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만주에 거주하던 고구려의 유민, 즉 발해의 유민 후예들이 건국의 한 주체요, 한 기둥이었기에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에게는 제2의 조국과도
같았던 만주국에서 군관이었던 박정희를 일본군이라고 부르면 듣는 사람들이 박정희가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박정희는 단
한번도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던 적이 없었음에도 일부 몰지각한 이들과 좌빨들은 사람들에게 그런 착각을 일으키게 하려는 나쁜 심보들이 있다.
만주국은 엄연한 독립국이었다. 그럼에도 무지한 사람들은 정서상 만주국에서 근무하면 친일파였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당대
사람들에게는 행정상뿐만 아니라 정서상으로도 만주국이 일본과 혼동될 수 없음이 너무도 분명하였다. 만약 만주국이 일본 통치권 안에 있었으면 광복군
대장의 조카 김일련은 일본 신원조회에 걸렸을 것이다. 행정적으로 엄연히 제3국이었기에 김일련은 태연히 만주국 관리로 복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서상으로도 생각해 보라. 삼촌은 광복군 장군 김학규인데 김희선 아버지 김일련이 만주국에서 경찰로 복무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의 무지한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그런 일은 정서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유민 후예들이 거주하던 간도는 우리땅임을 알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조선인이
만주국 건국에 동참하면 친일파라는 정서가 전혀 없었다.
자기 부친 김일련이 만주 독립군이었다는 김희선 의원의 주장은 무지에서 비롯된
거짓말이었다. 많은 좌빨들이 이 거짓말에 속았으며, 이 거짓말을 확대 재생산하여 국민을 기만하였다. 그러나 만주국 경찰은 일본 경찰이라는
좌빨들의 주장 또한 성립될 수 없는 거짓말이다. 만주 경찰이 결코 일본 경찰일 수 없었듯이 그 만주국군도 일본군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지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큰 오늘날의 시대에 많은 한국 국민이 마치 박정희가 일본군복을 입은 일본군이었던 것처럼 속고 있다. 사실 김대중이 그 상징적
존재인 좌빨들의 친일인명사전은 박정희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동시대에 일본군복을 입었던 김대중의 사진이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위 동영상에서 윤리강사 이현이 열을 올리며 학생들에게 거짓말하고 있다.
정말로 전교조와 노사모 부류의 미개인들의 거짓말 창작 능력은 대단하다. 어떤 미개인은 박정희가 일본천황에게 혈서를 보냈다고 사기치고, 위의
동영상에서는 한 미개인이 박정희가 "일본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혈서를 쓰고" 등의 거짓말을 지어낸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혈서를 썼다고 주장하는 반면, 윤리강사 이현은 박정희가 일본사관학교에 들어간 후 혈서를 썼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미개인들과 좌빨들이 이런 거짓말들을 창작해낼 수 있었던 시절도 한 철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일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을 공개한 후로는 좌빨들이 이제 더 이상 이런 픽션소설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여태껏 좌빨들은 박정희가 일본천황에게 혈서
보냈다는 거짓말과 박정희가 1939년에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거짓말을 동시에 해왔었다, 박정희가 일본 천황에게 혏서를 보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지난 5일의 만주신문 기사 공개로 확증되었지만, 박정희가 1939년에 독립군을 토벌하였다는 주장은 허위주장이었음이 이미 지난 2005년에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에 의해 확인되었었다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12/200512190078.html ). 그럼에도 이현같은
픽션소설가들이 여전히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며 인터넷에 동영상으로 그런 허위사실 유포를 하였으나, 금번의 만주신문 기사 공개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의 관심이 객관적인 사실로 쏠리게 되었다.
위에서 우리는 일본 인명사전에 기록된 박정희의 경력을 본다. 중앙의
19-7이라는 연대 표시 바로 옆에 박정희는 "만주국군 소위"였음이 명기되어있다. 만약 자국군이었디면 일본군(日本軍)이라고 명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군이었기에 만주국군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일본인들이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는데, 도대체 왜 한국의 어떤 무지한 이들은 박정희가
일본군이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가?
