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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26 22:58
[한국사] 고려 천리장성과 장성 밖 전답 11,494 경의 미스테리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2,854  

이 기록은 <고려사 세가>에는 나오지 않고 <동국통감>에서 확인되는 자료이다.

고려사 문종 대의 여타 기록과 함께 고려 전성기의 강역이 만주까지였을 알려주는 방증 가운데 하나로 널리 활용되는
기록이지만

나는 이 기록을 지난 고려 서북계 고찰에서 활용하지 않고 일단 제외하였다.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서북로 병마사가 아뢰기를,
“장성(長城) 밖에 개간한 전답 1만 1천4백94경(頃)은, 청컨대 가을 수확을 기다려 군량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제가(制可)하였다.

<동국통감> 문종 27년(1073년) 2월

11세기 <고려사> 세가에는 994년 성종 이래 강동 6주를 농경지로 활발히 개간한 기록과 함께 거란의 압록강 변 성보와 다리 축조로 그곳 고려 백성들이 농사에 불편을 겪는다 하여 고려가 거란에 항의한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 천리장성은 학계 통설에 따라 현
 압록강 하구로부터 함경남도 바닷가까지 이어진 것이다.

학계 통설에서는 공민왕 대의 일시적 점유를 제외하고는 고려 전체 시기 500여 년에 걸쳐 현 압록강에 그 영토가(압록강 하구 제외) 미치지 못 했고 압록강까지 우리 영토가 도달한 것은 조선 세종 대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앞서 이미 984~991의 성종 대에 압록강 변 성보 축조와 여진족 퇴치 사실을 고려사 세가 기록에서 찾아서 이러한 학계 통설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고려 덕종 2년 (1033년) 기사의 관성(關城)에 주석으로서 제시된, 학계 통설이 설명하는 천리장성 설명은 다음과 같다.

[덕종 2년(1033) 8월 옛 국내성(國內城)의 경계에 있던 압록강(鴨綠江) 하구의 바닷가부터 관방[關防·關城(관문·국경요새지)]시설을 설치하기 시작한 사실을 말한다. 고려조정은 거란과 여진의 남하에 대비하여 현종 때부터 북쪽 변방의 요새지에 부분적으로 성책을 축조하였으나, 덕종 2년부터 서해에서 동해까지 1천 리나 넘는 소위 천리장성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하여 정종 10년(1044)에 완성하였다. 그 지역은 위원진(威遠鎭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흥화진(興化鎭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피현군 백마 동쪽)·정주(靜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영삭진(寧朔鎭 : 지금의 평안북도 천마군 고영삭)·운주(雲州 : 지금의 평안북도 운산군)·안수진(安水鎭 :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시 조양)·청새진(淸塞鎭 : 지금의 자강도 희천시)·평로진(平虜鎭 : 지금의 자강도 동신군 신풍)·영원진(寧遠鎭 : 지금의 평안남도 녕원군 녕원)·정융진(定戎鎭)·맹주(孟州 :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군)·삭주(朔州 : 지금의 평안북도 삭주군) 등지를 거쳐 요덕진(耀德鎭 : 지금의 함경남도 요덕군 요덕)·정변진(靜邊鎭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 영흥)·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 영흥) 등지까지 이르렀으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尺)이었다. 이 장성의 완성 결과, 고려의 북쪽 국경선이 획정되었으며, 여진 및 거란과의 문화적 구분선도 가지게 되었다. 이 관방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82, 병지, 성보(城堡), 정종(靖宗) 참조. 『고려사절요』 권4, 덕종 2년 8월.]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623929&cid=49629&categoryId=49629

그러나 고려사에서 장성이라는 것은 서북로에 정종 원년인 1035년에 쌓게 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정종 원년(1035). 서북로의 송령(松嶺) 동쪽에 장성(長城)을 쌓아 변방 외적의 침구를 막게 하였다. 또 재전(梓田)에 성을 쌓고 민(民)들을 이주시켜 인구를 채웠다.<고려사 병지 성보>]

(뿐만 아니라 해당 성보의 정종 기록에는 장성을 완성했다는 식의 그 어떤 표현도 없다 사실 고려는 전 시기에 걸쳐, 특히 11세기에는 성과 보를 계속 쌓았다. 정종 이후에도 여전히 활발히 말이다.)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674055&cid=49630&categoryId=49630

