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가 과거에 매몰된다면 자기 본래의 인문학자로서의 책무를 방기하는 것이 된다.
인간이 역사를 연구하고 과거를 인식하고자 하는 목적은 현재 인간 자신, 더욱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역사가 자신과 역사가와 더불어 살고 있는 인류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즉, 실증주의가 학문을취하는 방법은 지속적으로 진화를 해야한다. 다시 말해, 과거와 같이 사료분석, 교차비교, 발굴 등의 방법보다는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가 역사라는 현상을 보다 이성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a)통계학 b)고고학 c)비교방법론 +논리학 그리고 d)문화인류학 심지어 e)심리학 마저 요구된다고 하겠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발견된 유물과 유적이 나와도 믿지 못하고(조작설 등에 의해), 또한 사료가 나와도 교차비교를 해야 하는데, 비교 대상이 되는 기존의 역사 및 지리지 등의 서적이 온전한 역사지리적 확증의 증거가 되기에 미흡한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책을 저술한 저자의 인문학적, 지리학적 소양부족 혹은 춘추필법과 같은 정치,민족적 도그마를 넘지 못하는 문제 등)
현재 강당을 식민실증주의라 비판하는 세력이나, 기존의 강단사학계 모두가 가지는 문제점이라 할 것이다.
즉, 각자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일종의 증거는 있으되, 반론의 증거를 각자 상호 인정을 하지 못할 만한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이미 완결된 인간의 행위(역사학에서 말하는 과거의 사건)를 인식하는 것이 역사인식론이라면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자신과 타인의 이미 완결된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든 현재를 살고 있는 인류의 사고와 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역사적 진실에 대한 인식은 현재의 역사가 자신은 누구인가라는 인문학적 물음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이러한 인문학적 물음은 결코 강단 역사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생존하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은 누구이며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를 알고자 한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책을 읽고 대화하며 다른 사람의 완결된 사고를 섭취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일반인들의 이러한 독서와 대화는 모두 역사적 인식이며 전문적 역사가의 역사인식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아마츄어와 프로의 차이는 몰두와 집중에 있을 뿐 방법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전문적 역사가에 옳은 방법론은 아마츄어에게도 옳다. 다만 전문적 역사가는 특히 그 부분에 집중함으로써 더 많은 데이터와 검증된 방법론을 사용할 뿐이다. 요컨대 전문적 역사가든 아마츄어 역사가든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역사가 자신과 역사가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 집단의 현재모습이 어떤 과정을 가지고 형성되어 왔는지를 알고자 함이다.
우리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한다. 자연과학이 세계에 대한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탄생했다면 역사는 후자에 관한 인간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탄생했으며 역사가 말해주는 바에 따르면 자연과학의 역사보다 수천 년 앞서 인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학이 태동했으며 오늘 이 순간에도 인간은 역사를 인식하고자 고전을 읽고 누군가와 대화하고 토론한다.
결국 역사의 종착점은 현재이며 이는 크로체가 “모든 역사는 現代史다.”라고 말했을 때 의미한 바이기도 하다.
