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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2-18 15:31
[통일] 우리학자들의 태도가 더 문제다.
 글쓴이 : 만법귀일
조회 : 3,741  

삼국지.png

삼국지 동이.png

여직()이라고도 한다.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 한()나라 때는 읍루(), 남북조시대에는 물길(), 수()·당()나라 때는 말갈()로 불리었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만주족(滿)이라고 불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진족 [女眞族] (두산백과)

안녕하십니까?  환빠..식민빠... 여러분^^

이런식으로 인사를 한번 해보니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서로의 견해가 틀리다고 해서 화를 토대로 상대를 비하하는 말을 하는 순간 제 마음이.. 제 입이 먼저 더러워 짐을 알았습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진실을 알아가는 좋은 토론의 장을 원하면서.. 다음과 같은 자료와 견해를 올려봅니다.

위의 지식백과와 같이 여진족은 읍루족이었고, 읍루족은 25개 정사인 "삼국지"에서 명확하게 동이족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 주장을 보면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이 내전이었냐고 자주 언급을 하시더군요.

우리가 주장하는 우리의 역사속의 신라와 백제의 전투를 내전이라고 말을 합니까?

일본의 전국시대의 수 많은 국가, 즉 나라라고 불리었던 국가간의 전쟁을 내전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역사공부와 토론은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계획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분명한 이유를 찾고자 함이라 생각합니다.

역사란 점점이 이어진 기나긴 대하라고 생각하기에 하나의 점점의 역사를 가지고 이것이 우리 역사다라는 단견에서 많은 논쟁이 발생됩니다.

과거의 기록에 뿌리를 같이 한  동일한 민족도 시간이 흘러 민족의 명칭이 변하고, 언어가 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역사가 아니라고 해석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뿌리와 변천사를 알고자 함이 첫째고 우리의 선조들이 후손들에게 간절히 원하고 남기고자 한 진실한 메세지를 찾는 것이 가치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길었습니다만, 우리 대한민국안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들이 늘 상충합니다. 가정에서나,사회에서나, 국가간에서나, 다툼과 전쟁은 끊임 없었으나, 지혜를 바탕으로 서로의 향상을 위하여 감정 보다는 선의로서 대화를 나누는 자세를 외쳐봅니다.

 


윤내현교수님.png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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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하제국 14-12-18 16:02
   
어느정도 공감하는말이네요
변방경상도 14-12-18 16:13
   
저는 그 동이족이라는 명칭에 범주를 중국이 자신들에 중화 즉 자신이 중심에 기준으로 동쪽에 오랑케를 분류하는 명칭으로 쓰인것인데 그 동이족이 동쪽에사는 모든 족속들이 전부 우리민족에 역사? 라고 해석하는것이 심각히 오류를 범하고있다고 판단됩니다.. 韓민족 이라는 개념도 아마 그당시에는 없엇고 고려시대나 아니면 그 이후부터 형성된것같은데말이죠.. 어떻게 따지고 보면 모든 민족에 기원은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민족에 기원으로 우리역사에 편입되느니 마느니 하는문제는 너무나 큰모순을 가지고있습니다 민족 즉 인류학적 기준보다는 문화적 계승구도를 놓고 지금에 과거의 역사를 우리것인지 아닌것인지 판단하는 기준이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법귀일 14-12-18 16:38
   
네 옳으신 견해이십니다. 모든 민족의 기원은 하나다 라는 가설은 저도 동의하고 증명해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현재의 우리민족의 기원과 우리 민족이 여러 국가를 형성하였고 또 그 국가들을 구성하였던 민족들과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찾고, 과연 어디까지가 우리 민족의 진정한 범위를 말 할 수 있는가의 여부라고 생각합니다.
버클리대학에서는 DONGYI의 역사를 Korean의 역사라고 단정해서 가르치고 있고, 그 뿌리는 무려 중국의 삼황오제 그 이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단 동이족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냥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嵎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등이 그것이다. 이자(夷字)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융적(戎狄)이 존재한 것이 그 유래가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어서 이들 이적(夷狄)들은 사실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개벽(開闢)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또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전 중국에 걸쳐 사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兗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위와 같은 내용을 참고로 함께 연구해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언제나 변방님의 열정에 감사드립니다.^^
          
변방경상도 14-12-18 16:52
   
섬세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세한 장문에 답변 감사합니다^^
               
만법귀일 14-12-18 17:19
   
별 말씀 다 하십니다.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한 이 시대에... 이렇게 우리역사를 사랑하는 분들과 세상을 밝히는 토론을 나눌 수 있는 것이 그저 행복입니다.

내친김에 이 부분도 함께 연구해 봤으면 합니다.

‘사고전서,사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柢)이다(夷者柢也).”

여기서 이(夷)를 저(柢)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柢)란 과연 무엇인가. 저(柢)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柢)’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柢),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柢)의 의미를 다시 저지(柢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柢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그 뿌리를 두고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柢地)의 저(柢)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柢)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 동안 알아 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뿌리 이자, 즉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 이자로 변질되었는지 연구해 볼 이유가 있다.
                    
