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수저 보다 더 막강한 미제수저요즘 '수저계급론'이 화제다. 흔히 부모를 잘 만나서 별다른 노력 없이 성공한 사람들을 빗대어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안철수는 한국에서 금수저보다 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일제 수저, 미제 수저를 물고 태어난 성골 중에 성골이다. 안철수는 친일파 할아버지, 친미파 아버지 덕에 별다른 인생의 굴곡 없이 성공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다.안철수의 아버지인 안영모는 안철수와 마찬가지로 의사였다. 안영모는 박정희가 부산 군수기지에서 소령으로 근무할 때 직속 군의관이었다. 당시 안영모는 박정희에게 부탁해 안철수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안철수의 대부인 셈이다. 안철수의 할아버지인 안호인도 일제 강점기에 금융조합장에 임명되었다. 안호인은 조선총독부가 임명한 최초의 조선인 공직자 1호였다. 친일파인 아버지 덕에 안영모는 서울대 의과대학에 어렵지 않게 입학했다. 조선인 일본 육사 1호였던 박정희와 공직자 1호의 아들인 안영모가 가깝게 지낸 것은 당시 세태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안영모는 7년 동안 군의관으로 복무했는데 박정희가 그러했던 것처럼 미군 관계자들과도 각별했다고 한다. 안영모는 미군의 주요인사들과 은밀한 우정을 쌓았다. 이때 쌓은 '본토 인맥'이 훗날 안철수의 정치적 성장에 적지 않은 힘이 됐다. 안영모는 제대이후에는 고향인 부산에서 '범천의원'을 차렸고 안철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따뜻한 품속에서 유복한 성장기를 보냈다.안철수의 청년기도 할아버지,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관심과 철저히 거리를 두고 오직 개인의 출세만을 위해 몰두했다. 안철수는 1982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 86년 졸업했다. 1980년대에 대학가는 시위로 몸살을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안철수는 그 흔한 시위경력조차 없었다. 안철수의 동기와 선후배들은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체포와 고문, 투옥 그리고 분신으로 쓰러져 갔지만 안철수는 사회적 문제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대학졸업 이후에도 오직 개인의 성공만을 추구하는 그의 인생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안철수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0년 28세에 당시 최연소로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학과장에 임명되었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30대가 되기도 전에 학과장에 임명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학과장은 고사하고 교수로 임용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안철수는 학업에만 전념한 것도 아니었다.2009년 안철수는 MBC의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박사 과정 시절에 운명적으로 조우한 컴퓨터 바이러스 때문에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고 하루 4-5시간씩 잤다"고 말했다. 도대체 잠은 언제 잤는지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면서 최연소 학과장이 되었다면 그는 대단한 천재거나 아니면 타고난 사기꾼일 것이다. 안철수가 '투잡'을 뛰면서 최연소로 대학병원의 학과장이 되기까지는 아마도 아버지의 인맥이 적지 않은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친일에도 명문가가 있다..친일 성골 중에 성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