비좀와라 15-09-13 06:18
   
솔본 (2006-01-31 05:29:17, Hit : 5104, Vote : 172)


 [펌] 최초 확인 “동방문화의 뿌리는 漢族이 아니라 韓族” -신동아-


학술/ 중국사료에 나타난 동이 고조선의 실체
최초 확인 “동방문화의 뿌리는 漢族이 아니라 韓族”

● 우리의 조상 동이는 개벽이래 중국에 살았다.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동양문화의 주역이다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여러 ‘고기(古記)’ 등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적지 않은 역사서적들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일제 36년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런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위시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하지 않고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 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중의 동이사료’ 등 4 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은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로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가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사고전서’ 중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해당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의 길이 열리는 것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 보기로 한다.

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냥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嵎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등이 그것이다. 이자(夷字)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러한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융적(戎狄)이 존재한 것이 그 유래가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어서 이들 이적(夷狄)들은 사실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개벽(開闢)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또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전 중국에 걸쳐 사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兗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로부터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사고전서․사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柢)이다(夷者柢也).”
여기서 이(夷)를 저(柢)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柢)란 과연 무엇인가. 저(柢)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柢)’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柢)․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柢)의 의미를 다시 저지(柢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柢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그 뿌리를 두고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柢地)의 저(柢)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柢)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 동안 알아 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뿌리 이자, 즉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 이자로 변질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고 하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보이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 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지인(東夷之人)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의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邾)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라 하였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맹자가 말했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에 의해 건립된 은은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까지도 모두 동이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 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지게 된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 ‘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嵎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다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도군(玄菟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嵎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도․낙낭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도․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우리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가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일로서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러나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밝힌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하는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 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 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나라 ‘구이’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 자료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은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한 분으로 자칭 군자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본다면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고구려․부여․삼한의 기원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馯=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말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이들이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 이전 우리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16)에 건국된 것으로 기술하여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서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가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널리 섭렵할 수 없다보니 어쩔 수 없는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이상 잘못 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다 보니,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인양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한 동이이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동이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도․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인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문헌상 최초의 동이인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모두 동이족 출신이었다.
넷째, 부여(夫餘)의 뿌리가 부유(鳧臾)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鳧山)이 발원지이며, 고구려가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고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출발점이 없는 한국사

오늘날 중국에는 몽고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 양대민족으로부터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황제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황(炎黃)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 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모습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두파 세파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역사의 단절로 인한 민족 얼의 상실에 있다.

국사교과서 새로써야

우리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되어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우리의 실제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도(東京) 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고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이후 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앞으로 만일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沈伯綱
1956년 경기 파주 출생
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연구직 전문위원․중국연변대 객원교수
월간 ‘한배달’ 편집인
저서: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조선왕조실록중의 단군사료’ ‘조선왕조실록중의 기자사료’ ‘이이 왕안석 경제개혁사상 비교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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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산책 (2006-01-31 09:41:24)
- 산동성의 노(魯)나라는 전통적으로 동이족이었고 산동성 곡부 출신인 공자도 당연히 동이족이 맞습니다. (산동성 곡부와 강소성에서 김해 예안리처럼 편두가 발견된 바도 있고..)

- 무열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에 임명했다는 것은 김춘추의 출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공격목표 즉 백제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이(嵎夷)의 '嵎'는 그 의미가 1) 산굽이[山曲], 2) 해뜨는 곳[日出處/暘谷], 3) 산동성 등주의 지명 등이예요. 산굽이는 일반적인 의미겠지만, 일출처라는 것은 동쪽을 뜻하여 동이를 가리킬 수 있고, 중원에서 볼 때 역시 산동성을 가리키는 말로 쓸 수 있겠지요. 산동성 등주의 지명을 바로 가리킬 때도 있고....



