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웃는 게 아니라 ‘웃는 표정’을 짓는 건 너무 어색해요.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만들어진 것, 꾸며진 것은 불편해요.”
“오늘이요? 아주 좋았어요. 집이 강남인데 거긴 너무 복잡하잖아요. 이렇게 풀과 나무를 볼 수 있는 곳에 오면 기분이 좋죠.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미우미우 니트 카디건을 입었더니 시골 소녀가 된 기분이에요. 솔직히 ‘물’을 더 좋아해요. 제 사주에 물이 부족하대요.” 내뱉은 말이 갑자기 우스웠는지 ‘풋’하고 고개를 돌리는 얼굴에 금빛 머리카락이 감긴다.
7월의 어느 햇살이 쏟아 내리는 초록 정원, 그 안에 햇살을 닮은 뽀얀 얼굴의 크리스탈이 있다. 오늘의 촬영 컨셉트와 스타일링은 그녀가 직접 제안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지금까지 시크한 컨셉트의 화보는 많이 찍어봐서 자연스럽고 소녀적인 뉘앙스가 가미된 사진을 찍어보고 싶었어요. 처음 해보는 금발 모습도 남겨두고 싶었고요. 이번 앨범 컨셉트는 ‘쎄서’재킷 사진도 다 어둡거든요.”
크리스탈이 속한 5인조 걸 그룹 f(x)는 최근 정규 3집 앨범 <레드 라이트>를 발표하고 활동 중이다. 동명의 타이틀 곡 ‘레드 라이트’의 티저 이미지와 뮤직비디오는 근래 아이돌 가수들이 선보인 ‘비주얼’ 중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반항아 같은 포즈, 한쪽 눈에 안대를 하거나 양쪽 눈의 메이크업을 달리 하고 찍은 묘한 사진들. ‘함수그룹’이라 불리며 수수께끼 같은 노래를 불러온 그녀들이지만 이번 변신은 더욱 센세이셔널했다. “거부감이 들거나 하진 않았어요. 본래 우리는 마냥 예쁘고 귀여운 걸 하는 그룹은 아니니까. 노래 자체는 호불호가 있지만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는 부분에서 반응이 좋은 것 같아요.”
섹시한 여성성을 강조하기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지닌, 미완성의 ‘소녀기’에서 차용한 알쏭달쏭한 이미지는 f(x)를 여타 걸 그룹들과 구분 짓게 해왔다. 그중에서도 퍼포먼스의 시작과 끝, 멤버들 가운데에 선 크리스탈은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여자아이. 예쁜 얼굴과 가는 팔다리를 지닌 100%의 소녀‘인 동시에 쉽게 장난을 걸 수 없을 것 같은 도도함이 풍겼다.
그랬던 그녀가 요즘 달라 보인다. 알려졌다시피 크리스탈은 같은 회사에 소속된 선배 그룹 소녀시대의 멤버 제시카와 친자매 사이. 각별한 우애를 자랑하는 두 사람의 일상을 쫓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제시카&크리스탈>이 현재 케이블에서 방영 중이다. 가족이자 평생 친구인 두 사람은 서로를 안고 쓰다듬고, 논쟁 같은 수다를 쏟아내고, 눈빛이 마주치기만 하면 웃는다. 특히 그 안에서 크리스탈이 보여주는 소탈하고 구밈 없는 태도와 귀여운 ’동생표‘ 애교는 시청자들을 무장해제시킨다. “꼭 연예인에 대해서만 아니라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다들 잘 모르면서 쉽게 얘기하잖아요. 그런 얘기들에 일일이 반응하거나 해명할 필요는 없겠죠. 방송을 보고 ’너 이런 애였어?‘ 하더라도 할 말 없고요.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
이날 오후를 함께 보낸 크리스탈은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다만 촬영 도중 “웃어 보라”는 사진가의 디렉션에는 꽤 난처해한다. “진짜 웃는 게 아니라 ’웃는 표정‘을 짓는 건 너무 어색해요.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만들어진 것, 꾸며진 것은 불편해요.” 연예인이라고 해서 ’대접‘받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옆에서 부채질해 줄 때 그걸 당연하게 받고 있는 모습은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이런 ’자연스러움‘이야말로 크리스탈에게 느껴지는 ’여유‘와 ’쿨함‘의 정체인 듯. 이런 그녀의 면모를 쌀쌀맞음이나 도도함으로 오해하는 시선들도 있었다. ’연습생 시절,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싫어서 화장실에 숨곤 했던‘ 여린 마음이나, 새로운 시작이나 만남에 적응하기까지 남보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사정은 그녀가 티 내지 않고 혼자 감내했던 것들이었으니. “다들 내가 파티를 엄청 즐길 것 같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사람 많고 시끄러운 데 안 좋아하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연습생으로 살았고 열여섯 살에 데뷔한 크리스탈의 일상은 우리가 떠올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그녀는 말한다). “관심 있는 것들은 늘 비슷비슷해요. 