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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1-28 19:27
12.12와 5.18에 대한 -- 美國 정부의 공식 답변(全文)
 글쓴이 : x카이저x
조회 : 1,036  

전문내용이 많다보니 글이 잘리는군요,

http://cafe454.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CBW6&fldid=IjT5&contentval=0001czzzzzzzzzzzzzzzzzzzzzzzzz&nenc=&fenc=&q=&nil_profile=cafetop&nil_menu=sch_updw

핵심 쟁점 요약 : 

1. 미국은 처음부터 줄곧 12.12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의 책임자가 전두환이고, 그가 정권찬탈의 욕심이 있었다는걸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2. 광주유혈진압에 대해 항의하는 미국에 대해 신군부는 북한과의 연계설로 설득하려 하였으나, 북한의 별다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3. 최규하는 미국에게 문민정부를 장담하였지만 신군부를 당해낼 능력이 없었고 이미 정권은 전두환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4. 미국은 계속 신군부의 쿠데타에 대해 항의를 표명하였지만, 신군부는 이를 묵살하였고 국내언론은 이를 보도하지 않거나 왜곡보도하였다.

첨어 : 미국은 당시 '북한의 침략 가능성'과 '신군부의 정권장악' 두가지를 염두에 두고, 북한과 전두환을 동시에 견제하려 했던 것 같네요. 분단상황을 고려해 무엇보다 조속한 해결을 바랬지만 결국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이..



12.12와 5.18에 대한 -- 美國 정부의 공식 답변(全文)
1980년 위컴 사령관이 全장관과 만났을 때
全장군은 『이번에는 북한이 학생시위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
『南侵의 결정적 시기가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위컴은 『南侵이 임박한 징조는 없다』고 대답… 

출처 : 월간조선                       

12.12 사전에 전혀 몰랐고,
5.17 계엄확대 2시간 전에 통보받아 

〔편집자 注〕 이 문건은 한국 국회의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가 요청한「12.12 사태부터 광주 민주화운동이 진압될 때까지의 미국의 역할」과 관련한 48개 질문서에 대한 美 정부의 공식 답변서 全文이다. 이 답변서를 통해 美 정부는 12.12 사태를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고 5.17 계엄확대도 불과 두 시간 전에 통보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또 「全정권은 계엄령하에서 보도매체를 장악하여 미국 입장을 왜곡시키고 마치 자기들을 지지하는 것처럼 이용했다」「관영 라디오 방송은 미국이 특전사 부대의 광주 파견을 승인했다고 거짓 주장했다」고 비난했다. 다시 말하면 全斗煥 장군이 정권을 장악한 데 대해 미국이 냉담하고, 또 공공연하게 불쾌한 입장을 취했으나 한국 국민들에게는 이런 입장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美 정부는 「1980년 그 불안한 시기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그리고 시민들에 대한 군사작전을 견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다」고 주장했다.

개요

한국군 자제 요청

-한국군 장군들이 12월12일 韓美연합사의 작전통제권하에 있는 부대들을 적절한 통고 없이 사용한 데 대해 미국은 분노했으며,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데 대해 심히 우려했으며, 문민통치의 원칙이 신속히 그리고 확고히 확인되지 않을 경우 발생하게 될 불안정 사태의 가능성에 대해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했다.

-미국은 韓美연합사 작전통제권하의 부대를 잘못 사용한 데 대해 한국 정부, 全소장 그리고 한국 군부에 대해 누차 맹렬히 항의했다.

-한국 군부 지도자들이 사실상의 정권 장악을 포기하거나, 민주화 일정표를 정할 의도가 없다는 증거가 12.12사건 후 점차 쌓이게 되자 미국은 심히 곤혹스럽게 생각했다.

-미국은 한국의 문민당국 및 군당국에 대해 민주화 과정을 재개하도록 누차 촉구하고, 탄압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金大中씨를 체포하는 것과 같은 정치인에 대한 탄압행동은 「소란을 일으키게」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또 저명한 야당인사들이 체포되었을 때 강력히 항의했다.

