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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지금의 우리나라를 보는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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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독 분단 시기에 서독의 고위 정보관리로 일하다 동독의 2중 간첩으로 암약했던 클라우스 쿠론씨는
서독 연방의회 의원들의 간첩활동을 1993년 폭로하였다.
쿠론 씨에 따르면, 최소한 25명의 서독 의원들이 동독의 첩자로 암약하였다는 것이다.
1972년 당시 빌리 브란트 총리의 최측근 비서였던 귄터 기욤이
동독 간첩이었다는 사실 말고도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저명했던
베를린자유대학의 한스 야콥젠 교수도 동독의 거물 간첩이었고,
송두율씨가 벤치마킹한 ‘내재적 동독 접근법’의 창시자인
피터 루츠 교수도 위장첩자였음이 밝혀져 독일 지성계를 경악시켰다
독일의 경우 1990년에 통일이 되었다.
동독일과 서독일로 나눠져 있었던 국가가 하나의 국가로 통일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소련 역시 해체되어 유럽에 포진했던 공산주의 진영은 완전히 붕괴해버렸다.
그런데 곧 서방세계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이전에 공산주의 국가였던 동독에서 보관한 문서인 일명 '슈타지(Stasi) 문서'가 공개된 것이었다.
통일 전에는 서독 역시 우리나라의 탈북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독에 속한 공산권 주민들이 대거 이탈을 했다.
그리고 동독에서 이탈한 주민은 무려 200만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슈타지 문서에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바로 '신분을 위장한 간첩', 즉 동독의 간첩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던 것이었다.
슈타지 문서에는 무려 3만에 달하는 동독 간첩들이 서독에 포진하고 있었다는 것이
독일의 통일 이후 발견된 '슈타지(Stasi) 문서'로 불리우는 기밀문서의 해제 결과 확인됐다.
그런데 그 간첩들에는 무려 서독의 정보부 고위관리들을 비롯한 방첩대,
수상의 여비서, 심지어 시위대에 발포명령을 내렸던 서독의 경찰청장까지 있었으며,
서독의 통일장관은 물론이고 동독을 연구하는 학자였던 송두율씨가 벤치마킹한
내재적 동독 접근법'의 창시자인 피터 루츠 교수도 위장첩자였음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이외에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저명했던 베를린자유대학의 한스 야콥젠 교수도 동독의 거물 간첩이었고,
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이었던 사민당(NPD) 원내총무인 뷔난트 의원까지 문서에 있었다.
서독 녹색당의 경우는 아예 슈타지의 지령을 받고 활동했다.
또한 심지어 수백명에 불과한 서독을 대표하는 연방의원 중에 무려 8명,
그리고 유럽의회 의원 2명까지 적혀져 있었다.
장교, 작가, 과학자, 외교관, 언론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서독에서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학생들을 비롯한 교육계는 모두 좌파적인 성향에 매몰되어 있었다. 안보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던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좌편향에 쏠려있었고, 동독에 대해 유화적이었다.
독일연방정보기관(BND)을 비롯한 여러 안보기관은 무려 7,000여건에 달하는 간첩들에 의한 국가반역범죄 행위를 적발했다.
그리고 명확히 밝혀진 간첩활동을 한 혐의자로 300명을 구속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만 서독의 각계에서 동독에 협력한 '비정규 정보원'의 규모는 무려 2만명이 넘고
심지어 서독의회(분데스타크) 내에서 한동안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만한 의원요원들이 활동했었다.
이들 간첩들은 시민운동 단체와 언론, TV 및 대중매체 그리고 대학 및 연구소들에 집중적으로 침투하고
포진하여 서독의 대동독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동독을 옹호하는 각종 이론을 개발하고
선전선동술을 공작했으며, 특히 '동독눈치보기'를 통한유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유도했었다.
그리고 서독에 대한 반정부 투쟁을 포괄적으로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러 각 분야에 걸쳐서 포진했었던 간첩들이 자행한 짓이었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뜨려서 서독을 뒤집어 엎어 동독에 흡수통일이 되기를 바랐던 자들이
자행한 짓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독에 포진한 간첩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여러 사실들로 짐작할 수 있었다.
