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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6-29 03:58
[기타] "사마천이 저지른 역사 날조의 구체적 방법"-뻐꾸기의 역사(4/5)
 글쓴이 : 환빠식민빠
조회 : 3,495  


④뻐꾸기의 역사 - 사마천이 저지른 역사 날조의 구체적 방법


  가. 실재는 이론이라는 조작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가


사마천(BCE145-86)을 그리기는 어렵다. 그를 사성(史聖)이라고 칭송해야 하는가 사도(史盜)라고 얕잡아 부를까. 신화는 역사와 다른가. 실재란 무엇인가. 모세가 그 무리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하느님이 약속한 땅 이스라엘에 들어왔단다. 그 토록 장엄한 출애굽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날조라고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희망사항이었으나 어느덧 실재가 된다. 그리고 무력으로 원주민을 내쫓고 원래 자기네들의 땅이었다고 가르친단다. 가르칠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대다수가 믿고 있다. 2000여 년 전에는 가짜였으나 지금은 진짜로  말이다. 주관적 신념과 객관적 실재는 같은가 다른가. 사실, 해석, 이론, 실재, 자연 현상, 과학, 검증, 반증, 신화, 역사 등 수없이 많은 단어들 속에 인류는 갇히어 살았다. 사마천을 찾아가기 전에 분명히 못 박아 둘 일이 있다.

 문사철 중에서 역사가 가장 과학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역사가 역사 발전의 일반법칙을 다룬다거나, 예측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무엇보다 역사는 사실에 근거한다. 자연 과학은 실재하는 자연현상에서 과학 이론을 도출한다. 그러므로 역사와 과학은 같다는 것이다. 사실과 자연현상을 동치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역사적 사실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유물을 통해 근거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자연 과학에서 실험을 통해 이론을 검증하는 작업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재야사학자들이 단군조선이나 《환단고기》를 통해 한국역사의 5000년 전, 또는 1만 년 전 기원설을 주장하여도 강단사학자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가 실제로 생존하였던 인물인가라는 검토는 중요하다. 그런데 사마천은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 황제(黃帝)를 《사기》 첫머리, 첫 글자로 올렸다. 이는 역사가로서 사기(詐欺) 행위였으나 지금 차이나 족들은 이를 문제 삼지 않고 100 미터 높이의 황제 석상을 만들어 둔다. 역사가와 사실, 해석 또는 이론, 자연 현상과 자연 법칙의 관계를 좀 더 고구할 필요가 있다. 철학에서건 과학에서건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한다. 우리가 실재한다고 알고 있는 많은 과학적인 지식들은 실은 개념적 허구일 뿐이다. 화학은 그 자체로는 자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요소들에 기초하고 있다. 원자나 분자가  실재하는 존재물인가. 개념상의 창조물일 뿐이다. 개념적 허구로서의 원자의 실재성과 실재하지 않았던 황제의 역사적 이해는 같은가 다른가.


 사마천(BCE145-86)이 죽은 지 2000년이나 지났다. 지금은 역사의 시대가 아니라 과학의 시대이다. 과학자들은 객관적으로 자연을 관찰한 후에 이론을 도출하고, 실험을 통해 이론을 검증한 후에 이론을 확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객관적인 관찰이 가능할까.

 관찰하기 전에 그의 머릿속에는 선이론(先理論)이 존재한다. 그래서 어떤 자연현상을 관찰할까를 결정하고, 머릿속의 이론에 따라 선택적으로 자료를 수집한다. 분류분석을 통해 이론화를 시도한 후에 실험으로 검증한다. 이러한 과정에 이론은 실험의 구성과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실험과 이론의 이런 관계를 관찰의 이론 의존성이라고 한다. 토마스 쿤은 과학의 발전에서 이론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패러다임(이론)으로부터 독립된 경험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제자 피터 갤리슨(Peter Galison, 하버드대 석좌교수)은 특정 시기에 경쟁관계에 놓인 이론들이 서로 달라도 실험 결과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음을 강조한다. 그는 토마스 쿤의 지나친 이론 중심적 사고를 경계하였다. 이론의 함정을 점검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실험을 통해 검증되었을까. 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질량이나 에너지의 존재가 그 주변 공간을 휘어지게 한다. 그 주변을 지나는 다른 물체는 이 휘어진 공간을 따라 운동하게 되며 빛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1919년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이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을 기다려 검증을 하였으나 신뢰성이 희박한 결론을 얻었다. 그 후 몇 차례 더 일식 실험을 하였으나 만족할 만한 결과는 얻지 못하였다. 그래도 과학자들은 일반상대성 이론을 믿었다. 왜냐. 일반상대성 이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인 매력 때문이었다. 과학에서도 이론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하물며 2300년 전, 신화가 여전히 지배력을 발휘하던 시기에 역사가가 사실을 기록했다는 말을 믿어도 좋은가.