고대사산책 (2006-01-31 09:57:14)
산동성의 래이(萊夷)가 마한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삼국유사 남대방조 주와 [삼국지] 한전을 비교해보면 지금의 하북성 동부에 있었던 낙랑군이 원래 마한이었다 하고, 난하의 동북 적봉일대가 대륙에서 가장 이른 문명발상지이며, 고인돌의 분포지역, 비파형청동검의 분포지역 등을 보면 고조선은 그 권역이 환발해권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지리적인 중심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산동성 동북의 萊지방이지요(환발해권/산동, 하북, 요녕, 평안, 황해).



홍승희 (2006-02-01 22:27:36)
근세조선 정조 연간에 필사된 동국지리지에 보면 고구려, 옥저, 예맥 등을 통칭 조선이라 하고 그 구역은 각기 다르니 조선의 본 강역을 한서 여러나라전을 상호 참고한 즉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마한, 동으로는 예맥과 접하고 서쪽 물가는 대해임을 알 수 있다고 기록했네요. 그에 앞서 소개한 전한서 조선전에는 진번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구요.
그런데 짧은 한자 실력이라 충분한 번역은 못하고 있지만 전한서 조선전에서 진번조선의 위치를 묘사한 부분에 진나라 멸망후 연에 속하던 요동 외곽에 한 쪽으로 수복된 요동 옛 요새에서 패수까지가 연과의 경계라는데 위만이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진번조선에 속하게 된 진나라 故空地로 도주했다는데 이 패수의 위치가 참 묘하죠? 그렇다면 요동 서쪽에 패수가 있어야 마땅한거죠?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가 요동에 위치하며 천리 남쪽에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하고 있는 땅 사방 2천리라고 묘사되네요.
후한서 백제전에는 백제에서 면포를 생산한다고 전하는데 고려말에 비로소 문익점에 의해 목화가 전해졌다는 말과의 상관관계는 또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이 저자는 분명이 단군이 요와 나란히 건국했음을 밝히고 있어서 아직도 단군을 신화라 우기는 이들이나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깍아내리고자 하는 이들이 제대로 봤으면 싶네요.
이런 자료를 강단 사학에서는 뭐라 평하는지 궁금하네요.



홍승희 (2006-02-01 22:51:16)
후한서 삼한전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 있고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며 54개국이 있으며 북으로는 낙랑과 접하고 남으로는 왜와 접하며 진한은 동쪽에 위치하며 12국이 있고 북으로 예맥과 접하고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위치하며 12국이 있고 남쪽으로 왜와 접한다. 무릇 78개국이 있으며 백제 역시 그 가운데 한 나라다....땅은 도합 4천여리에 걸쳐있고 동서는 바다 있으며 옛 辰國이 그 뿌리다...
'반도 3천리'라는 노래 가사가 무색하네요.
마한에서 면포를 만들고 배(梨)같은 큰 밤이 나오고 꼬리 긴 닭이 있어 그 길이가 5척이나 된다네요. 배는 돌배 정도로 이해한다 해도 재미있는 기록들이지요. 필사본이라 글씨 읽기가 만만치는 않아 대충 그 정도만 전합니다.
     
비좀와라 15-09-13 06:38
   
솔본 (2005-07-21 16:40:23, Hit : 2653, Vote : 96)


 김한수님에게.. 한자의 옛음가에 대한 설명과 출처


밑에 김한수님께서 제기하신 문제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이 설명은 다른 분들에게도 필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인용하는 자료는 1990년 후반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 비교언어학자인
세르게이 스타로스틴 박사와 미국의 산타페 고등연구소 그리고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철학부(The Russian Academy of Sciences (Dept. of History and Philology)
홍콩의 The City University of Hong Kong 등이 공동연구로 진행하고 있는 비교역사언어
자료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전세계 주요 어족의 어휘를 비교하여 그 원형 (proto type)을 재구하는
작업입니다.

