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어느 집 대문 앞에 이르렀는데, 원래 정위(廷尉) 영언요(永言姚)公의 거처였다. 후문으로 들어가니, 저택 깊숙하니 곳곳마다 시체가 있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곳이구나. 구불구불 더 나아가 앞채에 도착하여, 도로로 나가서 다른 주택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서양상인 교승망(喬承望)의 저택이었다. 이곳이 바로 세 병사의 소굴이었다.
문을 들어가니, 병사 하나가 보이는데, 미모의 여자 몇을 지키면서 광주리에 산처럼 쌓인 색무늬비단 의복을 뒤적이다가, 세 병사의 도착을 보고는 으하하! 웃었고, 우리들 수십 명 남자를 몰아 후청으로 갔다. 부녀자들은 곁방에 남겨졌다. 그 방에는 탁자 두 개가 있고, 옷 匠人(장인) 셋과 중년 부인 한 사람이 옷 만드는 중이었다. 이 부인은 양주사람이었는데, 짙은 화장을 곱게 하고, 산뜻한 색의 옷이며 화려한 장식에, 웃는 말로 지휘하는 것이, 자못 득의양양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값나가는 물건이 나올 때마다, 병사에게 애걸하여 수중에 넣는데, 갖은 아양을 떠는 것이, 수치를 몰랐다. 나는, 병사의 칼을 빼앗아 이 요사스런 물건을 베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여기 병사가 훗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고려를 정복할 때에, 고려 부녀자 수만을 포로로 잡았는데, 몸을 내맡기는 자 한 명도 없었다. 어찌하여 당당 중국이, 수치를 모르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나?” 오호라, 이게 바로 중국이 大亂(대란)을 당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