나. 황제 신화가 역사적 사실로 실제화되는 구체적 과정


 차이나 고대사의 세계로 가 보자. 과연 차이나 족의 조상은 헌원(軒轅)이라는 이름을 가진 황제(黃帝)일까. 황제는 실재하였을까. BCE 206년에 차이나 족은 한(漢)나라를 건립하였다. 무제(BCE 141-87재위)의 침략 전쟁으로 국토는 그 이전의 차이나족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넓어졌다. 위대한 한나라의 자부심이 팽배할 때에 차이나족들은 자신들이 위대한 족속이라는 역사적 검증을 받고 싶어 했다. 이때 사마천이 사기를 쓰면서 요순보다 더 오래된 인물로 황제였다는 조작된 신화를 역사책에 옮겨 적었다. 이것이 바로 《사기》 <오제본기>이다.


황제는 소전의 아들로서 성은 공손이요, 이름은 헌원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고 곧 바로 말을 할 수 있었다. 어려서는 똑똑하고 자라서는 성실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듣고 보는 데에 밝았다 (黃帝者, 少典之子, 姓公孫, 名曰軒轅. 生而神靈, 弱而能言, 幼而徇齊, 長而敦敏, 成而聰明 - 사기).


 누가 이 이론을 검증하자고 대들 것인가. 더구나 황제 신화는 사마천이 처음 발설하지도 않았다. 전국시대에 음양오행설이 지식인 담론으로 일반화된 지 100여 년이 지났다. 모든 것을 오행에 따라 배치하고 이를 실재라고 믿었다. 주족(周族)을 대변하는 가운데(黃)의 제(帝)가 가장 위대하고 그는 실재하여야 했다. 그를 황제(黃帝)라고 불렀으며 급속하게 실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미셀푸코의 말을 기억하라. 이론이 실재를 구성한다고. 토마스 쿤도 그랬다. 과학 혁명은 이론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헤겔이 그랬다.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실현과정이라고. 사실이냐 이론이냐. 이 해묵은 논쟁 속에 그것이 역사와 과학이라면 사실의 실존성과 현상의 실재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거짓말은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 아인시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염두에 두고 주장하지 않았다. 태양, 별, 빛, 공간과 중력 등은 우주 속에 실재한다. 아직도 검증을 기다리고 있으며 반증례가 나타날 때까지는 과학계가 인정하는 패러다임으로서 효용성을 가진다.


 역사와 과학은 다르므로 백보 양보하기로 하자. 신화 속의 인물은 실재하는가. 몇 날 몇 시에 실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어떤 공동체나 어떤 시기의 상징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실재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단군 신화에서 곰과 호랑이를 곰 토템족과 호랑이 토템족으로 설정하고 이를 실재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황제의 실재성도 담보할 수 있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거짓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징성을 대변할 때에는 불가지성이라는 신성성의 베일에 덮여 있어야 한다. 도대체 어떤 신화가 조작이 분명한 시간적 확실성을 노출한단 말인가.


 황제 신화는 단군 신화와는 다르다. 100% 거짓말이다.

왜인가. 황제(黃帝)라는 글자는 제 위왕(威王, BCE357-320재위)의 그릇에 새겨져 있는 것이 최초의 것이다. 이 그릇의 황제가 오제관(五帝觀)에 의한 황제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최초의 명문이다. 사마천의 주장대로 황제가 요순보다 앞선 인물이라면 전국시대 이전의 그 많은 서적과 유물에 기록되어 있었어야 한다. 왜 《서》,《논어》등 BCE 4세기 이전에 저술된 수많은 책에 요순은 있는데 황제는 나오지 않는가. 《장자》 내편이 저술되던 대략 BCE 320년경 이후의 저술에만 등장한다.

 오제관이라는 이론 속의 황제가 실재화 되는 과정을 《장자》를 통해 확인해 보자.


 ①《장자》 제 2편 <제물론>에서 공자를 통해 황제가 맨 먼저 등장한다. 인간 세상을 처음 연 황제조차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하물며 나 구(丘, 공자) 따위가 어떻게 알겠는가.

 ② 제 11편 <재유>에서 황제는 요순보다 앞선 인물로서 인의를 가르친다.