-한국 당국은 5월18일 00시01분에 시작된 전면계엄령 선포 불과 2시간 앞서 이를 미국에 통보했다. 미국은 한국군 당국이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대학교와 국회를 폐쇄할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 5월18일 미국은 서울과 워싱턴에서 계엄령 실시에 대해 날카롭게, 그리고 맹렬히 항의했다.

-미국은 처음에 광주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을 때 미국은 한국 군대가 자제하도록 누차 촉구했으며, 5월22일 광주 소요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서로 대항하고 있는 쌍방간의 대화를 촉구하는 공개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대화를 촉구하는 미국의 5월22일자 성명이 방송되고, 광주시에 배포될 것이라는 다짐을 한국 당국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그 성명은 방송되지도 않았고, 배포되지도 않았다. 대신 광주의 관영 라디오 방송은, 미국이 특전사 부대의 광주 파견을 승인했다고 거짓 주장했다.

(중략..)

-미국은 미국의 행동과 정책을 공개적으로 왜곡한데 대해 한국 정부와 한국의 보도매체에 대해 항의했다. 그 왜곡에는 미국이 12.12사건과 全씨의 중앙정보부장 임명, 5월17일 한국 정부가 취한 행동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미국이 광주에서의 특전사 활동을 승인했다는 것과 같은 주장이 포함되었다.

-이 성명서가 다루고 있는 기간중에 북한이 공격을 가해올 의도가 있음을 시사해주는 여하한 정보도 미국은 받은 일이 없으며, 또한 미국 관리들은 남한의 국내 정세가 전면 계엄령이나, 가혹한 탄압 조치를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고는 간주하지 않았다.

-무척 노력했지만 미국은 문민정부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민주화 일정을 정하도록 全장군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미국은 金大中씨에 대한 죄과에 대해 국제적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의 사형선고를 감형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金大中씨에 대한 죄과가 「牽强附會식 억지」라고 묘사했었다.

성명

韓美연합사와 작전통제권

(중략.. 신군부의 군사반란에 동원된 군대는 미국과 관련이 없다는 내용)

朴正熙 대통령의 암살

(중략..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후 북한의 혹시 모를 공격을 걱정하였다는 내용)

1979년 12.12사건

5. 미국은 全斗煥 소장이 이끄는 일단의 한국 육군 장교들이 무력으로 한국군 지도층을 제거해 버린 12.12사건에 대해 사전에 알지 못했다. 1979년 11월 말경에 위컴 장군은 한국 陸士(KMA) 11기 및 12기 출신 군인들간에 약간의 「불만」이 있음을 듣게 되었다. 위컴 장군이 柳炳賢 연합사 부사령관과 盧載鉉 국방장관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그들은 이것이 루머라고 간주했다. 

미국 관리들은 12월12일 초저녁 용산의 미군 「벙커」에 있는 미8군 지휘소(CP)가 이상한 부대이동이 행해지고 있다고 보고하기 시작했을 때 이 사건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위컴 장군과 글리스틴 대사는 즉시 벙커로 가서 부대가 시내에서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다는, 그리고 총소리가 들리고 있다는 단편적인, 그러나 놀라운 보고들을 종합하기 시작했다. 

거의 처음부터 그들은 어던 형태의 쿠데타가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이윽고 盧載鉉 국방장관과 金鍾煥 한국군 합참의장이 그들에게 와서 한국군의 몇몇 부대들과 무전 및 전화 연락을 취했다.

6. 그날 밤 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었던 부대들이, 적절한 절차를 밟아 작전통제권을 연합사로부터 되돌려 받지도 않고, 또 연합사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지휘관들에 의해 이동되었다. 위컴 장군은 이런 행동을 연합사의 방위능력을 약화시키는 일로 보고, 그날 밤 한국 군부 지도자들에게 정식으로 항의했다. 또 한국 국방부에 대해 한국 군부대간의 교전을 피하기 위해 국방부에 충성하는 부대를 새벽까지 이동을 중지시키도록 종용했다. 동시에 한국군 부대간의 충돌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全斗煥 소장에게 경고하는 전갈을 보냈다.