인테리어, 요리, 베이킹 같은 것들. 그런데 뭔가 특별하게 꽂혔던 건 없는 것 같아요. 한동안 카메라에 빠지긴 했는데 그것도 흐지부지해졌죠. 이 모든게 진짜 좋아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과정인 것 같아요.” 연예계 생활 속에서 ’본연의 나‘를 지켜줄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을 꾸려가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특별함을 찾는 것이 크리스탈의 삶의 방식처럼 들린다. ’평범함 속의 특별함‘은 인연을 맺는 기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자기만의 분위기나 색을 지닌 사람에게 매력을 느껴요. 언니는 내가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것 같다고 걱정하지만.”
또래 아이돌 중 최고의 패셔니스타로 꼽히는 그녀는 ’출근 패션‘’공항 패션‘의 단골 스타다. 비결을 묻자 돌아오는 질문. “누구나 집 밖에 나올 때 옷에 신경 쓰지 않나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거나 대답 끝에 물음표를 붙이는 게 핑퐁 같은 크리스탈의 화법. 그녀의 스타일 모델로 알려진 카야 스코델라리오에 대해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난 그녀가 아니라 <스킨스>에서 연기한 ’에피‘를 좋아했던 건데 잘못 알려졌어요. 카야는 평소에 옷도 잘 못 입지 않아요?”
가식을 모르는 그녀의 기질이 ’귀엽게‘ 드러난 순간은 최근에 누렸던 행복한 기억에 대한 답변이다. “요즘은 컴백 준비하고 활동하느라 그런 걸 느낄 여유가 없었어요. 아니다, (갑자기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음반 내가 방송 활동해서 너무너무 행복해요. 이렇게 말해야 하나?”
어느덧 연예계 데뷔 5년 차이자 스물하나. 여전히 보호가 필요한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마냥 어린애는 아니다. “스무 살이 된 후부터 필터링 없이 바로 오는 것들이 많아졌어요.전에는 미성년자니까 주변에서 조심했다면 이제는 나한테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말이 많죠.”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더 직접적으로 다가올 세상의 피드백과 낯선 경험들은 크리스탈에게 새로운 꿈을 선사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렇겠죠. 가끔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데, 아직 찾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데 만일 그런 게 있더라도 얘기 안 해줬을 거예요.(웃음).” 아, 이런 사랑스러운 솔직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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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E gusetlist 中 스타일리스트 최경원>
“반하실 겁니다.” 크리스탈을 만나기 전, 최경원 실장이 한 말이다. 이달 ‘예쁜 여동생’같은 크리스탈과 <엘르>의 첫 번째 만남을 위해 에디터와 수시로 카톡 창에서 시안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눴다. 그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며, 이번 프로젝트의 마지막 카톡으로 그녀의 뮤즈인 크리스탈에 대한 코멘트를 청했다. “크리스탈보다 ‘수정이’ 혹은 ‘뚜덩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길 좋아한다. 수정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밝고 털털하다. 소소하게 지켜나가려는 일상 속에 수정이만의 감성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둘이 맛집 투어를 다니기도 하는데, 팬시한 곳이 아니더라도 어떤 곳에 들어서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3. 수정이랑 이태원에 놀러간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