연구를 총괄 진행하는 세르게이 사로스틴박사는 코카서스언어와 노스트라틱어의 비교연구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언어학자입니다.
한자어의 고대음가는 홍콩대학과 중국 복단대등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옛 상고시대의 한자음이 현재의 중국음과 차이가 있다는 것은 설문해자와 기타 고문서의
주해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의 한자로 된 문집은 해석을 하다보면 종종 뜻이 통하지 않는 글자들이 문맥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소리가 같으면 바꾸어 쓸 수있다는 관습때문입니다.

그래서 청대의 저명한 언어학자인 왕니엔쑨같은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무릇 雙聲의 글자는 소리에 따라 뜻을 아는 것인데 소리에서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글자에서 뜻을 구하면 당연히 그 말하는 것은 대부분 억지로 갖다 붙힌 것이다"
  왕니엔쑨 (王念孫) / 廣雅疏證

참고로 한 예를 보십시다.

한자를 일컫는 한자의 漢의 현대 중국어 발음은 한(han)입니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랬을까요?

설문해자에서 漢에 대해서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漾也...從水難省聲."

=> 강을 뜻한다. '수난성'의 음을 따른다.

漢은 원래 강의 지명입니다. 漢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漢의 발음은 水자와 難자와 省자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반절음을 응용해 보면 s-n-ang /s-n-an이라고 재구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국어의 고대음에 끝음가의 'ㅇ'이나 'ㄴ'음은 흔히 'ㄹ'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漢은 s-nar (스나르)였다고 그 보편적인 원형을 재구하는 것입니다.

상고시대에 漢의 음가는 결코 '한'han'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Character: 漢

Modern (Beijing) reading: han 4

Middle Chinese reading: xa^̀n

Old Chinese reading: sŋār-s

Vietnamese reading: hán

Translation: the Han river; Han river in the sky; the Milky Way

Number in GSR: 0144 c
====================================================================================

그러면 韓과 漢의 옛 음가를 비교해 봅시다.

Character: 韓

Modern (Beijing) reading: han 2

Middle Chinese reading: g|a^n

Old Chinese reading: g(h)a:r ==> 가르

Vietnamese reading: ha\n

Translation: name of a county [L.Zhou]

Comments: Shuowen glosses the character as 'wall of a well', but there are no text examples for this meaning.

Number in GSR: 0140 h-i
======================================================================================

재구된 韓의 옛음은 '한'이 아니라 '가르'입니다. 중세 발음은 '글란'입니다.
이것은 '韓'의 발음의 'ㅎ'음이 'ㄱ'음으로 나는 것은 반절음에서 초두음 '胡'가 '曷'과
통했다는 근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胡는 옛음이 '고/ 코'였다는 것이지요.

漢의 옛음이 '스나르' 이고 韓의 옛음이 '가르' ( 모음조화를 적용하면 '가라')였다는
것은 지나인과 우리 한겨레간에 분명한 자기 인식차이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세르게이 박사팀의 연구결과를 받아들인다면  韓이 '가라' 또는 가야가 되었던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중세음이 '글란'(glan)이었다는 점은 거란족과 우리 겨레
간의 공통적 뿌리를 짐작케 하는 것입니다.

특히 漢의 옛고음이 '스나르'였다는 것은 중국인이 '지나'라고 자신들을
지칭했던 근거가 아닌가 합니다.

즉 지나(스나르) 漢과 가르(겨레)韓은 분명히 달랐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중원 최초의  국가라는 夏와 동이국가 殷의 고대음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세르게이 사로스틴 연구팀에 의하면 夏의 옛음은 '가르/가' 였고 殷의 옛음은 '아르'(@r)
입니다.

