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번강 대동강, 2번강 현 압록강, 3번강 현 청천강, 4번강 혼하, 5번강 대요하
6번강 난하, 7번강 대릉하, 8번강 조백하, 9번강 영정하 10번강 (황하북부 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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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의 위치를 찾을 때 중요한 것은 고조선과 중국 진·한(秦漢) 사이의 국경인 패수(浿水)의 위치다. 중국 후한(後漢:서기 25~220) 때 학자인 상흠(桑?)이 편찬했다는 ‘수경’(水經, 역도원이 수경에 주석을 단 '수경주' 라는 책은 근거거 매우 부족한 책이다...윤내현 교수는 수경주를 전면 부인하신다...이점 참고하고 읽자)에 패수가 나온다.
‘수경’은 중국의 137개 강에 대해서 서술한 책인데, “패수는 낙랑군 누방(鏤方)현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臨浿)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東入于海)고 말하고 있다. 패수는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다. 그런데 한·중·일 고대사학계는 패수를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등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라고 우긴다. 북위(北魏)의 역도원(酈道元:?~527)과 일본인 식민사학자들, 이른바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박사 등이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東入於海)는 ‘수경’ 원문의 ‘동’(東)자를 ‘서’(西)자로 바꾸어 한반도 북부의 강이라고 우겼기 때문이다. 후한 때의 학자 허신(許愼:58~147)도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패는 강이다.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東入海)고 거듭 말한 것처럼 패수는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다. 패수를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한반도 북부의 강으로 비정하면 안 된다.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만주 요동의 강에서 찾아야 한다.
1) 패수 동쪽에 요동군이 있다
패수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고조선과 진·한 사이의 국경일 뿐만 아니라 낙랑군의 위치를 말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1차 사료는 한(漢)나라의 정사인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다. ‘한서’ ‘지리지’와 그 주석은 고조선의 도읍지에 세운 것은 요동군 험독(險瀆)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요동군 험독현에 대해서 ‘한서’ ‘지리지’의 주석자인 응소(應劭)는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라고 말했다. 위만조선의 도읍지에 세웠다는 뜻인데,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성(王險城)에서 ‘험’(險)자를 따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 강가를 뜻하는 ‘독’(瀆)자를 덧붙여 ‘험독’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요동군 소속의 험독현이 압록강 안쪽이 아니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중국 동북공정에서도 요동군 험독현을 지금의 랴오닝성 안산시 태안읍 부근으로 비정한 것이다. 한·일 고대사학계만 여전히 고조선의 도읍지를 북한의 평양이라고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우기고 있는 중이다. 위만조선의 도읍지 왕험성에 세운 요동군 험독현에 대해서 ‘한서’의 다른 주석자인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말했다.
신찬의 말은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기본적인 방위를 제공한다. 낙랑군이 요동군 서쪽에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요동군 험독현을 랴오닝성 태안읍 부근으로 비정했으면 낙랑군은 요동서쪽에 위치해야 하는데, 낙랑군을 남쪽 평양으로 추정하였다. 동북공정, 즉 역사를 조작하려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사기’ 및 ‘한서’의 다른 주석자인 안사고(顏師古)도 “신찬의 설이 옳다”고 말했으므로 낙랑군은 지금의 랴오닝성 태안읍 서쪽에서 찾아야 한다.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이라면 그 동쪽 강원도가 요동군이라는 뜻이니 말이 되지 않는다.
▲ 성호 이익 영정. 이익은 낙랑군과 현도군이 모두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말했다.
2) 조선 후기 학자들도 “낙랑은 요동”
조선 후기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낙랑군이 평양이 아니라고 말하고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패수가 압록·청천·대동강 등이 아니라고 말한 것도 여러 사료를 검토한 결과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 20년(246)조는 조조(曹操)가 세운 위(魏)나라 유주(幽州:현 베이징)자사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략했다고 전한다. “위(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1만인을 거느리고 현도로 침범해서…낙랑으로 퇴각했다”는 것이다. 그가 퇴각한 낙랑이 지금의 평양이라면 관구검은 자신의 근무지인 베이징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고구려 강역 수천 리를 통과하거나 수십 척의 배를 건조해 서해와 발해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없는 반면 ‘삼국지’ ‘위서(魏書)’ 가평(嘉平) 4년(252)조에 관구검은 양쯔강 남쪽을 정벌하는 진남(鎭南)장군이 되어 오나라를 공격하고 있다.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이라면, 관구검과 위나라 군사들이 느닷없이 양쯔강 유역에 나타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성호 이익은 ‘조선사군’(朝鮮四郡)에서 관구검의 공격로와 퇴각로를 근거로 ‘낙랑군과 현도군은 모두 요동에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에서 “한나라 낙랑군 관아가 있었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의 평양이다”라고 갈파했다.
중화 이데올로기나 조선총독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1차 사료를 보면 낙랑군이 현재의 평양일 가능성은 없다.
3) 한사군을 한반도로 몰아넣어 조선의 강토가 줄어들었다
연암 박지원은 정조 4년(1780)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청나라 황실의 여름 별장인 열하(熱河:지금의 승덕(承德))를 방문하고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남겼다. 이 글에서 박지원은 이렇게 말한다. “오호라, 후세에 영토의 경계를 상세하게 고찰하지 않고, 망령되게 한사군의 땅을 모두 압록강 안쪽으로 몰아넣고 사실을 억지로 이끌어 구구하게 분배(分排)했다. 다시 ‘패수’를 그 안에서 찾아서 혹은 압록강, 혹은 청천강, 혹은 대동강을 패수라고 지칭했다. 그래서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의 위치를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리기 때문이다.”
서울신문 기사참조 및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