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한자를 이용했지만
신라어가 100 %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향가입니다.
향가를 보면 당시 신라어나 지금 말이나 별반 다름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백제 무왕이 지어 경주에 퍼트렸다는 서동요를 봐도 그렇습니다.
善化公主主隱 선화공주님은
선화공주주은(한자음)
(主-님, 隱-은 표기)
他密只 嫁良置古 남그스기 어랴두고 ( 남모르게 시집가놓고)
타밀지 가량치고
( 他-남, 그스기-그윽히,은밀히, 只-지, 당시는 기, (길->질, 기름->지름, 김치->짐치)
얼다- 시집 장가가다- 얼은이>어른 , 置-둘 치)
薯童房乙 마동방에게
서동방을
(乙-에게,을 로 사용됨, 나를 주라-나에게 주라)
(서동- 마를 파는 아이=백제 무왕이 신라 경주에 가서 마를 캐서 팜,
房은 서방님과 같이 남편을 의미함)
夜矣 卯乙 抱遣去如 밤의 둇흘 포갠거여 ( 밤에 좃을 포갠거여 )
야의 묘을 포견거여( 卯= 둇기(토끼) = 도끼(斧. 나무 찍는 도끼),
토끼와 도끼가 당시에 서로 발음이 같아 둇(좃)을 은유하는데 사용했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원효대사가 '자루없는 도끼'를 빌려달라고 노래하여
원효대사는 요석공주와 하룻밤을 얼었고 그 결과 설총이 태어나게 됩니다.
도끼는 둇=좃 을 의미하고 자루(막대기) 있는 것은 남자의 성기,
자루없는 것은 여자의 성기를 의미합니다.
당시 백제인이었던 서동이(훗날 백제 무왕) 신라에 가서 동요를 지어
아이들에게 가르쳤을 정도면 백제와 신라 언어가 서로 무리없이 잘 소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국의 언어는 고조선 > 부여 >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부여는 고조선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다고 하면
고구려+백제 --> 부여의 계통 --> 부여어
마한 --> 고조선 유민 + 마한 계통 --> 고조선어 + 마한어
신라 (사로연맹) --> 마한 지배 + 박씨와 6부족은 고조선의 유민 + 김일제 후손 김씨
--> 고조선어 + 마한어+ 진나라어
가야 --> 마한 계통(김수로이전 토착 세력) + 부여의 유민 --> 마한어 + 부여어
고조선 사람들이 수천년간 요서, 요동, 산동, 만주, 한반도 일대에 살았다고 생각하면
마한어 역시 고조선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고조선어 , 부여어, 마한어를 이어 받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중간 중간 중국계 유민들의 유입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의 기본 바탕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지금의 사투리 정도의 차이를 보였기에 서동요가 탄생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결론은
첫째, 사국四國은 대략적으로 언어 소통이 가능했다. 다만, 사투리정도의 차이는 존재했을 것이다
둘째, 당시 언어가 지금과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입니다.
강호의 고수들에게 많은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