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자료실
HOME > 영상자료 > 한류영상
 
작성일 : 15-08-17 22:02
[기타해외] (해외 반응) 한국은 거지같은 나라에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좋은 나라가 된거냐?
 글쓴이 : snowmon20
조회 : 12,159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일경 15-08-17 22:25
   
왜 우리나라가 이렇게 빠르게 산업화가 됐냐고??

한반도에 들어선 국가 중에 국제적 기준으로 봐도 문화적 경제적으로 못살았던 나라가 산업화 이전엔 존재 하지 않았으니까.

백제,고구려,신라,고려,조선 모두 전 세계 기준으로도 문화적 경제적으로 매우 발전한 나라들이였는데

식민지 시대와 전쟁으로 황폐화 되어 잠시 힘들었을뿐 원래 자리를 다시 찾은 거임.

다른거 없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만큼 살 사람들임..

오랜 시간 그렇게 살아 왔기에 그렇게 사는게 당연한듯해서 열심히들 사는것임..
     
일경 15-08-17 22:32
   
보태여 말하면 이런 뿌리깊은 문화는 확실하게 차이가 남.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의 GDP가 낮은 국가들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음.

우린 못먹고 못입고 힘들어도 자식 교육은 포기 하질 않음.

우리 부모시대가 그렇게 힘들었는데도 글을 못 읽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학교를 아에 못 가본 사람도 찾기가 힘듬. 하다 못해 서당이라도 다녔으니...

도시가 아니라 시골 사람들도 학교든 서당이든 글을 배웠음.

이게 차이임.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교육의 중요성을 못 깨우치고 있을때 우린 교육의 중요성을 이미 누구나가 알고 있었음.

왜냐면 과거부터 국가 체계가 잘 잡혀 있던지라.. 배운 사람이 확실히 대우를 받고 살았었거든..

그래서 그렇게 힘들어도 가르치려고 했던거지..
     
요다다 15-08-18 08:16
   
이런 사람들을 국뽕이라는거구나.. 첨 알았다.
          
굿잡스 15-08-18 11:16
   
요다다>윗 님이 전체적으로 틀린 말 한게 없는데 뭔 어디서

되지도 않는 개념 말아 먹은 국뽕 어쩌고 시비질이심?(아님 제대로 근거를 가지고

반박을 해보든지)
          
검은바바리 15-08-18 21:03
   
요시다

이 인간 뭐여?
냄새가 아주 구리네..

아이디도 다분히 친일파스럽고
그냥 조용히 있어라.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대배달인 15-08-19 16:32
   
저 사람이 국뽕이면 님은 머여?
매국노여?
     
소리없이 15-08-20 03:56
   
그러네요...  사실 한반도에 들어선 국가중에 당시대로 국제사회에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가장 못 나가는 나라가 대한민국이긴 하군요.  머  조선후기의 암울한 시기(주권을 상실한)를 빼면 기나긴 역사로 볼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가 제일 후지긴 하네요~ 

 와~  엄청 날카로운 시각이십니다~
예랑 15-08-17 22:37
   
무지한 외국인들이 우리나라가 전쟁과 식민지시대 이전에도 아예 문화도 없고 역사도 없는
계속 못살았던 민족처럼 생각하네..
굿잡스 15-08-17 22:41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삼국사기 <최치원전>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그때 그의 나이는 98세였다. 임금의 호를 장수왕(長壽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효문(孝文)이 이 소식을 듣고, 흰색의 위모관(委貌冠)과 베로 만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七十九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79년(서기 491)


28년(서기 519),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문자명왕(文咨明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
 
二十八年 王薨 號爲文咨明王 魏靈太后擧哀於東堂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28년(서기 519)

서토 낙양을 장악한 북조사 북위 대국의 통치자들이 고구려 태왕이 승하하자 상복을 입고

애도식을 행함.


東海之內 北海之偶 有國名曰 朝鮮

동해지내 북해지우 유국명왈 조선

"동해(서토 동해안) 안쪽, 북해(발해) 모퉁이에 조선이란 나라가 있었다”

-산해경(춘추전국시절 편찬된 지리서)


요서에서 발견된 두로영은(豆盧永恩)의 비문에

조선건국 고죽위군朝鮮建國 孤竹爲君’(조선이 건국을 하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


출토 유물로 본 고조선 영역

http://blog.daum.net/joo119114/1550

삼국시대 고(구)려 영역.
http://cafe.daum.net/alhc/4xOO/11341?q=%B0%ED%B1%B8%B7%C1&re=1
굿잡스 15-08-17 22:42
   
“예군 묘지명에 적힌 ‘日本’은 ‘百濟’지칭”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42301032430074011


“일본은 원래 백제땅 일컫는 말이었다”

