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미군정기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만큼 사회주의, 공산주의운동이 왕성하던 곳이었다. 광복 이후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 기의 남한내 민중들의 삶은 굶주리는 처지였다.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콜레라가 창궐한
대구의 굶주림은 특히 더 심했었다. 대구, 경북 일대에 2천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치료를 위한 조치들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전염을 막는다며 대구를 봉쇄해버린 탓이었다.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시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그 결과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쌀이 부족했다. 당시 돈이 있다해도 쌀을 구할 수 없어
콜레라를 치료하는 의사들조차도 콩나물과 쌀로 죽을 끓여 먹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또한 국립경찰
[3]로 채용된 과거 친일파 출신 경찰들이 일제시대 방식 그대로 농민들의 쌀을 강탈하다 시피 공출해갔다.
[4][5] 친일출신 경찰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매우 커져갔고, 경찰은 이에 대해 보복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었다. 이러한 가운데
대구,
경북 일대의 민심은 매우 흉흉했다.
[4]
한편,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군정에서 '공산당 활동 불법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는데
박헌영계열
조선공산당세력들에서는 "
미군정에 대항하겠다."면서 '신전술'이라는 방식을 채택하여 더욱 급진적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어 공산당과
전평은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1946년 9월에 철도노동자, 운송업노동자들이 주도해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는데, 이것이
9월 총파업이다.
9월 총파업은
부산지역을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었다. 이렇게 되어 공산당과 전평은
9월 총파업을 주도해 나아가 본격적으로 미군정에 정면충돌을 벌였다.
[6] 9월 총파업으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가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미군정은 국립경찰과 반공청년단체를 투입하여 파업에 진압하였으나, 여기서 의외의 사태를 맞게 되는데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자 즉흥적인 폭력 사태로 발전되어 버렸다.
[7]
조선공산당에서 주도하여
9월 총파업을 전개했을때, 대구에서는
전평 지도부에서
9월 23일부터 총파업에 돌입,
10월 1일까지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었다.
[8] 10월 1일 대구지역에서 노동단체들이 모여 메이데이 행사를 개최했다.
해주로 피신했다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헌영은
경성부로 내려와
경성의 메이데이 행사에 참석, 축사를 낭독했고 타지역의 메이데이 행사에서도 그의 축전이 낭독되었다. 그러나 메이데이 행사는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 미군정에 대한 항거와 폭력사태로 변질되어 갔다.
그런데
10월 1일 저녁,
대구시청 앞에서 기아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황말용, 김종태 라는 노동자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발원지인 대구시청 자리는 오늘날
경상감영공원이다.
[8] 사태가 심각해지자 박헌영은 무력 시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고, 불필요하게 미군정을 자극해서는 안된다며 중단을 촉구했지만 사태는 걷잡을수 없이 확산되었고, 경찰관과 행사 참가자 간의 물리적인 폭력사태로 진행되었다.
박헌영은 즉시
경성부를 떠나 피신하였다.
다음 날 아침,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2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이 시내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굶주린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시위에 합세했다. 만여명의 군중에 포위된 대구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네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게 했다.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은 질서 있게 경찰권을 인수하려 했다. 그런데 이때, 거리 한쪽에서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에 투석을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경찰관들도 자위권을 발동해 순식간에 17명의 시위대를 사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9]
분노한 군중들은 폭도로 변했다. 군중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동향을 살피던 정사복 경찰관들을 구타하거나 경찰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다. 처음에 평화시위로 시작하다가 폭력사태로 돌변하자 일부 젊은 공산당원들은 시위의 선봉에 섰으나 고참 당원들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뛰고 저리 뛰어다니기만 했다.
군중들은 부잣집과 과거 친일파들의 가옥을 털어 생필품이나 식량등을 약탈했지만, 각자 갖고 달아지 않고 길바닥에 쌓아놓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일반
상점이나
은행 같은 곳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군정은 이튿날인
10월 2일에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그러나
미군 개입으로 시위가 대구 인근인
경산군,
성주군,
영천군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상북도 일대에서
민중들과
미군정간의 충돌은 멈추지 않고, 계속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경북 지역 민중시위 진압 과정에서 또다시 경북 지역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1946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시위 가담자 일부는 이웃 달성(達城)으로 달려가 그곳
경찰서를 습격하고
군청을 불사르는 등의 시위를 일으켰으며, 이 사건으로
경찰관 여러 명이 살해되었고,
달성군 군수 등 여러 명이 불에 타 죽었다.
