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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3-28 09:11
훈민정음은 세종과 신미대사의 공동작품
 글쓴이 : 유전
조회 : 1,369  

(40권 대반열반경)


13. 문자에 대해서(文字品)


부처님께서 또 가섭보살에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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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 10007] 쪽

"세계에 있는 가지각색 다른 언론과 주술과 말과 글자는 모두 부처님이 말씀한 것이요, 외도가 말한 것이 아니니라."

가섭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글자의 근본입니까?"

 "선남자야, 처음에 반쪽 글자[半字]를 말하여 근본을 삼아 가지고 모든 언론과 주술과 문장과 5음의 실제 법을 기록하게 하였으므로, 범부들은 이 글자의 근본을 배운 뒤에야 바른 법인지 잘못된 법인지를 알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글자라는 것은 그 뜻이 어떠합니까?"

 "선남자야, 열네 가지 음을 글자의 뜻이라 이름하고, 글자의 뜻을 열반이라 하며, 항상한 것이므로 흘러 변하지 않느니라. 만일 흐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함이 없는 것이요, 다함이 없는 것은 곧 여래의 금강 같은 몸이니라. 이 열네 가지 음을 글자의 근본이라 하느니라.

짧은 아(阿, a)는 파괴하지 못함이요, 파괴하지 못하는 것은 삼보니 마치 금강과 같으니라. 또 아는 흐르지 않음이요, 흐르지 않는 것은 여래니, 여래의 아홉 구멍에는 흐를 것이 없으므로 흐르지 않으며, 또 아홉 구멍이 없으므로 흐르지 않나니, 흐르지 않는 것은 항상하고 항상함은 곧 여래니, 여래는 짓는 것이 없으므로 흐르지 않느니라. 또 아는 공덕이라 하나니, 공덕은 곧 삼보라, 그러므로 아(a)라 하느니라.

다음에 긴 아(阿, )는 이름이 아사리(阿?梨)니 아사리란 뜻은 무엇인가? 세간에서 성인이라 하니, 어째서 성인이라 하는가? 성인은 집착이 없음이니, 욕심이 없어 만족한 줄을 알므로 청정이라고도 하느니라. 3유(有)에서 흐르는 나고 죽는 바다에서 중생들을 제도하므로 성인이라 하느니라. 또 아( )는 제도(制度)라고 하나니, 깨끗한 계행을 지키고 위의를 잘 차리느니라. 또 아( )는 성인을 의지함이라 하나니, 위의와 거동을 배우고 삼보를 

 공양하고 공경하여 예배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대승을 배우는 것이니라. 선남자·선녀인으로 계율을 잘 지키는 이와 보살마하살을 성인이라 하느니라. 또 아( )는 가르침이라 이름하나니, '너희들은 이런 일은 하고 이런 일은 하지 말라'고 말하고, 위의답지 못한 일을 못하게 하는 이를 성인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아( )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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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 10007] 쪽

 짧은 이(伊, i)는 곧 부처님 법이니, 범행(梵行)이 넓고 크고 깨끗하여 때가 없음이 보름달 같으며, 너희들은 이런 일은 하고 이런 일은 하지 말며, 이것은 옳은 것이요 이것은 옳지 않은 것이며,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요 이것은 마군의 말이라 하므로 이(i)라 이름하느니라.

긴 이(伊, )는 부처님 법이 미묘하고 깊어서 얻기 어려움이니, 마치 자재천과 대범천왕의 법을 자재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만일 이것을 보호하면 법을 보호한다고 하는 것이며, 또 자재라 함은 세상을 보호하는 사천왕[四護世]이라 하나니, 이 네 가지 자재하는 이는 대반열반경을 거두어 보호하며, 또 자재하게 선전하고 연설하느니라. 또 이( )는 자재하기 위하여 말하나니, 그것은 방등경전을 닦아 익히는 것이니라. 또 이( )는 질투를 끊으려는

 것이니, 돌피를 뽑는 것 같아서 모두 길상한 일로 변하는 것이므로 이( )라 하느니라.

짧은 우(憂, u)는 모든 경전 중에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며 자꾸 늘어나는 것이니 곧 대열반이니라. 또 우(u)는 여래의 성품이어서 성문이나 연각은 듣지 못하는 것이니 모든 곳에서 북쪽의 울단월이 가장 훌륭하듯이, 보살이 이 경을 들어 가지면 모든 중생에게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므로 우(u)라 하느니라.

긴 우(憂, )는 마치 우유가 모든 맛 가운데 상품이 되듯이, 여래의 성품도 그와 같아서, 모든 경전 가운데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 되며, 만일 비방한다면 이 사람은 소와 다를 것이 없느니라. 또 우( )는 이 사람을 지혜와 바른 생각이 없는[無慧正念]이라 이름하며, 여래의 비밀한 법장을 비방하면 이 사람은 매우 불쌍한 것이니, 여래의 비밀한 법장을 여의고 내가 없다는 법을 말하므로 우( )라 하느니라.

열(·, e)은 부처님들 법의 성품인 열반이므로 열(e)이라 하느니라.

야(野, ai)는 여래란 뜻이며, 또 야(ai)는 여래의 나아가고 멈추고 굽히고 펴는 동작이 중생을 이익케 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야(ai)라 하느니라.

오(烏, o)는 번뇌란 뜻이니, 번뇌는 루(漏)라고 하거니와, 여래는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었으므로 오(o)라 하느니라.

포(?, au)는 대승이란 뜻이니, 14음에서 이것이 나중이 되듯이, 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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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 10007] 쪽

 경전도 이와 같아서, 모든 경과 논에서 가장 나중이므로 포(au)라 하느니라.

암(菴, am)은 모든 부정한 것을 막음이니, 부처님 법에서는 온갖 금과 은과 보물을 버리므로 암(am)이라 하느니라.

아(?, ah)는 훌륭한 법이란 뜻이니, 왜냐 하면 이 대승경전인 대열반경은 모든 경 가운데 가장 훌륭하므로 아(ah)라 하느니라.

가(迦, ka)는 모든 중생들에게 대자대비를 일으키는 것이니, 아들이란 생각 내기를 라후라와 같이하여, 묘하고 선한 뜻을 지으므로 가(ka)라 하느니라.

가(?, kha)는 착하지 아니한 벗이라 하나니, 착하지 아니한 벗은 잡되고 더러움을 이름하며, 여래의 비밀한 법장을 믿지 아니하므로 가(kha)라 하느니라.