박정희는 유학생이었으며, 유학생은 일본군 장교가 될 수 없었다. 한국 육사에도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지에서 유학생이 온다. 만약 아프리카 사람들이 한국 육사에 유학했던 아프리카 군인을 한국군이라 부르면 우리가 기절초풍하지 않겠는가?
위에 네째 줄에 보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자, 박정희 준장이 1954년에 미국 육사(정확히 말해 포병학교)에
유학하였다. 그렇다고, 박정희가 미군이었는가? 전두환 역시 두 차례에 걸쳐 미국 육사에 유학하였었다. 그렇다고 전두환이 미군이었는가? 박정희는
일본육사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포병학교 과정을 일년간 이수하였다.
자, 박정희와 전두환이 1950년대에 미국육사 연장교육
프로그램에 유학해 있는 동안 미국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야 했던가? 아니다. 유학생들은 유학생반에서 따로 수업을 받았다.
1940년대의 일본 육사 유학생반도 마찬가지였다. 유학생들은 일본사관생도 제복도 입지 않았을 뿐더러 수업도 유학생들끼리 따로 받았다. 위의
박정희 학력에 57기생 상당으로 되어있다. 일본의 육사 57생기생들은 유학생들을 동기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단지, 같은 해에 재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일본육사 유학생들이 혈서를 썼다는 거짓말을 지어낸 윤리강사 이현의 픽션소설 쓰는 실력은 실로 대단하다. 그러나, 팩트(facts)와
너무도 동떨어진 거짓말을 하는 자가 역사와 윤리를 강의하면 교육이 망가지지 아니하겠는가?
위의 동영상에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작사, 작곡하신 노래 "나의
조국"을 듣는다. 과연 그 어느 시인이 조국 사랑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의 조국 / 박정희
작사·작곡
백두산의 푸른정기 이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의 높은기상 이겨레 지켜왔네
무궁화꽃 피고져도 유구한
우리역사
굳세게도 살아왔네 슬기로운 우리겨레
영롱한 아침해가 동해에 떠오르면
우람할 손 금수강산 여기는 나의
조국
조상들의 피땀어린 빛나는 문화유산
우리모두 정성다해 길이길이 보전하세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새마을 정신으로
영광된 새 조국에 새역사 창조하여
영원토록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세
자, 도대체 좌빨들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하였기에 우리의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하였다는 말인가? 민족문화연구소가 지난 5일 혈서 기사라며 공개한 만주신문
기사에는 혈서 사진도 혈서 목격자도 없고, 당초의 민문연측 주장과 달리 그 글자도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 아니라, "일사에
어봉공"(一死以テ御奉公)으로 밝혀졌다. 만약 그 시대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학교에 진학하겠다는 결심을 밝히면 친일이었는가? 아니었다.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말을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말로 해석하면 그 해석은 틀린 해석이다. "일사에 어봉공"은 입학시켜 주면 좋은
생도가 되겠다는 결심을 밝힌 말이다. 이 말귀에 전혀 친일논란의 소지가 없다. 무엇이 한 인물의 친일을 입증하는 기사인가? 바로 아래의
여운형씨의 기사이다.
기사 제목이 "황민반도"이다. 여운형씨가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글을 쓰고 조직을 키웠던 것이다. 바로 여운형같은 인물이 일제의 조선인 황국신민화 정책에 앞장섰던 친일 부역자였던 것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여운형의 친일 행적들은 그 물증이 분명하다.
▲ 여기 여운형의 학병 권유 격문이 실린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사진이 있다.
▲ 그리고 여기 '반도이천오백만동포에게 호소함'이라는 격문 제목과 '여운형씨
수기'라는 필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좌빨들이 여운형 등 진짜 친일파들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 만주국군 소위 시절의 박정희의 사진이 있다. 보라! 박정희의 군복은 일본군복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일본의 황군이
아니었기에 일본군복을 입지 않았다. 조선인 일개 학도병도 일본군복을 입었으나, 만주국군 군관 박정희는 일본군복을 입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만주국군은 일본의 황군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국민들이 군복에 대한 상식이 없기 때문에 좌빨들의 선동에
놀아났었다. 그러나, 아래의 김대중의 목포상고 졸업 앨범이 박정희의 누명을 벗겨준다. 고등학생이 사회 유지로 여겨지던 시대에 목포상고 회장은 그
지역의 지도자였다. 그런데, 여운형이 조선인 황군 지원 권유 격문을 쓰던 바로 그때에 김대중이 몸소 일본군복을 입고 연극 공연을 하며 졸업
사진을 찍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여운형씨의 공산당 조직은 건준으로 변신하는데, 이때 김대중이 목포지부 간부가 되었다. 즉, 김대중은 일제시대에
여운형이 조선인 황군 지원 권유 격문을 쓰던 때부터 여운형의 추종자였으며, 일본군복을 입고 조선인 학생들을 선동했던 그 행동 대장이었던
것이다.
