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동경=양평 설에 대한 의문에 답합니다.
《요사》<지리지·동경도>에 보면 “요나라 동경은 고구려 광개토왕이 평주목(平州牧)으로서 거주한 곳(즉, 양평)이며, 북위의 태무제(묘호는 世祖)가 (평주목의 치소인 양평에) 견사하여 이른 곳, 즉 평양성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이 기사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위서》<고구려전>에 의하면 북위의 태무제가 보낸 이오(李敖)라는 사자가 도착한 곳은 선왕(先王) 광개토왕이 거주하던 양평이 아니라 한반도의 평양으로 옮긴 뒤였다.
장수왕은 양평성에 있다가 즉위 15년 평양으로 옮기고,
이오는 장수왕 23년에 평양에 도착하는 것이다.
양평이 아닌 평양에 도착한 것이다.
이 천도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요사 편찬자는 《위서》와 《梁書》 등을 참조하여 광개토왕 때 거주하던 양평이 장수왕 때에도 지속되고, 그곳(양평)을 고구려는 평양으로 칭한다고 오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사 편찬자의 오해에 기반한 기록이기는 하더라도, 그 방점은 당시 평주목의 치소(양평)에 있고, 동경=양평 설은 여기에 기반하는 것이다.
청대 학자들이 말하는 동경=요양 설은 왜 잘못되었는가?
《요사》에서 『요양고성(遼陽故城)』이란 말은 동경이 있던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한 요동군 요양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왜냐 하면 《요사》가 한나라의 옛 현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漢故遼陽縣地』(橫州)·『漢長岑縣』(崇州)·『本漢平郭縣』(興遼縣), 또 『本渤海 囗囗城』, 또는 本高麗囗囗城』 등으로 그 소속 나라를 먼저 밝혔기 때문이다.
『漢故遼陽縣地』(橫州)의 예를 보자.
《요사·지리지1》 두하군주(頭下軍州) 조에 횡주(橫州)가 있는데 “橫州. 國舅蕭克忠建。部下牧人居漢故遼陽縣地,因置州城。在遼州西北九十里,西北至上京七百二十里。有橫山。戶二百.”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하군주(頭下軍州)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頭下軍州 [二七]頭下軍州 原無此目。按「頭下軍州」皆因諸王、外戚、大臣私城所建,與以上州軍不盡同。國志別出「投下州」一項。今仿下文「邊防城」例,增此一目。
頭下軍州,皆諸王、外戚、大臣及諸部從征俘掠,或置生口,各團集建州縣以居之。橫 帳諸王、國舅、公主許創立州城,自餘不得建城郭。朝廷賜州縣額。其節度使朝廷命之。刺 史以下皆以本主部曲充焉。官位九品之下及井邑商賈之家,征稅各歸頭下;唯酒稅課納上 京鹽鐵司”.
그런데 이 국구(國舅)인 소극충건(蕭克忠建)의 부하 목인(牧人)들이 한대(漢代)의 옛 요양현지에 살고 있어서 횡주성(橫州城)을 두게 되었는데, 요주(遼州)의 서북쪽 90리에 있고, 서북쪽으로 720리를 가서 上京에 이른다고 하였다.
요나라의 요주(遼州)는 어느 곳인가?
그 치소(治所)가 요빈현(遼濱縣)인 점으로 보아 요하 이서에 있음은 확실하다.
요하 이서에 있는 요빈현의 서북쪽 90리가 횡주성, 즉 한(漢) 요양현이라는 의미이다.
‘遼陽故城’이 橫州를 설치한 ‘漢故遼陽縣地’가 아닌 이유이다.
《원사》<지리지>에도 『요양고성(遼陽故城)』이란 말이 등장하는데 심양로가 교치(僑治)하던 곳이다.
이곳도 한 요양현을 말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심양은 정동행중서성의 치소로 되기 전에 『요양고성』에서 교치(僑治)하였다.
이곳에는 고려에서 투항한 홍복원에게 고려군민만호를 제수하고 함께 투항한 고려군민을 요양과 심주에 분산시켜 거주케 하고 처음으로 성곽을 쌓고, 관리를 두어 『요양고성』에서 교치한 것이다.
즉 홍복원이 고려군민만호로서 다스리던 《고려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심』 지역인 것이다.
이 지역이 동경일 수는 없다.
《요사》는 원대에 편찬되었다.
원대의 요양에 있는 『故城』이 즉 遼代의 동경이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원사》<심양로>에 등장하는 『요양고성』은 《원사》가 편찬된 明代의 요양, 즉 요동도지휘사사가 있는 『故城』에서 홍복원이 고려군민만호로서 『요심』의 군민을 다스렸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