가(伽, ga)는 장(藏)이라 이름하니, 장은 여래의 비밀한 장을 말함이며,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으므로 가(ga)라 하느니라.

무거운 음 가(伽, gha)는 여래의 항상한 음이니, 무엇을 여래의 항상한 음이라 하는가. 여래는 항상 머물고 변역하지 않으므로 가(gha)라 하느니라.

아(我, na)는 온갖 행을 파괴하는 모양이니 그러므로 아(na)라 하느니라.

차(遮, ca)는 곧 닦는다는 뜻이니 모든 중생들을 조복하는 것을 닦는다 하며, 그러므로 차(ca)라 하느니라.

차(車, cha)는 여래가 모든 중생들을 가리워 주는 것이니 마치 큰 일산과 같으므로 차(cha)라 하느니라.

자(?, ja)는 곧 바른 해탈로서 늙는 모양이 없으므로 자(ja)라 하느니라.

무거운 음 자(?, jha)는 번뇌가 성한 것이니, 빽빽한 숲과 같으므로 자(jha)라 하느니라.

약(若, na)은 지혜란 뜻이니, 참된 법의 성품을 알므로 약(na)이라 하느니라.


        




[180 / 10007] 쪽

 타(?, ta)는 염부제에서 몸을 반쯤 나타내고 법을 연설하는 것이니, 반달과 같으므로 타(ta)라 하느니라. 

타(?, tha)는 법신이 구족함이니, 보름달과 같으므로 타(tha)라 하느니라.

다(茶, da)는 어리석은 중이니, 항상함과 무상함을 알지 못함이 어린아이와 같으므로 다(da)라 하느니라.

무거운 음 다(茶, dha)는 스승의 은혜를 알지 못함이니 마치 숫양[?羊]과 같으므로 다(dha)라 하느니라.

나(拏, na)는 성인이 아니라는 뜻이니, 마치 외도와 같으므로 나(na)라 하느니라.

타(多, ta)는 여래가 저기에서 비구들에게 말하기를 '놀라고 두려움을 여의라, 너희들에게 미묘한 법을 말하리라' 하므로 타(ta)라 하느니라.

타(他, tha)는 어리석다는 뜻이니, 중생들이 생사에서 헤매기를 자기의 실로 몸을 얽는 누에와 같으므로 타(tha)라 하느니라.

다(陀, da)는 크게 베풂이니 이른바 대승이라, 그러므로 다(da)라 하느니라.

무거운 음 다(陀, dha)는 공덕을 칭찬함이니, 이른바 삼보가 수미산처럼 높고 가파르고 커서 뒤바뀌지 않으므로 다(dha)라 하느니라.

나(那, na)는 삼보가 편안히 머물러 기울어지지 않음이 문지방과 같으므로 나(na)라 하느니라.

파(波, pa)는 뒤바뀌었다는 뜻이니, 만일 삼보가 모두 없어졌다고 말하면, 이 사람은 스스로 의혹하는 것이므로 파(pa)라 하느니라.

파(頗, pha)는 세간의 재앙이니, 만일 세간의 재앙이 일어날 때에는 삼보도 끝난다고 말하면, 이 사람은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 성인의 뜻을 어기는 것이므로 파(pha)라 하느니라.

바(婆, ba)는 부처님의 10력(力)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바(ba)라 하느니라.

무거운 음 바(婆, bha)는 무거운 짐이라 하나니, 위없는 바른 법을 짊어질 수 있으며 이 사람이 대보살임을 알지니, 그러므로 바(bha)라 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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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 10007] 쪽

 라.

마(摩, ma)는 보살들의 엄숙한 제도(制度)니, 대승의 대반열반이므로 마(ma)라 하느니라.

야(耶, ya)는 보살들이 간 데마다 중생들을 위하여 대승법을 말하는 것이므로 야(ya)라 하느니라.

라(?, ra)는 탐욕·성냄·어리석음을 깨뜨리고, 진실한 법을 말하므로 라(ra)라 하느니라.

가벼운 음 라(羅, la)는 성문승은 흔들리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대승은 편안하여 흔들리지 않음이라 하나니, 성문승을 버리고 위없는 대승을 부지런히 닦으므로 라(la)라 하느니라.

화(和, va)는 여래 세존께서 중생들에게 큰 법비를 내림이라 하나니, 세간의 주문·술법의 경전이라, 그러므로 화(va)라 하느니라.

사(?, a)는 세 가지 화살을 멀리 떠남이니, 그러므로 사( a)라 하느니라.

사(沙, sa)는 구족하다는 뜻이니 이 대열반경을 들으면 곧 온갖 대승 경전을 듣고 지니는 것이므로 사(sa)라 하느니라.

사(娑, sa)는 중생들을 위하여 바른 법을 연설하며 마음을 즐겁게 함이니, 그러므로 사(sa)라 하느니라.

하(呵, ha)는 마음이 즐거움이라 하나니, 신기하게 세존은 온갖 행을 여의었고, 이상하게 여래께서 반열반에 드시므로 하(ha)라 하느니라.

라(羅, lam)는 마군이란 뜻이니, 한량없는 마군들도 여래의 비밀한 법장을 깨뜨리지 못하므로 라(lam)라 하며, 또 라(lam)는 내지 일부러 세상을 따라서 부모와 처자를 두는 것이므로 라(lam)라 하느니라.

로(魯, r)·류(流, r)·로(廬, )·루(樓, ) 이 네 글자는 네 가지 뜻이 있으니, 이른바 부처님·교법·승가와 대법(對法)이니라. 대법이라 함은 제바달(提婆達)이 일부러 승단을 파괴하며 가지가지 형상을 변화시킴과 같은 것이니 계율을 제정하기 위한 것이므로 지혜 있는 이는 그렇게 알고 두려운 생각을 내지 말 것이며, 이것은 세상을 따르는 행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로(r)·류(r)·로( )·루( )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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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 10007] 쪽

 숨을 들이키는 소리는 혀가 코를 따르는 소리이다. 긴 소리, 짧은 소리, 뛰어나는 소리 따위로 음에 따라서 뜻을 해석함이, 모두 혀와 이로 인하여 차별이 있나니, 이런 글자들이 중생의 구업(口業)을 깨끗하게 한다. 중생의 불성은 그렇지 않아서 문자를 빌린 뒤에야 깨끗하여지는 것이 아니니, 왜냐 하면 성품이 본래 깨끗한 것이므로 비록 5음·6입·18계에 있더라도 5음·6입·18계와 같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중생들은 모두 귀의하여야 하며, 보살들