변방경상도 14-12-18 17:32
   
그것은 중화문명 유교의 영향이겠지요 우리 민족에 한 일파인 만주인들을 조선시대에 그들스스로 배척해왔습니다 아쉬울수도 있지만 그게 과거에 현실이니까요..

민족적으로 만주인과 한반도는 하나에 일파 인것은 부정할수도 없는 사실인것은 저도 인정하는바입니다.. 저는 단지 문화적인 측면에서 역사를 다루는 사람이기때문에 어쩌면 여기있는 많은 분들과 상반되는 의견으로 갈라질것입니다..
변방경상도 14-12-18 16:39
   
추가적으로 고대에 韓국 이라고 기록된 중국측 고대 문헌과 사료에 그들이 말하는 韓이라는 그룹은 한반도 남부에 지역적 명칭에 범주입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만주와 韓은 별개이지요 후한서에 내용만 보아도 韓과 부여는 별개의 종족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고대에 위대했던 부여왕국에 후손 고구려 백제의 남하로 최초에 중앙집권체제의 왕권국가가 성립할수있었으며 새로운 철기문화 등등 의 문화적 계승으로 현재에 이른것이지만요 읍루라던지 말갈 부락 족속들은 어떻게 봐도 韓이라는 지명적인 그룹에 해당될수가 없겠네요.. 부여 남하이전까지도 韓이라고 불리우던 지역에 3종족(마한 진한 변진)도 전부 부락사회(정확히는 여러 소국들)였다는것은 여러사료나 고고학적 유물로서도 알수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그들 3종족또한 서로 달랐다고 하니.. 어찌했던 다떠나서 아주 먼 옜날 민족적인 인류학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현 중국도 어떻게 보면 그시기 존재하였다는 ‘이(夷)’라는 종족에 일파로 우리역사 일부분이 되겠지요 그들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그렇게 생각하겠구요^^ 왜냐하면 지금 그들땅을 기원으로 하기때문에.. 참 애매합니다..이런문제는
     
굿잡스 14-12-18 22:32
   
추가적으로 고대에 韓국 이라고 기록된 중국측 고대 문헌과 사료에 그들이 말하는 韓이라는 그룹은 한반도 남부에 지역적 명칭에 범주입니다 >??

얕팍한 소리로 여전히 떠드시구만.


고구려 유민인 '고현 묘지명'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이다. ....(중략)... 할아버지는... 아버지는... 모두 삼한(三韓)의 귀족으로 누대에 걸쳐 현달하였고"

고구려인 삼한인으로 표현.



삼국사기 권 제 28 백제본기 의자왕편

百濟本紀第六.<義慈王>.

 

[원문]: ○十一年, 遣使入<唐>朝貢. 使還, <高宗>降璽書, 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列疆界,

地實犬牙.

近代已來, 遂構嫌隙, 戰爭交起, 略無寧歲. 遂令<三韓>之氓,

命懸刀 俎 , 築戈肆憤, 朝夕相仍.

朕代天理物, 載深矜憫. 去歲, <高句麗>·<新羅>等使, 來入朝, 朕命釋玆 怨, 更敦款睦.

<新羅>使<金法敏>奏言: '<高句麗>·<百濟>, 脣齒相依,

竟擧干戈, 侵逼交至, 大城重鎭,  爲<百濟>所倂, 疆宇日蹙, 威力 謝, 乞詔<百濟>,

令歸所侵之城.

11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고종이 조서를 보내 왕에게 타일러 말했다.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의 역사가 오래되고 국토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이다.

근대 이래로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이 계속 일어나니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삼한 백성들은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상황이 되었으며,

무기를 쌓아 놓고 분노하는 일이 아침 저녁으로 이어졌다.

나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입장이니 이를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함께 와서 입조하였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기를 명하였었다.

신라 사신 김 법민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를 침략하니,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은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 갑니다.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아 간 성을 돌려 주게 하소서.

 

일본서기 권 25  天萬豊日天皇 孝德天皇

日本書紀 卷二五

 

[원문]: 大化四年(六四八)二月壬子朔◆二月壬子朔。於 三韓〈三韓、謂高麗,百濟,新羅〉遣學問僧。

[해석]: 大化 4년(648) 2월 壬子 초하루  三韓[삼한은 고(구)려·백제·신라 를 이른다]에 學問僧을 보냈다. 

이 해  新羅가 사신을 보내 調를 바쳤다.