일 교수, 678년 ‘예군 묘지명’ 근거
“실제 일본은 해좌·영동으로 표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6435.html
 

칠지도 (七枝刀)

백제 어라하(황제)가 열도 제후 왜왕에게 하사
 

<앞> 泰○四年 ○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銅] 七支刀 生辟百兵 宜供供侯王○○○○作
태○사년 ○월십육일 병오정양 조백련[동] 칠지도 생벽백병 의공공후왕○○○○작

<뒤>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선세이래 미유차도 백제왕세○ 기생성음 고위왜왕지련 전시후세

(국립부여박물관 전시 내용)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를 ○○○○가 만들었다.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이나리야마”에 새겨진 백제의 열도 지배


이두로 이 글을 다시 풀어보니 놀랍게도 이것은 고구려가 남침한 369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망명온 뒤 이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 였던 것이다.
 
이두로 풀이한 칼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471년에 “고” 확고는 조상이름을 적어 둔다. “오호 비꼬”어르신, 그 아들 “다가리 쪽니”어르신, 그 아들 “고리 확고”, 그 아들 “다사기 확고”. 그 아들 “바라 고비”, 그 아들 “가사 비리”, 그리고 그 아들은 “고 확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장수로서 대대로 섬긴바 그 임금님은 사기궁에 마실을 차리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크신 확가 개로 대왕이시니라. 온 번 불리고 달구어 만든 이 칼에 우리 집안 내력과 뿌리를 적어두는 바이다
 
...................


이렇듯이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은 5세기 가운데 즈음에 옛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등 세 곳에 백제가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왜 왕실은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것이다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168467§ion=sc1§ion2



백제인들이 열도를 지배하고 생활하기 위해 건설한 협산지(狹山池:사야마이케)저수지(사진)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6291&page=0&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98%A4%EC%82%AC%EC%B9%B4+%EC%A0%80%EC%88%98%EC%A7%80&sst=&sod=&spt=0&page=0
 

열도내 우리 유적 -신롱석산성(神籠石山城:고고이시산성)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6931&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A%B3%A0%EA%B3%A0%EC%9D%B4%EC%8B%9C%EC%82%B0%EC%84%B1&sop=and
 

고송총 고분(高松塚 古墳: 다카마쓰즈카 고분)

1972년 발굴된 고분으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엽의 우리나라할때의 나라

현에서 발굴된 벽화 고분으로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고구려 양식의 고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특유의 주름 치마 여인복장이 그려져 있음. (그외

평양의 고구려 강서대묘에서 보이는 사신도(현무등)의 그림도 그려져 있는.)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4179&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5%9C%EB%B3%B5+%EB%8B%B9%ED%92%8D&sop=and
 

백제가 열도에 건설한 아스카(飛鳥:비조) 문명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1026&logNo=150180089525
 
http://blog
 

남북국시대(발해-신라)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한 신국(神國)의 신라.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제대로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박살난 일본, 결국 용서를 빌기 위해 서기 742년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 이를 기특하게 여긴 신라는 드디어 일본을 용서하고 속국으로서 인정한다. 서기 806년 속국에게 하교하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 사찰을 수리하는 것조차 '종주국' 신라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 이후 '속국' 일본에 대한 종주국 신라의 사랑은 계속되고… 신라의 어버이와 같은 사랑에 감동한 일본은 서기 882년, 보답한다.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3년의 내용)-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옛 사서(역사책)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 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고려도경


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旣恥其名. 又自以在極東因號日本也. 今則臣屬高麗也 - 郭若虛.『圖畵見聞志』 卷6. 高麗國
왜국은 일본국이다. 倭라는 원래 이름을 부끄러워했는데, 극동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가 일본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속국이다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62414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1%B0%EC%84%A0+%ED%99%A9%EC%A0%9C&sop=and
 

에도막부, 조선통신사 일행에 극빈 대접

“한해 쌀 수확량 12% 접대비로 사용”

옥스퍼드大 루이스 교수 논문

“일본이 조선통신사의 한 차례 방문에 쓴 접대비용은 (일본의) 한 해 쌀 수확량의 12%를 넘었다.”


http://news.donga.com/3/all/20090202/8690797/1
slayer 15-08-17 22:49
   
솔직히 한글이라는 엄청나게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를 쓰는거 하나만으로 절대 무시못할 나라인데 식민지배를 당하고 전쟁을 겪었다고 문명에 뒤쳐진 나라쯤으로 여기는 건 무지의 소산이라고 봅니다.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도 2000년전후로 고구려-백제-신라에서 통일신라-고려-조선까지 약 1300년동안 3개의 통일왕조만으로 나라가 유지됐다는 사실까지 알면 놀라 자빠질거 같네요.
굿잡스 15-08-17 23:00
   
남북국시대(해동 성국 대발해-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한 신국(神國)의 신라.