-솔본-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11-23 11:06)





우롱차 (2005-07-21 16:48:51)
솔본님이 글중에서 가장 제대로된 글 같습니다. 비록 그 과정이 빠지고 결론 부분만을 인용하였기는 하지만, 어떤 한사람의 질문에 답하는 자세로는 모범이 된다고 보겠습니다. 러시아 학자의 연구가 맞던 안맞던, 우리나라에는 이미 세계의 언어가 바로 한민족의 말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연구를 하신 분이 계시지요.
저는 이분과는 상관없지만, 가보시면 그런 주장을 하시는 글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www.hanja.co.kr (박대종 선생님의 개인사이트), 이 사이트의 링크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운영자님은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솔본 (2005-07-21 16:55:29)
상당히 우롱당하는 기분이군요..



고대사산책 (2005-07-21 17:13:36)
韓, 夏, 胡 등의 고어 음가를 보니 일어 생각이 납니다.

일어 가라[韓], 가[夏], 고[胡] 등이고 고[湖], 가와[河] 등이지요. 일어는 가야어(진한어)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말이고(가야의 열도개척과 대화왕조로 인해). 지금의 한어에서 히읏음이 일어에서는 기역음으로 나고 있는 것이 많네요.

한어와의 특징적인 차이는 '한어>복모음과 종성이 발달했다', '일어>복모음이 적고 종성이 없다시피 하다' 라는 점 때문에 한어가 고어로부터 훨씬 많이 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을 바꾸면 일어는 음이 한어에 비해 고어로부터 상대적으로 덜 변했다고 할 수 있다는 점.

결국 일어의 음이 한어보다는 한자의 고어 음가에 가까울 개연성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일어도 같이 연구를 하시거나 아니면 그런 각도에서 연구한 다른 분의 성과를 활용하는 것도 좋을 듯...일어 음이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지도...



思無不通 (2005-07-21 17:25:23)
솔본님

여러가지 친절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이 곳(우리역사의 비밀)을 찾는 분 중에 "솔본"님의 글을 읽기 위해
찾아 온다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의 시원과 뿌리를 찾아 고군분투하시는
솔본님께 무한한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위의 설명 중의 한(韓)에 관한 원문 중에서 "wall of a well" 이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 오는군요.
혹시 이 부분에 대하여 생각하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솔본 (2005-07-21 17:49:33)
思無不通/

일천할 뿐입니다..
언제 서로의 연구들을 함께 모아 토론해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韓이 과거에 "wall of well'' 다시말해 '우물벽?'의 뜻이었다는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원문에도 그런 증거를 갖고 있는 텍스트는 없다고 하는군요.. 그럼에도 코멘트를 단 것을 보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한 가봅니다.

우물을 둘러싸고 있는 벽이라....



고대사산책 (2005-07-21 18:13:07)
사무불통님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wall of a well'은 단순히 보면 '우믈[井]의 담장'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이 우물이 신라(진한)의 건국신화에서 굉장히 중요시되어 혁거세신화, 알영설화, 탈해설화, 알지설화 등에서 왕조의 상징으로 구사되고 있어요. 따라서 우물물은 왕권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고...

혁거세>나정, 알영>알영정, 탈해>요정, 알지>계정 등인데 이 우물이 실사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양신의 으뜸은 태양신 즉 일신(천신)이고 음신의 으뜸은 지기(地祇)인데 지기를 의인화하면 여신(大地의)이 되고 이 여신의 음(陰)을 井으로 표현한 겁니다. 이 여신은 국토신(國土神)이예요. 혁거세신화에서 지기를 의인화하여 신격화하면 선도성모가 되고 다시 이를 인격화하면 알영이 되는 겁니다.

즉 천신과 선도성모가 대응되고 천신의 자인 천자 즉 혁거세에 대응되는 왕비는 알영이란 뜻인데 알영은 실존인물이 아니고 영토를 의인화한 인물이예요. 혼인한 후에는 영토통치권 즉 왕권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고대신화설화에서 '천신+지기=알'의 구도인데 알은 왕조의 상징이예요. 알이란 고대 음양사상에서 천신과 지기가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지상에 내려보냈다는 의미가 있어요. 그것이 곧 고대왕조사상에서 나온 '알=왕조'란 것이지요. 이 알에서 태어난 인물은 그 왕국의 시조라는 것이고....