 도 불성인 인연으로 중생들을 평등하게 보고 차별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반쪽 글자가 모든 경서(經書)와 기론(記論)과 문장의 근본이 되느니라. 또 반쪽 글자의 뜻은 모든 번뇌를 말하는 근본이므로 반쪽 글자라 하고, 완전한 글자는 모든 선한 법을 말하는 근본이니, 마치 세상에서 나쁜짓 하는 이를 반쪽 사람이라 하고, 선한 일하는 이를 완전한 사람이라 하는 것 같으니라. 이와 같이 모든 경서와 기론은 다 반쪽 글자로 근본을 삼거니와, 만일 여래와

 바른 해탈도 반쪽 글자에 들어간다 하면, 그런 것이 아니니, 왜냐 하면 문자를 여읜 까닭이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온갖 법에 거리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서 참으로 해탈을 얻었느니라.

어떤 것을 가리켜 글자의 뜻을 안다고 하는가. 만일 여래가 세상에 나타나서 반쪽 글자를 없앨 줄을 안다면 이는 글자의 뜻을 안다고 할 것이요, 만일 반쪽 글자만을 따르는 이는 여래의 성품을 모르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글자가 없는 뜻이라 하는가. 선하지 못한 법을 친근하여 닦는 이는 글자가 없다고 하는 것이며, 또 글자가 없는 것은 비록 선한 법을 친근하여 닦으면서도 여래의 항상하고 무상함과, 늘 있고 늘 있지 않음과, 법보·승보와 계율과 잘못

 된 계율과, 경전과, 잘못된 경전과, 마군의 말과 부처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렇게 분별할 줄을 모르는 이는 글자가 없는 뜻을 따른다 하느니라. 내가 지금 글자가 없는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였으니, 선남자야, 그대들은 지금 반쪽 글자를 여의고 완전한 글자를 잘 알아야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마땅히 글자의 수를 잘 배우겠나이다. 저희들이 지금 위없는 스승을 만나서 여래의 은근한 가르침을 받았나이다."

부처님께서 가섭보살을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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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2일 토요일

[유전] [오후 12:42] 한글을 세종대왕 하고....상원사 스님 하고 같이 만들었는데 그 스님이 경전에 나온 가나다라마바사....

그걸 한글에 인용해서 만든거죠. 이거 영화로도 나왔죠.

경전에 있다고 하는데도 사람들은 잘 믿지 않죠.

[유전] [오후 12:43]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835

영상 제목: 한글 창제 일등공신 '신미스님' 스크린에 서다 - 불교신문

[유전] [오후 12:43] 실존인물인 신미스님이 훈민정음 창제의 일등공신이라는 사실이 불교계를 중심으로 학계에서도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전] [오후 12:43] 진언교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아자문(阿字門)35)이란 모든 것이 본래 생겨남이 없는 연고이니라. 가자문(迦字門)36)이란 모든 법은 작업을 떠나 있음이니라. 카자문(佉字門)37)이란 모든 법이허공과 같아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아자문(哦字門)38)이란 모든 법의 일체행(一切行)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가자문(伽字門)[가(伽)는 중성(重聲)이다.]39)이란 모든 법이 하나로 합한 모습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유전] [오후 12:44] 진언에 붙는 발음에 대해 설한 거죠. 이 분량이 꽤 됩니다. 발음 하나하나에 다 법칙이 있어요.

[유전] [오후 12:44] 비로자나세존께서는 대중의 모임을 관찰하시고 집금강비밀주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진언문에서 수행하는

모든 보살들이여,

아자(阿字)를 자신으로 삼아서

안팎을 모두 동등하게 하라.

온갖 뜻과 이익97)을 모두 버리고

금과 보배를 조약돌과 같게 여겨라.

여러 가지 죄업 및 탐냄과

성냄 등을 멀리 떠나라.

[유전] [오후 12:44] 10. 자륜품(字輪品)1)

이 때에 박가범비로자나께서는 지금강비밀주에게 말씀하셨다.

"비밀주여, 변일체처(遍一切處)의 법문을 잘 듣거라. 비밀주여, 만약 보살이 이 자문(字門)에 머물면 온갖 사업은 모두 다 성취될 것이니라.

가(迦) 카(佉) 아(哦) 가(伽)

자(遮) 차(車) 야(若) 샤(社)

타(吒) 타(咤) 나(拏) 다(茶)

다(多) 타(他) 나(娜) 다(馱)

파(波) 파(頗) 마(麽) 바(婆)

야(野) 라(囉) 라(邏) 바(嚩)

사(奢) 사(沙) 사(娑) 하(訶)

가사(吃灑二合右此一轉皆上聲短呼之)

[유전] [오후 12:45] 갹(屩)100) 각(卻)101) 학(虐)102) 거(噱)103)

작(灼)104) 작(綽)105) 약(弱)106) 표(杓)107)

책(磔)108) 탁(坼)109) 낙(搦)110) 택(擇)111)

달(呾)112) 타(託)113) 낙(諾)114) 탁(鐸)115)

박(博)116) 박(泊)117) 막(漠)118) 박(簿)119)

약(藥)120) 락()121) 락(落)122) 막(嗼)123)

삭(鑠)124) 삭(嗦)125) 삭(索)126) 학(臛)127)

가삭(吃索二合皆帶第一轉音入聲呼之)128)

이(伊)129) 액(縊)130) 오(塢131)오(烏)132)

[유전] [오후 12:45] 리(哩)133) 리()134) 리(里)135) 리(狸) 136)

예(翳)137) 애(藹)138) 오(汙)139) 오(奧)140)

앙(仰)141) 양(壤)142) 나()143) 나(曩)144) 망(莽)145)

앙()146) 양(穰)147) 녜(儜)148) 나(囊)149) 망(忙)150)

엄(噞)151) 염(髥)152) 남(喃)153) 남(南)154) 밤(鍐)155)

갹 약(弱)157) 낙(搦)158) 낙(諾)159) 막(莫)

160)

비밀주여, 이와 같은 자문도(字門道)161) 는 훌륭하고 오묘한 법문이니라.

[유전] [오후 12:45] 이런게 다 한글의 기본이 된겁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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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22-03-28 10:25
 
유전 22-03-28 10:25
신미대사가 참여한 것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이 다 있는데 님은 아직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고,
현재의 주류 학자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죠.