당대 유럽의 최대 도시라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보다 훨씬 큰

천년 신라의 수도 서라벌.

삼국유사에 남북국시대 신라의 전성기 때 수도의 호수가 17만 8936호.

1호(가구)를 5인으로 잡으면 90만 정도 그런데 발견된 신라촌락문서을 보면 호당 10명까지도 잡은 기록이 보임.

(평균 호당 7,8명만 해도 과장없는 100만의 거대 국제도시가 서라벌. 이 서라벌이라는 어원이 이후

지금의 서울이라는 대한민국 수도가 나온 명칭의 유래임)

신라 서라벌 3D구현.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2487&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84%9C%EB%9D%BC%EB%B2%8C&sop=and


황금의 나라 동방의 이상향 신라.

신라 때는 개(犬)목걸이도 황금이었다
 
"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
 
 966년, 아랍사학자인 알 마크디시는 < 창세와 역사서(Kitabu'l Badi Wa'd Tarikh) > 에서 신라를 이렇게 표현했다. 마크디시 뿐이 아니다. 9~12세기 사이 아랍의 지리학자들은 한결같이 신라를 '신비의 이상향'이자, '황금의
나라'로 표현한다.
 
 "신라의 공기가 순수하고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하다.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의 향기가 풍긴다.

전염병과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이 걸린 사람은 그곳에 가면 곧 완치된다."

http://cafe.daum.net/121315/9mPD/5?q=%BE%C6%B6%F8%20%C8%B2%B1%DD%C0%C7%20%B3%AA%B6%F3%20%BD%C5%B6%F3&re=1


그리고 고구려 안학궁이나 발해 궁성을 보면 당대 서토 수,당보다 단일 건축물로는

더 크고 웅장.(언뜻 크기가 얼마인지 체감 안된다면 무굴제국의 황제가 타지마할 짓고

나서 국가가 휘청했다는 크기보다 더 큰게 고구려 발해 궁성 건물임. 그것도 목조로)


고구려  5세기
 
<안학궁 남삼문(南三門) 중 남중문(南中門) 38m 앞면 7칸

안학궁 남궁 1궁전(정전) 62m 앞면 11칸

안학궁 중궁 1궁전(편전) 87m.  앞면 19칸 >
 
7세기에 세워지고 확장된 당나라의 최대궁전인 대명궁의 정전인 함원전 정면 길이가 67.33m
 
북경  자금성에서 가장 큰 건물 태화전 정면 64m


동대사 크기는 높이 48m, 가로 57m, 세로 50m라오. 안의 대불은 15미터  =>백제인에 의해 건립.



인도의 타지마할의 기단 크기 94m, 건물 크기 57m

발해의 상경용천부 제2궁전 기단 크기 120m, 건물 크기 93.5m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6234&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83%80%EC%A7%80%EB%A7%88%ED%95%A0&sop=and


조선 한양도성(5궁체재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창경궁+경운궁)>> 서토 자금성

 43만㎡+ 43만㎡+ 23만㎡ +21만㎡+6만㎡ (아래 단위는 생략)
=136만㎡

자금성 면적
72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0733&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9E%90%EA%B8%88%EC%84%B1&sop=and&page=2
굿잡스 15-08-17 23:11
   
비록 대한제국이 뒤늦게 문호개방부터 비록 잽의 정치 공작과 무력에 무너졌지만

명,청(만주일대 조선의 직간접 통제를 받던 여진족(후에 만주족으로 개칭)이 근세

동북아의 최대 전쟁인 임진왜란 시기에 부족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워 서토 명을

멸망시키고 수백만을 도륙하면서 세웠으며 초기부터 말기까지 만주본위 서토인 차별의 이민족 정복왕조

사) 정도의 서토 인구력 빨에 조선이 어쩌고였지 유럽가면 이미 앞선

중앙집권에 선진 관료체계,인구,군사력, 식량 저장, 1600년 전 삼국시대 이미 고등교육기관 및

세계최초의 서민 교육 기관 설립(경당제도)등 앞선 인프라 수준이면 깡패짓할 나라였군

요. (본격적 개방 이후 대한제국의 빠른 근대화의 성과와 역량도 이런 조선의 이전 인

프라가 수준이 있었기에 가능)


