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내내 지속된 원화가치고평가(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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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회장은 강경식 경제부총리와의 만남에서 "환율이 고평가되고 있어, 환율상승을 예상한 투기 조짐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51)"5 라는 우려를 전했다.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될수록 외국 투자자들은 국가경제의 기초여건 fundamental6 에 의심을 품게 된다. 김인준·이영섭은 <외환·금융위기와 IMF 경제정책 평가>(1998)에서 '경상수지 적자 → 경제의 기본 건전성에 회의를 갖게된 외국 투자자 → 자본유출 → 통화가치 급락' 현상을 이야기한다.
게다가 1996년에 기록한 '-229억 달러 · GDP 대비 -4.75%' 에 달하는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는 외환유동성 자체를 크게 악화시켰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소속 신인석은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를 통해 "환율절하 지연에 이은 96년에 기록된 대폭의 경상수지 적자가 잠재적인 외환유동성을 악화시켰다" 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외환유동성 악화는 1997년 12월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인출사태(banking panic)'을 촉발시켜 외환보유고를 고갈시켰다.
1996년의 성장률은 내수증가가 기여했고 물가는 환율의 고평가와 수입증가가 기여한 것이었다. 1994년부터 3년간 경상수지는 물가와 성장률에 희생된 것이다. 대내균형을 위해 대외균형이 파괴된 것이다. 1996년은 물가를 희생해서라도 환율을 크게 올려 수출을 늘이고 수입을 억제했어야 했다.
10%가 넘는 임금상승에서 가격경쟁력 상실을 보전할 수 있는 수단도 사실상 환율 뿐이었다. 매년 5% 정도의 절하만 있었더라도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고임금으로 가격경쟁력이 상실되어가고 있는데 환율까지 평가절상 되었으니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
80년대후반~90년대말까지 지속된 임금폭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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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기 수출경쟁국 대만의 2~5배의 임금상승률ㄷㄷㄷ)
https://www.google.co.kr/url?sa=t&source=web&rct=j&url=https://www.kiet.re.kr/part/sDownload.jsp%3Fs_idx%3D28473&ved=0ahUKEwjmhPO_tqzJAhUBHZQKHT25DTkQFggjMAE&usg=AFQjCNHSBIvD34oaytLsz8XUtoz3h4zX-Q&sig2=3myt-0SYy3OkP1OL9aY73g
한국은 90년대초 이미 평균임금 1.035달러로 경쟁국인 대만의 임금수. 준을 추윌하기 시작하였다.
고용창출폭발을 야기시킨 기업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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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경제정책이 얼마나 탁월했으면 기업들이 저렇게 엄청난 부채를 지면서 고용을 늘렸을까?
ㄷㄷㄷ
그결과 엄청난 내수경제호황이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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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이전의 취업 풍경
필명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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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95년도에 학부를 졸업했습니다.
밑에 있는 취업난 관련 글을 보고 있다보니 까마득한 옛날 일이 생각납니다.
보통 2학기 시작할때쯤 되면 학과사무실에 기업들이 배포하는 원서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 원서를 일단 구해야 어떤 기업이든 일단 지원을 할 수 있다보니 많은 학교에서는 저 원서 구경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만 서울대야 뭐..
일단 들어온 원서들은 학과 사무실에 있는 탁자에 그냥 주르륵 놓아두었습니다. 특정 기업에 꼭 가야겠다고 일치감치 생각하던 사람들은 오전오후 부지런히 들락날락하면서 체크해서 가져가거나 아니면 조교에게 미리 음료수 한캔과 더불어 부탁을 해 놓으면 원서 구하는것 까지는 별 문제 없었습니다.
원서를 구해서 대충 작성한 다음 성적증명서, 졸업예정증명서 등등 필요서류를 챙겨 시간이 되면 놀러가는 마음으로 직접 가서 접수하던지, 아니면 우편으로 접수하면 끝..원서 접수후 몇일 후면 면접 오라고 연락이 오는데 서류에서 탈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자취생들의 경우 집에 전화가 없어서 학과사무실 번호를 적어놔서 그 번호로 회사에서 연락이 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게시판에 붙여놓거나, 동기들을 찾아 알려주곤 했죠) 면접 다녀오면 거의 90%의 확률로 합격을 해서 몇군데 원서 내면 어디를 가야하나를 놓고 동기나 선배들과 상의하는 모습이 일상적이었습니다.
취업난? 그런것 없었습니다 한국은행같은 곳에 꼭 가야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이상 대충 적당히 다들 갔죠. 80년대 후반 학번 국경과 선배가 시중은행에 가겠다고 하니 주변에서 다들 '너 미쳤구나..'라며 말리던 기억도 납니다. 수자원공사에 가려던 선배에게 다들 '아니 시험까지 봐 가면서 왜 대전에 있는 그런 곳에 가요?'라고 궁금해하곤 했죠.
가끔은 술먹고 돌아다니다, 아니면 차였다고 징징거리다가 뒤늦게 취직하겠다고 과사무실에 와서 '남는 원서 없어요?'라고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죠. 그러면 조교가 책상서랍을 뒤적거리다가 '옛다..아무도 안가져가려해서 버릴까 하다 남겨놨다'면서 던져주곤 했죠. 4년 평점 1.2를 찍던 선배는 그렇게 해서 금호에 가서 지금 잘 지내고 있고, 1.5를 찍던 여자 동기도 쌍용에 입사해서 기획실에서 근무했던 기억도 납니다. 당시 막 삼성에서 분리된 신세계백화점의 원서의 경우 누구의 선택도 못받고 굴러다니다가 옆과 누나가 '나 백화점 좋아하니 한번 가볼까?'하면서 집어가더니 입사했는데 몇년전 글로벌 바이어 큰손이라면서 신문에 나기도 하더군요..)
그렇게 들어간 사람들이 지금의 후배님들보다 능력이 좋을리는 만무할텐데 그래도 대부분의 회사들은 잘 굴러갔고, 들어간 사람들도 대부분 별 탈없이 아직까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입사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괜찮은 자리를 잡기가 어려워진 지금의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20년도 안되는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인구구조상 2016년 이후 취업난에 상당부분 해소될 것이라는 희망섞인 전망도 있긴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맞딱뜨리는 분 입장에서는 실감이 안날듯 합니다.
마침 바쁘게 돌아가던 일 하나가 끝나 조금 한가한 오전 시간에 한번 끄적여봤습니다.
시간이 참 많이 지났구나..
추천 98 비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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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들의 경제 워너비는 사실 김영삼이었다! 갓영삼을 찬양하라!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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