7. 미국 관리들은 한국 육군부대간에 심각한 무력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을, 그리고 북한측이 그러한 충돌을 남침의 기회로 볼 가능성을 우려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崔圭夏 대통령에게 우려를 표명하기 위해 전화를 하려고 시도했으나 직접 통화는 불가능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그날 밤의 총격전에는 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파견된 부대가 관련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鄭장군은 朴正熙 암살사건 조사 주무관인 全斗煥 소장으로부터, 암살사건 조사를 위해 질문할 일이 있으니 와달라는 「초청」을 거절했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또한 全장군이 이끄는 군대에게 한국군 내부의 싸움이 초래할 북한으로부터의 위험과 그들의 행동이 미칠 정치적 안정에 대한 위협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그들과 연락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그들이 실권을 장악할 때까지는 미국 정부 관리들과 직접 접촉하기를 거부했었다.

8. 미국 정부는 또한 일부 군인들에 의한 12.12 실권장악이, 미국이 매우 중요시하고 있는 민주화 과정을 중단시키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북한에 대해 경고하고, 또 한국의 내분을 막기 위해 미국은 모든 관계자들에게 경고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이 성명의 내용은 崔侊洙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그리고 적어도 간접적으로 반군측 장교들에게 알려졌다. 美 국무성은 다음날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 수주일 동안 우리는 朴대통령 암살사건에 이어 광범한 지지기반을 가진 정부를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이 질서있는 절차를 채택한 것을 보고 고무되었다. 그러나 오늘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결과 우리는 한국에 가 있는 우리 대사와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이 정치 발전을 방해하는, 한국내의 어떤 세력도 그들의 행동이 韓美관계에 미치게 될, 심한 역효과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든 관계자들에게 지적하도록 지시했다. 그와 동시에 서울의 현정세를 이용하려 들지도 모를, 한국 밖의 여하한 세력도 10월27일에 우리가 발한 경고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성명은 1979년 12월12일 서울에서 작성된 것이었으나, 駐韓 미국대사관이 그것을 한국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정부의 통제를 받는 보도매체를 이용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워싱턴에서 발표되어야 했다.

9. 12월13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崔대통령과 만났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한국이 文官에 의한 군부통제와 그리고 정치 자유화 계획의 계속을 필요로 한다고 보는 것이 미국의 견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회동을 통해 글라이스틴 대사는, 崔대통령하의 약한 행정부가 군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을 것같지 않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리처드 홀브루크 東亞太 담당 국무차관보도 12월13일 워싱턴에서 駐美 한국대사와 만나 미국의 우려를 강조했다.

11. 12.12사건으로 권력장악에 대한 미국측의 노여움을 나타내기 위해, 글라이스틴 대사의 조언에 따라 위컴 장군은 全씨와 만나기를 거부했다. 대신 위컴 장군은 한국의 국무총리, 신임 국방장관 및 기타 관리들과 만났다. 위컴 장군의 메시지인즉, 韓美연합사에 사전통고 없이 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는 한국군 부대를 이동시키는 행위는 연합사가 북한으로부터 침공을 막아낼 수 없게 되는, 용납할 수 없는 위험한 행위라는 강경한 것이었다. 위컴 장군은 또한 이 점을 서면으로 전달하고, 한국군 고위장교들과 수많은 논의에서도 이 점을 역설했다.

12. 12.12사건에 대해 미국측이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가능한 강경하게 전달하기 위해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80년 1월4일 崔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 駐韓 미국대사관은 이 친서 내용을 한국 정부와 군부에 유포시켰다. 카터 대통령은 정치적 화해와 헌법 개정을 위한 崔대통령의 계획에 찬사를 보냈다. 카터 대통령은 12.12사건에 「심한 곤혹스러움」을 느꼈다고 지적해서 말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우리의 긴밀한 협조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2.12사건 이후의 미국정책

(중략 : 미국은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한국의 민주화가 또 다시 후퇴될 것을 우려했다는 내용과 전두환이 정권 장악을 하지 못하게 계속 유도했다는 내용)

전국계엄령으로의 확대

25. 그러나 얼마 안가 이 낙관적 견해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5월 두번째 주에 강경파들이 학생들을 강력히 탄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많은 보고가 駐韓 美대사관에들어오기 시작했다. 청와대는 한국 정부가 연합사 예하의 일부 부대 작전통제권을 연합사로부터 되돌려 받을 지도 모른다고 글리스틴 대사에게 통고해 왔으며, 한국군 당국도 이를 위컴 장군에게 통고해 왔다.