그리고 삼국시대 앞선 목판 인쇄술부터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개발 이후

조선이 가진 활자 종주국으로서의 방대한

인쇄량과 문명률 수준은 당대 세계사적으로도 최고의 나라. 이런 바탕에서 18세기 조선 후기에 가면

이미 오늘날 세책점 같은 책대여점에 오늘날 넷댓글처럼 아녀자도 책 뒤에 소감을 적을 정도였고

이런 근대화되는 문명률상은 유럽도 근대시기에 보기 힘든 모습들임. (프랑스가 병인양요때

가져가서 최근에 반환된 외규장각도서의 정밀하고 세밀한 기록 유산을 보고 혀를 내둘렸다는

이야기나 당시 서구에서도 일반 서민 가정집에서는 책이 귀하고 읽을 수준이 못되었는데

조선의 가난한 집에서도 책들이 놓여있는 모습에 놀랐다는 일화등은 새삼 새겨볼 필요가 있음)

이런 문명률을 바탕으로 교육을 받은 많은 중인 계층과 상업의 발달에(개성의 복식

부기인 송도사개치부법등은 이미 세계최초로 서구보다 200여년 앞서 나온 상태임.

이미 고려시대부터 발전해서 서양보다 200여년을 앞선 근현대적 복기부기의

원조격인 개성상인의 사개치부법(四介治簿法)등에는 오늘날 사용하는 현금출납장부터 물품거래

장에 위탁물처리장 및 어음거래를 한 어험수지장(魚驗收支帳)까지 다 들어 가 있군요.)


서구보다 200년 앞선 개성상인의 복식 부기(조선의 자본주의식 경영)

http://news.donga.com/3/all/20131029/58553481/1


그외 세계최초의 공중 보건서인 동의보감의 편찬으로 이미 18세기에 가면 이런 높은 문명률로

진찰은 의원에게 약은 약방의 의학 분업의 곳곳의 사회상들이고 유럽의 근대 보건 사회상보다

더 앞서 나온게 조선 후기 모습이군요. 이런게 지금 와서야 별 감흥이 안느껴지겠지만

무슨 약방이나 진찰 어쩌고 이런 인프라나 보건 지식 개념이 이정도로 대중화 교육 받는게

당대에 그렇게 흔한 모습이 전혀 아닙니다.

그외 임진왜란를 일으킨 도요토미가 패망하고 도쿠가와의 에도막부시대가

열리면서 조선통신사가 왜국에 사농공상과 선진 관료를 전수할때 도리어 조선은 이미 신분제 사회가

무너지고 있었고 이때문에 1800년에 들어서 조선 조정내에서 자체 자발적

공노비 해방부터 고종시기에 가면 사노비 해방의 신분철폐, 사유재산 인정, 기존 삼국시대부터 이미 내려온 앞선

선진 서민 교육 기관에 근대 교육을 병합시켜 근대 교육령반포, 서구식 의사

자체 배출 ,병원, 철도, 전문 고등 교육 기관 설립,근대 은행,

전차, 전기, 근대적 우체국 및 근대적 군사제도와 대규모 징병제도 러일 전쟁전에 이미

대두되고 있던 단계였음.


왜가 16세기 조선의 은 제련 기술을 몰래 배워서 본격적 은광산 개발이 시작되는데

이런 은광은 에도말기에 가면 이미 거의 다 발굴해서 밑바닥을 드러냈던데 비해

우리 대한제국은 이전까지 묻어 두었던 광공업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지금도 우리가 아는

노다지(금을 발굴할때 노터지 즉 만지지 말라라는 말에 유래)라는 말은

이 당시 세계적인 풍부한 3대 금광을 가지고 미국등과 합작 본격적 광공업 개발과 주식회사

등이 생겨나면서 나온 시대배경등임. 이런 대한제국의 금광등을 바탕으로 고종은 이미

1883년 상설 조폐기관인 전환국부터 근대 은행(대한천일은행등 설립)을 설립하고 백동화 같은 근대적 화폐 유통이

전국적으로 본격화되자 이후 화폐의 가치 안정화를 위해 금본위 제도의 중앙은행설립단계로 넘어

가고 있었지만 잽의 방해와 러일 전쟁 이후 대한제국의 조세권을 강탈하면서 이런 막대한

금광등 수많은 자원이나 근대적 인프라의 열매를 송두리채 쭉쭉 빨아 쳐먹고 성장한 것임.


 당시 대한제국은 러샤와 간도협약등 나름 유대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대한제국은 앞서 프랑스나 미국등과 무력적 대결을 하는등 만만찮은 태도를

보이면서 당시 미국등은 이런 대한제국에 대한 이해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시대입니다. 그기에 러샤등에 대해 도리어 대한제국은 나름 유효한 카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당시 세계 최강 국이였던 영나 미는 이런 러샤의 남하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었고.(영국도

러샤 견제로 자신과 어쩌고 하면 밀어 준다는 식이 있었음. 먼저 러샤와 협략을 맺고 난 이후라서

흐지부지 되어 버렸지만)

그러다 보니 미 흑선 몇방에 일찍 문호개방하고 잽 정부 차원에서 자국 여성의 대대적

인신매매수출과 농민 고혈을 빨아서 관치 주도의 서구 무기 수입에 혈안이

된 군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니 미국등 돈도 짭짤해 지겠다 빨아주니

호감을 얻으면서 미국 입장에서야 당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접점도 덜한 대한제국보다 잽을 더 좋게 보고

러샤의 저지를 위한 지역 방패막으로 적극 활용. 영미의 대규모 차관과 군수무기 지원 및

군사 교련을 시켜 대결시켰던게 러일전쟁의 시대적 배경이군요.