즉 동국통감 문종 27년 기사에서 서북면 병마사가 보고한 "장성 밖 전답 11,494경"은 바로 저 1035년에 서북로에 축조한, 혹은 축조케 한 장성을 가리키는 것으로밖에 달리 볼 수 없다

학계 통설에서 설하는 강동 6주와 천리장성의 위치는 우리가 학창시절 국사교과서를 통해 배운 바 대로 다음과 같다(링크 참조)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056953&cid=40942&categoryId=31682

문종 27년 기사의 전답 11,494 경의 크기는
조선 세종 대의 기준으로 소급시
대략 30 만 km²로 한반도 전체 먼적인 약 23 만 km²보다 넓다

조선 세종 대의 1경의 크기
https://m.blog.naver.com/okyes0612/220142283545

이 기사의 진위는 무엇이며
이 곳은 어디겠는가?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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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12-26 23:03
   
면적 추산이 틀렸다면 알려주세요
감방친구 17-12-27 02:24
   
내용 정정합니다
전답 11,494 경 기사는
<고려사>에도 나옵니다
다시 찾아보니 세가 문종 27 년 기사에는 없으나 병지 둔전 항에 있습니다

27년 4월. 서북로병마사(西北路兵馬使)가, “장성 밖에 개간한 전(田) 11,494경(頃)에서 나오는 곡식은 가을철 수확 후에 군의 비축 물자로 삼도록 하십시오.”라고 건의하자 왕이 제가(制可)했다.

<고려사 병지 둔전 문종 조>

과제는 두 사서에서 확인되는 11,494 경의 면적 추산입니다
조선 세종 대 기준으로 환산 시 약 30만 제곱 킬로미터로 한반도 전체 면적보다 넓습니다
감방친구 17-12-27 06:00
   
중국 진시황 시대 관련 자료로 보는 1경(頃)

"현대의 장교쯤에 해당하는 갑사(甲士)의 머리 1개를 베어오면 작위 1급, 양전(良田) 1경(頃), 주택을 지을 수 있는 토지 8무(畝)를 하사받고, 작위가 없는 서자(庶子) 한 명을 부릴 수 있었으며,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됐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상앙은 군사 5인을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만들어, 전장에서 한 명이라도 탈영하면 나머지 4명이 처벌받는 연좌제를 실시하였으나, 적의 수급(首級)을 베어온 자는 면죄해줬다. 또한 군사 5인마다 둔장(屯長)을, 100인마다 백장(百將)을 두어 전쟁에서 적의 머리를 베어오지 못한 부대의 둔장과 백장은 아무리 귀족이더라도 참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 베어온 적의 머리를 장군에게 제출하여 문제가 없다면 그에 따른 작위를 얻을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현대의 장교쯤에 해당하는 갑사(甲士)의 머리 1개를 베어오면 작위 1급, 양전(良田) 1경(頃), 주택을 지을 수 있는 토지 8무(畝)를 하사받고, 작위가 없는 서자(庶子) 한 명을 부릴 수 있었으며,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됐다. 만약 갑사의 머리 5개를 베어온다면, 자신 고향의 다섯 가구의 사람들을 부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앞서 적 갑사의 머리를 베어 온 자들은 관리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갑사의 머리 하나에 55석, 두 개에 100석의 녹봉을 받는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또한 20등급의 작위를 두어 군공에 따라 작위를 부여하였으며, 작위가 있는 자만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토지와 집의 크기, 노비의 수, 무덤의 장식 등 많은 분야에서 철저하게 작위의 등급에 따라 제한하였으며, 2급 이상의 작위는 면죄부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02&aid=0002036951
     
감방친구 17-12-27 06:04
   
조선 세종 시대 척도 기준

1무 = 240보 = 약 78.6평
1경 = 100무 = 약 7,860평
감방친구 17-12-27 06:10
   
常之以河源衝要,欲加兵戍之,而轉輸險遠,乃廣置烽戍七十餘所,開屯田五千餘頃,歲收五百餘萬石,由是戰守有備焉。

"흑치상지가 둔전 5천여 경(頃)을 개간하여 한 해에 500만여 석을 거두어들였다"

<자치통감 권202>
감방친구 17-12-27 06:32
   
고려 문종 기록의 "장성 밖 1만 1천 494 경"은 약 17만 7천 547 k㎡
(한반도 면적은 약 23만 k㎡)

"삼국시대에서 고려 때까지의 1경의 넓이는 15,447.5㎡"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중국 주공(周公)이 처음으로 제정한 도량형의 면적 단위로, 길이가 19.496㎝인 주척 64만평방척으로 그 넓이는 24,326㎡에 해당된다.

