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에 앞서 요동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부른게 아니라
서토 왕조 특히 한족 왕조에서
서토 내륙에 쳐박혀 대대적으로 특정 국경을 말하는게 아니라
먼 동쪽 낯선 곳의 의미로 요동을 이야기 합니다.
(고구려가 요동의 강자로 실질 지배하면서 요동, 발해란 말도 다 우리 고려(고구려) 지칭)
글자 그대로 서토의 한족들에겐 영향력이 늘 미치지 못한 지역을 말함.
--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자기의 인민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고려)뿐이다. 우리의 선왕 때로부터 그 후 거의 100년 가
까운 기간에 부자가 계속 우리와 친선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서로 장인과 사
위관계로 되었다. 이미 공훈을 세웠고 또 친척이 되었으니 응당 부귀를 누려
야 할 것이며 어떤 나라보다 먼저 국교를 맺었으니 추숭하는 예절을 어찌 늦
출 수 있겠는가 --
사람들이 원제국 시기에 고려의 생산력이 완전히 박살 난 상황에서 공물만
바치는 거의 속국처럼 이해하는데 현재는 이런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도리
어 무인 100여년시기에 가면서 특정 무인가문을 지키기 위해 군사가
사병화 되면서 고려의 전성기 중앙 군사력의 기반이 약화 붕괴되고
도리어 강화도에 쳐박혀 있거나 일부 무인들이 남아 대몽항쟁질 한다면서
내륙까지 민간인들의 실질 피해가 많았음.(이들을 끌어 내기 위해
몽골이 내륙까지 휘젖어 버림)
도리어 충선왕때 세계를 경영하던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당시 1계급
몽골에 견주는 1.5계급의 대우를 받았던 게 고려입니다.(한족은
당시 최하층 노예계급)
나름 자주권도 주어졌고 생산력도 회복되어 어느정도
돌아간 상황이였음.
이후 공민왕의 개혁은 이전의 실질적 동북아 3강의 황제국의 자주권 실현의
도모였지 고려가 막장에서 급격히 피치를 올려다는 식이 아닙니다.
이는 원래 일본 원정을 준비하고 실행하기 위해 고려에 설치되었던 기관이었다. 정식명칭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다. ‘정동’은 일본정벌을 뜻하는 것이고, ‘행중서성’은 중앙정부 중서성(中書省)의 지방파견기관을 뜻하는 것이다. 원은 지배지역에 지방행정기관으로 행중서성을 설치했다. 이것이 현재까지 성(省)이라는 행정단위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는 일본 원정을 포기하면서 필요 없어진 정동행성이, 고려를 통제하는 기관으로 변했다고 보아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동행성이 고려를 통제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이라고 보지 않는다. 고려에 대한 통제 기능은 일시적으로 발휘되는 경우가 있었을 뿐, 대부분의 시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점은 정동행성의 구조와 여기서 활동한 인물들의 성격에서 나타난다. 정동행성에는 기관의 수장으로 승상(丞相 : 종1품)이 있고 그 아래 평장정사(平章政事 : 종1품)·우승(右丞 : 정2품)·좌승(左丞 : 정2품)·참지정사(參知政事 : 종2품)·낭중(郎中 : 종5품)·원외랑(員外郎 : 종6품)·도사(都事 : 종7품) 등이 있었다. 이런 구조에서 정동행성의 수장인 승상에는 고려왕이 임명되었다.
또 몇 년 동안을 제외하고는 평장정사 이하 참지정사까지의 고급직위(종1품에서 종2품까지)에 대한 임명은 없었고, 낭중·원외랑·도사와 같은 하급직위(종5품 이하)만이 채워져 있었다. 하위직 마저도 대부분 고려인으로 충원했고, 원의 관리가 임명되는 평장정사·좌승·우승·참지정사 등의 요직을 비워두는 것이 관례였다. 더욱이 원(元)이 간섭할 필요가 있는 문제가 생기면 정동행성을 통하지 않고 사신이 직접 와서 처리하는 일이 많았다. 내정간섭을 위해 설치된 기관이라면 이런 식으로 운영되었을 리가 없다.
정동행성보다는 그 부속기구인 이문소(理問所)가 폐단이 더 컸다. 원나라의 다른 행성들에도 설치되어 있던 이문소(理問所)는, 본래 개경에서 원과 관련된 범죄행위를 다스리는 업무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