그리고 이 당시 잽이 러일 전비로 영미에 빌려 소모한 금액이 20억엔에 이르는데 러일 전쟁

승전에도 러샤가 전쟁 배상금 지급을 하지 않아 잽 내부에서 불만과 폭동까지 났던 상황임.

만약 잽이 극동까지 피로에 지친 러샤 함대를 이기지 못했다면

그래서  대한제국의 막대한 조세수탈(310억엔에 이름)이나 세계적 3대 금광,

35년 동안 악랄한 7,800만에 이르는 강제노역과 대대적 식량 수탈및 자원 수탈등이 없었다면

기형적 관치 군수로 인해 내부적으로 이미 경제가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했을 나라임.

(지금 북한 꼴로 쉽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이런 대한제국의 근대화의 열매를 쭉쭉 빨아 쳐먹고 7,800만에 이르는 강제노역을 통해

근대 인프라 구축을 못시켰다면 그게 더 상뷩 신이겠죠.


대한제국 근대화 사진.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67208&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B%8C%80%ED%95%9C%EC%A0%9C%EA%B5%AD+%EC%82%AC%EC%A7%84&sop=and
굿잡스 15-08-17 23:23
   
근대 대학            전신                                  설립연도
 
성균관대 성균관(조선태조), 경학과(3년제의 근대대학)    1398년, 1895년
 
고려대    보성전문학교                              1905년
 
연세대    광혜원                                    1885년
 
배재대    배재학당                                    1885년
 
숭실대    학당                                        1897년
 
가톨릭대 배성요셉신학당                              1855년
 
이화여대  이화학당                                    1886년


근대 고등학교

서울 배재고 - 1885년, 개교 130주년
서울 경신고 - 1885년, 개교 130주년
서울 이화여고 - 1886년, 개교 129주년
서울 정신여고 - 1887년, 개교 128주년
인천 영화관광경영고 - 1892년, 개교 123주년
서울 광성고 - 1894년, 개교 121주년
부산 개성고 -1895년, 개교 120주년
인천 인천고 - 1895년, 개교 120주년
부산 동래여고 - 1895년, 개교 120주년
서울 숭실고 - 1897년, 개교 118주년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700487

이걸 보면 명확히 알겠지만 교육관련해서도 잽강점기(1910-45) 이전에 우리 자체 내에서

이미 다 시행하고 근대적 인프라를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던 시기였군요.

(도리어 잽강점기 35년은 교육에서도 우리의 암흑기로 불릴 만큼 제대로된

전문 고급 인력 양성이 극도로 제한되어 저급 단순 교육 위주의 우민화에

지금도 학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식민 사관 및 우리 언어와 한글, 얼까지

말살할려는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이 후기로 갈수록 더욱 노골화되었던 극악의 시기임)



<이미 조선은 근세시기 정치적으로 야만적 왜국처럼 칼이나 무력이 아니라

경국대전이라는 법치를 바탕으로 오늘날 의회 민주주의 처럼

왕의 독단이 아니라 토론과 견제를 통해서 정치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고 잽 강점기 35년의 우민화

저급 단순 교육과 6.25 남북 전쟁으로 폐허속의 반세기로 일시 주춤했지만 이미 왕조시대 당대 세계사적으로

문자가 권력자의 정치적 지배 도구로 사용되는 시대에  임금이 백성을 위해 쉽게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위대한 애민정신으로 탄생한 한글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이후 반세기라는 짧은 시간속에서도

지식의 원활한 전달과 흡수 빠른 저변 교육이 가능했고 이를 통해 첨단분야와 정보화 시대의 선두 주자로 나올 수 있는

내재된 문화 기반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기에 이미 1600여년 전에 당대 세계에서 귀족들도 교육을 받고 문자를 해독하기 힘들었던 시대에

이미 서민들을 위한 경당이라는 문무겸비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이어온 제도사상과 기반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빠른 현대화를 구축하고 고급 인재를 육성해서 선도할 수 있는 큰 힘으로

