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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04 12:47
[한국사] 대방국과 대륙백제 - (고이왕)
 글쓴이 : 꼬마러브
조회 : 2,139  

<송서> 백제국은 본디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었으며, 그 뒤에 고려는 요동을 공략하여 가지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가지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던 곳을 일컬어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 위는 대륙백제를 기록한 대표적인 중국측 기록입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자 백제는 요서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한 시기를 알면 백제의 요서 공략 시기를 알 수 있겠지요.


저는 이러한 추측에 따라 <삼국사기>의 고구려와 백제의 기록들을 살펴보았고, <송서>와 교차검증되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삼국사기> 동천왕 16년(서기 242년), 왕은 장수를 보내 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 그리고 4년 후 백제의 기록


<삼국사기> 고이왕 13년(서기 246년)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삭방태수 왕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들을 돌려주었다.


-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두 기록의 시차는 고작 4년차입니다. 위의 <송서>의 기록과 일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겁니다.


혹여,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낙랑을 습격하여 뺏었다는 기록과 <송서>의 백제의 요서 공격이 어떻게 이어지는 거죠?”


예전부터 주장해 왔던 저의 주장을 보시면 알겠지만 저는 한사군이 요서에 있었음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위의 백제 기록은 요서를 공격한 기록이 되는 것이고 <송서>와 일치하는 겁니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삼국지>에 나옵니다.


<삼국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했는데,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잘못 옮겼다. 그러자 신지가 한(韓) 백성들을 격분시켜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을 멸망시켰다.


- 위의 삼국사기 백제의 기록과 비교해 보십시오.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기록이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대방태수 궁준이 삭방태수 왕준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즉, 삼국지에 나오는 한은 백제이고 신지는 고이왕입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한반도의 정세를 잘 몰랐기 때문에 백제를 마한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을 멸망시켰다는 <삼국지>의 기록은 딱 봐도 중국측의 왜곡이지요. 결론적으로 당시 백제의 고이왕은 대방군과 싸워서 이긴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건 백제가 대방과 싸워서 이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당시 백제와 대방군의 관계가 서로 적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여기서 이상한 점이 생깁니다.


다음은 고이왕의 아들인 <삼국사기> 책계왕조의 기록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가 대방을 치니 대방에서 우리에게 지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 왕의 딸 보과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방은 우리와 장인과 사위 관계의 나라이니 그 청을 듣지 않을 수가 없다" 하여 드디어 군사를 내어 지원하였다.


- 앞서 말씀드렸다 시피 책계왕은 고이왕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는 책계왕이 대방 왕의 딸인 보과와 혼인하였으며 책계왕이 대방을 지원하였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만약 대방이 한사군의 대방군이라면 모순점이 생기는 겁니다. 고이왕 시기 백제와 대방군은 서로 적이었고 백제에 의해 대방태수 궁준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고이왕의 아들인 책계왕이 대방 왕의 딸과 혼인했지요. 책계왕이 대방 왕의 딸 보과와 혼인 한 것은 고이왕 때인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고이왕 때 백제와 대방군은 서로 적이었습니다.


즉, 백제와 대방은 서로 사돈끼리 싸운 것이고, 보과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시집간 것이며 고이왕은 자신의 사돈을 죽인 것이 됩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모순은 해결할 수 있는 저의 답은 이렇습니다. 책계왕이 지원한 대방은 중국의 대방군이 아니라 한반도의 대방국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앞의 고이왕의 기록의 대방은 중국의 대방군을 이야기 합니다.


마지막 결론입니다. 고이왕 시기 백제가 공격했던 낙랑군은 요서의 낙랑군이고, 이는 <송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즉, 다시말해 백제는 고이왕시기 대륙에 영토를 마련한 것으로 정확한 시기는 앞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서기 246년이다.


<삼국사기> 고이왕 13년(서기 246년)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삭방태수 왕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들을 돌려주었다.


고이왕 시기 백제의 대륙 영토 (발그림 ㅈㅅ)

고이왕.png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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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러브 17-06-04 12:48
   
사실, 추론하는 글을 길게 썼었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서 생략하고 간략화했습니다. 필력이 딸리더라도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꼬마러브 17-06-04 13:02
   
참고로 지도의 그림에 대해서 설명드리면

이번 <고이왕>편에 이어 나중에  <분서왕> 편을 쓸 것인데,

미리 말씀드리면, 뒷날 분서왕 7년인 서기 304년에 백제는 낙랑군의 서쪽 현을 점령한 것으로 보아 백제의 해외영토는 낙랑군의 서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낙랑군은 지금의 요서 지방, 즉 난하의 동쪽에 위치했으므로 백제의 해외영토는 난하 서쪽으로 비정됩니다. (고대의 요서지방) 지도의 그림도 이러한 추론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 대륙백제 지도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46193&sca=&sfl=wr_subject&stx=%EB%B0%B1%EC%A0%9C&sop=and
목련존자 17-06-04 12:49
   
꼬마러브님
평양이 백제의 거점이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봐도 아주 멋진 고대사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화이팅!!
     
