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 치중이라기 보다는 중앙집권체계냐 봉건체계냐의 차이에서 나오죠. 일단 국가체계가 잡혀있어야 문신에 힘이 실리니까요. 유럽도 중세때 지방영주끼리 분쟁이 많았는데 절대왕권시대에 들어서 제대로 국가기틀이 잡혔으니까요. 학문도 중세에는 그나마 체계가 잡혀있는 교회중심으로 돌아갔으니까요.
일본 같은 경우는 제대로 된 중앙집권은 메이지 유신 때죠. 에도막부 때 사무라이가 붓을 잡았느니 어쩌니해도 결국은 칼잡은 놈이 권력을 쥐는 거였으니. 메이지 유신도 무력으로 실현했고 20세기초 군부 폭주까지 감안하면, 일본의 제대로된 문민통제는 평화헌법 성립 이후가 될듯 싶습니다만?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사무라이들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무라이의 습성이 아주 쪼~끔 부드러워졌는데
이를 두고 전국시대 완전 흉폭하게 나대던때를 그리워하던 사람도 있었죠.
막부성립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책인 '하가쿠레'에 이런 모습들이 보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그때서야 비로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봉토의 관료로서 봉토의 행정사무를 보기위한 것이었지
추상적 도덕사상->정치사상->구체적 행정에 적용
에 이르는 보편성에서 구체성에 이르는 흐름에 따른건 아니었지요.
당연히 학문이 얕을수 밖에 없습니다.
사무라이가 행정사무를 위해 붓을 쥐었다고 문인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지요.
동아시아 3국중에 유일하게 춘추전국시대가 없었던 한국...중앙집권체제가 너무 일찍 들어와버린 탓인지 그 습성이 아직도 남아 고급인력, 자본 모두가 중앙으로~중앙으로~ 너무 아쉽습니다. 가까운 일본만 봐도 그 지역 고유한 문화적 특색이 남아있거나 자본 역시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해서 본사라던가 공장이 존재하죠.
고려시대를 무신 우대라고 말하는 것은 좀 오류라고 봄.
개돼지 처럼 천대받아서 열받아서 뒤집은 것이고,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고려 "장군"은 실제는 문신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위키에서 참조:
강감찬(姜邯贊[1] 또는 姜邯瓚[2], 948년 12월 22일(음력 11월 19일) ~ 1031년 9월 9일(음력 8월 20일))은 고려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다. 강이식의 후손으로, 어릴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금주(지금의 낙성대)에서 태어났으며, 묘는 충청북도 청주시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요나라의 침입을 세 번 격퇴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은 검교태위 문하시랑에 이르렀고, 작위는 천수현개국자작(天水縣開國子爵)에 봉해졌다. 무관으로 알려졌으나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 장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