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통일신라. 도충분히 가능성은 남아있을듯 하네요
예를 들어 광개토대왕시기. 백제의 지원군으로 참전한 왜군이 적지 않은 병력이 넘어올시기
이들이 운용한 함선이라든지. 고대 중국사에 왜국이 공식적으로 등장한시기를 고려해 보다면
왜의 항해로 중국 접근이 가능해 보이네요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가 존재했던 기간 동안 50 여회의 왜국 침입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은 일단 접어두고.
일본에서 8 세기에 발간된 일본서기에는 수차례에 걸쳐 신라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8 세기 이전에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 남쪽까지 일정 규모 이상의 군대를 수송할 수 있는
배와 항해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아마도 대마도를 중간 기착지로 이용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주원장이 명나나를 개국한 후, 즉위 초기인 1368 년에 사신을 통해 일본에 국서를 보냅니다.
국서에는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라는 것과
중국 해안에 출몰해서 명나라를 괴롭히는 왜구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1368 년 (14 세기) 이전부터
왜국의 세력이 중국 남부 해안까지 갈 수 있는 배와 항해술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는 한반도에 고려가 있던 시기와 겹칩니다.
그러니 삼국 시대에 왜가 중국까지 직접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최소한 고려 시대에는 중국까지 직접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 시기에도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해로를 따랐다면
왜가 중국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왜가 한반도 세력의 도움없이 스스로 그런 능력을 보유했다고 볼 수 있을 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스스로 만든 능력이든지 아니면 한반도로부터 전수받은 능력이든지 간에
왜가 중국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일본도 섬나라다보니, 배를 만드는 선박술과 항해술은 일찍부터 있었으나, 삼국시대보단 신라시대.
신라시대보단 고려시대 등등 시대가 지날수록 발전해갑니다.
일단, 삼국시대 동시기 일본은 선박술과 항해술이 있긴했으나, 그 질에 대해선 글쎄요-.-;;
백제가 sos치고, 나름 원군을 보내준 걸보면 그쪽에서도 신경을 쓰긴한거 같으나,
뭐,,역사는 알다시피 백왜군은 졌고, 당시 왜는 남부왕국들과 교류한 수준이였지,
중국까지 나갈 정도로 항해술이 발달하진 못했습니다.
견수사도 한 두어번정도? 나갔는데, 이것도 일본으로써는 정말 큰마음 먹고 나간거예요.
하지만, 워낙 뱃길이란게 고생스럽고, 풍랑이라도 만나면 익사사고로 이어지고해서 오래 지속되진 못했습니다. (수가 짧은 왕조이기도 하구요. )
수가 망하고 들어선 당나라에 견당사라고 십여차례 보내는데,(일본에선 견수사/견당사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 이때엔, 우리나라에서도 백제유민이라든지 일본으로 도망가거나 망명을 제법 한 것으로 보여지고, 여기에 기술자들이나 관료들같은 엘리트들이 망명갔다면, 일본측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좋아지면 좋아졌지, 나빠지진 않았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시기, 일본이란 국명이 등장하는데, 일본이 원래 백제를 지칭하던 별칭이였던 것으로 볼때
그 영향을 알수 있을겁니다. 일본에서 당에 왜국이 아니라, 일본이라고 국명을 알려주려 사신을 보낸쯤이
이 시기도 하거든요.- (당시, 당의 측천무후때였나 그러함. 이후 중국에선 왜와 일본국이란 단어가 양립함.)
하여간, 당나라는 실로 오랜만에 분열되었던 중원을 평정했고, 이후 당나라문화가 여러나라에 알려질정도로
잘 나가던 국가였음. 일본도 견당사를 파견해, 국제무대에 이름값을 올리게 된 것은 평가받을만한 한 일임.
실제로, 일본도 이때를 가지고, 중국과 대등한 외교를 했느니 자뻑하는 경향도 있는데( 중국입장에선 걍-
당에 조공오는 수많은 나라중에 하나일뿐이지만;; 하여간, 멀리 있는 일본도 당을 인정하려 와주는 것은
당의 영량력을 보여주는 일이니, 좋아했음. 다만 지리적으로 멀리 있는 나라니, 자주는 못 오는걸 인정하고,
10년마다 1번씩 오라고 했나? 하여간 그랬음)
그시기, 일본은 백제가 망하고, 신라가 통일함에 따라, 신라와 관계가 안 좋게됨.
그래서,섬나라로써도 다른 무역통로를 얻어야 했던 차에, 중국으로 어떻게든 발을 뻗어야 했으므로 다이렉트로 당과 교류가 가능하게 된 것은 신의 한수였음. 당의 선진문화와 불교등이 일본으로 전래됨.
