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회원에 대한 반말,욕설 글(운영원칙 2,3항) 3회 위반시 접근 차단 조치 됩니다.(원인제공과 관계없이 조치)
하오니, 절대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거법 위반 및 정치관계법 위반행위 신고는 아래 중앙선거관리 위원회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앙선거관리 위원회 http://www.nec.go.kr
이어 한민당은 임정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승만, 서재필, 김구, 이시영, 문창범, 권동진, 오세창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 5인은 아직 해외에 있었고 국내에 있던 권동진과 오세창은 영수직을 수락하지 않았다. 한편 조병옥은 '김규식 박사도 당의 영수로 추대할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으나 다른 한민당 당원들에 의해 번번히 묵살당했다. 조병옥은 '나는 그(김규식)에게 누구보다도 많은 기대를 가졌다[7]며 많이 아쉬워하였다.
1945년 9월 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고려민주당, 조선민주당, 한국민국당 등은 이에 크게 발발하여 9월 16일
천도교회관에서 100여명의 대표자들이 모여 이승만,김구,이시영 등을
영수로 추대하여 당수격인 수석총무에 송진우를 선정하여"한국민주당"
(한민당)을 창당하였다.
그것은 한민당이 임정을 계승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이 임정의 주요 직위를 맡았던 이들을 한민당이 형식상 추대한 것입니다.
미 군정이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정부가 한국 내에 있어야 그들에 대해서 협상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인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둘 다 미군의 하지중장에 의해 부정되었죠.
저들은 형식상으로 추대된 것입니다.
한민당에 입당한 사실 또한 없고요.
이승만과 김구는 국내 기반이 없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민당의 실력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각자의 조직을 키우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조직 확대를 놓고 경쟁하는 입장이었다.
.
.
.
김구가 민족주의 세력보다 반탁 세력, 즉 극우 세력을 더 중시한 것은 '임정 추대' 때문이었다. 한민당은 창당 때부터 '임정 봉대'를 내세워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외면-적대했고, 같은 임정 추대를 제창한 안재홍 국민당의 '보강론'과 달리 '직진론'을 주장했다. 보강론은 중경 임정을 뼈대로 삼되 국내 인물로 보강한다는 것인데, 직진론은 국가 권력을 통째로 있는 그대로의 중경임정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1945년 말 반탁 운동이 터져 나올 때 한민당 계열 군정청-경찰 간부들이 앞 다퉈 김구에게 충성을 맹서한 것이 이 직진론의 입장이었다.
1947년 들어 김구 세력이 한민당-이승만 세력과 다시 손잡고 반탁 운동에 나선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미소공위 좌초와 중간파 봉쇄가 그들의 공동 목표였지만, 총선거를 통해 정권을 노리는 한민당-이승만 세력과 임정 추대를 꾀하는 김구 세력은 갈 길이 달랐다. 무엇보다, 통일 민족 국가 성립이 자기네에게 불리할 것으로 보고 이를 회피하려 드는 한민당-이승만 세력의 속셈을 이 시점까지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을 수는 없다.
이승만과 하지 사이의 불화를 보며 반탁 세력을 모두 휘어잡을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가졌던 것일까? 그 와중에 한독당이 깨어져 상당 범위의 민족주의자들이 김구 세력을 이탈했다.
8월이 지나는 동안 미소공위 실패가 분명해지자 김구의 임정 추대 노선과 한민당-이승만의 총선거 노선 사이의 충돌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8월 12일 이승만은 미국인 측근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민주당의 뿌리는 고려민주당으로 올라간다. 45년 8월 16일 광복이 되자마자 원세훈, 윤보선 등은 고려민주당을 창당했다. 9월 1일엔 김병로, 백관수 등은 조선민족당을 창당했고, 김도연, 백남훈, 장덕수, 허정 등은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김구가 1926년에 만든 한국국민당, 공화당계가 81년에 만든 한국국민당과는 이름이 다르다.)