대구 10.1 사건은
조선공산당의 지도와 영향 아래 발생하였지만, 지역별로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미리 통일적으로 준비되거나 철저히 계획된 사건은 아니었다.
[11] 이미
박헌영[12],
이강국,
이주하 등 간부들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져 일부는 월북하고 일부는 체포되었으므로, 조선공산당의 영향력은 전국 단위의 조직적인 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구미 사건은 대구사건에 영향을 받고 발생하였고, 달성군, 성주군, 칠곡군, 영천군, 의성군, 선산군, 군위군, 경주군에서도 봉기가 일어났지만, 일반적으로 사태의 단위는
군 이상으로 확장되지는 못했다.
시위대는
미군정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발과 경찰과 같은 핵심 행정기구에
친일파를 그대로 등용한 과거사 미청산에 대한 반대, 행정과 치안에 인민이 참여하는
인민위원회 설치 요구 등의 주장을 내걸었다.
대구 10.1사건은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로 확장되면서 경찰력만으로는 진압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각 지역에서 미군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비롯하여
한민당세력,
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백의사 등 반공주의 우파 인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족청,
백의사,
서북청년회 등 각종 반공주의 우파단체 관련자들이 시위에 가담한
좌파를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테러 또는 재산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속출하여 좌파와 우파간의 이념갈등을 불러왔다.
이 사건의 정확한 규모는 기록 미비로 알려지지 못하였고, 2차 피해를 우려한 참가자들의 신고도 적어 피해 상황은 명확히 추산할 수 없다.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사망자가 공무원 63명, 일반인 73명으로 총 136명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역시 경북 지역에서만 관청 건물 4동과 일반 건물 6동이 불에 타 전소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체포된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선산군 구미 지역에서 경찰과 시위대를 중재하던 중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사망하였다
"북, 61년 5.16주도세력에 거금 전달"
박정희 兄 상희와 대구공산폭동 - 인민재판 유일 지역
대구는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미군정기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만큼 사회주의, 공산주의운동이 왕성하던 곳이었다
노동자들이 시내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굶주린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시위에 합세했다. 만여명의 군중에 포위된 대구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네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게 했다.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은 질서 있게 경찰권을 인수하려 했다
분노한 군중들은 폭도로 변했다. 군중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동향을 살피던 정사복 경찰관들을 구타하거나 경찰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다
군중들은 부잣집과 가옥을 털어 생필품이나 식량등을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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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구경북은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많았던 지역입니다.조선의모스크바 동양의모스크바라고 불릴정도로 공산당 주도세력이 한반도 공산화는 대구서 부터라는 구호로 한국을 붉게 물들려고 했었습니다.
대구경북의 200만명이 참가할 정도로 지역 주민들의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대구뿐아니라 인근 구미부터 공산세력의 범위는 도민축제라고 할정도로 뜨거웠습니다.
당시 대구가 공산당의 특별시라면 평양은 군청소제지로 봐야 하는게 역사학계 공통된 인식입니다.무기고를 털었고, 먼저 무장 했으며, 경찰관을 죽이고(총기,화영,폭력) 각종 물품을 약탈 했습니다.미군정과 대치하면서 양키 고우홈을 외첬습니다.
그중심에는 박정희와 박상희가 있었습니다.
한국에 2대 공산주의집안이 있습니다.김일성집안과 박정희집안..박상희가 바로 한국 공산당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박정희는 군책책임자..즉..공산당의 군권의 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김일성이 쿠테타 직후에 축하성명을 준비하고 간첩접선과 간첩자금을 받았습니다.
그사람이 고향지인 황태성 입니다.박상희의 죽마고우...박정희의 멘토
그때가 가장 한국의 민주주의와 주권이 위협받았습니다.한국은 자유 민주주의를 국시로 여기고 있습니다.아직도 남로당 공산세력들은 한국에 수백만이 있습니다.한국의 헌법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일이 다시는 일어 나서는 안되겠습니다.
ㅡ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애국보수시민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