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정치가 부패 일로를 달리고 있을 때, 중국 동북 지역에서는 여진족의 한 부족인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세력이 점차 커졌으며 그 수령은 누르하치(노이합적(努爾哈赤))였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 기오창가(覺昌安)와 아버지 탁시(塔克世)는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건주좌위(建州左衛)라는 관직을 받았다. 누르하치는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으며 무예 또한 출중했다.
누르하치
누르하치가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건주여진의 토륜성 성주 니칸 와이란이 명나라군을 불러다가 구러성 성주 아타이(阿臺)를 공격했는데, 아타이의 아내는 기오창가의 손녀였다. 기오창가는 탁시를 데리고 구러성을 구원하러 갔다가 도중에 명나라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결국 기오창가와 탁시는 혼전 중에 둘 다 전사하고 말았다. 누르하치는 대성통곡을 하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을 땅에 묻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으나 힘이 모자라 명나라군과 대적할 수는 없었다.
비분을 안고 돌아온 누르하치는 아버지의 갑옷을 입은 다음 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토륜성으로 진격했다. 니칸 와이란은 누르하치를 당해낼 재간이 없어 황급히 달아났고, 토륜성을 점령한 누르하치는 이 기회에 건주여진의 다른 부락들도 정복했다. 이후 누르하치의 명성은 인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몇 년 후에 그는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이에 다른 여진 부락들은 공포에 떨었다. 당시 여진족은 거주 지역에 따라 건주여진, 해서여진(海西女眞), 야인여진(野人女眞)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해서여진 중에서는 예허(葉赫) 부락이 제일 강했다. 1593년에 예허는 다른 여진 부락 및 몽골의 여덟 부락과 연합한 3만 군사로 누르하치를 공격해 왔다.
9개 부락 연합군이 진격해 온다는 말을 들은 누르하치는 적군이 오는 길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길 양쪽 산마루에 돌과 통나무를 쌓아놓았다. 연합군이 산 아래에 이르자 누르하치는 군사 1백 명을 보내어 적을 매복지로 유인했다. 예허부락의 한 우두머리가 가장 먼저 말을 몰고 달려왔다가 누르하치군이 박아놓은 말뚝에 걸려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자 누르하치의 군사들이 달려나가 죽여버렸다. 그것을 본 다른 우두머리는 그만 놀라 혼절해버렸고, 지휘관을 잃은 연합군은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누르하치는 승세를 타고 적군을 바싹 추격하여 예허부락을 소탕했다.
그러고나서 몇 년 후에 누르하치는 여진 각 부족을 통일했다. 그 다음에 누르하치는 여진족 사람들을 8기(八旗)로 편성했는데, 기는 행정 단위이자 군사 조직이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 조정의 감시를 느슨하게 하기 위해 해마다 조공을 바쳤으며, 그의 태도가 공손하다고 여긴 명나라에서는 그를 ‘용호장군(龍虎將軍)’으로 책봉했다.
8기군 군복
8기군 군복은 서로 색깔이 다르며, 대례 때만 입고 평상시에는 입지 않는다. 처음에는 각 기의 지위가 평등했으나 산해관 안으로 들어와서는 황제가 정황기, 양황기, 정백기를 직접 영솔하게 되었으며 이를 ‘상삼기(上三旗)’라고 했다. 그 외의 5기는 ‘하오기(下五旗)’라고 했다.
누르하치 8기군이 사용했던 검, 칼, 투구
삭자갑(索子甲) [명나라]
철간견(鐵坎肩, 쇠 조끼)이라고도 한다. 작은 쇠고리들을 연결시켜 만든 갑옷으로 탄성이 있고 창칼을 막을 수 있었다. 8기군 장병들의 중요한 호신구였다.
1616년,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누르하치는 8기 귀족의 옹호를 받아 예투아라(요녕성 신빈현 부근)에서 ‘칸’으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금(大金)이라고 했다. 역사상에서는 이 금나라를 이전의 금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후금(後金)’이라고 한다.
천명통보(天命通寶)
천명한전(天命汗錢)이라고도 한다. 누르하치는 천명 원년(1616년)에 금나라를 세우고 붉은 구리로 천명통보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천명통보의 문자는 만주 문자와 한자 두 가지로 되어 있었는데, 처음에는 후금의 통치 지역에서 유통되었다.
홍타이지(皇太極)가 즉위한 후에는 이와 다른 천총통보(天聰通寶)를 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