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4월 1일의 ‘1차 쇄신’의 대상은 부이사관급 140명을 포함해 서기관급 581명이었다. 동시에 안기부 밖에선 대공 경찰 2500명,
기무사 요원 600여 명, 공안검사 40여 명이 해직됐다. 8개월 뒤 12월의 ‘2차 쇄신’ 내용은 300명의 추가 명퇴였다. 대북 공작국과
대공 수사국이 없어졌지만 면직되진 않아 ‘일 없이 남은 직원’ 들이 대거 나갔다. 8개월 사이 900여 명 안기부 직원이 나가면서 수백 명 북한
담당 인력도 함께 사라졌다. 당시 안기부 내 북한 분석관이었던 P씨는 “이사관급 이상 간부 수백 명이 당시 쫓겨나는 것을 봤다”고 했다. 99년
1월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쫓겨난 자리를 500명 새 직원이 채웠다. 모두 이종찬 원장-이강래 기획조정실장 때의 일이다.
(※21명은
2003년 9월 12일 면직 무효 소송에서 승소했다. 송 대표는 “대북 담당들은 대외 접촉을 꺼린다”고 했다.)
이처럼
안기부가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던 98년 10월, 북한에서도 일이 벌어졌다. 2001년 탈북했던 김유송(53)씨의 말이다. 당시 상좌로 총참모부
산하 함경도 무역회사 책임자였던 그는 이때 많은 장성들이 보위부로 끌려가는 것을 봤다. 친했던 교도훈련 지도총국장 임태영 상장(우리의 중장),
총참모부 2전투 훈련국장 우명훈 중장, 64저격여단 이상일 소장 등이 다 잡혔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안피득 총참모부 부참모장과 안산관에서
만났다. 군사건설 국장 출신 안 부참모장은 97년 금강산 공사를 완공해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장성이었다. 안 부참모장은 “자고 나면 옆집
장성이 없어져 불안하다”고 했다. 그는 인민무력부 장성들 사택에서 살고 있었지만 왜 그런지는 몰랐다. 후에 그도 체포됐다. "
위에서 말에서 대북 정보력이 떨어진 이유를 보이면 안기부가 정치적 성향을 보이는 이유도 있습니다.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쫓겨난 자리를 500명 새 직원이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