작용했다고 보군요.(물론 자식의 올림 사랑의 효와 내림 사랑의 부모님의 헌신의 가족애의

미풍양속이 어려운 시기 현재보다는 미래를 위해 피눈물을 흘리면서 노력하고 헌신한 부모님 세

대들의 노고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원동력이겠지요)>



우리나라는 이미 사료적으로 확인되는 것이 최소 고조선 말기 열국시대 준왕이 위만에게 박사 (博士) 라는 지위

를 주는 등 교육 관련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조선의 8조금법등

사회 규율 및 고조선 건국 이념인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가르침은 지금도

우리 교육 이념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시대 고구려는 고등 교육 기관인 태학부터 이미 1600년 전 세계 최초의 서민

교육 기관인 경당 제도를 두었고 그외 백제의 박사. 신라의 화랑제도등 인재 양성 기관을

통해 이런 정신과 인프라는 고려를 지나 조선 시대에도 공립 고등 교육 기관인 성균관 부터

민간 사학,  지방의 문화와 교육을 담당하는 향교 및 초등 교육 기관을 담당하든 개인 교습부터

서당등 매우 체계적이고 앞선 교육 인프라를 전국적으로 구축하고 있었으며 이런 바탕에서 고종은

이런 전통적 교육의 장점과 서구식을 조화시켜 근대 교육령 제도를 반포하게 되군요.(1895)

이를 통해 영어 학교부터 상공업, 의학대등 다양한 전문 학교나 근대적 고등 교육 기관 및 전국적 초,

중,고등교육 기관들이 급속도록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임.


조선시대 초등교육기관인 서당 교육 수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5079&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84%9C%EB%8B%B9&sop=and
 

이에 반해 19세기 우리나라 승려가 기록한 일본 표해록을 보면 당시 왜국은 학교 조차 없었고

심지어 조선인의 애를 낳으면 국가에서 돈이 나오기까지 한 기록들이 보이군요.

에도시대에 와서 조선 통신사를 통해 선진 관료제를 도입하면서 점차 문인 관료화로 행정력을

발휘해야 하니 일부 귀족층에 한해 한정된 교육기관이 나오지만 이것도 특수 일부에 한정되었고

실제 16세기 임진왜란 시기에 왜의 장수라는 작자는 병법서 한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들이 상당했을 정도였음. 이후 미 흑선 대포 몇방에 에도 정권이 공포에 질러 불평등

조약을 맺고 통상이 이루어지자 자국내 경제는 더욱 피폐되었고 이런 불만으로 이후 지들끼리

칼질하다 나온게 메이지 유신인데 이때도 잽이 딱히 무슨 영국처럼 대항해 시대의 수백년을

통해 상업적 부를 축적하면서 돈이 있어 어쩌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단기간내에 우민화

된 사회상과 교육 수준이고 근대화상을 이룩한게 전혀 아닙니다.

(<메이지 일본의 알몸을 훔쳐보다>라는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페르디낭 비고의 만화를

보면 1882년 잽에 건너와 18년 동안 살면서 본 메이지 후반기의 적날한 모습들이

나오는데 열차가 도입되자 자국민을 3등급으로 분류해서 무슨 저기 백인들 흑인 노예랑

같이 앉지 못하게 차별마냥 서열 정해서 탑승. 신분제 폐지?? 현실은 헛소리임.

그기에 윤락녀등 몸파는 여자들은 무슨 동물 우리같은 격장에 갇혀서 호객 행위를 할만큼

비인권적(21세기에도 잽의 전국에 수천개의 천민부락쿠 마을이 폐지되지 않고 있는데

다 이유가 있음). 광산쪽에도 강제 노역이 엄청 심했고 이걸 이후 식민 강점하면서 조선인들이

죽어 나가면서 이후 잽 노동자와 조선인까지 못살겠다고 합심해서 데모.

남녀 혼탕의 이해되지 않는 목욕 문화하며 뻐드렁니 숏다리 잽 정치인이 거덜먹거리면서 활보하는

모습등. ) 임진왜란 때 마냥 자국 여성들 인신매매로 등쳐먹은 돈과 농민 고혈 빨아서 관치 주도로 군

수 근대화라고 불릴 정도로 서구 무기 수입질에 치우친 기형적 근대화였지. 이런 어설픈 관치 군수

경제와 제대로된 철학부재와 수준이 없다보니 인성 상실한채 전쟁광분에 치달리면서

온갖 중범죄에 인체실험과 대학살 및 자국민까지 인명경시가 극에 달해서 무식한 무대포 반자이 돌

격부터 사람을 수중어뢰폭탄이나 공중 인간 미사일식 카미가제등 황당한 짓거리 까지 서슴치 안다 핵쳐

맞고 패망.(쓰레기 전범 잽 극우들은 이런 전후 적날한 역사적 만행과 원인,과정을 감춘채

침략자이고 중범죄 피의자가 마치 본인들이 피해자 마냥 개소리에 2차대전을 미화하면서

강요된 무의미한 희생들을 자화자찬 뜨거운 애국심마냥 포장질 쳐하고 있는)