9월 8일 고려민주당,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은 여운형과 박헌영의 인민공화국 타도를 내세우며 모였다가 9월 16일 통합했다. 고려민주당,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이 통합한 뒤 국민대회준비회의 대표를 맡고 있던 송진우를 영입해서 당수로 하고 9월 16일 한국민주당을 정식 창당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한민당이다.
1
한민당의 초대 당수는 송진우였다. 수석총무였지만 당수로 내세운 이승만, 김구, 권동진, 오세창이 당수직을 거절하면서 송진우가 한민당 당수가 됐다. 한민당은 여운형, 박헌영보다 세력이 미약하자 임시정부의 귀국을 돕다가 신탁통치 문제로 찬탁을 주장했던 송진우가 임정계 한현우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두 번째 한민당의 당수는 장덕수였다. 장덕수는 미소공위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일로 김구와 공개석상에서 고함을 지르며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00년대 초 김구가 재령 보강학교에 교사로 교육계몽활동을 할 때의 제자 중의 한사람이 장덕수, 장덕준 형제였다.
46년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백남운의 남조선신민당이 통합해서 남조선노동당, 남로당을 창당했다. 그 사이 김일성은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북한지부를 북조선노동당으로 바꾸고 자기가 당 주석이 되어버린다.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백남운의 남조선신민당 등 좌파정당이 통합하면서 한민당도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통합하려 했다. 이 통합에 김성수는 찬성했지만 장덕수가 이건 당을 임정 사람들에게 통째로 갖다 바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한국독립당에서는 김석황, 조상항이 47년 12월 8일 장덕수의 혜화동 집에 사람을 보내 장덕수를 암살해버렸다. 그러나 이 일로 한독당과 한민당의 통합은 완전히 물건너갔고, 김구가 배후로 지목되어 재판정에 끌려나갈 때 이승만이 김구를 변호해 주지 않자 이승만과 김구 사이도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이승만은 이때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이승만은 41년 임정 주미외교위원장이 되면서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에 가입했다.(선우진의 김구 참조) 그러나 45년 귀국 후 탈당, 각 정당사회단체의 모임인 독립촉성중앙회 대표로 있으면서 정당에 초월한 듯 하였다. 48년에 창당된 친이승만계 정당인 대한국민당이 있었지만, 이승만은 독촉을 중심으로 독립노농당(46년 창당)과 통합해 51년 자유당을 만든다.
이승만과 틀어진 김구는 이때부터 남북협상을 주장한다.
한민당의 당수는 47년부터 김성수가 맡게 됐다. 한민당은 장덕수가 죽자 갑자기 단독정부론에 적극 가담한다. 그 뒬 48년 5월 초대 제헌국회가 구성되고 7월 의원투표로 이승만이 196대 김구 13표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당선을 도운 공로로 총리 자리와 장관직 절반을 요구했다.
이승만이 한민당 몫으로는 재무장관 1석을 준뒤, 총리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준다며 한민당 당수 김성수에게 재무장관 직을 주자 모욕적이라 생각한 김성수는 장관직을 거부했다. 7월 22일 총리서리로 이승만은 북한에서 월남한 조선민주당 부총수 이윤영을 총리서리로 임명했다. 한민당은 이윤영 총리인준 부결로 보복했다.
7월 31일 총리서리가 된 이범석은 한민당에게 장관직 절반을 준다고 약속해서 총리 승인을 받았으나 총리가 된 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범석은 임시정부 광복군 참모장 출신으로, 만주에서 유일한 반공주의 독립군으로 고생할 때 이승만이 보내준 호피가죽과 병사용 피복, 만년필, 수시로 보낸 격려편지에 감격받아 그대로 이승만의 편이 되었다.
만주에서 공산당이 창궐하면서 김좌진, 양세봉이 암살되자 이범석과 이청천은 5백여 명의 병력을 데리고 임시정부로 건너갔다.
내각에서 배제되고 세력을 잃고, 공산당의 선전공세에 악질 부자당으로 낙인찍힌 한민당은 49년, 48년에 창당됐던 대한국민당을 탈당한 이청천, 신익희와 통합해서 민주국민당으로 탄생했다. 당수는 한민당의 당수가 아니라 대한국민당을 탈당한 신익희가 민국당의 당수로 추대됐다. 이는 당수직을 김성수가 신익희에게 양보한 것으로 봐야 되겠다
52년 민주국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이시영을 내세웠으나 이시영은 유세도 하지 못하고 부산 피난지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부통령 후보로 등록한 김성수가 부통령에 당선되어서 2대 부통령이 됐다.
