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고려는 따지고 보면 중세유럽과 비슷한 형태였습니다.
권문세족, 호족으로 불리는 계층이 마치 중세의 영주들과 마찬가지였죠
즉 애초에 왕권이 약화될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졌었다는거죠.
이때문에 개혁성향으로 권문세족을 약화시킬 방안들을 제시하는 신돈을
왕이 중용하게 된거고.
결국 신돈과 권문세족의 힘겨루기가 줄곧 이어지다
패배한 신돈이 처형당했다 라고 봅니다.
뭐 핑계는 신돈이 반역을 꾀했다라는 거지만
반역을 꾀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무력하게 잡혔죠.
글쎄요 개판이라고 하는건 좀 비약이 심한것 같습니다.
당시 고려사회는 유럽중세에서 흔히 말하는 봉건제 사회.
중앙에 왕을 두고 지방 영주가 독자적 세력을 갖추는 끄으랏차님 말대로 왕권이 약화될수밖에 없는 사회였으니까요.
따라서 왕이 있는데 지방영주들이 고개를 뻣댔다고해서 개판이라고 말하기엔 비약이 심한감이 있습니다.
그저 시대적 상황이 어쩔수 없었던 상황이었죠.
조선왕조는 개국후 고려왕조의 이같은 약점을 간파하고 지방영주를 할수있는한 최소한으로 세력을 축소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여 전제군주제를 이뤄냅니다.
흔히 조선왕조를 봉건왕조 낙후된 시스템의 왕조라고 오해하지만 사실 알고보면 서양보다도 빨리 전제군주적 시스템을 시작한 나라라 할수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에나 봉건제를 탈피했죠.
물론 영주들을 누르니 외척과 당파가 왕권을 들쑤시긴 했습니다.
고려판 [라스푸틴]이라고 볼수있죠.
라스푸틴 아시죠? 제정러시아 말기에 뽕~하고 나타난 요승, 거시기가 어마어마하게 컸다는-.-;;
노국공주가 죽고, 혼자 남은 공민왕 앞에 홀연히 나타난 요승으로, 원래 천민출신이였는데
어찌어찌 공민왕 외가쪽 친척과 연결이 되어서 빽으로, 궁궐에 소개되어 왔는데- 공민왕 눈에 들어서
왕의 스승인 왕사겸, 재상이 되어 고려의 개혁을 꾀하다 실패하고 참형에 처해지죠. 여기까지가 신돈에 대해서 알려져 있는 내용이구요..
공민왕은 상당히 조용하고 신중한 성격이였고, 또한 매우 예민하고 주변인들을 의심하는 성격이였습니다.
어쩔수 없는게... 고려말기 막장된 왕궁에서 믿을사람이라고는 공주하나 뿐이였는데, 불행히 난산으로 사망한데다가, 여러 난리를 겪으면서 그런 성격이 되어 버렸죠.
그래도, 공민왕이 고려 다시 되살려보겠다고 부단히도 노력한건 유명합니다.. 공민왕이 신돈을 총애한것도
그가 이렇다할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충성하면서 개혁을 하는데 알맞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한 놈이 왕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하는걸 귀족들은 눈에 가시와 같았겠죠.
신돈의 개혁은 첨엔 잘 되는듯 했으나, 개혁이 늘 그렇듯.. 기득권의 반발과 시행착오와
점점 개인적 사심이 생겨서 결국엔 실패합니다. 공민왕은 점차 신돈의 권력이 쎄지고, 기득권이 반발하는 것을 보고 화가 자신에게 미칠것을 우려해, 쓰임이 다하자 제거해버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