메이지 시대 자칭 근대화 되었다는 일본 자화상(사진)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6111&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B%A9%94%EC%9D%B4%EC%A7%80&sop=and
고구마깡 15-08-17 23:25
   
위에 사람들 논리면 이란 이라크 인도 우리나라 위치까지 올라가야함 더군다나 그 삼국은 해방후 우리나라보다 훨씬 공업화가 되어있는나라인데다가 입법 민주주의 까지 이룬 나라였음 근데 이걸 60년도안에 치고 올라와서 누군 수백년걸려이룬걸 반세기만에 이뤘다?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어없음
     
굿잡스 15-08-17 23:33
   
그런데 우리가 너무 특정 정치적 프레임으로 어느 시기만 포커스를 맞추어 이야기 하다

보니 상대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3자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역사가 내내 가난했거나

약소국 마냥  어쩌고 이런 왜곡된 이미지가 생겨난 게 있습니다.(결코 바람직한

모양새는 아니죠)

과거 수천년간 동북아에서 오랜 시원문명으로 그리고 당당히 외세에 맞서 만주 요동일대를

지켜내면서 문명국으로 발전해 온 저력이 그리고 이미 그런 한글부터 선진적 사회교육제도

등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지켜온 문화가 있었기에 짧은 기간의 산업화 시기에 지식 정보화

사회의 선두 국가로 나갈 수 있었다고 보군요. 나아가 식민지로 점철된

기형적 사회상을 극복하고 경제뿐 아니라 정치 민주화라는 양대 산맥을

반세기만에 동시에 이룩할 수 있었던 저력일 것이고. 비록 오늘날 남북한이 분단되어

있지만 이제는 점차 이런 동북아의 강대국으로서 문명국으로 정상적으로 찾아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3자에게 이해시키고 전후 흐름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 나가는게

좀 더 정확하고 지금의 우리를 이해시키는데도 적절한 시점이겠지요.

나아가 온 국민이 합심하고 더욱 분발해서 평화 통일 대한민국을 만들어

우리 고조선의 건국 이념인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 사상을 펼쳐 나갈 수

있게 더욱 부단히 힘을 키우고 노력해야 겠지요.
          
왜나라호빗 15-08-18 00:56
   
맨날 우리 스스로 5천년 이래 지금처럼 강대국인 적이 없다는 멍청한 소리나하고 다니니 쩝
외계생명체 15-08-17 23:42
   
다만 그 발전의 역사가 짧은만큼 개인적으로 아쉬운점들이 보이는데..
그것만 개선된다면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 될거라 생각함.
그리고 땅과 자원만 더 있었어도..ㅜㅜ
너끈하다 15-08-18 00:34
   
싼인건비와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노력이 있었죠.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변고가 없이 살았있었다면 생각나는 사람이 카다피네요.
민주주의의 확립은 국민 스스로 이뤄낸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열이 일어나니 깨어있는 사람이 생겨나고 그게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원동력이 되었죠. 덕분에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한꺼번에 이뤄냈게 아닐까 스스로 생각해봥용
무얼원해 15-08-18 00:44
   
흥미로운 반응들이 많네요.
박정희 시절에 미국으로부터 무역특혜가 있던건 사실이나
월남전에서 흘린 피의 댓가이구요.
인종 지능 드립은 모르겠으나
자원이라곤 개 코딱지만큼도 없는데, 이만큼 먹고사는건 오로지 인적자원뿐
교육열이 큰힘이 되었죠. 그게 부메랑이 되어서 지금 부작용이 생기긴 하지만요.
땅파먹고 나무 끓여먹던 시절에 박정희가 경제원조 얻을려고
저자세로 나간게 지금의 한국의 위상을 만들긴 했지만..
어쨋든 배 곪은 시절은 넘겼다는점에서..양날의 검인것 같습니다.
mini0614 15-08-18 01:04
   
미국이 달러를 쏟아부어주면 한국처럼 되는 건 일도 아니다?
백제 15-08-18 02:19
   
이건 쪽빨이에게 해당되는거죠
문화도 역사도 없던 쪽빠리가 갑자기 잘 살게 된게 오래 되질 않습니다
문화 역사가 깊은 우리나라는 최근에 잠시 망했다가 저력이 있기에 빨리 일어선 것일뿐
비유를 하자면 근본도 없는 천민이 수단과 방법을 거리지 않고 악행도 서슴치 않고 악착같이 돈벌어 부자가됨 -->쪽빨이
명문가였지만 가세가 기울어 망했다가 저력이 있어 스스로 다시 일어서는중 -->>대한민국
달나라사과 15-08-18 03:27
   