53년 이승만의 3선을 허용하는 사사오입 개헌으로 시위대학생이 발생하고 경찰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김성수는 사퇴한다. 이때 자유당 내에서 이승만의 대안으로 지목된 사람이 운석 장면...
친이승만계 세력은 장면을 공격했고, 장면 등은 자유당을 탈당했다.
55년 민주국민당 세력과 자유당 탈당파는 호헌동지회라는 모임을 만든 뒤, 55년 10월 민주당을 창당한다. 호헌동지회에 조봉암이 가담하자, 조봉암의 신당 참여를 찬성하는 장택상, 김성수, 서상일, 박기출과 반대하는 조병옥, 장면의 주장이 팽팽하게 갈렸다.
조봉암의 입당이 불허되자 서상일과 박기출은 민주당에 참여하지 않고 조봉암과 진보당 창당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서상일과 조봉암의 의견이 맞지 않아 서상일은 다시 57년 10월 민주혁신당을 창당해서 나가게 된다. 민주혁신당은 60년 진보당을 흡수하여 사회대중당으로 바뀌게 된다. 61년 군사정변 이후 사회대중당은 해체되었지만, 67년 통일사회당을 창당한다. 이 당은 박정희 정권에서 원내 제3당까지 올라가게 된다.
신익희와 조병옥은 민주당의 구파였다. 이들 구파는 신익희, 조병옥을 민주당 대선후보로 내세웠지만 신익희는 호남유세 중 열차에서 갑자기 사망했고, 조병옥은 병으로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 중 사망했다.
그리고 구파에 가깝지만 신파의 지도자로 부통령을 차지한 인촌 김성수가 있었고, 그 뒤로 김성수가 사망하자 운석 장면이 신파 지도자로서 대통령후보로 나온 구파 신익희, 조병옥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후보로 계속 출마했다.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가 뭔가 하면... 한민당과 한민당이 49년 대한국민당 탈당파 신익희, 이청천 등, 토착 지주그룹과 통합하여 만든 민주국민당 출신자들이고, 신파는 55년 호헌동지회 결성 이후 참가했거나, 장면 등 자유당 탈당파, 평안도 등 서북 출신과 흥사단계 출신들을 신파라 부른다.
이 중 민주당 구파는 지금의 한나라당을 형성했고, 신파는 몰락하였으며, 김대중 계열이 호남 지역정당을 만든게 현재의 민주당이다.
민주당 구파로는 신익희, 조병옥, 백남훈, 김도연, 유진산, 윤보선 등이었고, 신파로는 김성수(한민당 출신이므로 구파로 보는 의견도 있고, 모호함...), 곽상훈, 장면, 박순천, 정일형, 이철승 등의 인맥이었다.
56년 신익희는 사망했지만 장면은 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4대 부통령이 된다. 조병옥이 사망하자 4대 대통령, 5대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은 구파 출신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세우고, 신파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세웠지만 3.15 부정선거로 이승만 내각의 퇴진이 확실해지자 선거는 무효로 되고 장면은 부통령직을 사퇴한다.(부정선거로 5대 부통령에 장면은 패배하고 이기붕이 당선 예정이었다.)
60년 7월 의원내각제로 개명하면서 구파인 윤보선이 대통령에 선출되어 같은 구파인 김도연을 총리로 지목하자 신파의 반발이 거세져서 신파 출신 장면이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구파와 신파는 각료직을 놓고 다투다가 장면이 양보하여 7석의 장관직을 구파에게 양보한 뒤에 어떻게 수습되는 듯 했다. 그러나 60년 12월 민주당 구파가 김도연을 당수로 하여 신민당을 만들어 탈당했다.
윤보선이 신민당계로 나가면서 장면 총리가 대표직을 승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