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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란 양력 5~6월쯤이면 가을에 걷었던 식량은 바닥이 나고 여름 곡식인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 굶주릴 수밖에 없었던 농촌의 어려운 사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1970년대 들어 그 말이 과거의 유산으로 사라지게 된 배경에는 적극적인 식량 증산의 노력이 있었다. 식량자급이야말로 가난 추방의 첫걸음이자 국가안보의 요체라고 여겼던 대통령 박정희는 1960년대 중반 신품종 개발을 지시했다.
1971년, 농촌진흥청이 동남아 신품종을 개량해 내놓은 새로운 볍씨의 재배가 시작됐다. 정식 명칭 IR667-98-1-2인 이 벼를 사람들은 '통일벼'라 불렀다. 보통 벼는 이삭 하나에 낱알이 80~90개였지만 통일벼는 120~130개가 보통이었고 200~300개가 되기도 했다. 농민들은 "못자리 때 싹이 안 터서 울었지만 엄청나게 벼를 쏟아내는 걸 보고 웃었다"고 말했다.(제1회 조선일보 논픽션대상 당선자 이완주씨 증언)
통일벼는 점차 '한국 토양에 적합한 다수확 품종'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됐고, 1972년 16%였던 보급률은 1977년에 55%까지 늘어 쌀 증산의 견인차가 됐다. 쌀 생산량은 1974년 3000만석을 돌파했으며, 1975년에는 마침내 쌀 자급(自給)이 달성됐다. 쌀 4000만석을 돌파한 1977년에는 전국 벼 평균수량이 1000㎡당 494㎏으로 '단군 이래 최고 수량'을 기록했다. 이 무렵 동남아 국가들이 신품종을 개발해 식량을 증산한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을 대한민국도 이뤄내게 됐던 것이다. 통일벼는 그 후 밥맛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보급이 중단돼 후속 품종들에 임무를 넘겨 줬다.
녹색혁명에는 새마을운동과 4대강 유역 종합개발을 통한 농업생산 기반 구축이 큰 역할을 했다. 1972년 수립된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일환이었던 4대강 유역 종합개발은 소양강댐(1967~1973), 안동댐(1971~1976), 대청댐(1975~1980) 등을 건설해 홍수의 피해를 줄였고, 논의 대부분을 가뭄 피해가 없는 수리안전답으로 바꿨다. 녹색혁명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비로소 수천 년 동안의 굶주림에서 벗어났다. 쌀에 이어 고기마저 웬만큼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부터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한국이 아래로 부터의 의식 개혁운동이 일어날 힘이 없었습니다
유럽이야 수십년간 쌓아올린 계몽주의와 점진적 산업화는 한국이 갈수있는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자율적 의식개혁 보다는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판국이었으며 아직 까지 도시 곳곳에서는
낡은 봉건적 사상과 낡은 공동체가 건재했습니다
한국은 하루빨리 경제발전을 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한국이 유럽처럼 발전하려면 시민의식의 개혁과 시민적 주체의 확립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지도자는 없었으며 한국 전쟁이후로 그 어떤 시민적 철학이 전무했습니다...
박정희라는 인물을 유럽이 수십년간 쌓아올린 현대문명의 진보 빨리 만들어야 했습니다
박정희는 동양의 대한 유럽의 지원이 전무했으며 미국은 그저 정부가 사회주의로 가는것을
막으려고 굶어죽지 않게 식량만 지워해 주었습니다
박정희라는 인물은 본인 스스로도 총대를 매어야 했습니다...시간이 없었으며 낡은 의식을 혁파하는데
철학 보다는 물리적 개조가 필요했다 생각했습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벤치마킹을 하였으며 국민의 늙은 의식을 총칼로 뜯어 고첬습니다
기계에 사람을 마구잡이식으로 뜯어고첬으며 산업화를 압박으로통한 비자율적 통제로서
강제화 시켰으며 정부가 나서서 선택과 집중으로 경제를 발전 도모했습니다
말년에는 권력에 취해서 그랬지만,박정희라는 인물이 그저 단편적으로만 평가할 인물이 아닙니다
한국의 굴곡진 역사와 드라마속에서 박정희는 다각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명과 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