 ③ 제 16편 선성(繕性)에서는 수인(燧人)․복희(伏羲)가 천하를 다스린 다음에 덕이 쇠하자 신농(神農)․황제(黃帝)가 천하를 다스린다.

 ④ 제 22편 지북유(知北遊)에서부터 ‘황제왈(黃帝曰)’이 뻔질나게 등장한다. 드디어 황제도 공자와 같은 철인이 되어 인간에게 도덕적 지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뿐인가. 《논어》에 순(舜)의 음악은 소(韶)이고 무(武)의 음악명은 무(武)라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찬가지로 황제의 음악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⑤ 제33편 <천하>에 황제의 음악은 함지(咸池)란다. 그 순서는 허구로 만든 이론이 실재가 되게끔 봉사한다. 황제의 악은 함지요, 요는 대장이요, 순은 대소요, 우는 대하요, 탕은 대호이며, 문왕은 벽옹의 악이요, 무왕 주공은 무를 지었느니라(黃帝有咸池,堯有大章,舜有大韶,禹有大夏,湯有大濩,文王有辟雍之樂,武王周公作武).


 《장자》는 장주(莊周 약 BCE 369?-289?)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다. 장자학파에서 무려 200년에 걸쳐 만들어나간다. 곽상(郭象)이 산정한 장자는 내편(1-7), 외편(8-22), 잡편(22-33)으로 이루어져 있다. A. C. Graham은 내편은 BCE 320년 경, 외편은 진의 멸망과 한의 승리 사이인 BCE 209 - 202년, 잡편은 BCE 2세기에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위에 언급한 ①②③④⑤를 검토해 보라. 《장자》는 완성되는 200년 동안에 황제의 실재화가 공고해지는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BCE 4세기 이후의 차이나 지식인들과 대중들이 황제의 실재를 믿는다. 실재성과 역사성을 획득한 신화를 역사서에 기록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역사서에 기록하는 순간 그는 사실만 기록한 사관은 아니다. 그래도 기록하고 싶은데 누가 기록하는가.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다는가. 사마천이 저질렀다. 사마천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임을 몰랐는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토록 뻔뻔한 역사 사기꾼이 될 수 있었는가. 공자가 주(周)의 역사에 하․은(夏殷)을 덧붙이는 뻔뻔한 짓을 하였다. 그래도 그는 성인으로 추앙 받았다. 차이나 족의 위대하며 동이족은 열등하다는 이론이야 만세불변의 진리로서 환영받으면서 전승될 것이다. 무엇이 두려우랴.


 사마천 이전의 황제는 막연히 요순의 윗대 사람으로만 말해졌었다. 황제와 요순은 혈연관계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마천의 드라마적 재능은 《사기》에 기록할 때에도 빛을 발한다. 황제의 후손 중의 한 명이 요순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악마를 제압하는 투쟁적 영웅이라야 이야기 거리가 확대 재생산된다. 구체적 행위를 통해서 고안한다. 동이족에게는 위대한 치우(蚩尤) 신화가 있다. 그를 구체적 장소에서 싸워 이기게 만든다. 황제는 탁록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쓴다.


 치우가 난을 일으키고 황제의 명을 듣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제후들의 군사를 징발하여 치우와 탁록의 들에서 싸웠다.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涿鹿之野, 遂禽殺蚩尤 - 《사기》).


 나는 사서(四書)를 읽고 난 이후에 《통감절요》를 읽었다. 대부분 혼자서 읽고 난 이후에 가르친답시고 대학생들을 모아서 괴롭혔다. 그 후에 《시》, 《서》, 《역》을 읽고 나서 《춘추좌씨전》을 읽었다. 《예기》를 읽을 무렵《사기》를 들추게 되었다. 깜짝 놀랐다. 아니 <오제본기>라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서(書》)와 《춘추(春秋)》에도 나오지 않는 인물이 어떻게 요순을 밀어내고 역사적 인물이 된단 말인가. 더구나 황제의 이름이 헌원씨(軒轅氏)라니. 차이나족들이 수레를 만든 때는 멀리 잡아도 은나라의 청동기에도 못 미친다. 《서》보다 오래 된 책이《역(易)》이다. 《역(易)》에는 배(舟)도 철(鐵)도 은(銀)도 나오지 않는다. 《역》을 《주역(周易)》이라며 가짜 책을 만들 때에도 조심성은 있었다. 《역》의 저자들이 위에 든 사물을 싣지 않았었다. 도둑질도 앞뒤가 맞아야 함을 알았던 거다. 헌원씨(軒轅氏)라면 수레 거(車) 변이다. 글자의 기원조차 BCE 7세기를 넘어 설 수 없다. 춘추 시대에 생겨났을 글자로 이름을 지어놓고 3000년 전의 사람이라며 믿으라는 말인가. 조상의 이름이 James라면서 4000년 전 한반도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는가.


