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돌풍이 무섭다. 부산·경남(PK)과 충청에서 하루가 다르게 지지율이 치솟고 있다. 충청에서 안희정 표를 안철수에게 뺏긴 것도 문제지만 문재인이 압도적 우위였던 PK에서 안철수가 타이스코어까지 치고 올라온 건 뼈아플 수밖에 없다. 호남과 20대에서도 안철수 바람이 거세다. 문재인이 2012년 대선에서 48%를 얻은 건 호남에서 90% 넘는 유권자가 몰표(600만 표)를 준 게 큰 몫을 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선 호남에서 300만 표 이상이 안철수에게 갈 개연성이 크다. PK에 이어 호남까지 무너지면 ‘문재인 필승론’은 흔들리게 된다.
문재인도 가만 있을 리 없다. 반전용 카드 세 가지를 들이밀 움직임이다. 우선 이미 써먹어온 ‘적폐연대 불가론’을 강화해 안철수와 홍준표의 단일화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홍준표를 밀어주는 격이 돼 ‘적폐청산’을 외쳐온 자신의 스텝이 꼬이는 결과를 빚게 된다. 홍준표를 방패 삼아 안철수와 양자대결을 피하려 하는 ‘비겁자’로 자리매김될 우려도 크다. 한 자릿수 남짓의 홍준표 지지율이 방패 역할을 해줄지도 의문이다. 두 번째 카드는 문재인의 장기인 ‘깜짝 영입’ 재연이다. 여권 출신 보수 명망가를 데려와 확장성을 과시하는 낯익은 이벤트다. 이것도 약발이 다했다. 김종인을 비롯해 데려온 인사들마다 당을 떠나는 사태가 이어진 데다 문재인 본인의 이념이 변하지 않으니 형식적인 끌어안기일 뿐이란 인상이 유권자 뇌리에 박힌 지 오래다. 세 번째 카드는 ‘숫자’일 것이다. 40석 소수정당인 안철수당이 집권해봤자 뭘 할 수 있겠느냐, 120석 원내1당인 민주당만이 수권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 곧 나올 것이다. 이 역시 말장난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부 시절 150석 넘는 거대여당 새누리당이 무엇을 할 수 있었나. 여당이 독주하면 야권이 똘똘 뭉쳐 법안 하나 통과시켜 주지 않는 게 우리 정치다. 이를 걱정한 안희정이 대연정론을 꺼냈지만 문재인은 단칼에 일축했다. 이런 그가 집권하면 120석 갖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히려 안철수가 집권하면 더 많은 일을 해낼 가능성이 있다. 어차피 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주고받기식으로 성과를 축적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국민은 정치인들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다. 뻔한 공학 써봤자 역풍만 분다. 문재인은 참모들을 물리치고 홀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바란다. 왜 ‘박근혜 잔당’ 홍준표의 완주를 목놓아 바라며 그와 로맨스에 빠지는 처지가 됐는가. 극좌·극우의 적대적 공생에 기대 편히 먹고사는 게 습성이 되다보니 이번 대선도 친문과 친박의 양파전으로 몰아가면 딱이라고 생각해서 아닌가. 과거에는 그런 수법이 통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친박 패권의 적폐에 몸서리를 치는 국민들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패권적 속성은 그대로인 세력이 대권을 승계하는 걸 원치 않는다. 지난해 총선에서 국민의당의 약진이 이를 입증한다. 문재인도 대선후보 수락연설에선 “이제는 통합”을 외치긴 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번 대선은 정의와 불의의 대결”이라 못 박아 독선적 편가르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박근혜가 국정 농단이란 ‘불의’를 저지른 건 맞다. 그러나 그것이 문재인을 ‘정의’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다. 국민은 박근혜의 불의를 탄핵으로 응징했으며 지금은 인품과 능력을 기준으로 후임자를 물색하는 중이다. 문재인은 그 시험장에 입실한 후보 중 한 명일 뿐이다. 정책을 묻는데 ‘정의’를 써내면 불합격은 따놓은 당상이다. 그래도 ‘정의’로 승부하고 싶다면 아들 특혜채용설과 민정수석 시절 노무현 대통령 사돈 음주운전 은폐 의혹부터 투명하게 해명하기 바란다. 정말 정의로운 후보라면 그런 의혹 자체가 일어날 수 없는 것 아닌가?
과거 문재인은 겸허하고 포용적인 처신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그때의 초심으로 돌아가라. 정책으로 승부하라는 뻔한 소리는 하지 않겠다. 집권하면 패권 대신 협치로 나라를 이끌겠다는 비전을 행동으로 입증하기 바란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