기록이 있는데 조선시대가 유교를 숭상한다고 그 기록이 우회하여 기록했다고 해서
그 기록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무지의 소치죠.

역사가 기록한 액면만 믿을 것이면 역사학 이라는 자체가 의미 없는 몰염치한 겁니다.
유전 22-03-28 10:30
 
사관[ 史觀 ]
역사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관점 또는 가설.
유전 22-03-28 11:32
 
진짜역사 22-03-28 11:17 
역사적 사실만 말하면  집현전 학자는 한글창제를 몰랐음 또 한글창제공표하니 상소올리고 랄부떨었음 , 세종대왕은 한글창제 당시 눈이 멀어서 거의 안보였다고함 또 지병인당뇨와,고혈압이있었음  (성인비만 질병달고삼),신미대사는 그당시 엄청난 언어학재수재임 5개국마스터 ,세종은 궁내부에 법전세울려고 했다가 반대당함 ,세종대왕이 죽기전에 유언 신미스님을  "나라를 위하여 세상을 이롭게 한, 지혜를 깨우쳐  반열에 오른분" 이라는 법호를 내렸음
유전 22-03-28 13:30
 
역사학자로서,

오대산과 속리산은 모두 세조가 목욕 후 피부병을 완치한 곳이라는 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대산은 문수동자가 목욕하는 세조의 등을 밀어주어서, 속리산은 “계곡에서 목욕하면 완쾌될 것”이라는 월광태자의 게시를 받고 목욕한 뒤 피부병이 나았다 합니다. 이 목욕소가 세조가 목욕하고 피부병을 다스린 곳입니다.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지만 세조가 피부병을 다스렸다는 오대산과 속리산의 치병(治病) 설화는 모두 신미 스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두 곳 모두 신미 스님이 주석했고, 세조가 스님을 만나러 친히 거둥한 곳이지요.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로 거둥한 것이 즉위 10년(1464)입니다. 그해 12월 스님은 상원사로 주석처를 옮겨 왕비 정의왕후의 후원으로 중창불사를 시작했습니다. 이태 뒤 윤 3월 세조는 직접 상원사로 거둥해 낙성식에 참석했습니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치병했다는 설화는 의숙공주 부부가 피고름이 묻은 어의를 그해 12월 조성한 문수동자상 복장유물로 납입한 사실로 미루어 낙성식에 즈음한 때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계곡물에 흘러내려온 흙에 묻혀 검푸른 소를 확인할 수 없지만 목욕소 설화는 부처님의 위신력에 기대 병을 치료하려는 세조의 간절함이 빚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목욕소를 지나면 이내 세심정(洗心亭)에 다다릅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곳은 속리산의 비범한 기운을 알고 전국에서 찾아온 도인에게 음식을 제공하던 곳이라 합니다. 어쩌면 세조는 이곳에서 흐르는 물에 몸을 씻듯 영욕에 찌든 마음을 다시 한 번 내려놓고 스승인 신미 스님을 만나러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 신미 스님 주석추 복천암. 세조는 이 곳에 거둥해 3일간 기도했다.
복천암은 세심정 위쪽으로 3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복천암은 성덕왕 19년(720)에 창건된 절입니다. 이 암자에는 공민왕이 다녀가기도 했는데, 극락보전에 걸린 ‘무량수(無量壽)’라는 편액은 공민왕의 친필이라 합니다.

세조는 복천암에서 신미, 사지(斯智), 학열(學悅), 학조(學祖) 스님 등과 함께 대설법회(大說法會)를 열었습니다. 목욕소에서 피부병을 치료한 뒤 절을 중수하고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고 쓴 사각옥판(四角玉板)을 하사했다고도 합니다.

세조와 신미 스님은 세종의 명으로 《석보상절》을 편찬하면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스님은 세조의 명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을 50부 인경할 때 작업을 감독했고, 간경도감(刊經都監)이 설치되자 불경언해 작업을 주관하는 등 세조가 일으킨 많은 불사를 거들었습니다. 세조는 그런 스님을 왕사처럼 모셨습니다.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에서 “나를 탐욕의 수렁에 빠지지 않게 이끌어 준 것은 스승(신미)의 공덕”이라고 고백할 정도였지요. 세조는 신미 스님에게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호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유전 22-03-28 14:09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80)
글쓴이: 박병역기자
작성일: 16-07-30 17:40
글주소: http://www.daehansinbo.com/bbs/board.php?bo_table=51&wr_id=200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80)
조선전기의 승려, 유.불학자

1. 내 용

f3388ac828d7adbe4162a5ca8b62c233_1469868충북 영동에서 부친 김훈(金訓)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유학자이며 숭불을 주장한  김수온(金守溫집현전 학자) 의 형님으로 본명이 수성(守省), 본관은 영산(永山)이다.
 
처음 법주사에 출가하여 수미(守眉)와 함께 대장경과 율을 배웠다.모친의 뱃속에서 나올적부터 왼손 손바닥에 임금왕(王)자가 손금에 있어 부모와 삼촌들은 크나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신라때부터 이조에 이르는 동안 그런 사람은 나라에 역적이 된다하여 국법에 의하여 잡아 죽였던 것이기에, 죽음을 면할려고 배안 병,신 노릇을 아니할 수 없어 항상 손가락을 오그리고 주먹을 쥐고 살 수 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잘나고 평소에 말을 잘하지 않았으나 한번 말을 내놓으면, 청산유수 같았고 눈을 부리뜨면 그 안광에 눌리지 않는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이 될만한 기품이 있었고 관상학상으로 왕의 기상을 타고 났다고 한다.
두뇌가 총명하여,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는데 글을 읽어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벼슬에 마음이 없고 불가(佛家)에 뜻이 있어 자칭 신미(信眉)라하여 머리깍고 스님이 되었다.

세종26년에 五子 광평대군(廣平大君)을 잃고, 세종27년에 七子 평원대군(平原大君)을 잃었고, 세종28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잃는 등 3년동안에 세분을 잃고,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뉘우치던 중... 세종이 병으로 고통 받을 적에 동생 김수온과 함께 세종을 도와 내원당을 짓고 법요를 주관했다.

또한 복천사를 중수하고, 그 곳에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했다. 이 공로로 문종은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 하였다.

문종과 수양대군 등이 세종을 지성으로 시탕(侍湯)하였으나, 효험이 없던 바 신미대사로 하여금 약을 쓰게 하니 완쾌하였다.