"왕국성립=시조(지배층 포함)+백성(피지배층)+국토(통치영역/왕권이 미치는 땅의 범위)"인데 고대건국신화에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다 나오는 것이 정상적인 구조를 가진 신화설화예요. 신라의 지배층이라면 6부의 조들과 그 자제들이지요.

신라의 나을신궁은 알려지기로는 시조신을 모신 신사라고 하는데 산책은 음신의 으뜸인 지기를 모신 신사라고 봅니다. 우물 자체가 지기를 의인화하여 신격화한 여신의 '陰'을 나타내기 때문이지요. 신라의 '나정(蘿井)'은 '여정(女井)=여음(女陰)'을 상징한 것인데 그것을 현실에서 구체화한 것이 나을신궁의 우물입니다(경주에 이 유적이 있다고...).
// (위의 내용들은 산책의 책 2권에 있음)

이런 의미에서 '우물의 담장'을 생각해보면 크게 볼 때는 1) '국토(왕권이 미치는 범위)'로도 볼 수 있고 좁게는 2) "지기를 모신 신사의 담장"을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예컨대 신라라면 나을신궁의 담장(신궁 안에 우물이 있음)이지요.

어느 쪽이든 의미는 국토를 의미하게 됩니다. 싱징적이냐 현실적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따라서 우물은 달리 표현하면 '나라[國]'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솔본님에 대한 사무불통님의 질문을 보고 생각이 나서 적어본 건데 엉뚱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자로 '우물 井'자는 고대에 일정 면적의 땅을 나타내는 단위였다고도 하던데...이건 잘 모르겠고요...



思無不通 (2005-07-21 18:28:28)
솔본님, 고대사산책님/

감사합니다.

저도 나름대로 연구를 해 보겠습니다.



김화식 (2005-07-21 18:30:44)
'우물 井'자가 세겨진
고구려 유물이 많다는데,

target=_blank>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OD&office_id=032&article_id=0000037968


뭔가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요?



고대사산책 (2005-07-21 18:37:13)
국토가 확장되면 되는 대로 井자가 새겨진 토기를 쓰게 하여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임을 나타내는 표시인가?



홍승희 (2005-07-21 23:01:38)
井자가 들어간 고구려 유물은 광개토대왕 대의 표식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제 기억이 잘못된 걸까요?



구신 (2005-07-21 23:08:27)
저도 굉장히 오래전에 井 자가 표시된 기와에 관한 TV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아주 흐릿흐릿 하게 납니다.
어떤 나라의 기와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홍승희 (2005-07-21 23:10:35)
고구려 유물은 맞다고 확신하는데... 그래서 그 때 서울 어떤 유적지가 한성백제 유적이냐 고구려 유적이냐를 논하는데 결정적으로 고구려설을 지지하는 이유가 됐던 것 같고.



하나 (2005-07-22 01:43:30)
한의 음가가 변했다는 말은 곧, 그곳의 주 지배계층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말이 변했다라고 얘기하는 것보다는, 지배계층이 변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더 상식에 맞고 이치에 맞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중국어는 청나라때의 성조를 기본으로 하며, 이는 말이 지배계층에 따라, 수시로 변해 왔음을 뜻합니다.

한자음의 변화라기 보다는 지배계층의 변화라고 보아야 합당할 것입니다.

즉, 서구인들이나, 솔본님의 경우에는 한자의 발음주체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전제하에 사건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는 이곳 사이트의 주장을 볼때,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매우 높지요.

중국역사에서 수많은 민족들이 명멸했는데, 민족에 따라서, 훈독을 한 민족도 있을 것이고, 음독을 한 민족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조는 어땠을 까요? 현대 중국어 한자 발음이 우리나라 한자 발음과 비슷하다는 주장이 맞다면, 음독을 한 케이스겠군요.

고대에는 훈독을 하기도 하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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