실증주의, 특히 ‘실증주의’란 용어는 일종의 언어적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실증사학에 대한 본격적 비판의 예봉을 무디게 하고 있다. ‘實’과 ‘證’이라는 한자어를 조합해서 만든 ‘실증주의’라는 용어에 대해서 일반인들은 이것이 마치 ‘증거주의’와 같은 말인 냥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귀스트 꽁트가 창안한 positivism을 일본에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실증주의란 용어를 사용했고 실증주의가 역사학에 침투하면서 랑케에 의해 주창된 ‘사실로서의 역사’가 실증사학이란 이름으로 동양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증주의’의 원래 유럽식 표기인 positivism에는 어느 한 구석에도 證據란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오귀스트 꽁트는 연구자의 주관을 철저히 배제하고 외면으로 나타난 인간행동을 귀납적 추론방법을 통해 유형화해 일반법칙을 발견한다는 기치아래 Positivism을 창안한다. 실증주의의 제1의 캐치프레이즈는 주관을 배제한 경험적 사실에 기초한다는데 있으며 제 2의 캐치프레이즈는 주관을 배제한 경험적 사실을 귀납추론을 통해 일반화해 일반법칙을 도출한다는 것이다. 랑케의 ‘사실로서의 역사’는 이 중에서 제 2원칙을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의 과거에 관한 연구와 유형화에 집중한다는 역사관이다. 제2원칙의 포기는 인간역사의 예측불가능성에 관한 실증주의자들의 自認의 결과이지만 그들은 제2원칙을 포기하면서도 제1원칙 즉, 주관을 배제한 경험세계를 역사학의 유일한 관찰대상으로 삼은 점에서 Positivism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실증사학이 관찰대상으로 인정하는 경험세계라는 것은 원래 자연과학에서 관찰대상으로 삼는 경험세계와 동일하다. 즉 그것은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따라 불변하는 인간의 행동양식을 관찰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역사는 변화하는 것에 관한 학문이고 인간의 경험과 인간의 행동은 역사성을 가진다. 또한 인간의 행동이란 과거 인간의 경험세계는 내적 의도를 가진다. 시이저가 루비콘 강을 건널 때도 역사학자는 왜 시이저가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지 알아야 한다. 요컨대 인간행동의 내면을 보아야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실증사학은 가치와 주관배제라는 명목 하에 역사가의 주관뿐만 아니라 역사적 인식의 대상인 인간의 경험조차 외면적 행동으로 제한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의식 없는 물질세계에 관한 연구방법론을 의식 있는 인간세계에 대한 연구방법론으로 확장한 결과이다.
나의 이러한 주장에 실증사학은 단지 역사가의 주관만 배제하는 것이지 역사적 사건의 이면에 있는 역사적 인물의 주관과 의도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는 실증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어느 역사적 인물이 이러저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역사가는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실증사학자들은 역사적 인물의 외부적 행동이 그의 의도를 증명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과 마찬가지다. 비록 실증사학자들이 역사적 인물의 내면을 연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부로 드러난 행동을 통해서다. 실증사학은 여전히 외부로 드러난 인간의 외적 행동을 귀납해 내면을 추론한다. 여전히 역사가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해설 없는 다큐멘타리를 보는 것처럼 과거의 역사흐름을 구경만 한다.
기록된 인간의 외부행동이나 물리적 형체가 있는 유물들을 통해 실증사학자들은 종종 비약된 추론에 이르고 그들이 당초 내걸었던 주관의 배제라는 캐치프레이즈와 달리 오히려 정치적 목적에 이용당하는 역사적 결론에 도달한다.
한국 실증사학자들은 평양 일대에서 중국식 목곽묘가 다량 발견되었다고 환호하며 이것이 낙랑의 한반도 주둔설을 立證한다고 방정을 떤다. 그들은 또한 조선 정조가 노론 수장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이 다량 발견되었다고 호들갑을 떨며 그것이 정조가 노론을 편들었다는 증거라고 강변한다.
이들의 호들갑과 비약적 추론에 대해서 우리는 다만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 "우린 다른 증거를 가지고 있어"
무의식적인 인간의 행동을 제외하고 인간의 행동이 의지의 산물인 경우에 우리는 감히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존재가 당위를 규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외부적 행동으로 내부적 의도를 입증할 수 없다.”
이 결론에 역사학자들이 다수 동의하게 된다면 실증사학은 파탄날 것이다. 나는 조만간 그럴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그런 날이 오기 위해서는 대안적 역사관에 관한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
즉 역사를 학문하는 방법, 역사를 판단하는 시각이 전면적으로 바뀔 날 즉 역사인식 및 탐문의 기준이 현재와 다르게 될 날이 반드시 올것이라고 믿는다.
아젠다님 글 일부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