자, 여기서 박정희의 군복은 전혀 일본군복이 아니었고, 김대중의 제복이
일본 황군 복장이었음을 아래 일본군 사진 자료들로 확인해 보자.
여기 윗사진 왼편의 일본군 장교가 긴 칼을 차고 있는 자세를 보라.
바로 김대중의 앨범 사진에서 차고 있는 칼이 일본검이었던 것이다.
학도병이라도 일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황제로부터 봉급을
받는 군인은 누구든 반드시 저 복장 차림이어야 했다. 박정희는 단 한번도 저런 군복들을 입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무지한 이들과 좌빨들이
박정희를 일본군이라고 부를 때 사람들에게 마치 박정희가 저런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도대체 그런 거짓 지식을 전파하는
비뚤어지고 못된 심보가 왜 필요한가? 이순신 장군에게 왜장 옷을 입혀놓고 이순신 장군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 시대 사람들에게
만주국군은 일본군이 아니었음이 복장상으로도 너무도 분명하였다.
과연 여운형과 김대중에게 그들의 친일 부역은 강요에
의한 것이었지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을까? 김대중이 1989년에도 여자전히 히로히토 일왕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후 제일 먼저 서두른 일이 히로히토의 아들을 천황으로 부르자는 것이었다. 오늘날 서양국가들이 영국 등 유럽의 왕들은
king이나 queen으로 부르고 일왕만 emperor로 불러주는가? 왜 우리나라만 일왕을 천황이라 불러야 하는가? 그것은 김대중이
일본군복차림의 자신의 모습을 뽐내며 활개치던 목포상고 시절에 그의 몸에 배어있던 황민근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그 시절의
일본군복 사진이 박정희가 일본군이었다는 누명을 지금 벗겨주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해방이 되는
날 모두가 태극기를 손에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사람들이 태극기 제작 방법을 몰랐다. 우리는 일제시대의 조선인들이 모두
애국가를 알고 있었다고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애국가를 전혀 몰랐다. 생전 들어보지고 불러보지 못한 애국가를 어떻게
알 수 있었다는 말인가? 일제시대에 불러보지 못한 애국가를 해방의 감격과 더불어 마음껏 불렀으리라고 우리는 상상하고 싶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해방된지 여러 달 지나서야 공식행사에서 처음으로 지금의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지금처럼 TV가 있는 때도 아니요, 라디오 생산공장이 있었던
때도 아니었다. 애국가 악보도 가사도 구할 수 없었던 때라 아직 대다수 국민들은 아직 애국가를 들어보지 못했었다. 이러한 때에 육사에서는
박정희가 처음으로 애국가를 보급하였다.
우리 민족이 해방된지 1년 하고도 두어달 지난 1946년 가을이었다. 아직 대한민국 건국
이전이지만 국토 경비를 위해 미 군정청이 창설한 태능 육군사관학교(아직 4년제 육사가 시작되기 전의 단기과정)에서는 제 2기생 교육 중이었다.
사관학교장은 이치업 육군 대위였는데, 그는 명색이 국군의 간성을 교육하는 육사교장이면서도 자신은 물론 주변의 누구도 애국가를 알지 못해 답답한
끝에 아이디어를 냈다. 생도들에 애국가 가사를 쓰라는 문제를 내고 시험을 치루었던 것이다. 생도 전원이 백지 답안을 제출하였는데 딱 한 명의
생도가 애국가 4절 가사를 정확하게 써냈다. 그가 바로 박정희 생도였다.