26. 위컴 장군은 5월13일 全斗煥 장군과 만났다. 全장군은 앞서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말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번에는 북한이 학생시위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南侵의 결정적인 시기가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고 위컴 장군에게 말했다. 이에 대해 위컴 장군은 미국은 언제나 그러하듯 한국을 방위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나 북한으로부터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징조는 없다고 대답했다. 

위컴 장군은 정치 자유화를 향해 나가는 것이 한국에 안정을 가져올 것이며, 안정이야말로 북한을 억지하는 주요 수단이라는 미국측 견해를 주장했다. 위컴 장군은 국내정세에 대한 全씨의 비관적인 평가와, 그가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을 강조하는 것은 청와대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

27. 5월13일 워싱턴 당국은 글라이스틴 대사 및 위컴 장군의 보고, 그리고 당시 서울에서 유포되고 있던 북한의 활동에 대한 루머에 대응하여 국무성 대변인에게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케 했다.

「우리가 가진 정보로는 북한에서 통상적이 아닌 부대 이동이 탐지되지 않고 있으며, 한국에 대한 어떤 형태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믿을만한 아무런 움직임도 탐지할 수 없다」

야당 지도자들은 분명히 자제를 요구함으로써 정부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처럼 보이기 싫어했지만, 그들은 마침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검열하에 있는 언론이 야당 정치인들이 온건을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고 있다고 워싱턴으로 보고했다.

(중략 : 미국의 항의를 묵살하고 있는 신군부와 침묵하는 한국언론에 대해 불만이였다는 내용)

32. 5월17일(土) 하루 종일 데모없는 소장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내에서 취해지고 있는 강경한 자세를 우려한 글라이스틴대사는 崔侊洙 청와대 비서실장과 만났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한국 정부에 대해 군부로 하여금 강경 정책을 지시하지 못하도록 촉구했으며, 특히 金大中씨를 체포하는 것과 같은 정치인 탄압행동은 「소란을 부채질하는」결과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崔비서실장으로부터 전면 계엄령을 실시하기로 하는 결정이 임박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전면계엄령

33. 5월17일 초저녁 미국 관리들은 한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 지도자들이 체포되었음을 알았다. 미국은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체포가 임박했다는 정보나 기타 탄압조치에 대한 정보를 갖지 못했다. 이날 밤 9시30분경 미국 관리들은 청와대로부터 5월18일 00시01시를 기해 전면 계엄령이 실시된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때쯤 해서는 金大中씨, 金泳三씨(가택 연금), 金鍾泌씨 및 기타 정치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는 보도는, 정부가 취한 행동이 철저한 성격의 것임을 명백히 해주고 있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워싱턴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5월18일 崔대통령을 방문하여 미국은 5월17일의 강경한 일제수색과 전면 계엄령을 선포한 조치가 「충격적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미국의 날카로운 항의를 전달했다. 崔대통령은 한국 정부가 걷잡을 수 없는 학생데모로 해서 전복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부득이 전면 계엄령을 선포하게 됐다고 대응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또한 金大中씨를 포함한 야당 지도자들을 석방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또한 李熺性 계엄사령관에게도 강력히 항의했다.

(중략 : 계속 여러가지 통로로 전두환을 압박했다는 내용)

36. 美 국무성은 5월18일, 그리고 5월19일 또다시 워싱턴에서 다음과 같은 공개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계엄령이 한국 전역에 확대 실시되고, 대학이 폐쇄되고, 여러 정치 지도자와 학생 지도자들이 체포된 데 대해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한다. 정치 자유화를 향한 진전에는 법에 대한 존중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 정부가 어제 취한 행동이 한국 문제를 악화시키게 될 것을 우려한다. 우리의 우려의 심각성을 한국 지도자들에게 명백히 했으며, 또 우리는 앞서 崔대통령이 밝힌 바 있는 헌법개정과 광범한 지지기반을 가진 문민정부의 선거를 위한 진전이 즉시 계속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신념을 강조했다. 우리는 한국 사회의 각계 각층에게 이 어려운 시기에 자제해서 행동해 주도록 촉구하는 바이다. 1979년 10월26일 우리가 천명했던 바와 같이 미국 정부는 한국의 정세를 이용하려드는 어떠한 외부로부터의 시도에 대해서도 조약상의 의무에 따라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다」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들

