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하게도 많은 미국인들은 한국에 진주한 처음부터 한국인보다 일본인을 더 좋아했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협조적으로 질서를 잘 지키고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반면 "한국인들은 성급하고 제멋대로이고 다루기 힘들다"고 본 것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아무리 살기를 품고 싸움을 하다가도 일단 싸움에 졌다고 항복을 하면 그 순간부터 철저히 복종하고 아부·아첨까지 하는 것이 그들의 국민성이기 때문에, 전쟁에 일단 항복하자 그토록 증오하고 욕설을 퍼붓던 진주미군에 대해 하룻밤 사이에 아첨과 아부를 일삼고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일본인 특유의 기질을 발휘한 것이다. 따라서 미군정 당국은 일본인들을 해임하고서도 그들을 비공식 고문으로 불러들여 여러 가지 자문을 구했다. 일본인들은 진주 초기의 미군 당국의 가장 주요한 거의 유일한 정보 제공자였다. 일본인들은 8·15후 10월까지 3백50종에 달하는 각종 정보를 영문으로 작성하여 제출했다.아무튼 하지 중장의 미군정은 서울에 진주한 지 불과 며칠 만에 한국 민주당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것은 그후 미군정이 다른 정당을 보는 관점에 결정적 영향을 주게 되었다. 한 기록에 의하면 9월 10일 한민당을 대표한 2명, 즉 '조' '윤'씨 등이 군정청 관리들을 만나 "소위 인민공화국은 일본에 협력한 일단의 친일분자들에 대하여 조직된 것이며 여운형은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분자로 잘 알려진 사람"이라고 말했고 그후 10여 일간 미군정 관리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인사들은 거의가 한민당계 사람들이었다.일본인들도 8·15이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공이 공산주의자 집단이라고 말하였다. 한민당은 살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한 미국측 자료는 한민당을 평하여 "일반 대중의 지지도 없었고 인공과 같은 조직의 솜씨도 갖추지 못했던 그들은 이조시대 당파싸움의 전통적 수법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평했다. 이 문서는 "한민당에 일본의 전쟁노력에 협력하여 반미연설을 한 인사들이 많다"고 했다. 이들은 미국의 정책적 변수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읽고 재서 미군정 당국이 듣기를 원하고 믿기를 원하는 바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고 했다.한민당이 간부들과 자주 접촉한 당시의 G. 2 책임자 세살니스트 대령은 한민당이 "저명하고 존경할 만한 사업가요, 지도자이며…… 자격이 있고 덕망이 있는 보수주의자의 대다수를 포함한 정당"이라고 평하였다. 당시 한민당이 미군정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당이었나를 이 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당시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인 H. 메럴 베닝호프가 워싱턴에 보낸 초기 보고서에는 한민당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정치정세 가운데에서 가장 고무적인 한 가지 요인은 나이 들고 교육수준이 높은 층에 속하는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서울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비록 일본인들과 함게 일한 사람들이지만 그같은 비난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이 보고서는 당시 대부분의 주한미군 고위간부들의 견해를 정확히 반영한 것이었다.주한미군의 이같은 한민당 편향정책은 미국무성 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공식기록에 의하면 1945년의 마지막 3개월 동안 미군정은 약 7만 5천 명의 한국인을 고용했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치하의 옛관리들을 그대로 종전의 자리에 앉힌 것이었고, 고위직에 대한 인사는 거의 한민당이 제공하는 정보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한 예로 경찰 총책임자 조병옥의 임명은 한민당의 송진우가 추천한 것이며 조병옥 자신이 한민당원이었다. 수도청장 장택상도 한민당계였고 수도청장이라는 자리는 경찰에서는 조병옥 못지 않게 중요한 자리였다. 경찰간부들의 대부분은 과거 일본에 협력한, 그래서 친일파로 규탄받고 있는 사람있다. 그러나 미국측 경찰책임자 윌리암 매크린은 친일경찰관의 재임용에 비난이 높자 이렇게 응수했다. "만약 그들이 과거에 일제를 위해 일을 잘 했다면 그들은 우리 미국을 위해서도 일을 잘해줄 것이다."미군정청 경무국 수사국장으로 있던 최능진은 1946년 11월 20일 군정당국에 제출한 한 보고서에서 "경찰이 일본인 밑에서 그들에 협조한 전직 경찰관과 민족반역자들의 피난처가 되고 있다"고 당시 경찰의 내막을 폭로 비난하고 있다. 최능진은 친일인사의 채용문제를 둘러싸고 조병옥과 사사건건 싸웠다. 그는 "군정청 경찰부는 썩어빠졌으며 민중의 적이다. 만약 사태가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인의 80%는 공산주의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방경비대 창설에 있어서도 미군 당국은 일제 때 징역살이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격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항일투사는 국군 장교가 될 수 없었다. 하여간 하지 중장과 그의 고문들은 좌익에 대한 반대투쟁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집단이나 인사고 그 배경을 가리지 않고 모두 포섭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애로가 따랐다. 그것은 애국자들은 친일파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친일협력자들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조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친일협력자들은 미국인에 의해 어느새 '민주주의자'로 변신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