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려와 몽골은 동계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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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8세기 무렵 아무르강 상류인 에르군네(Ergüe)河 유역에서 몽골실위(蒙兀室韋)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여 11~12세기 무렵에는 오난江(Onan河) 일대까지 진출했다. 오난江으로 진출한 몽골은 케레이드(Kereyid), 메르키드(Merekid), 타타르(Tartar), 나이만(Naiman) 등의 부족들과 서로 다투면서 성장하다가 1206년 칭기스칸(成吉思汗)이 이들을 통일하여 세계제국을 건설하였다.
공식적인 사서들의 기록에 따르면, 몽골은 동호(東胡)에서 나왔는데, 동호들 가운데 남부 사람들이 거란(契丹 [쇠단 ?])이 되었고 북부 사람들이 몽골(실위)이 되었다는 것이다. 몽골과 거란은 동호(東胡) → 선비(鮮卑)·오환(烏桓) → 거란(남)·실위(북) 등의 계통을 밟는다. 여기서 실위(室韋)가 바로 칭기스칸의 몽골과 직접 관련이 있다.
실위(室韋)는 『위서(魏書)』에 처음 등장하는데 실위(失韋)라고도 쓰지만 수, 당대 이후 실위(室韋)로 통일하여 사용하였다. 대부분 연구자들은 실위라는 말이 몽골어의 ‘삼림(Siγui[시귀])’에서 나왔다고 보지만, 서양 선교사 연구자인 펠리오(P.Peliot)는 선비(鮮卑)에서 나온 말로 보고 있다.131) 만약 실위가 몽골어의 삼림에서 나왔다고 하면, 이 말은 만주족들을 가리키는 물길(勿吉[우지] : 만주어로 삼림)이나 왜(倭[와]), 옥저(沃沮[오쥐])등과도 다르지 않다.
『수서(隋書)』에는 “실위는 거란의 한 종류이다. 남쪽에 있는 사람들을 거란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사람들을 실위라고 부른다.”(『隋書』「室韋傳」)라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의 「실위전(室韋傳)」에는 “실위는 거란의 별종으로 … 황룡부(금나라 수도) 북쪽에 있고 … 적게는 천호에서 많게는 수천호로 하천과 계곡 근처에서 흩어져 살며 … 비록 용감하여 전쟁을 잘하지만 강국이 되지 못했다.”라고 한다.
이들은 “때로 모여서 사냥하고 일이 끝나면 흩어졌다.(『구당서』)”고 하는데 그래서『신당서』에서는 신속(臣屬)이 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每戈獵卽相嘯聚 事畢去 不相臣制)고 했다. 즉 당나라 시대까지도 이들은 정상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국학자 장지우허(張久和)는 “실위는 당연히 선비(鮮卑)의 후예지만 탁발 선비의 귀족들이 이들처럼 정상적인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자신들과 분리하여 실위라고 했다.”고 한다.132) 즉 동족(同族)이라도 제대로 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잡거(雜居)하였기 때문에 실위라고 했는데 일종의 비칭(卑稱)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예맥(濊貊)이라도 고구려인이나 부여인(夫餘人)들은 잡거하는 예맥과 분리하여 서술한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 거란과 해(奚)의 경우도 동일하다. 해(奚)는 거란의 원류지만 거란이 국체로 형성되었을 때는 일종의 거란 변방인 실위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344년 선비족들 내부에서 모용부(慕容部)가 우문부(宇文部)를 정벌하자 우문부의 일부가 달아나 송막[松漠 : 현재의 시라무렌(西拉木倫) 및 랴오하(老哈河)강 일대의 천여 그루 송림 지대]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는데, 이 때 이들의 명칭이 거란, 고막해 등이었다.133)
그런데 『위서(魏書)』에는 북부여의 후예들인 두막루(豆莫婁 또는 달말루 : [더모로?])가 실위의 동쪽에 살았는데 『신당서』에서는 “고구려가 부여를 멸하여 유민들이 나하(那河: 현재의 눈강과 제1송화강)를 건너 그 곳에 거주했다.”(『新唐書』「東夷傳」)고 한다.
즉 부여의 후예(두막루)가 실위의 거주지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말이다.134) 그런데『위서』에서는 “거란, 고막해(실위), 두막루의 언어가 같다.( 『魏書』「室韋傳」)”고 한 것이다. 언어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부여 및 고구려(부여의 별종) 등과 이들 실위가 같은 종족이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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