 

금석비문중 (통일 신라시대)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원문]:         

  皇龍寺 刹柱 本紀」※

侍讀 右軍大監兼省公 臣 朴居勿 奉敎撰」

詳夫 皇龍寺九層塔者」

善德大王代之所建也 昔有善宗郞眞」

骨貴人也 少好殺生放鷹摯雉雉出淚」

而泣感此發心請出家入道法號慈藏」

大王卽位七年 大唐貞觀十二年我國」

仁平五年 戊戌歲隨我使神通入於西」

國王之十二年 癸卯歲欲歸本」

國頂辭南山圓香禪師禪師謂曰吾以」

觀心觀公之國皇龍寺建九層窣堵波」

海東諸國渾降汝國 慈藏持語而還以」

聞 乃命 監君 伊干龍樹大匠 [百]濟阿」

[非]等率小匠二百人造斯塔焉」

(鐫字僧聰惠)」

其十四年歲次乙巳始構建四月▨▨」

立刹柱明年乃畢功 鐵盤已上 高[七][步]」

已下高卅步三尺 果合三韓以爲▨▨」

君臣安樂至今賴之」

 

[해석]:

황룡사 구층탑은 선덕대왕 때에 세운 것이다. 전에 선종랑(善宗郞)이라는 진골 귀인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살생을 좋아하여 매를 놓아 꿩을 잡았는데, 그 꿩이 눈물을 흘리며 울자 이에 감동하여 마음을 일으켜 출가하여

도에 들어갈 것을 청하고 법호를 자장(慈藏)이라 하였다.

선덕대왕이 즉위한 지 7년째 되는 당나라 정관(貞觀) 12년 우리나라 인평(仁平) 5년 무술년(638)에

우리나라 사신 신통(神通)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선덕왕 12년 계묘년(643)에 신라에 돌아오고자 하여 종남산(終南山)의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머리 조아려 사직하니

선사가 “내가 관심(觀心)으로 그대의 나라를 보매, 황룡사에 9층의 탑을 세우면 해동(海東)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신라에) 돌아와 나라에 알렸다.

이에 (왕은) 이간(伊干) 용수(龍樹)를 감군(監君)으로 하여 대장(大匠)인 백제의 아비(阿非) 등과 소장(小匠) 이백여인을 데리고

이 탑을 만들도록 하였다. 선덕왕 14년 을사년(645)에 처음 건립하기 시작하여 4월……에 찰주(刹柱)를 세우고 이듬해에 모두 마치었다.

(탑의) 철반(鐵盤) 이상은 높이가 7보이고 그 이하는 높이가 30보 3자이다. 과연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고) 군신이 안락한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에 힘입은 것이다.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원문]:

曉慈忍禪師致書云月光寺者神僧道證所刱也昔我太宗大王痛黔黎之塗▨▨▨海之▨▨止戈三韓之年垂衣一統之日被」

▨▨▨之▨永除▨▨之災別封此山表元勲也曾授錄於金剛又傳名於仙記淸冷泉澗靉靆煙霞廣孕珠靈備存

▨傳師其居焉師如響應聲振衣卽▨▨▨▨夕夢前神侍衛」

 

[해석]:

자인선사가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월광사(月光寺) 신승(神僧) 도증(道證)이 세운 곳으로

과거에 우리 태종대왕(太宗大王)(무열왕(武烈王)을 말함)께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해(四海)가 괴로워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 삼한(三韓)에서 전쟁을 그치게 하고 통일을 달성하신 때에

▨▨▨ (부처?)의 ▨을 입어 ▨▨의 재앙을 영원히 없앴다고 하여 특별히 이 산을 표창하여 으뜸되는 공이 있음을 드러내었다.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변방경상도 14-12-18 23:02
   
후한서에서 언급되는 三韓은 마한.변진.진한을 뜻하는것이고
신당서 구당서 일본서기에서 언급되는三韓은 고구려.백제.신라를 통틀어 일켣는 표현입니다 봐도 모르겠어요? 당나라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三韓으로 기록하는 자체가 이미  韓은 민족에 이름이 아니라 한반도를 부르는 지역적 명칭이네요 그리고 당시에 서로 서로 옴겨살기도 하는 시대상이기도 하구 대방지역에 살던 한사군세력이 고구려 백제에 압박으로 대다수가 삼한에 이주하여 살고있다는 기록이 있구요 삼한은 본래 왜인과 땅을 접하고있어 문신같은 왜인에 풍습을 다수가 하고있다는 사료도 존재합니다 그 三韓이 부락사회로 존립하던시기에 고구려는 이미 졸본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동북부여를 남으로는 동예 옥저같은 부여 예맥계를 통합하고있던 시기에요
중국사서에서 시대별로 차이가 붙는 三韓을 우리식으로 구분하기위해 애써
  三韓열국시대와 삼국시대를 구분해서 부르고있잔아요 전혀 글을 이해못하고 글을쓰시는군요
               
굿잡스 14-12-23 23:41
   
이건 뭔 허접 소리 쳐하시남. 고구려가

한반도? 초기 400년 고구려 수도만 해도

만주일대 집안시구만

그리고 본인이 바로 위에서 짱개사서 남부

어쩌고 쳐떠들고는 뭔 딴소리 쳐하남??

짱개사서는 후한서 하나뿐임? 쳐발리니

헛소리나 하는
                    
대한민국군 14-12-24 00:15
   
오오 굿잡스님!!! 훌륭한 일침이시구만요...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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