39. 되풀이해서 요점을 설명하자면, 한국 당국은, 전면 계엄령 선포를 하기 불과 2시간 전에야 이를 미국에 알려왔다. 韓美연합사 사령관도 미국 대사도 대학과 국회가 폐쇄되고, 정치 지도자와 언론인들이 체포되고, 군 장교들이 보도매체를 포함한 온갖 민간 분야에 밀고들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41. 미국 관리들은 5월18일(日) 아침 전면 계엄령 실시에 항의하고, 그 범위와 의미, 특히 金大中, 金泳三(가택연금), 金鍾泌씨 및 기타 정치 지도자들의 체포 사실을 확인하려 드는 등 큰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미국의 옵저버들은 무장한 계엄군이 대학 캠퍼스를 점령하고, 서울 전역의 주요한 시설들을 수비하고 있다고 보고했으나 주요한 충돌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44. 계엄사의 검열에 의해 철저한 통제를 받는 한국의 보도매체들은 5월18일(日)과 5월19일(月) 광주 사건에 관해 아무 것도 보도하지 않았다. 5월19일~20일간에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발전에 관한 미국 대사관의 단편적인 지식은 광주 미국문화원장 데이비드 밀러로부터 얻은 단편적인 정보, 그리고 광주시에서 약 12마일 떨어진 공군기지에 있던 美 공군관리가 보내온 제한된 관찰보고, 그리고 외국 기자들의 보도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46. 온건과 인내를 종용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경로가 사용되었다. 주요 경로는 위컴 장군을 통한 군사경로로, 그가 주로 접촉하는 상대는 柳炳賢 장군과 한국군 합동참모본부였다. 위컴 장군은 또한 글라이스틴 대사와도 부단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崔대통령과 국무총리를 포함한 文官 관리들에게 자제하도록 노력하고, 광주시민과의 접촉을 추구하고, 군사력을 지나치게 사용한 데 대해 사과하거나 유감의 뜻을 표하는 문제를 신중히 고려하도록 종용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또한 똑같은 내용을 종용하는 한편 가톨릭교회 지도자들과 접촉했다.

부대파견:특전사와 제20사단

47. 미국은 특전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한도 없으며, 그 부대들이 광주로 이동한 데 대해 사전에 알지 못하고 있었다. 특전사는 韓美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다. 미국이 마침내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종합해서 그 전모를 파악했을 때 글라이스틴 대사는 특전사의 지나친 반응이 비극의 직접원인이라는 판단에 도달했다.

(중략 : 광주의 특전사 파견과 미국의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에 대해 우려하는 성명을 발표했다는 내용)

이 성명과 그 후 발표된 성명들은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 의해 방송되었지만, 한국의 보도매체들은 이 성명의 발표를 금지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장군은 한국군 당국으로부터, 5월22일 미국측 성명이 방송되고 광주시에 공중 살포될 것이라는 다짐을 받았다. 이 성명을 포함한 전단이 인쇄되었으나 미국 당국은 그 전단들이 결코 공중살포되거나 배포되지 않았음을 나중에 알았다. 

미국 관리들은 그와 반대로, 정부 통제를 받는 광주의 라디오 방송이, 미국측이 특전사의 광주 파견을 승인했다고 보도하고 있음을 나중에 알았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역정보 행위를 한국 정부에 항의하고, 이를 정식으로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당국은 이를 취소하지 않았다.

