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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11 08:54
[한국사] 책"고조선으로 가는 길" 식민사학자들은 조선통독부가 통설로 확정한 '낙랑군 평양설'을 따르고 있다.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1,609  









◎ 조선총독부가 통설로 확정한 ‘낙랑군 평양설’


오늘날 강단사학계 통설은 중국 식민기관인 낙랑군이 BC 108년부터 AD 313년까지 420년 동안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고 한다. 이 ‘낙랑군 평양설’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일방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발표한 유물들을 근거로 주장하였으며, 강단사학계가 비판 없이 수용하여 해방된 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통설로 행세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가 한국사를 연구한 목적은 역사 진실을 밝히려는데 있지 않았다. 불순한 의도, 즉 한반도 식민통치를 쉽게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한국사를 연구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통설로 확정한 ‘낙랑군 평양설’은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과연 강단사학계 주장처럼 중국 식민기관인 낙랑군이 전한과 후한 그리고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에 이르기까지 420년 동안 한반도 평양에 있었을까? 이 문제를 풀기위해서는 먼저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진서』등 낙랑군이 존재하던 시기의 중국 정사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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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서』는 ‘낙랑군이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고 기록



먼저 중국 서진시대 정사인 『진서』를 보자. 『진서』(사료 A-1)는 아래와 같이 낙랑군이 소속된 서진의 평주가 ‘우공 기주지역’이며, ‘주나라 유주지역’이며, ‘한나라 우북평군’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平州. 按, 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莵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진서』권14, 지제4, 지리상, 평주



위 『진서』(사료 A-1)는 낙랑군이 속한 공손씨 요동과 위나라 평주 및 서진의 평주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 유주’이며, ‘한나라 우북평군’에 속했다고 하였다. 중국 정사 가운데 낙랑군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혀놓은 최초 기록이다.


‘우공의 기주’는 하나라(BC 2070년경 ~ BC 1600년경) 우임금이 중국 천하를 9개주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기주冀州이다. 『사기정의』(사료 A-2)는 ‘우공의 기주’를 아래와 같이 주석하였다.



사료 A-2 : “치수와 공부를 살펴보면 제도(帝都, 기주)로부터 시작했다. 황하는 승주 동쪽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남으로 화음에 이른다. 또 동쪽으로 회주 남쪽에 이르고, 또 동북쪽으로 평주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동하의 서쪽, 서하의 동쪽, 남하의 북쪽이 모두 기주이다(按理水及貢賦 從帝都爲始也. 黃河自勝州東, 直南至華陰, 卽東至懷州南, 又東北至平州碣石山入海也.東河之西, 西河之東, 南河之北, 皆冀州也).”  『사기』‘권2 하본기’



사료 A-2에 의하면 ‘우공의 기주’는 황하(동하, 서하, 남하)로 둘러싸인 현 중국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이다. 중국 남송시대 1209년 제작된 고지도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 기주지역이 잘 표시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주나라 유주’나 ‘한나라 우북평군’도 동쪽으로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넘지 못하였다.



‘우공의 기주’나 ‘주나라 유주’ 및 ‘한나라 우북평군’ 공통분모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라는 것은 중국 고대사를 조금만 연구해보아도 알 수 있으며, 현재 한‧중‧일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진서』(사료 A-1)에 기록된 서진 평주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며, 평주에 속한 낙랑군도 당연히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아래 <그림 1> 참조)



이와 같이 중국 서진시대 정사인 『진서』(사료 A-1)를 통하여 한나라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에 이르기까지 420년 동안 낙랑군이 현 중국 하북성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사학계와 중국 동북공정에서는 서진 평주 위치를 아래 <그림 2>에서 보듯이 현 중국 요령성과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고 있다.



강단사학계 통설처럼 평주 위치를 비정하면, 가마득한 하나라(BC 2070년경 ~ BC 1600년경) 우임금 시절부터 한반도 북부가 중국 땅이었으며, 한나라 우북평군이 한반도 평양에 설치되었다는 말과 같다. 그러면 한나라 우북평군 동쪽에 있었던 요서군과 요동군은 동해 바다 속에 있어야 한다. 현 강단사학계 통설은 중국 정사인 『진서』(사료 A-1)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 역사왜곡이다.

 






◎ 『삼국지』는 고구려 강역을 사방 2천리로 기록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진서』(사료 A-1)에 따르면 한나라로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시대에 이르기까지 평주와 낙랑군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평주는 중국왕조의 가장 동쪽에 설치된 행정구역이며, 그 동쪽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 현 중국 요령성 지역은 모두 고구려 영토였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삼국시대 정사인『삼국지』(사료 A-3)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료 A-3 :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환도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 戶三萬).”    『삼국지』위서 30, 동이전, 고구려