그뒤, 당나라도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죠. 안사의 난 이후 당의 국내 불안은 외국 사절 대우에도 영향을 주어 당측으로부터 속히 귀국할 것을 종용받았는데, 유학생에 대해서도 유학 기간의 제한을 통고하는 등 냉대를 받게 됩니다.
일본측 사정도 견당사 이외의 해외 도항을 금지하는 도해제(渡海制)가 실시되고, 사신 파견시기의 간격이 늘어나면서 도해에 필요한 항해나 조선 기술의 저하를 초래했음.
견당사들의 조난도 사신 파견의 의욕을 저하시켰구요.
결과적으로 마지막 견당사가 된 조와 5년(835년)의 견당사는 두 번이나 출발에 실패했고, 귀국할 때에도 항로를 둘러싸고 대립이 벌어지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나오게 됩니다.
또한 당나라주재 유학생들을 둘러싼 환경이 악화되었다는 것도 빼놓을수 없습니다.
당시 당나라주재 외국 유학생은 당에 체류하다, 비용이 부족하면 당측에서 관비를 지원해주었지만, 당측의 관비 지원도 떨어지게 되죠.
당의 쇠퇴로 정치적 의의도 저하되고, 당이나 신라의 상선에 의한 문물 교류나 유학 환경도 악화되고, 일본 국내에서도 선박 제조 및 항해 기술이 저하되는 등의 변화로 견당사를 파견할 이유가 없어져, 결국 간표 6년(894년) 견당사는 장기간 연기의 형태로 보류되었는데 이것이 당의 멸망으로 이어지면서 실질상으로 폐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측에선, 뭐.. 당나라에서 받을건 다 받았고, 이제 일본문화도 당나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국풍문화로 자신들의 문화에 자족하고 왕성한 모험과 탐구의 활력을 잃어버린 결과 견당사가 폐지되었다고 돌려서 말하는 편이지만, 뭐 하여간 복잡한 국제정세가 있었다는건 부정할수 없죠.
일본인들이 견수사나 견당사를 높이 평가하면서 내세우는 한편
(300여년을 다 합쳐도 20회가 될까?말까? 하지만;;) 신라와 관계가 트이고 나선 신라파견 횟수가 50차례가 넘은건 의도적으로? 또는 잘 알지 못하여? 평가절하 당하고 있는게 현실입니다.(당보단 신라가 가깝기도 하고, 훨씬 안전한 뱃길이기도 한게 현실이니까요.)
뭐,, 중국과 한국의 인지도빨 이유가 있겠고ㅋㅋ
중국에서 배운건 그려려니해도, 한국에서 배웠다고 치는건 좀 자존심 상한다? 뭐 그런 생각이 없다곤 못하겠죠.. 그래서 내세우는게 빨대론같은거구요 ㅋㅋㅋ
고려말기에 들어선, 왜도 내부적으로 막부체제로 돌입하게 되는데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렇다보니, 왜구가 아주 번창하게 되죠.
나라가 백성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니, 치안도 안 좋아지게 되고, 또 외국에 약탈해서 먹고 살고 뭐 그런 경향이 많아집니다.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에 왜구 좀 어떻게 해달라고 하지만.. 일본 중앙도 뽀족한 방법도 없고, 한편으론 묵인하고 뭐 그랬음.
그러다,조선시대 와선, 일본도 긴 전국시대 끝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적인 야망도 있었고, 사무라이 계급들이 계속 싸워야 먹고 사는 직업인데, 전국이 통일되어 백수가 될려니 잉여들을 처리하기도 좋도록 왜란발생- 뭐 결과는...
일본배는 약탈에 적합함. 빠르고 날쎄지만, 크기가 작고,주재료가 일본 삼나무로 빠른 건조가 가능하나 약했음. 주요 전법이 빠르게 달려들어 갈고리 걸고 올라타 뱃사람들 죽이고, 물건 약탈하는.. 그런 싸움에 익숙하다가 본격적인 화포싸움과 덩치싸움에선 충파술에 나가 떨어짐;; 흔히, 일본이 섬나라라서 해군이 쎌것으로 생각하나, 전국시대에도 해전이 얼마 없었다고 kbs역사저널에서도 지적.
근대에 들어선, 세계에서 가장 컸다는 야마토함?도 만들고 했지만
뭐 이것도 얼마못가 침몰되었나 그랬던거 같은데-.-
뭐,, 하여간 일본도 시대에 따라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전해 갔으며
섬나라란 지리적 장점이자 약점을 계속 극복해가려고 노력했던건 사실.
이때문에, 주변국인 우리가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것이고,,
지금도, 해군자위대 키워서 독도 노리려고 하는것에 우리가 주의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