그로부터 세종은 신미대사와 가까워 졌고 신미대사의 박식(博識)함에 감탄하고 인물됨에 매료되었다.

세종은 신미대사에게 혜존각자(慧覺尊者)의 호를 내리려 하였으나 병으로 내리지 못하고 문종에게 유교를 내리니 문종은 선왕의 뜻을 받드려 왕에 오르자 사호(賜號)하니 「慧覺尊者」라 했다.

특히 세조와는 수양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세조는 왕위에 올랐어도 꼭 존자(尊者)라 불렀고, 국사로 모셨으며 세조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대사를 우두머리로 효영대군(孝寧大君)과 김수온(金守溫) 등에게 불서를 언해하고 간행함에 100종에 이르렀다.

1456년(세조 2) 도갑사(道岬寺)를 중수하여 약사여래불상 3구(軀)를 조성·봉안했다. 1458년에 국가의 요청으로 해인사(海印寺)의 대장경을 인출할 때 이를 감독했고, 1461년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간경도감을 설치할 당시 이를 주관했다.

이때 언해(諺解)된 불경이 〈법화경〉〈반야심경〉〈영가집> 등이다.

1464년 왕이 속리산 복천사를 방문했을 때 사지(斯智)·학열(學悅)·학조(學祖) 등의 승려와 함께 대설법회(大說法會)를 열었다. 이 해에 상원사(上院寺)로 옮겨가, 왕에게 상원사의 중창을 건의했다.

신미는 여러 승려의 법어를 번역·해석하여 유통하게 했는데, 기화(己和)의 〈금강경설의 金剛經說誼〉를 교정하여 〈금강경오가해설의 金剛經五家解說誼〉 1책을 만들고, 〈선문영가집〉의 여러 본을 모아 교정했으며, 〈증도가 證道歌〉의 주를 모아 책으로 간행했다.

송리산 복천사(福泉寺)를 비롯하여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월정사(月精寺),낙산사(洛山寺) 대자암 등을 중신하고 국책으로 처불함에도 소신것 불사에 힘썼으니, 그 공이 지대하였다.

성종10년에 열반에 오르니 복천사 남쪽 200미터에 신미부도(信眉浮屠)를 세웠으니, 충청북도문화재 12호이다.

2. 한글 창제의 주역

한글 창제의 산파역할을 한 신미대사, 그가 주지로 있던 복천암은 한글 창제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도량이다.

복천암 사적기(福泉庵事蹟記)

"세종은 복천암(福泉庵)에 주석하던 신미대사(信眉大師)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梵語)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복천암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5백미터 가면, 신미대사 부도탑(보물 제 1416호)이 있다.

세인의 관심을 다시 끌고 있는 세종의 왕사였던 신미대사(1403~1480)가 한글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은 그동안 종종 제기되어 왔었다.그동안의 정설은 세종대왕의명령으로 집현전 학자들이 이의 실무 작업을 맡았고, 구체적으로는 우리 입의 발음기관을 본 떴다는 것이었다.

현재 가장 유력시 되는 설은 범자(梵字) 모방설이다.
조선초기 유학자인 성현(1439-1504)의 저서 용재총화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도 언문은 범어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와같이 한글 창제의 주역인 신미대사 친동생인 집현전 학사-김수온이 쓴 복천보강, 효령대군 문집, 조선실록, 영산김씨 족보등 각종 자료를 근거로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산파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이 한글 창제 후...

불경을 언해하기 시작한 것도 신미대사의 영향이며, 언해할 서책이 많은데 굳이 불경부터 한 이유는 신미대사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또한 세종이 한글 창제의 초석을 다진 고마움의 표시로 복천암에 삼존불을 조성, 시주했으며 죽기 전에 유생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유언으로, 신미대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子)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올라있지 않지만 신미대사의 속가 집안인 영산 김씨 족보에 스님이 집현전 학자로 세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러가지 문헌이나 기록으로 보아 한글 창제의 모델이 범어가 분명한데 그 당시 범어를 아는 스님은 신미대사 밖에 없었다고 한다.

신미대사가 실제 한글을 창제했다고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은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으로 집현전 학자들 중에 반대하는 학자(최만리,김문,정창손 등)들이 많았으며 한글창제를 극력 반대하는 상소문까지 올리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세종이 한글을 오랫동안 지키고 신미스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고 신미대사(信眉大師)에 대한 세종(世宗)의 신뢰가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3. 세조왕과의 인연

조선조 제7대 세조는 국초의 서정(庶政)을 바로 잡고 만기(萬氣)를 친재(親裁)하기에 영일(寧日)이 없는 사이에 몸에는 지독한 피부병이 걸렸다.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였다. 전날, 보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여러 형제를 해치고 어진 신하들을 학살한 세조는 만년에는 인생의 무상을 느끼고 회오의 길로 침잠하니 외로움과 헌전함에서 정신적인 안식처를 구하려 하였다.

이 때, 생각나는 이가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信眉大師)였다. 신미는 도학과 학식이 뛰어난 당대의 도승이자 학승으로서 복천사에 주석하고 있었다.

신미대사의 초청은 받은 세조대왕은 天順 8년 2월 28일에 신숙주 이하 많은 신하를 대동하고 청주서 2박을 하고 장재리를 거쳐 말띠재를 넘어 큰소나무 아래까지 당도하였다

바로 길옆에는 2등변 3각형의 아름드리 낙낙장송이 가지를 길위에 드리우고 있어서 왕이 탄 연의 꼭지가 아마도 걸릴 것만 같았다.
​​
​이때, 대왕은 연 위에서 손으로 늘어진 소나무 가지를 가리키며

「아! 저가지 아! 저가지」이렇게 외치자

그 순간, 늘어진 가지가 위로 처들었다 한다.
왕은 신통히 여겨 즉석에서 정2품의 벼슬을 주었다.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2품송 이라 지금도 부르고 있다.

정이품송을 지나 복천사에 도착한 왕은 ​신미대사가 주재하는 법회에 의지하여 티끌세상에 물든 자신의 심신이 부끄러움을 깨닫고, 또 한편으로는 무한한 법열을 느꼈다

이는 신미대사의 무변의 법력과 도심으로 제도한 까닭이다.

세조와 신미대사와는 수어지교(水魚之交)로서 평생을 은혜롭게 지냈다.

