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한(漢)나라 때는 읍루(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隋)·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로 불리었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女眞)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만주족(滿洲族)이라고 불렀다.
이런식으로 인사를 한번 해보니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서로의 견해가 틀리다고 해서 화를 토대로 상대를 비하하는 말을 하는 순간 제 마음이.. 제 입이 먼저 더러워 짐을 알았습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진실을 알아가는 좋은 토론의 장을 원하면서.. 다음과 같은 자료와 견해를 올려봅니다.
위의 지식백과와 같이 여진족은 읍루족이었고, 읍루족은 25개 정사인 "삼국지"에서 명확하게 동이족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 주장을 보면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이 내전이었냐고 자주 언급을 하시더군요.
우리가 주장하는 우리의 역사속의 신라와 백제의 전투를 내전이라고 말을 합니까?
일본의 전국시대의 수 많은 국가, 즉 나라라고 불리었던 국가간의 전쟁을 내전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역사공부와 토론은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계획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분명한 이유를 찾고자 함이라 생각합니다.
역사란 점점이 이어진 기나긴 대하라고 생각하기에 하나의 점점의 역사를 가지고 이것이 우리 역사다라는 단견에서 많은 논쟁이 발생됩니다.
과거의 기록에 뿌리를 같이 한 동일한 민족도 시간이 흘러 민족의 명칭이 변하고, 언어가 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역사가 아니라고 해석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뿌리와 변천사를 알고자 함이 첫째고 우리의 선조들이 후손들에게 간절히 원하고 남기고자 한 진실한 메세지를 찾는 것이 가치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길었습니다만, 우리 대한민국안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들이 늘 상충합니다. 가정에서나,사회에서나, 국가간에서나, 다툼과 전쟁은 끊임 없었으나, 지혜를 바탕으로 서로의 향상을 위하여 감정 보다는 선의로서 대화를 나누는 자세를 외쳐봅니다.
저는 그 동이족이라는 명칭에 범주를 중국이 자신들에 중화 즉 자신이 중심에 기준으로 동쪽에 오랑케를 분류하는 명칭으로 쓰인것인데 그 동이족이 동쪽에사는 모든 족속들이 전부 우리민족에 역사? 라고 해석하는것이 심각히 오류를 범하고있다고 판단됩니다.. 韓민족 이라는 개념도 아마 그당시에는 없엇고 고려시대나 아니면 그 이후부터 형성된것같은데말이죠.. 어떻게 따지고 보면 모든 민족에 기원은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민족에 기원으로 우리역사에 편입되느니 마느니 하는문제는 너무나 큰모순을 가지고있습니다 민족 즉 인류학적 기준보다는 문화적 계승구도를 놓고 지금에 과거의 역사를 우리것인지 아닌것인지 판단하는 기준이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네 옳으신 견해이십니다. 모든 민족의 기원은 하나다 라는 가설은 저도 동의하고 증명해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현재의 우리민족의 기원과 우리 민족이 여러 국가를 형성하였고 또 그 국가들을 구성하였던 민족들과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찾고, 과연 어디까지가 우리 민족의 진정한 범위를 말 할 수 있는가의 여부라고 생각합니다.
버클리대학에서는 DONGYI의 역사를 Korean의 역사라고 단정해서 가르치고 있고, 그 뿌리는 무려 중국의 삼황오제 그 이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단 동이족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냥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嵎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등이 그것이다. 이자(夷字)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융적(戎狄)이 존재한 것이 그 유래가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어서 이들 이적(夷狄)들은 사실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개벽(開闢)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또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전 중국에 걸쳐 사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兗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위와 같은 내용을 참고로 함께 연구해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언제나 변방님의 열정에 감사드립니다.^^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한 이 시대에... 이렇게 우리역사를 사랑하는 분들과 세상을 밝히는 토론을 나눌 수 있는 것이 그저 행복입니다.
내친김에 이 부분도 함께 연구해 봤으면 합니다.
‘사고전서,사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柢)이다(夷者柢也).”
여기서 이(夷)를 저(柢)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柢)란 과연 무엇인가. 저(柢)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柢)’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柢),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柢)의 의미를 다시 저지(柢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柢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그 뿌리를 두고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柢地)의 저(柢)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柢)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 동안 알아 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뿌리 이자, 즉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 이자로 변질되었는지 연구해 볼 이유가 있다.
추가적으로 고대에 韓국 이라고 기록된 중국측 고대 문헌과 사료에 그들이 말하는 韓이라는 그룹은 한반도 남부에 지역적 명칭에 범주입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만주와 韓은 별개이지요 후한서에 내용만 보아도 韓과 부여는 별개의 종족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고대에 위대했던 부여왕국에 후손 고구려 백제의 남하로 최초에 중앙집권체제의 왕권국가가 성립할수있었으며 새로운 철기문화 등등 의 문화적 계승으로 현재에 이른것이지만요 읍루라던지 말갈 부락 족속들은 어떻게 봐도 韓이라는 지명적인 그룹에 해당될수가 없겠네요.. 부여 남하이전까지도 韓이라고 불리우던 지역에 3종족(마한 진한 변진)도 전부 부락사회(정확히는 여러 소국들)였다는것은 여러사료나 고고학적 유물로서도 알수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그들 3종족또한 서로 달랐다고 하니.. 어찌했던 다떠나서 아주 먼 옜날 민족적인 인류학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현 중국도 어떻게 보면 그시기 존재하였다는 ‘이(夷)’라는 종족에 일파로 우리역사 일부분이 되겠지요 그들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그렇게 생각하겠구요^^ 왜냐하면 지금 그들땅을 기원으로 하기때문에.. 참 애매합니다..이런문제는
후한서에서 언급되는 三韓은 마한.변진.진한을 뜻하는것이고
신당서 구당서 일본서기에서 언급되는三韓은 고구려.백제.신라를 통틀어 일켣는 표현입니다 봐도 모르겠어요? 당나라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三韓으로 기록하는 자체가 이미 韓은 민족에 이름이 아니라 한반도를 부르는 지역적 명칭이네요 그리고 당시에 서로 서로 옴겨살기도 하는 시대상이기도 하구 대방지역에 살던 한사군세력이 고구려 백제에 압박으로 대다수가 삼한에 이주하여 살고있다는 기록이 있구요 삼한은 본래 왜인과 땅을 접하고있어 문신같은 왜인에 풍습을 다수가 하고있다는 사료도 존재합니다 그 三韓이 부락사회로 존립하던시기에 고구려는 이미 졸본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동북부여를 남으로는 동예 옥저같은 부여 예맥계를 통합하고있던 시기에요
중국사서에서 시대별로 차이가 붙는 三韓을 우리식으로 구분하기위해 애써
三韓열국시대와 삼국시대를 구분해서 부르고있잔아요 전혀 글을 이해못하고 글을쓰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