 나는 위대한 학자는 진실해야 한다고 믿었다. 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궁형으로 불알이 썩어가면서도 글을 썼다는 사마천의 발분저서(發憤著書)가 기껏해야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란 말인가.

 역사가는 사실 앞에서 경건해야 한다. 제 장왕이 치정으로 신하 최저(崔杼)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최저가 병으로 죽었다는 곡필을 당부하였으나 태사(大史) 백(伯)은 거절한다. 최저가 자기의 임금을 죽였다라고 쓴다. 최저가 백(伯)을 죽인다. 그와 두 동생 중(仲)과 숙(叔)도 직필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 태사가 모두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소사(小史) 남사씨(南史氏)까지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 죽간을 들고 갔었다. 그 길은 진실을 위한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의 길이었다. 그래서 집간이왕(執簡以往)의 고사를 남겼다.


공자는 주나라를 유구한 역사의 나라로 만들려고 은나라, 하나라를 훔치었다. 사마천이 차이나 천하를 10여 년이나 돌아다니고 《사기》를 썼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돌아다녀 본 결과 은과 하 요순이 동이족임을 알았다. 언젠가 밝혀지면 공자의 거짓말이 들통 난다. 비록 최근에 만들었으나 차이나의 가짜 신(神) 황제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마음 한구석 캥기지  않느냐고? 공자도 역사사기꾼이었는데 뭐 어때. 사마천만 이런 배짱으로 역사서를 쓴 게 아니다. 700여 년 후에 《사기색은(史記索隱)》을 쓴 사마정(司馬貞, 唐)은 대담하게 《사기》에 <삼황본기(三皇本紀)>를 부기(附記)한다. 삼황이란 수인씨(燧人氏), 포희씨(庖犧氏=복희씨), 신농씨(神農氏)이다. <오제본기>보다 앞 선 시대를 조작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수인씨(燧人氏), 포희씨(庖犧氏=복희씨)가 《사기》에 나오지 않는 점이 차이나족의 역사적 유구성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사마정만 이러하랴. 주자(朱熹, 1130-1200)까지도 이런 짓을 하였다. 나중에 간략하게 적는다.


 역사사기꾼 공자와 사마천의 범죄 행위를 요약해 보자

 

①공자 → 주서(周書) 위에 은나라의 역사서 상서(商書)와 하나라의 역사서 하서(夏書)를  덧붙이어 주민족의 기원을 약 1000년이나 올린다.

 ②사마천 →공자가 날조한 요순, 하, 은이 동이족의 역사임을 알고 황제를 요순보다 수백 년 앞선 인물로 기록한다. 심지어 요(堯)를 황제의 후손으로 기록한다.


차이나 족들의 역사는 믿을 게 못 된다. 역사를 날조한 것이 아니라 신화를 역사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치우 신화까지 자신들의 신화로 만들기 위해 광분한다고 한다. 염제와 황제의 석상을 만들고 염제와 황제의 후손은 시조를 잊지 말아야 한다(炎黃子孫 不忘始祖)는 깃발을 흔든다.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하여 새 나라를 건국하였다는 희망사항은 실재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차이나는 황제가 만들었다는 허구를 위해 광분하는 나라와 대중들이 바로 이웃에 살고 있다. 지금의 차이나 땅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BCE 10세기 이전까지 동이족이 역사의 주체로서 주도권을 쥐고 살았었다. 그 후에도 오래토록 동이 겨레가 살았다. 민족의식이 있었는가. 있었다. 민족이란 너와 남의 다름이라는 견해로 좁혀서 본다면 그들과 우리는 달랐다. 말이 다르고, 조상이 달랐으며, 문화가 달랐다.


 끝으로 사마천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가짜 신화 황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치우(蚩尤) 신화는 진짜였음을 기록으로 남겨 주었음에 감사한다. 모든 가짜는 진짜에 의탁하지 않던가. 앞으로 나는 치우 임금에게 배례를 올릴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songpoet/50019267449

<저자> 송명호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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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빠식민빠 15-06-29 04:13
   
지금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역사조작 프로젝트 동북공정, 단대공정, 탐원공정의 뿌리가 바로 사마천!!
중국은 사마천의 역사 조작을 근거로 황제헌원을 화하족 짱깨의 원조라고 설정하고
중국 역사를 3천년-> 5천년 ->1만년전까지 끌어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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