꼬마러브 17-06-04 14:18
   
감사합니다. ㅎ
비좀와라 17-06-04 13:28
   
<北史>

"동명의 후손 구태(仇台)는 어질고 신의가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우고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얻어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처음에 백(百) 집의 사람을 거느리고 강을 건넌 까닭에 백제(百濟)라 한다.”

<수서(隋書)>

"구태(仇台)가 공손도의 딸과 결혼하여 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있다. "

<삼국지 위서 부여전>

공손도가 해동을 점거하고 그 세력을 넓히자,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요동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여, 공손도는 부여가 두 나라 사이에 있으므로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으로서 그 아비는 우태(優台)이니, 북부여왕 부루(夫婁)의 서손(庶孫)이며, 어미는 소서노(召西奴)니 졸본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우태에게 시집 와서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운 다음 과부로 있던 소서노를 취하여 왕비를 삼고 비류 등을 친아들과 같이 대우하였다.”

김부식은 백제(百濟)의 시조를 우태(優台)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

古記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가 혹은 주몽, 혹은 우태라 한다.”라고 하였다. 개로왕(蓋鹵王)이 위(魏) 나라에 올린 표문(表文)에, 고구려의 근원이 부여로부터 나왔다는 말이 있고, 또 온조의 성이 고(高)를 따르지 않고 부여씨를 따랐으니 우태(優台)임이 분명하다. <북사(北史)>나 <수서(隋書)>는 대개 <후한서(後漢書)>의 그릇된 것을 인용한 것이 많다. 따라서 공손씨(公孫氏)와 백제(百濟)의 연관성은 없다고 보여진다.

결론은 책계왕의 부인은 대방군과 관련이 없고 잘 못된 기록일 수 있습니다.
     
꼬마러브 17-06-04 13:52
   
예. 그러므로 저는 책계왕의 부인이 대방군과 관련이 없는 한반도의 대방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촐라롱콘 17-06-04 13:30
   
[[<삼국지>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했는데,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잘못 옮겼다. 그러자 신지가 한(韓) 백성들을 격분시켜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을 멸망시켰다.

- 위의 삼국사기 백제의 기록과 비교해 보십시오.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기록이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대방태수 궁준이 삭방태수 왕준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즉, 삼국지에 나오는 한은 백제이고 신지는 고이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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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의 기리영을 공격한 '한'을 주도한 세력은 마한의 주도국인 '목지국'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 기리영전투에서 큰 타격을 받은 여파로 이후 마한에서의 목지국의 위상은 급격히 쇠퇴하고.....
반면에 이후에는 백제가 마한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부상했다는 것이 정설인 것 같은데....
 
또한 기리영전투를 교훈으로 당시 백제의 고이왕은 낙랑-대방과 충돌을 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낙랑-대방의 종주국인 진나라에 보내는 서신에 스스로를 마한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만.....
     
꼬마러브 17-06-04 13:54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마한은 이미 백제 온조왕 시기에 멸망하였습니다. 설사 마한이 아직까지 잔존해있었다고 하더라도 세력은 약해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위의 중국과 싸웠다는 한(韓)을 마한의 목지국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없어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삼국지>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이 서로 유사하므로, 둘이 같은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삼국사기> 고이왕 13년(서기 246년)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삭방태수 왕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들을 돌려주었다.
 
- 여기서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쳤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246년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고구려의 왕은 11대 동천왕이고요.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알 겁니다.

<삼국사기> (동천왕) 20년(서기 246) 위나라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에서 나와 침입하였다. 임금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에서 맞아 싸워 이기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병사를 이끌어 양맥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겨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 즉,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던 틈을 타 백제의 고이왕이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것 - 다시 말해 백제가 낙랑군을 공격한 시기가 -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시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과 같은 사건인 <삼국지>에 나오는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시킨 것 또한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시기와 같은 시기라고 할 수 있지요. 참고로 <삼국지>에서는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시기가 서기 244년이라고 나옵니다. 그럼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서기 246년이며 <삼국지>에서는 서기 244년인 것입니다. 불과 2년의 시차라는 것이지요.

시간도 비슷한데다 내용도 유사하니..
이를 통해 둘은 같은 사건을 가르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필합 17-06-04 13:32
   
삼국사기의 기록을 잘못된다고 생각하는건 잘못이 아닐까요? 자국의 역사를 기록한사람이 정확한거지
다른나라사람이 다른나라 역사를 기록한것이 정확하겠슴가 삼국사기를 기본으로 하고 교차해석한
꼬마러브님 글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꼬마러브 17-06-04 14:12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외국의 사서로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차선책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사서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정확함이 당연하고.. 우리나라 사서가 없을 경우에만 불가피하게 외국의 사서를 이용해 역사를 바라보는 겁니다.
비좀와라 17-06-04 13:50
   
(三國志 魏書 韓傳)

건안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폐한 땅을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으로 삼고 공손모, 장창등을 보내어 유민들을 불러 모으고, 군대로 韓濊를 벌하니 옛 백성들이 차츰 다시 돌아왔다.

