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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04 08:55
[기타] 세종의 민족 통합정책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387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842906&memberNo=997329&vType=VERTICAL

조선 버터는 임금님의 보약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삽화: 김용민 기자/kym5380@

·포스트 편집: 이학선 기자/naemal@



조선시대 버터는 임금이 먹는 보약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이 버터 생산을 중단하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자 훗날 집현전 부제학을 지낸 윤회가 버터 생산중단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수유(酥油)는 임금님 약으로도 쓰고,  때때로 늙어 병 든 신하에게 나눠주는 것이니 생산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렸는데요. 윤회는 임금으로부터 "그대가 알 바 아니다"라는 핀잔 비슷한 대답을 들었는데요.


세종이 버터 생산을 중단하려고 한 까닭은 뒤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여기서 윤회가 말한 수유(酥油)가 바로 지금의 버터입니다. TV 다큐멘터리를 보면 티베트 등지에서 찻잎 끓인 물에 버터와 소금을 넣은 전통차인 ‘수유차’를 마시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수유차를 다른 말로 하면 바로 버터차가 됩니다.


우유가 귀했던 고려와 조선에서는 버터인 수유가 거의 약으로 쓰였습니다. 성종 때 인물로 좌의정을 지낸 이행은 중국사신을 맞이해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쇠약한 몸 지켜주는 것은 오직 버터(酥油)뿐"이라고 노래합니다. 버터가 보약 이상의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는 거죠.


'산림경제'에도 구기자차에 달인 수유를 넣고 소금을 약간 쳐서 끓여 마시면 몸에 아주 좋고 눈도 밝아진다고 약효가 적혀 있습니다.


버터가 조선에서 이렇게 귀한 약재 취급을 받았던 이유는 생산량이 워낙 적었기 때문일 겁니다. 조선은 농경사회였으니 우유 생산량이 적었겠죠. 제한된 우유로 보양식인 우유죽(駝酪)도 끓이고 치즈(乳酪)도 만들며 버터(酥油)도 생산해야 하니까 주로 왕족이나 양반의 약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약재인 버터의 생산을 세종이 중단키로 한 것은 지나친 사치품이기 때문에, 혹은 버터를 생산하느라 백성들이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엉뚱하게도 병역기피 때문이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버터를 만든다는 핑계로 군대를 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버터가 병역기피의 도구로 악용됐던 것인데요. 자세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세종 3년(1421년)의 기록에 나옵니다.


"수유치(酥油赤)를 폐지했다. 황해도와 평안도에 수유치가 있는데 스스로 달단(韃靼)의 유민이라고 하면서 도축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해마다 가구당 수유를 궁중 주방에 바치도록 하고 병역을 면제해 주었는데 병역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서 지내면서 수유는 바치지 않고 군대만 빠지고 있다."


달단은 서역의 타타르족으로 버터를 생산하는 달단의 후손들에게 병역을 면제해 주었던 것인데 조선 사람들도 그것을 악용해 달단인 마을로 옮겨가 군대를 빠졌던 모양입니다.


그 폐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어떤 가구에서는 군대도 가지 않으면서 몇 해 동안 한 번도 수유(버터)를 바치지 않은 곳도 있고 또 어떤 가구는 한 집에 남자만 21명이나 있는 집도 있었다고 합니다. 세대 등록만 해놓은 것이죠.


이러니 속된 말로 세종대왕이 열 받을 만도 했겠죠.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인간 꼭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lipidchoys/221188179697
버터와 세종대왕

몽고가 침략하고 고려에 약 100년을 거주했는데 이 때 우리나라에 육식 문화가 정착된 시기라고 합니다. 워낙 고기와 유제품 다루는 솜씨가 뛰어 났던 몽고인들은 몽고가 패망한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려 땅에 그냥 눌러 앉은 사람이 많습니다. 