복천사 법회를 마치고 아쉽게 떠날무렵 신미대사는 세조대왕에게 청원을 하기를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는 부처님(석가여래)정골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는데 오랜세월로 심히 퇴락하여 민망한 지경에 있으니 대왕께서 이보궁을 중수하시면, 그 공덕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간청하자 세조는 쾌히 승낙하여 이에 바로 학열(學悅)스님을 상원사로 보내어 중수를 마치고, 6월에 낙성식을 가졌는데 이때, 신미대사는 상원사에서 세조대왕을 초청하였다.

때는 5.6월 염천이라 날씨가 찌는 듯 하였고 대왕의 온몸은 피부병에 덮여 이때 더욱 악화되었다.

이 사정을 누구보다도 신미대사가 잘 알고 있었기에 왕을 초청한 것이다.

낙성식에서 진종일 땀을 흘린 대왕은 밤이되자 절에서 마련한 목욕장소에 들어가 몸을 씻는데, 옥같은 석간수에 들어가니, 전신이 녹아 내릴 것같이 시원하였다

그리고 나이 어린 동자가 느닷없이 들어와서 고운 두손으로 등을 문지르니 심신이 날아갈 듯 쇄락하였다.

더욱 고마운 것은 나이어린 동자였다.

그래서 세조대왕은 등뒤에 있는 동자에게 나즉이 말을 건냈다.

「애, 동자야~! 너 어디사니 이렇게 고마운데가 있나...!」

「고맙긴요~! 저는 이 절에 살고 있어요. 대왕님」

「아, 그래~ 내가 너한테 부탁할 것이 있는데 꼭 들어주겠나? 약속해...」

「예 대왕님, 어느 존전이라고 대왕님의 부탁을 마다하겠습니까? 무엇인지 하교하옵소서. 대왕님」

「참으로 기특하구나~ 나의 부탁은 다른 것이 아니고 나의 몸에 손을 댔다는 말을 남한테 절대로 하지 말아라 이것이 부탁이다」

세조왕의 이 말은 중대한 깊은 뜻이 있었다. 신하된 자가 왕의 옥체에 손을 대면 극형에 처하는 법이 있기에 동자의 신상이 염려되어 한 말이다.

그러자 동자는 대왕을 향하여 저도 대왕님께 청이 있으니 꼭 들어달라고 한다.

세조왕은 나이도 어리고 조금만 놈이 청이 있단 말이 하도 귀엽고 앙징스러워서 그래~너의 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동자는 태연히 하는 말이 「대왕님께서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현신(現身)하여 뒤에서 몸을 문지렀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마세요. 꼭 약속이요」하였다.

​세조왕은 깜짝놀라서 뒤를 돌아 보니 동자는 온데간데 없고, 몸의 부스럼이 이 때부터 치유가 되었다.

세조대왕은 신미대사의 도력에 힘입어 복천사에서는 세조왕이 목욕했던 당시에 현신했던 문수보살의 상이 모셔져 있다.

4. 신미대사의 자비와 도력

보은 속리산에는 법주사란 이름 높은 절이 있고 이 절에 고명한 스님들이 주석하였기에 이 절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혜각존자 신미대사가 한때 이 절에 주석하여 면벽관심(面壁觀心)으로 불도에 정진하고 있을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겨울날 밤에 이 절의 중진급 스님 3.4명이 헐레벅떡 정신없이 신미대사의 수도장에 문을 두드리고 뵙기를 청하였다.

내용인즉 이러하다

도둑 20여명이 벌떼같이 절에 침입하여 젊은 중들을 묶어놓고, 장차 창고를 털 기세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높은 스님 신미대사 의 지시를 받으러 온 것이다.

이 놀랍고도 끔찍한 말을 전달한 스님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더 이상 말도 제대로 못했다.

이런 뜻밖의 일을 당한 신미대사는 눈하나 깜박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했다.

이런 칠칠찮은 것들, 떨기는 왜 떨어! 도둑이 떨 일이지, 주인이 왜 떠느냐?

이렇게 꾸짖고는 명령을 내렸다.

모든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마음대로 다 가져가라고 했다.

이 법주사는 토지가 많아서 일년에 천여석의 수확을 할뿐아니라 비단과 무명 기명과 잡화가 창고에 많았다

​이 말을 들은 도둑들은 마음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쌀이며 비단이며 무명이며 기명등 닥치는 대로 멜빵이 끊어지도록 힘껏 짊어지고 도망을 쳤다.

긴긴 겨울밤이 보얗게 새도록 구슬땀을 흘리며 허둥지둥 도망을 쳤는데, 이것이 웬일인가?

밤새도록 죽을 힘을 다하여 도망을 쳤건만 법주사 경내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밤새도록 법주사만 뺑뺑 돈 셈이다.

신미대사의 도력에 잡힌 것이다.

이에 놀라고 당황한 도둑떼는 겁에 질려 솜같이 나른한 몸을 이끌고 신미대사 앞에 나가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신미대사는 태연히 도둑떼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너희들의 눈을 보니, 모두 착한 사람이다 이 순간이라도 사악한 마음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왜들 이러느냐? 마음을 바로 잡아라」라고

이렇게 순순히 타오르는 대사의 자비로운 얼굴에는 춘풍이 만면하였다

도둑들은 대사의 말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다고 한다.
유전 22-03-28 14:13
 
복천암 사적기(福泉庵事蹟記)

"세종은 복천암(福泉庵)에 주석하던 신미대사(信眉大師)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梵語)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전 22-03-28 14:24
 
신미대사의 친동생 김수온(집현전 학자)

본관은 영동(永同). 자는 문량(文良), 호는 괴애(乖崖)·식우(拭疣). 아버지는 증 영의정 김훈(金訓)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41년(세종 2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가 되었으나 곧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1446년 부사직(副司直)이 되고, 이어서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승문원교리(承文院郊理)·병조정랑을 거쳐 1451년(문종 1) 전농시소윤(典農司少尹), 이듬해 지영천군사(知榮川郡事)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457년(세조 3) 사예(司藝)로서 문과 중시에 2등으로 급제해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듬해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9년에 한성부윤, 이듬해 상주목사, 1464년 지중추부사·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66년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 모두 장원,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쌀 20석이 하사되었는데, 문무과 장원에게 쌀을 하사하는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어서 호조판서를 거쳐 1469년(성종 즉위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74년 영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세종 때 수양대군·안평대군이 존경하던 고승 신미(信眉)의 동생으로 불경에 통달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육경(六經)에 해박해 뒤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한림 진감(陳鑑)과 「희정부(喜睛賦)」로써 화답한 내용은 명나라에까지 알려졌다. 그리고 성삼문(成三問)·신숙주(申叔舟)·이석형(李石亨)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문명을 다투었다.