55. 5월23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朴忠勳 국무총리서리와 만났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朴총리서리에게, 5월17일 (한국의) 정책결정이 미국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공공질서를 유지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인정하나, 그에 따른 정치적 강경조처는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행위이며, 광주에서의 심각한 질서붕괴의 원인이 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글라이스틴은 평온이 회복되면 정치발전이 재개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국민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면 정세가 안정될 수 없다고 역설했다.

같은 날 글라이스틴 대사는 일단의 여야 국회의원들과 오찬을 같이하면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견해를 논했다. 한국의 신문들은 글라이스틴 대사가 5.17 사건에 대해 「이해」와 「승인」을 표명했다고 보도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 오찬에서 글라이스틴은 정치 지도자들의 체포, 국회 폐쇄, 그리고 5월17일에 시작된 전반적인 정치적 탄압에 대해 강력한 불찬성을 표명했다.

光州의 소강상태와 협상

56. 광주에 대해서 말하자면 위컴 장군과 글라이스틴 대사는, 대결의 비폭력적 종결을 추구하기 위해 광주의 시민집단들과 대화에 들어가도록 계엄당국 관리들에게 권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한국의 당국자들에게, 광주에 평화를 회복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시민 및 종교 지도자로 구성된 비공식 특별시민위원회와 대화를 갖도록 종용했다. 글라이스틴은 또한 대화를 촉진시키려는 가톨릭 교회측의 노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톨릭 교회측과 연락을 유지했다. 

데이비드 밀러 광주 美 문화원장이 5월24일 서울을 향해 광주를 떠났을 때에 그는 광주의 尹대주교가 金추기경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가지고 갔었다. 그 메시지는, 광주시의 긴장의 신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가 특전사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특전사가 광주에서 저지른 비행에 대해 당국이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에 찬동했다.

그는 설사 군대가 광주시 재점령을 위해 파견된다 해도 무력 사용을 극소화하고, 시민이 다치는 일을 막기 위해 작전계획을 조심스럽게 짜야할 것이라고 종용했다. 柳장군은 자제를 약속했다. 위컴 장군은, 광주시민위원회가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자기와 글라이스틴 대사가 믿기 때문에 계엄군이 광주시에 재진입해야 할 가능성은 낫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58. 그러나 5월25일 미국 정부는 불길한 신호를 받기 시작했다. 한국 외무부는 모든 외국인들에게 광주를 떠나도록 요청했는데, 이는 가일층의 군사행동과 폭력사태의 가능성을 예시해 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조치였다. 주한 미국대사관과 기타 대사관들은 아직 광주를 떠나지 않은 自國 국민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광주시와의 전화연락을 할 수 있었던 광주 공군기지에 있는 美 공군부대는 광주에 있는 여러 나라 시민들과 연락을 시도했다.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 영국 및 남아프리카 국민 91명이 광주 공군기지에 모였다. 그들 중 23명은 5월26일 美 공군에 의해 철수되었으며, 나머지는 기지에 머물렀다. 평화봉사단원과 선교사를 포함한 몇몇 미국인과 기타 외국인들은 광주에 머물기로 택했다.

光州시에의 재진입

60. 다음날인 5월26일 崔侊洙 청와대 비서실장은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광주에 있는 현지 한국군 사령관에게 광주시 재진입의 재량권이 부여되었으며, 작전이 곧 시작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한국 정부가 사태를 종식시키기를 원한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나서, 그러나 먼저 모든 비군사적 방법들을 시도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또한 광주시의 재점령에 특전사 부대들이 투입되는 것은 잘못이라고 특별히 지적해서 말했다.

61. 광주시 탈환작전이 시작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광주 도청건물 안에 있던 어떤 사람이 한 기자에게, 글라이스틴 대사가 중재자로 나서달라는 요청을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전해주도록 요청했다. 이때는 이미 군의 공격이 입박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계엄사와 중재해 달라는 전화요청을 사절했다. 그것은 그러한 역할이 미국 대사에게 합당하지 않으며, 또 한국 당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그가 믿었기 때문이다.
62. 5월27일 이른 아침 계엄군이 광주시에 진입한 후, 계엄사는 韓美연합사 사령관에게 작전이 잘 수행되었으며, 무기를 내놓기를 거부하여 살해된 30명을 제외하고는 사상자가 경미했다고 통보했다.