한국인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이 있었는지 니들은 상상조차 못할꺼다

어두운 이면에 노력은 보지않고 미국원조니 머니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발전한것도 원폭처맞고 다죽어가던 나라 한반도 전쟁으로 운좋게 살아난 케이스가

일본이지 일본이 했던 노력과 원폭으로 희생된 사람들이나 밤낮으로 일했던 사람들에 노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노력으로 치자면 한국이 몇배는 더했다 일본이 했던 노력하곤 차원이 다르다

왜 한국처럼 발전이 안되냐고? 죽음의 문턱에 갔다오지 못한 나라는 절대 이해 못하지

일본이나 우리나 죽었다가 살아나면서 경제대국으로 올라선거고

미국이 도와준건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미국이라는 나라에 이익을 위해서 였지 그냥 도와준건 아니지
할게없음 15-08-19 01:10
   
다른거도 다 맞지만.. 결정적인건.. 아무래도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고싶지 않았던 부모들의 노력이 발전의 토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미국 지원? 맞습니다. 인정할건 해야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정도 성장했다? 그럼 필리핀을 비롯해서 냉전시대에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여러 국가들은 뭐가되는거죠? 지원도 중요했지만.. 그만한 노력도 중요했음. 다른나라 사람들은 그 노력을 안했던거고 우리나라 부모세대들은 이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위해 열심히 노력했던것임. 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노력임. 전 세계 어느나라의 부모 모두 자식이 잘되길 바라지만, 자식들은 자기들처럼 굶지 않도록 자기들보다 더 잘살게 되길 바라면서 죽도록 일한 나라는 없을거임. 교육도  부모세대들의 노력 중 하나. 요즘에도 똑같죠. 부모들은 항상 자식들에게 입버릇처럼 '공부 열심히해서 나처럼 살지말아라' 라고 말하죠. 서양국가나 기타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 국가 였으면 어땠을까요? 애초에 이런 생각조차 안했을거임. 너네 인생 너네가 살아라. 아니 애초에 신경조차 안썼을지도 모르죠.
 
 
Total 121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77 [기타해외] **KPOP 중독증상 보이는 외국팬들** (1) 돌아온산적 08-19 6103
76 [기타해외] (일본 반응) 한류붐이 먼저 일어난 나라가 일본이 아… (21) snowmon20 08-18 8279
75 [기타해외] (해외 반응) 한국은 거지같은 나라에서 어떻게 이렇… (24) snowmon20 08-17 12160
74 [기타해외] 필리핀 방송에 나온 한국녀... (24) 삐삐삣 08-16 15678
73 [기타해외] 노르웨이 아가씨 드디어 한국에 오다! (10) 도나도니 08-04 11285
72 [기타해외] [정글의법칙] 니카라과 공항 입국하는 "잭슨(갓세븐)&… (8) 츠카사 08-04 7458
71 [기타해외] Doha GOALS 2015 (1) 雲雀高飛 07-28 1949
70 [기타해외] [자막] 내/외국인 홍대 클럽거리 인터뷰 삐삐삣 07-14 2544
69 [기타해외] <자막>K-PoP심리학 쇼 - with 최도원 삐삐삣 07-14 1989
68 [기타해외] 런닝맨 홍콩 공항 입국 (14) 울묵뻬기 07-03 9699
67 [기타해외] 아르헨티나(?)방송 200%커버 (4) 삐삐삣 06-18 3403
66 [기타해외] 영화 "케이팝이 내인생을 망쳤어" Trailer (2) kpopstar 05-29 7374
65 [기타해외] 케이팝팬 VS 일반인 (3) kpopstar 05-29 3938
64 [기타해외] 외국 연예인들이 한국팬들에 받은 인상 (1) 청실홍실 05-27 6820
63 [기타해외] 새마을 한류 에티오피아편 (3) 시아L 05-25 3346
62 [기타해외] 서양 밀덕들의 신기전 시험기 (4) Voraussicht 04-24 7030
61 [기타해외] 히든싱어 태국판 (15) 게리쿠퍼 04-20 11108
60 [기타해외] 홍콩처자 한국여행 기행기 동영상 (5) 야놉스 04-07 5070
59 [기타해외] Dream High OST Flashmob 2015 응답하세요 04-04 1385
58 [기타해외] 말레이시아 방송- 티아라,씨스타 (2) 여우비 04-03 3637
57 [기타해외] 러시아 연해주 4부류의 한인 (2) 전쟁망치 03-29 3449
56 [기타해외] .. (7) 탭시 03-28 5552
 1  2  3  4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