위와 같이 『삼국지』(사료 A-3)는 3세기경 고구려 강역을 사방 2천리라고 하였다. 이 기록대로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를 찾아보자. 고구려 동쪽에는 옥저가 있었으므로, 고구려 동쪽 국경선을 대략 백두산 일대로 보더라도 백두산에서 서쪽으로 2천여 리를 가면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 경계인 칠로도산까지이다.(아래 <그림 1> 참조) 그러므로 『삼국지』(사료 A-3)에 기록된 고구려 강역은 한반도 북부와 중국 요령성을 모두 포함하는 지역이며, 『진서』(사료 A-1)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또 당시 고구려 수도는 동천왕(재위: 227 ~ 248)이 서기 247년 천도한 평양성에 있었다. 『삼국지』(사료 A-3)는 고구려 수도가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고 하였다. 『진서』(사료 A-1)에서 보았듯이 공손씨 요동지역이 서진의 평주가 되었으므로 고대 요동은 하북성 지역이며, 동쪽으로 칠로도산까지였다. 하북성과 요령성 경계인 칠로도산으로부터 천여 리를 가면 현 중국 요령성 요양 일대가 된다. 이곳이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해당하며 동천왕 평양성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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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삼국지』에 기록된 3세기경 동아시아 정치체들 위치(저자『고조선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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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 『삼국지』에 기록된 3세기경 동아시아 정치체들 위치(강단사학계 통설)


 



그러면 강단사학계 통설에서 주장하는 중국의 위‧오‧촉 삼국시대 고구려 강역을 살펴보자. 위 <그림 2>에서 보듯이 요동군 동쪽 고구려 강역은 사방 2천리는 고사하고 사방 8백리도 나오기 어렵다. 강단사학계 통설은 중국 정사인 『삼국지』에 기록된 고구려 강역을 무려 1/5 이하로 왜곡‧축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지』(사료 A-3)는 당시 고구려 수도가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고 하였는데, 통설과 같이 요동군을 현 중국 요령성에 비정하면 고구려 수도 평양성은 옥저지역을 넘어 동해 바닷가에 있어야 한다. 현 강단사학계 통설은 중국 정사인 『삼국지』(사료 A-3) 기록과도 전혀 맞지 않는 역사왜곡이다.



혹시 『삼국지』(사료 A-3)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가 잘못된 기록일까? (위 <그림 1> 참조) 그렇지 않다. 수많은 중국 정사 기록을 통하여 교차검증 된다. 『후한서』‧『삼국지』‧『양서』‧『남사』에는 고구려 강역이 사방 2천리, 『북위서』‧『주서』‧『북사』‧『수서』에는 동서 2천리와 남북 1천리, 『구당서』에는 동서 3,100리와 남북 2천리, 『통전』에는 고구려 강역이 동서 6천리로 나온다. 특히 『통전』은 아래와 같이 시대별 고구려 강역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땅은 후한 시 사방 2천리였다. 위나라 때 남북이 점점 좁아져서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나라 때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리가 되었다(基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東西六千里).” 『통전』권 제185, 변방1, 동이 하, 고구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 강역은 신라, 백제와의 관계에 따라 남북은 2천여 리에서 1천여 리까지 좁아지기도 하였지만, 동서 길이는 2천여 리 보다 좁아진 적이 없었다. 즉 고구려 서쪽 국경선은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 경계인 칠로도산 보다 줄어든 적은 없었다. 그리고 고구려 전성기에는 강역이 동서 6천리로 현 중국 산서성 지역을 넘어 섬서성 지역까지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고구려 강역은 어떤가?


광개토태왕 이전 강역은 요령성 천산산맥을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구려 강역이 사방 1천리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구려 전성기 때도 현 중국 요령성 요하를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강단사학계는 중국의 수많은 정사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면 강단사학계가 고구려 강역을 『삼국지』(사료 A-3) 기록보다 1/5 이하로 좁게 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대 요동 위치를 잘못 비정했기 때문이다. 『진서』(사료 A-1) 기록에서 보았듯이 고대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며, 요동이라는 지명이 요령성으로 이동한 것은 중국 요나라(916 ~ 1125) 시대 이후이다.(필자의 저서 『고조선으로 가는 길』89~109쪽 참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일방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발표한 점제현신사비, 효문묘동종, 와당, 봉니 등의 유물을 근거로 ‘낙랑군 평양설’을 통설로 확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유물은 쉽게 이동‧교류‧왜곡이 가능하므로 역사지리를 확정짓는 핵심근거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조선총독부가 한반도 식민통치를 쉽게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한국사를 연구했음은 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선총독부가 일방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발표한 유물을 핵심근거로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사료선택과 역사해석이 아니다.




반면 중국 서진시대 정사인 『진서』는 648년 당나라 태종의 명으로 방현령房玄齡 · 이연수李延壽 등 20여명 학자가 편찬한 책이다. 이 시기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하여 절치부심하고 있을 때였다. 강단사학계 주장처럼 서진 평주가 현 중국 요령성과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면, 이보다 더 고구려를 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도 서진 평주를 하북성 지역으로 축소하여 기록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따라서 중국 정사인『진서』(사료 A-1) 기록은 낙랑군 위치를 밝히는 핵심근거가 될 수 있으며, 한나라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시대에 이르기까지 420년 동안 중국 식민기관인 낙랑군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지금 중국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유물들을 조작하여 통설로 확정한 ‘낙랑군 평양설’을 핵심근거로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한반도 유사시 북한지역에 군사를 주둔할 수 있는 명분을 착실하게 쌓고 있다. 동아시아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은 주변국을 침략하기 전에 먼저 그 나라 역사를 왜곡‧축소하여 침략의 명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현 강단사학계 통설인 ‘낙랑군 평양설’은 낙랑군이 존재하던 당시의 중국 정사 기록들과 전혀 맞지 않으며,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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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2 18-03-11 11:42
   
이런 모습을 보면, 강당이 깡단이 있다고 해야 하는지,,, 강단도 유사사학이라 해야 하는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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