예컨대 서독에서 가장 유명한 간첩사건으로는 '기욤 사건'을 빠뜨릴 수 없다.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유대인 학살에 대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던 총리가 있다.
바로 빌리 브란트 총리이다.
그런데 1974년에 브란트 총리의 수행보좌관으로 귄터 기욤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브란트의 1인 최측근으로 '브란트의 그림자'로까지 불렸던 인물이다.
바로 이 사람이 동독의 비밀정보기관 슈타지의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수행보좌관이라면 브란트 총리가 직접 담당하는 여러 국정에 중요한 문서들이 담긴
서류가방을 담당하던 보좌직이었다.
1급 기밀들을 그야말로 눈앞에서 대치상황에 있었던
동독에게 뻔히 흘려주는 것과 다를 게 없던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브란트 총리는 책임을 지고 결국 사임을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기욤에 대해 서독의 마녀사냥이라거나 조작
희생양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마저 생겼다.
하지만 이후의 정황을 통해 간첩임이 명명백백하게 입증되었는데
1975년에 간첩죄로 징역 13년이 선고된 기욤은
1981년 동서독간의 포로 교환시에 서독 간첩과 교환되어 동독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동독에서는 칼 마르크스 훈장을 수여받아 국가 보안성 대령으로 승진해
슈타지의 공작원 양성 학교 교관으로 발령됐다.
귄터 기욤은 1950년 동독의 국가보안성에 들어가 서독 잠입을 위한 훈련을 받은 뒤에
1956년 서독으로 망명하여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했었다.
그리고 1957년에 서독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1964년부터는 정치에 활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1968년 프랑크푸르트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사민당 시의회 원내교섭단체의 사무국장까지 됐다.
1969년 연방 총선거가 실시되자 기욤은 게오르크 레버 교통장관의 선거 캠프에 들어가
헌신적으로 선거 운동에 종사했으며,
장관의 당선에 기여하자 레버 장관은 그를 총리실의 경제·재정·사회정책 담당 비서관으로 추천했다.
이에 1972년 브란트 총리는 기욤의 능력을 높이 사 그를 수행보좌관으로 임명했고,
기욤은 서독 총리의 기밀 문건이나 회의록, 사생활 등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브란트의 업적으로 칭송을 받는 '동방정책'과 같은
서독의 대동독 정책이 동독에 의해 이미 낱낱이 파악이 되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어
서독의 방첩기관이 그에 대한 11개월 동안의 잠복수사 끝에 증거를 잡고
1974년 4월 24일에야 비로소 서독의 수도 본의 자택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됐던 것이다.
간첩과 관련된 정황을 포착하고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기욤은 "나는 독일 인민군 장교로서 국가 보안성에 소속되어 있다.
적의 장교로 대우해주길 바란다"며 당당하게 나왔다.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할 것은 문건을 통해 확인된 간첩활동의 사례는
동독의 서독에 대한 간첩활동이 한창 서독이 우리나라의 '햇볕정책'과 같은 정책인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그러니까 동서독의 교류가 활발해졌을 때인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더욱 극심해졌고 기승을 부렸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브란트 총리의 수행보좌관이 간첩으로 밝혀진 '기욤 사건'이 벌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브란트 총리 이후에 수상이 된 콜 총리의 측근들
역시 간첩들로 포진되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동독의 비밀정보기관 슈타지가 서독에서 벌어진
여러 수많은 항의운동들과 학생시위,
반전 평화시위와 같은
반정부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를 해서 주도를 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심지어는 동독의 간첩들이 서독의 극우주의자들과 협력하여 네오나치운동을 조장한다거나,
서독 정권의 간부들 중에서 나치에 부역을 했던 혐의들을 들춰내서
서독 지도부의 정통성과 존립 자체를 뒤흔들어 놓기까지 했다.
그 표적은 서독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독 대통령마저 나치 부역자로 왜곡하며 서독 정부의 정통성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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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은 우리보다 더 지독하게 간첩 때려잡았습니다.
결코.. 사회적 건전성과 부정부패 없다는것만 믿고.. 손 놓은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