63. 광주시 재진입작전에 투입된 군대의 많은 부분은 20사단 병력이며, 광주사태를 도발한 특전사 부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특전사가 그들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정규군 복장을 하고서 도청과 광주시의 기타 장소에 직접 공격을 했으며, 작전이 끝난 다음에 그들의 책임지역을 20사단에 인계했다.

光州사태의 여파:미국정책

(중략 : 전두환에 의해 정권이 장악되고 한국내의 반응은 받아드려지고 있다는 내용)

5월31일의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카터 대통령은 미국의 對韓정책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두 가지 원칙, 즉 한국의 안보와 인권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언명했다. 카터는 미국의 對韓 안보공약은 확고부동하다고 확언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가 「좌절되었다」고, 그래서 미국은 한국 관리들에게 「완전한 민주정부를 지향해 가급적 빨리 나가도록」촉구한다고 지적해서 말했다.

67. 머스키 국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글라이스틴 대사는 6월4일 全斗煥씨를 만나 5월17일 이래 한국에서 일어난 제반 사건들이 미국 정부내에서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글라이스틴은 全씨에게 광주에 특전사 부대가 투입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특전사는 매우 거칠어 시위 진압을 위해서가 아니라, 북한으로부터의 침공자들을 막기 위해서 있는 군대이며, 한국 국민 자체에 대해 사용하기에는 너무 사나웠다고 말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광주사태의 비극적인 사실이 公的으로 시인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全씨는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특전사 부대가 투입되어야 했던 것을 자기도 유감스럽게 생각하나, 사태 수습을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그 부대가 투입되었다고 말했다.

68. 글라이스틴 대사는 6월26일 全씨와의 회담에서 미국의 견해를 피력했다. 글라이스틴은 정치적 자유화를 향한 전면적 진전의 필요성과, 그러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본적인 안보 및 경제관계 유지가 어렵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는 계엄령의 종결을 촉구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또한 그릇된 정보가 방송되어 광주사태에 대해 미국측에게 잘못이 있었다고 믿는 한국민들이 많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全씨는, 이 문제를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한국내에서의 反美감정에 대해 미국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응답했다.

69. 7월8일 또 다시 글라이스틴 대사는 머스키 국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全斗煥씨와 직접 만나, 全씨가 한미안보관계를 「악용했다」(abused)는 머스키 장관의 견해를 그에게 강조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全씨에게 韓美간의 장기적 안보관계는 한국 정부가 그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역설했다.

美國의 立場을 歪曲시키다

70. 全씨가 정권을 장악한 데 대해 미국이 냉담하고, 공공연하게 불쾌해 하는 정책은 세계에 알려졌으나, 한국 국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全정권은 전면 계엄령하에 보도매체를 장악하여 미국의 입장을 왜곡시키고, 미국이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지지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데 이를 이용했다. 

광주에서의 특전사의 행동을 미국이 지지한다는 왜곡된 라디오 방송 보도를 하고, 광주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할 것을 지지한다는 미국의 성명을 담은 전단을 광주시에 공중살포하는 데 합의해 놓고서 이를 어긴 당국의 행동은 그들의 기만적인 행동의 몇가지 사례에 불과했다. 

5월23일 한국의 보도매체들은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한 글리스틴 대사의 말을, 5월17일 일어난 사건들을 「이해했다」느니, 「찬동했다」느니 하고 왜곡해서 보도했다(54항, 55항에서 지적한 것처럼).

71. 광주사태 직후 全斗煥씨는 일단의 한국 신문 방송 발행인과 편집인들을 모아놓고, 미국은 12.12 실권장악과 자신의 중앙정보부장 임명 및 5월18일의 전면 계엄령 선포에 대해 사전에 통보받았다고 말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美대사관 공보관을 全씨와 만난 각 보도기관 인사들에게 보내, 기록을 바로잡으려고(오해를 풀려고) 했으나, 어느 보도기관도 미국의 참다운 입장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엄령하에서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AP통신은 全씨의 성명이 「절대 사실이 아니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全씨 자신이 알고 있었음」을 명백히 한 미국 대사관측의 부인성명을 인용 보도했다. 그러나 AP통신의 이 보도는 한국의 매체에서 보도되지 않았다. 