제주도에 말농장에 몽고인 500명이 있었는데 본국이 망한 후 돌아가지 않고 정착했고 북쪽에 정착해 있던 몽고인 역시 눌러 앉아 수렵, 도축, 유제품 생산을 하면서 살았는데 이 들을 달단인이라고 했습니다. 몽고군은 폴란드 침공시 너무 빠르고 너무 잔인하여 당시 유럽인들은 아마겟돈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주력군 중의 하나가 따따르 인입니다.  따따르인이 한문 차음으로 달단인입니다. 그 후에도 유럽인의 마음에는 그 공포가 남아있어 19세기에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중국을 경계해야 한다고 황화론을 주장하는 모티브가 되었고, 중앙아시아 쪽에서는 따따르 라고 하면 우는 애도 멈출 정도로 무시 무시한 기억을 남긴 용맹하고 잔인한 전사입니다. 따따르 합창단도 물론 유명하지만요^^.

거란 유민도 있었는데 주로 샤만, 광대, 도축에 종사했습니다.(고구려를 거의 궤멸시키고 고국원왕에게 뼈 아픈 경험을 준 선비족은 돌궐족의 분파인데 돌궐은 투르크의 한자 차음이고 투르크는 바로 터키인데.. 의외로 먼 옛날 부터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그런데 이 들의 생활습관이 유랑이라 새로 출범한 조선에게는 골치아픈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명칭도 부여하고 정착할 곳도 주어 거기서 살게 했는데 이 때 백정이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나중에 천민을 대표하는 백정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 - 이희근

당시 버터는 바로 이 달단인들이 만들어서 국가에 바치던 진상품이었다고 합니다. 워낙 우유가 적게 나와 수량도 적어서 왕이나 고관들이 주로 보약 목적으로 먹었다고 합니다. 

'쇠약한 이 몸을 지켜 주는 것은 오직 수유 뿐'이라는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행의 시도 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농서 '산림경제'에는 '구기자 달인 물에 수유를 넣고 약간의 소금을 넣고 끓인 구기자차를 마시면 몸에 아주 좋고 눈이  밝아진다'라는 언급도 있다고 합니다.

달단인이 거주하던 마을을 '수유치'라고 하는데 '치'는 마을이란 뜻의 몽고어 발음입니다. 여담이지만 저한테 다니는 몽고 환자들 보면 정말 끝에 ...치...치 가 많이 붙어서 둘이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면 치..치 소리 밖에 안들립니다^^.  장사치, 벼슬아치, 양아치.. 등등의 접미사 치가 몽고어의 유산이라는 것은 들어 보면 알게 됩니다^^. 



http://www.newswatch.kr/news/articleView.html?idxno=6240

세종, 조선 땅에 이슬람복식을 금하노라

태종 7년(1407) 회회(回回) 사문(沙門) 도로(都老)가 처자(妻子)를 데리고 함께 와서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명하여 집을 주어서 살게 했다고 기록돼있다. 사문이 일반적으로 성직자 계층을 가리키는 용어다.

태종 12년(1412) 회회 사문(回回沙門) 도로(都老)에게 명해 금강산(金剛山)·순흥(順興)·김해(金海) 등지에서 수정(水精)을 캐도록 했다. 이는 회회 사문 도로가 조선 땅의 산천이 많아서 반드시 진귀환 보화를 가졌을 것이니 두루 돌아다니게 한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후 경상도 도관찰사 안등이 회회 사문 도로가 캔 수정 3백근을 바쳤다고 기록돼있다.

그해 회회 사문(回回沙門) 다라(多羅)에게 쌀 10석을 내려 줬다. 그 이유는 임금이 양옥(良玉)을 내어 다라에게 주며 각서(刻署) 해 바치도록 했다. 각서는 도장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즉, 옥을 내어서 회회 사문 다라에게 도장을 만들게 한 것이다.

이후에도 태종과 세종 때에 회회 사문들에게 쌀을 하사하는 등의 기록이 나와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색이 있는 것은 세종 9년(1427)의 기록이다. 예조에서 이슬람 복식을 폐지할 것을 세종에게 청한 것이다.

예조는 “회회교도는 의관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 때 회회도의 기도하는 의식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그때(세종 때)까지 이슬람 사람들은 이슬람 복식을 그대로 고수했고, 대조회(모든 벼슬아치들이 다 모여 임금을 알현하는 것) 때에도 이슬람 복식과 기도하는 의식을 그대로 고수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이슬람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그대로 고수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슬람 사람들과 결혼하기를 꺼리게 됐다. 이에 세종 때에 이슬람 복식과 의식 등을 폐하면서 이슬람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동화해서 살게 만든 것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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