『치평요람(治平要覽)』·『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편찬, 『석가보(釋迦譜)』의 증수, 『명황계감(明皇誡鑑)』·『금강경(金剛經)』 등의 번역에 참여했으며, 「원각사비명(圓覺寺碑銘)」을 찬하고 사서오경의 구결(口訣)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식우집(拭疣集)』이 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수온 [金守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전 22-03-28 17:14
 
http://news.bb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948733
월인석보에서 찾은 신미대사의 자취

기자명 홍진호 기자  입력 2019.08.20 16:32  수정 2019.08.21 10:45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에 깊이 관여했다는 내용의 영화 ‘나랏말싸미’가 극장에서 선보인 것을 계기로 훈민정음 창제 과정과 불교의 역할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져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훈민정음과 불교와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는 책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가 출간돼 대중적 관심을 낳고 있습니다.

보도에 홍진호 기자입니다.

세종대왕의 둘째아들로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조선 최초의 한글 대장경 ‘월인석보’를 즉위 5년인 1459년에 간행합니다.

세종이 펴낸 ‘월인천강지곡'의 월인과, 자신이 지은 한글경전 ‘석보상절’의 석보를 합편한 월인석보는 아버지를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한 세조가 세종의 뜻을 이어받은 불교 서적입니다.

1446년 훈민정음 반포 후 12년 만에 나온 한글 대장경은 훈민정음 창조에는 세종이, 배포에는 세조가 앞장섰으며, 그 배경에는 불교가 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냅니다.

[범종 스님/ 안동 광흥사 주지]

“세조가 아니면 불교뿐만 아니라 훈민정음 내지는 한글을 이렇게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봅니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한글을 배포 하는데는 세조가 가장 큰 역할을 한 분 중에 한명이라고 봅니다.”

이와 관련해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의 저자 정진원 교수는 “석보상절 뒤에는 신미대사의 동생인 김수온의 그림자가, 월인석보 뒤에는 신미대사가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는 말로,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훈민정음 창제 이후 집중된 한글역경사업의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정 교수는 “세종과 세조 모두 불교학과 언어의 천재이지만 훈민정음 반포 후 불과 10개월 만에 24권의 석보상절이 완성이 되고, 곧바로 ‘월인천강지곡’이 편찬된 것은 당대 집단지성의 힘이며, 이 중 ‘월인석보’는 신미대사가 주도했을 것”이라고 추론했습니다.

[정진원 교수/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

“(훈민정음 반포한 지) 10개월 만에 석보상절 24권이 완성이 된다는 거 지금으로서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짧은 시간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석보상절을 보고 아버지 세종이 600수에 가까운 월인천강지곡을 짓습니다. 그러니깐 이거는 정말 이분들이 불교학과 언어학의 천재라고 하더라도 평생의 역작으로 하기에도 이 책 한권 내는데 3~40년 걸렸습니다. 대단한 거죠. 그렇다면 반드시 조력자가 있었을 것이다. 집단지성의 힘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영화 ‘나랏말싸미’ 제작에 이어 이번 신간 발간에도 큰 도움을 준 훈민정음 해례본 원소유처 안동 광흥사 주지 범종스님은 최근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두고 빚어진 역사왜곡 논란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영화 ‘나랏말싸미’의 내용 중 80%이상이 역사적 고증을 거쳤음에도, 대한제국 형성 후 만들어져 굳어진 잘못된 역사관이 논란을 불러왔다”고 지적했습니다.

[범종 스님/ 안동 광흥사 주지]

“역사를 공부하면 다 알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역사를 모르는 지금에 있는 어떻게 보면 대한제국이 형성 된 이래로 한글에 대한 불교적으로 있던 내용들 다 배제를 시켰습니다. 그것은 바로 대한제국 형성을 했던 기독교 선교사적인 입장에서 오다 보니깐 모든 불교학자들이 서구적인 교육을 받아서 지금에 오다 보니 이런 형상들이 일어난 것으로 봅니다.”

[스탠딩] 훈민정음 반포 직후 간행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대를 이어 완성된 ‘월인석보’는 오늘날의 한글이 조선왕조의 전폭적인 지원과 당대 스님들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물임을 소리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유전 22-03-28 17:40
 
[유전] [오후 5:39] <세종실록>에 <석보상절>이라는 명칭은 검색되지 않고, 1446년 12월 2일 기사에 “부사직(副司直) 김수온(金守溫 신미대사의 친동생)에게 명하여 <석가 보(釋迦 譜)>를 증보 수찬(增補修撰)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석가 보(釋迦 譜)>는 중국 양(梁)나라 승우(僧佑)가 편찬한 책으로, 세종이 1424년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에도 일본 왕에게 선물했던 책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석보상절 [釋譜詳節] - 훈민정음과 불교가 만나 이룬 보물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희귀본, 허경진)
유전 22-03-28 20:16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359205
KBS [뉴스플러스] 한글 창제, 진짜 산파 누구였나?
입력 2016.10.11 (10:24)

문헌에 따르면 신미 대사(1403-1480)는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영산 김 씨, 김훈의 장남으로 충북 영동군 용산면 오얏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유교경전을 빨리 익혔으며 과거에 합격해 집현전의 학사가 됐다.

그러나 벼슬에는 뜻이 없고 불교경전에 심취해 출가했다. 출가 후 대장경에 심취한 신미 대사는 한문경전이 불법을 이해하는 데 미흡함을 느끼고, 몽골 팔사문자와 티베트어, 범어를 직접 익혀 경전을 공부했다고 한다.

불교계에서는 신미 대사가 한자뿐 아니라 몽골 팔사문자와 티베트어, 범어 등 주변 6개 나라의 언어와 문자에도 능통해 한글 창제에 도움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세종대왕이 아무리 영명했더라도 한글을 만드는 데는 언어학과 자학, 음성학, 기호학 분야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대왕은 죽기 몇 달 전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 신하로서가 아니라 스승을 대하는 예로 신미대사를 접견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신미대사가 주석하던 법주사 복천암 불사를 후원하고 미리 준비한 법호를 내린다. 당시 내린 법호는 '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다

이 법호를 보면 신미 대사의 스님으로서의 높은 법력과 도의 경지를 칭송하면서, 대중적 공적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하는 문구도 보인다. 바로 '우국이세'다. 즉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한글 창제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받든 것으로 풀이된다.