이 제도가 한(漢)나라 고조에 의하여 한나라 전토(田土)의 면적 단위명으로 사용되었을 때는 주척 길이가 길어져 1경을 주척 6십만평방척으로 하여야 했다. 따라서 1보(步)는 25평방척, 1묘(畝)는 240보, 1경은 1백묘로 정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경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실질적인 넓이는 1결(結)과 같아 결의 별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 때까지의 1경의 넓이는 15,447.5㎡였다.

세종 18년(1436)∼26년(1444)까지 우리나라에서도 경묘보법(頃畝步法)이 일시적으로 실시되었는데, 이때의 1경은 세종 주척에 따르면 1보=5척, 1묘=240보, 1경=1백묘로서 1경의 넓이는 25,945.9㎡로 되어 있었다. 이는 중국의 1경보다는 약 6.7%가 넓다.


한민족문화대백과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566364&cid=46637&categoryId=46637
     
도배시러 17-12-27 07:04
   
11,494 경 X 고려 0.015447 = 177.5 km²  방450리
11,494 경 X 세종 0.0259459 = 298.2 km²  방750리
          
도배시러 17-12-27 07:08
   
방450리 서울~ 강원 태백시 , 방750리 서울~울산
               
감방친구 17-12-27 07:15
   
그 정도 크기면 대략 어느 정도인가요?
강원도 정도 크기가 될까요?

30만 제곱킬로미터면 한반도보다 큰데
경작 면적을 고려하면 말이 안 되는 크기라서
저 혼자 이 새벽에 이리저리 이상하다 하며 궁리하고 있었네요
칼리S 17-12-27 06:47
   
조선 세종때는 수등이척법을 사용했기에 문종대와는 똑같지 않겠고, 학설에도 넓이가 다양하게 주장되는지라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님이 말한 대로 1경 = 7860평 계산하면요

1 경 = 7,860 평 = 0.025983 km²

11,494 경 = 90,342,840 평 = 298.654017 km²

대충 300 km²니깐 딱 정설대로 장성 밖 평안도 여분의 밭 넓이 정도 되네요.

아무리 산수를 못해도 좀 이성을 가졌으면 논리적으로 생각 좀 해 봅시다. 한반도 넓이의 경작지면, 그 경작지를 둔전으로 경영할 병력은 도대체 얼마나 있어야 하겠습니까? 설마 미국처럼 기계로 농사짓는걸 상상하셨나요? ㅋㅋㅋ 가뜩이나 한반도 북부지역은 인구도 안습이고, 게다가 둔전인데요.

상식적으로 먼저 생각을 좀 해보고 사료분석을 하세요.

그리고 좀 더 다양한 토론을 하고싶으시면 네이버 부흥같은 전문 역사카페 가셔서 하세요. 거기분들이 여기 가생이 유저들보다 역사쪽으로는 훨씬더 나으니깐요.
     
감방친구 17-12-27 07:04
   
11,494×15,447m²
          
칼리S 17-12-27 07:08
   
그냥 님이 쵝옵니다. ㅋㅋㅋ 인정합니다.
               
감방친구 17-12-27 07:12
   
위에 글에 썼듯이
추산이 틀리면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잘 모르니 알려달라 하는 것이죠
비웃을 일이 아닙니다
감방친구 17-12-27 07:21
   
11,494경은 대략 서울 면적의 절반 정도 넓이군요
칼리S 17-12-27 07:22
   
냠 쉽게 님이 쓴 고려 장성밖의 전답 11,494경의 넓이는 대전광역시의 넓이보다도 작습니다.

즉 님이 쓴 글은 현 정설이 맞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적당하다는 겁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감방친구 17-12-27 07:27
   
이보세요
제가 추산한 게 저 스스로도 틀렸다고 생각하니 이 새벽에 이리저리 찾아보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틀린 걸 알려줘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학계 통설과 제 견해를 견주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 본 글에서 밝혔 듯이
잘 몰라서, 불확실하기에 고려 서북계 고찰에서 문종 대의 이 기록을 제외했으니까요
도배시러 17-12-27 07:24
   
지도에 표시해뒀으니 지도보고 하셔요
감방친구 17-12-27 07:37
   
제가 서울대 못 간 이유가 역시 여기에 있었네요 ㅎㅎㅎ
Marauder 17-12-27 10:06
   
개인적으로 너무커서 이상하다고 생각은했는데... 역시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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