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동천왕조의 기록입니다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유유는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사는 마침내 혼란에 빠졌다.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을 거쳐 물러갔다.
당시 서토는 위,촉,오 세나라로 나뉘어져 있었던 상황으로 고구려가 서안평을 점령하자 위나라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1만의 군사로 치게합니다. 하지만 관구검의 군사들은 유유와 밀우등의 활약으로 관구검의 군사들은 퇴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이상한 점은 위에 굵게 칠한 부분입니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관구검의 군사들은 낙랑을 거쳐 후퇴를 했다고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 낙랑이 현 통설대로 평양에 있었다면 이는 불가능합니다.. 아래 지도를 봐보세요
위나라의 군사들이 유주로부터 시작해서 고구려를 치다 후퇴를 한다면 파란색 화살표처럼 위나라가 있는 서쪽으로 후퇴를 해야 정상이지 뭐하러 후퇴하는 마당에 한반도 깊숙히 평양까지 간단 말입니까? 고구려군에게 몰살당하려고 작정을 했다는 생각밖에 안듭니다.
그리고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전의 기록입니다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이 기록 역시 낙랑군이 통설대로 평양에 있었다면 불가능한 내용입니다. 아래를 보면
지도를 보면 알다시피 부여는 고구려에 막혀 낙랑을 칠 수 없습니다. 설사 해군으로 갔다 하더라도 부여는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어 해군으로 가는 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삼국사기 태조왕기의 내용입니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태조왕이 요동의 서쪽을 노략질해서 대방과 낙랑을 공격했다는 기록입니다. 하지만 이 기록또한 낙랑군이 평양,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면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고구려가 요동의 서쪽을 공격을 했는데 갑자기 평양과 황해도 일대를 노략질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위 기록대로라면 낙랑과 대방 역시 요동의 서쪽에 있어야 정상입니다. 아니면 태조왕이 요동의 서쪽을 공격하고 다시 배를 타 황해도일대를 공격했다는 말입니까? 말이 안되죠
다음은 삼국사기 중천왕조의 기록입니다
四年 夏四月 王以貫那夫人置革囊 投之西海 貫那夫人 顔色佳麗 髮長九尺 王愛之 將立以爲小后 王后椽氏 恐其專寵 乃言於王曰
4년 여름 4월, 임금이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로 던져버렸다.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었다. 이금이 그녀를 사랑하여 장차 소후를 삼으려 하자 왕후 연씨는 그녀가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 할 것을 걱정해 임금에게 말하였다.
위의 기록 또한 현 통설대로라면은 불가능합니다. 아래 지도를 보십시오
이는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지도인데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한사군이 현 통설대로 한반도에 있었다면 당시 고구려는 한사군에 막혀 서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면 위나라 군사들이 고구려군사들이 자기국경을 침입하여 관나부인을 던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있기만 했다는 이야기인지..
자치통감의 기록입니다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為之置樂浪郡, 以統為太守, 遵參軍事.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과 서로 싸워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민 1000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케 하였다. 모용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군 태수에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양서의 기록입니다
乙佛, 頻寇遼東, 廆不能制
을불(미천왕)이 자주 요동으로 쳐들어갔는데 모용외는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이 기사는 낙랑군의 두 군에 대하여 세력을 가졌던 장통이 그 백성 천여 가를 데리고 모용외에게로 투항한 사건을 가르키는 구절입니다. 요동에 있었던 장통이 어떻게 한반도 평양과 황해도유역에 있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지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가운데에는 고구려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상황에?? 그리고 양서의 기록을 보면 모용외는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헌데 쨰서 평양과 황해도 유역에있는 낙랑군이 요동에 있는 모용외에게 투항을합니까?
그리고 또한 장통은 투항할때 낙랑의 백성 1000여가구를 데리고 갔는데 한가구당 5인가족이라 쳐도 5000명입니다. 뭐하러 평양에 있는 낙랑군이 5000명 크게는 10000명까지의 백성들을 데리고 요동에 있는 모용외에게로 간단 말입니까?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