이치업 교장이 박정희 생도를 불러 애국가를 어디서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박정희는 대구사범 졸업 후 교편을 잡는 동안 학생들에게 몰래 애국가를 가르쳤다고 대답했다. 가사는 현재와 같으나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이별의 노래)'을 차용해 불렀을 때였다. 안익태 곡의 애국가는 그 뒤 일이다. 이렇게 해서 육사에서 비로소
애국가가 불려지게 됐다. (이치업.스티븐 엠.딸프 공저 '번개장군' : 2001 원민)
이치업 당시 교장의 이 증언은 문경의 그의
제자들의 증언으로 확증된다. 이영태(李永泰)는 스승 박정희가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음악시간에는<황성옛터><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주셨다"고 증언한다. 그는 이낙선(5·16군사쿠데타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조갑제의 ‘박정희’ 79쪽).
박정희가 애국가와 <황성옛터><심청의 노래> 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증언들을 위의 오디오는 뒷받침해준다. 신세대는 잘 모르고 있겠지만,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여러 노래들을 작사, 작곡하여
국민에게 보급하셨는데, 위의 오디오에서도 애국가 다음에 들리는 "나의 조국" "잘살아 보세" "맹호부대 군가" 등 세곡의 노래가 모두 박정희가
작사, 작곡한 노래들이다. 나의 조국이란 노래를 다시 들어보라. 과연 그 어느 시인이 저런 가사를 작사할 수 있으며, 그 어느 음악가가 저런
곡을 작곡할 수 있는가?물론 우리 모두 우리의 조국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 그러면 어째서 만주국은 결코 일본군일 수 없는지
설명해 보자. 만약 사기꾼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주국군이 일본군이었다면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민족문화연구소는
박정희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두차례나 입학을 거부했다고 하는데, 박정희를 일본 황국신민화 정책에 이용하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보낸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과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만약 일본이 박정희가 일본군이 되기를 원했다면 무엇하러 나이 트집을 잡아 두차례씩이나
불합격시켰겠는가? 박정희는 1940년 2월 불온교사로 찍혀 문경의 교사직에서 면직되었고, 바로 그 다음 달, 즉 1940년 4월 4일에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3수하려면 2~3년 걸리는데 어떻게 3월 한 달 사이에 3수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일본이 일본군
장교를 선발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국가관에 관한 신원조회였다. 불온교사로 찍혀 면직된 박정희는 다시는 그 어느 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을
수 없었다. 그의 불온교사 경력은 그 어느 직장에 취직하는데도 불리했을 경력이었다. 하물며 국가관이 가장 중요한 일본군 장교로 그를 선발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분경에서 교필을 잡던 박정희가 1940년 2월 갑자기 면직된 사유는 그가 불온교사였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교사를 면직할 때
그 사유를 기록으로 남겨둔다. 박정희가 일본인 몰래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는 동안 한 학생이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웠다 (황실광의
증언). 천황에게 신사참배하는 것이 강요되던 시대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순희씨에 따르면 일어 상용(常用)으로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박정희는 수업시간에 몰래 조선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한번은 둥근 원을 그려 그 속에 가로로 물결무늬를 그려 넣고는
“보기만 해! 이게 조선 국기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림을 찢어버렸는데 한 학생이 다른 반에 가서 자랑한 것이 일본인 교사 귀에 들어가
‘불온교사’로 찍혔다는 것이다. (제자 이순희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60쪽)
만약 만주국군이 일본군이었다면 이런
불온교사 경력의 박정희는 신원조회에 걸려 절대로 사관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고, 입학 후에도 곧 입학이 취소되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주국은 일본의 신원조회망을 벗어난 철저한 제3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자, 다시 위의
오디오의 두번째 노래 "나의 조국"으로 돌아가서, 박정희가 어떻게 그런 가사를 작사할 수 있었을까? 그 실마리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생
유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금강산으로 수학여행가서 박정희 학생이 쓴 여행소감에 나라없는 민족의 恨이 배어 있었다. "금강산아, 너의 자태는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데, 우리는 왜 ..................." 무슨 일인지 끝을 맺지 못한 그의 글에 그의 아픔 마음이 이렇게 배어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일 1939년 3월 31일자 ‘민주신문’ 기사의 사본을 공개했을 때 지난 수년간의 "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설은 조작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 기사가 보도한 일곱 단어의 혈서는 군관후보생이 되려는 각오를 표현한
"一死以テ御奉公"이다. 도대체 여기 어디 진충보국이란 낱말이 있다는 말인가? 박정희의 지원서가 일본 천황에게로 배달되었다는 종전의 주장과 달리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치안부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의 하급 계원에게로 그 지원서가 배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박정희가 일본
천황에게 혈서 썼다는 그간의 사기꾼들의 주장도,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여덟 자의 혈서를 썼다는 주장도 모두 새빨간 거짓말들이었음이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이다.