한글의 창제와 발음 등을 적은 것이 '훈민정음 해례본'인데, 현재 간송본(안동본)과 상주본 두 권이 있다. 이 가운데 간송본은 간송 전형필이 1940년 일본으로 밀반출 직전에 구입한 것으로 안동시 와룡면 이 씨 가문에서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상주의 배 모 씨가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상주본도 원래는 안동에 있는 광흥사 복장유물이었다는 것이 불교계의 주장이다. 광흥사는 신미 대사와 더불어 훈민정음 창제 이후 불경언해에 공을 세운 학조 대사가 있었던 곳이다.

불교계는 신미 대사와 더불어 불경언해에 힘을 기울인 학조대사가 주석했던 광흥사 복장유물 가운데 하나가 훈민정음 상주본이고(불교계 주장) 광흥사 인근 민가에서 훈민정음 간송본이 나온 것도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삼한 22-03-29 02:33
 
잘 기억해둬야겠군.
유전 22-03-29 08:50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001&oid=009&aid=0004512254
매일경제
한글은 세종대왕이 아들딸과 만들었다
기사입력 2020.02.05. 오후 3:02

세종대왕은 대신 아들과 딸의 도움을 받았다. 1444년(세종 26) 2월 20일자 실록에 의하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훈민정음 제작의 부당함을 알리면서 "공적 업무라면 세자가 세세한 일을 맡을 수 있지만 언문처럼 급하지도 않은 일에 시간을 허비하면서 걱정하느냐"고 따졌다. 세종은 "내가 나이 늙어서 세자에게 그 일을 맡겼노라"고 했다. 세종이 한글 제작의 상당 부분을 문종(1414~1452·재위 1450~1452)에게 일임했다는 말이다. 집현전을 책임졌던 최만리가 이처럼 세종을 공격한 것을 볼 때 과연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는지도 의심스럽다.

둘째 딸인 정의공주(1415~1477)도 아버지를 도왔다. 정의공주는 머리가 비상했다. 공주가 시집간 죽산 안씨 대동보는 "훈민정음을 창제할제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다 연구하지 못하여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지만 답을 얻지 못하였다. 공주에게 내려 보내니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며 노비 수백 구를 하사하였다"고 서술돼 있다. 실록의 정의공주 졸기도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역산(曆算)을 해득하여 세종이 사랑하였다"고 썼다.
유전 22-03-30 11:45
 
(2022.03.30) [유전] [오전 11:31]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 어지를 한글 108자로 맞추고 정음편에 쓰인 한자도 108자로 맞춘 것 그리고 세종이 석보상절을 편찬토록 하고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지은 것은 불경에 대한 믿음과 신미대사의 영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함.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2341137
오마이뉴스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 서문 108자 번역의 의미
기사입력 2022.02.04. 오전 8:29


세종이 한글, 즉 '언문(훈민정음)' 창제를 마무리한 것은 1443년 음력 12월이었지만, 이를 체계화하여 온 세상에 알린 것은 1446년 음력 9월 상순, 지금의 한글날 즈음에 <훈민정음> 해례본(이하 '해례본')이라는 한문으로 된 책을 통해서였다. 이 책에서 세종 서문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
 
▲ 훈민정음 해례본의 세종 서문(첫 장 앞 쪽) 훈민정음 해례본의 세종 서문(첫 장 앞 쪽) @김슬옹, ≪훈민정음해례본 입체 강독본≫ 부록 41쪽.
ⓒ 김슬옹
 
해례본의 1차 대상은 양반들이었으므로 54자의 한문으로 훈민정음을 누가 왜 만들었는지, 그 가치는 무엇인지가 간결하지만 요긴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한문을 그 당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이른바 언해본의 세종 서문이다. 고등학교의 모든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는 글이다. 언해본은 1459년 세조 5년에 <월인석보>라는 책에 실려 전하지만, 실제 번역은 1446년 음력 9월 해례본 반포 후 적어도 12월 말까지는 번역되었다는 것이 전문 학자들의 중론이다.

이러한 108자 코드는 고 김광해 교수가 1987년에 "<훈민정음 어지>는 왜 백여덟 글자였을까. <우리시대> 2월호"라는 글에서 처음으로 밝혀냈다. 108이라는 숫자는 불교 코드로서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글자 하나하나에 온 정신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질적, 상징적 숫자라는 것이다.
 
▲ 훈민정음 언해본의 <세종 서문> 108자 12*9 배열표 [표 1] 훈민정음 언해본의 <세종 서문> 108자 12*9 배열표 @김슬옹
ⓒ 김슬옹

또한 일부러 108자를 맞추기 위해 번역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였는가를 읽어내야 한다. 그런 의미가 들어 있다면 그것의 현대어 번역도 108자로 번역하는 것이 15세기 세종과 세종을 따랐던 언해본 번역가들의 정성과 간절한 마음을 잇는 것이고, 후손의 마땅한 도리이다. 그동안 그 의미를 살려야 한다는 의견은 있었으나, 아직 공식화된 적은 없어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것이다.
 
<현대말 108자 번역>
 
우리나라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글 모르는 백성이 말하려는 것이 있어도, 끝내 제 뜻을 능히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 세종 서문의 현대말 108자 번역문 [표 2] 세종 서문의 현대말 108자 번역문 @김슬옹
ⓒ 김슬옹
 
108자 코드를 언해본에서 처음 적용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앞서 해례본(1446.9.)에 처음으로 적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세종이 직접 저술한 정음편의 한자 갈래 수가 108자라는 점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이는 인천교대 박병천 명예교수님이 2016년에 "세종의 <훈민정음>에 숨겨진 불교적 숫자와 그 의미(<월간서예> 422호)"라는 글에서 처음으로 밝혀냈다.
 
▲ 훈민정음 해례본 정음편에 쓰인 한자 108자(괄호는 빈도 수) [표 3] 훈민정음 해례본 정음편에 쓰인 한자 108자(괄호는 빈도 수) @ 김슬옹(2019). ≪한글교양≫(아카넷). 47쪽.
ⓒ 김슬옹

물론 15세기에 108자의 의도나 의미를 밝혀 놓은 책이나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세종이 해례본을 발표한 뒤 언문 보급을 위해 <석보상절>(1447), <월인천강지곡>(1449)이라는 불경 책을 펴낸 맥락으로 보아 불심에 기대어 언문을 보급하고자 했던 세종의 마음을 담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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