대방군은 요동태수 공손강이 고구려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낙랑군 북쪽을 포기하고 낙랑군 남쪽에 세운 군현 입니다.

공손공을 겁박하여 지위을 빼앗은 공손연이 오와 결탁하려 하자 위(魏) 경초(景初) 2년(238년)에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은 우금(牛金), 호준(胡遵) 등과 보기(步騎) 4만을 이끌고 경도(京都-수도)를 출발하여 공손연(公孫淵)의 치소 요동군 양평(襄平)을 공격 합니다.

여기서 잠깐 공손연의 치소인 양평(襄平)의 위치가 굉장히 중요한데 사마선왕(司馬宣王)은 “경도(京都-안양)을 출발하여 고죽(孤竹)을 지나고 갈석(碣石)을 넘어 6월에 요동(遼東)에 도착하여 요수(遼水)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는데 후세사가들은 양평(襄平)을 현재의 요양이라고 비정합니다.

<수서>

 “환도(丸都)에서 군마들에게 꼴을 먹이고, 요수(遼水)에서 군사들을 사열한 다음 바다 밖에서 하늘의 주륙을 행하여서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듯한 고통을 받고 있는 백성들을 구해 줄 것이다.”

여기서 환도(丸都)는 요수(遼水)를 건너기전에 군마를 휴식시키는 장소로 표현한바, 환도(丸都)는 요하(遼河) 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손연(公孫淵)의 도읍지 양평(襄平)이 고구려(高句麗)의 동쪽에 위치하게 되는 이상한 각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록상으로는 양평(襄平)은 현재의 열하승덕 양하 부근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유는 갈석(碣石)을 넘어서 요수(遼水)에 이르게 되었다는데, 임유관에 있는 갈석(碣石)이 아니라 현재의 북경서남쪽 영수지역에 있는 갈석(碣石)을 지칭한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병도는 기존의 요양설을 갈석이 황해도 지명 이라고 주장하며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대방군 이건 대방국이건 황해도에 없었습니다.

백제의 초기 위치는 요동이나 아님 북경 지방이고

 ‘흠정만주원류고’ 에서는 양나라 천감(天監)시대에 한반도로 이동 하였다고 봅니다.
천감이란 중국 양나라 무제의 연호로 천감 1년은 서기 502년이며 신라 지증왕 3년, 고구려 문자왕 11년, 백제 무령왕 2년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 주장의 근거는 ‘양서(梁書)’ 백제열전에 “진(晉)나라 때 요서, 진평 두 군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가 남제(南齊) 천감시대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지자 그 후 남한(南韓)지역으로 옮겨갔다.” 입니다.
     
꼬마러브 17-06-04 14:17
   
만주원류고는 백제가 존재했던 당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사서이기 때문에, 백제의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서는 가치가 낮은 사료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수서>와 같은 중국사서에서 대륙에 백제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백제의 대륙진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가장 타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위구르 17-06-04 15:58
   
만주원류고 읽어보셨는지는 모르겠는데 만주원류고는 단순히 그들 청나라 사학자들의 생각만을 담은게 아니라 고대부터 유래된 사서들에서 관련 기사들을 싣고 그것들을 종합해 기술하고 마지막에 자신들의 견해를 덧붙이는 형식입니다. 그 책은 청나라 역사학자들의 실증학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실증주의를 가지고 만주족이 대륙백제에 대해 쓴 것이라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Marauder 17-06-04 15:27
   
나제동맹 당시 성왕이 결혼동맹을 하고도 통수를 당했고 다시 결혼동맹을 재시도하려했으며, 확실한건 아니지만 의자왕은 어머니의 나라를 공격하였으니 그것하나만으로 분리하기엔 결정적이라고 생각되진 않네요... 반대로 인질로 주었을 수도 있죠.
흑요석 17-06-04 17:13
   
이래서 경기도 충청도에 한족 유전자가 높은 비율로 나오는 건가?

대륙에 있으면서 한반도로도 많이 유입되고

아예 한반도 내로 옮기면서도 중국인들 유입이 많았겠네요.
     
꼬마러브 17-06-04 18:38
   
대륙에시 한반도로 백제가 이주했다는 설을 채용한다면 그렇게 설명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굳이 그 설을 채용하지 않더라도 저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백제가 요서를 경략하였으므로.. 대륙의 한족들이 경기도-충청도로 유입될 수도 있겠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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