무엇이 미개인의 논리인가? "원숭이 궁덩이는 빨갛다. 사과는 빨갛다. 고로 원숭이 궁덩이는 사과다"는 것이
미개인들의 논리이다. 만약 생물학자 홍길동이 원숭이 궁덩이는 빨갛다고 말했고, 우리가 그의 주장을 트집잡으려면 원숭이 궁덩이는 새빨간 것이
아니라 붉으스럼하다는 말로 트집잡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만약 노사모가 생물학자 홍길동이 원숭이 궁덩이는 사과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하면 그 주장은
조작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자 홍길동은 전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한 혈서 해프닝이다. 박정희가
"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를 썼다며, 그 원문 기사를 공개했는데, 盡忠報國은커녕 그 비슷한 글자도 없다. 분명 생물학자 홍길동이 한 말은
"원숭이 궁덩이는 빨갛다"였는데, 민족문화연구소는 홍길동이 "원숭이 궁덩이는 사과다"라고 말했다며 남의 말을 제멋대로 조작하여 발표하여 왔던
것이다.
우리가 위의 영상물에서 보듯이 민족문제연구소측은 지난 2004년에는 조선족 작가를 돈으로
매수하여 책 내용까지 조작한 바 있다. 박정희가 1939년 독립군을 토벌한 공로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책을 출판함과 동시에
친일청산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지난 5일 공개한 신문은 박정희가 1939년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음을 또한번 입증한다.
따라서 민족문제연구소측이 벼룩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라면 지난 2004년 그렇게 책 내용을 조작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을 국민에게 사과하는
말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런 반성조차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자, 이 사기꾼 집단이 박정희 혈서 기사라며 신문을 공개했으니,
그 공신력에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선 만주신문의 공신력에 문제가 있다. 만주신문은 창간된 적도 창간호도 없는
신문이었다. 만주신문은 만주어와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던 만주국 국민들도 전혀 안 보는 신문이었으며, 일본인들도 안 보는 신문이었다.
만주신문은 만철 기관지였으며, 만철 기관지는 민족문화연구소측에서는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되는 신문이었다. 신문 자체의 공신력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사가 조작 투성이라는 것은 시각적으로 나타난다. 미련한 좌빨들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일 공개한 박정희의 서신 내용 전체를
박정희가 혈서로 썼다고 주장하거니와, 그것이 불가능함을 좌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박정희의 친필 서신의 한 예가 바로 아래에 있는 서신
사진이다. 서신이 너무 길어 여기 전체를 올리지 못하나 원문 전체를
http://bookstore21.net/korean/photo/park-jh/park-letter-lee.jpg
에서 볼 수 있다.
위에서 우리가 보듯 한국어가 국어인 우리도 흘려쓴 필체 때문에
박정희의 친필 서한 중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종종 있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지원을 위해 문의 편지를 썼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만주국 관리들은 일본어를 몰랐는데, 박정희가 어느 언어로 서신을 보냈는지조차 그 기사만으로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입학지원서의 일부인 지원자의
서신을 치안부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가 신문사로 보내는 것이 가능한가? 혈서가 있다면 왜 혈서 사진도 없고 혈서 목격자도 없는가? 왜
기자가 보도하지 않고 정체 불명의 편집자가 보도하는가? 도대체 편집자 눈으로 직접 혈서를 본 것인가 못 본 것인가? 만주국 관리가 입학지원서를
만주신문에 보낸 것이 아니라면 신문 편집자도 그 혈서를 본 바 없고, 단지 만주국 하급 관리가 보낸 메모를 보도했다는 말인가? 혈서 사진도 없고
혈서를 목격했다는 기자도 없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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