72. 한국의 사태발전에 대한 미국 관리들의 성명은 계엄령하에서 한국의 보도매체에 의해 번번이 무시되고 왜곡되었다. 미국 관리가 韓美안보장치에 대한 지지를 언급할 때마다 그 성명은 대서특필되었으나, 민주화와 인권존중을 촉구하는 성명은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거나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6월22일 미국대사관은 미국 관리들이 한국 문제에 대해 행한 성명을 모아 편집하여 발표하고, 이를 한국에 있는 3천여명에게 우송하는, 매우 이례적인 조치마저 취했다. 한국측의 역정보에 대응하여, 그리고 미국의 정책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마이클 아마코스트 부차관보가 6월25일 하원 외무위원회 소위원회에 나와 한국에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과 미국의 對韓정책을 논했다. 6월26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광주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관한 역정보가 방송되고 있는데 대해 全씨에게 직접 항의했다.

73. 한국의 보도매체에 의한 사실조작은, 1980년 8월27일 全斗煥씨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데 대해, 全씨에게 보낸 카터 대통령의 강경한 어조의 서한을 그릇되게 인용하는 등 그 해 여름 내내 계속되었다. 카터 대통령은 한국에서 정치 자유화가 다시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나 당국의 통제를 받은 보도매체들은 그것을 다르게 보도했다. 한국 신문의 헤드라인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金大中씨 裁判과 人權문제 

74.미국은 金大中씨와 그 밖에 체포된 인사들의 운명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었다. 金大中씨가 체포된 다음날인 5월18일 미국은 그를 위해 한국 당국에 항의했다. 카터 대통령은 1년 전 金씨를 만난 일이 있어, 그의 사정에 대해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당국은 불쾌하게 여겼지만 金씨의 재판에 미국 관리가 임석할 수 있게 해달라는 미국 대사관측의 강경한 요구를 받아들였다. 

미국은 재판 후 金大中씨에 대한 기소 내용은 「견강부회」(억지)라고 공표했다(이 말은 당국의 통제를 받는 보도매체가 보도하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으로해서 金大中씨 사건은 국제적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金大中씨가 사형선고를 받은 지 몇달 후 全斗煥 정부는, 金大中씨의 운명을, 韓美양국 정부간의 경직된 정치관계를 어느 정도 정상화시키는 문제와 결부시킬 것임을 미국에게 분명히 했다. 全씨와의 긴 논의끝에 金大中씨의 사형선고는 풀렸으며, 全씨는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되어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결론 

75.이 성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미국 정부의 최고위 당국자들은 1979년 12월12일부터 1980년 5월의 전면 계엄령선포와 잇따라 일어난 광주의 비극 그리고 그 후까지, 군사통치가 공고히 되어가고, 민주주의 전망이 후퇴함에 따라, 한국에서 일어난 제반 사건에 대해 극도로 우려하게 되었다. 

미국의 군사 관리와 文官 관리들의 끈질기고 강력한 종용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태들에 대해 극히 미미한 영향밖에 미칠 수 없었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인권과 공민권 문제는 韓美간의 중요한 논쟁분야로 남았다. 미국 정부는 이 불안한 시기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그리고 시민들에 대한 군사작전을 견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음을 기록이 밝혀주고 있다. 

다만 미국 정부는 그때, 문민 합헌통치의 공고화와 민주화 과정의 속행이라는 미국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부록 생략)

 PS : 우리나라 학생운동이 반미운동로 급격히 돌아선 결정적인 계기가 된게 바로 5.18광주항쟁 때문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국내언론을 장악하고 미국 입장을 왜곡 보도함으로써 오해가 생긴 것이죠.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의 반미감정 발생의 주범은 바로 전두환입니다라고 말할 여지가 생긴겁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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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13-01-28 20:23
   
어휴 읽느라 힘들었슴ㅋ. 잘봤습니다.
Noname 13-01-29 13:03
   
5.18이? ㅋㅋㅋ

5.18 특별법에 대한 해외 반응 가져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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