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의 생애를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먼저 위키백과에서 말하는 이정희의 생애 초반을 읽어보자
출생과 학창 시절[편집]
이정희는
서울 관악구 출신이었다. 그의 부모는
충청북도 출신으로 결혼하고 상경,
관악구 봉천동 재래시장에서 장사에 종사하였다. 그는 산동네 재래시장 지하 단칸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하 단칸방에 살던 그는 여름에 수해와 물난리를 겪기도 했고, 중학교 재학 무렵 집안 형편이 나아져 이층집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서울 서문여중을 거쳐
1984년 서문여고에 입학했으며, 학창시절 내내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였다.
1987년 2월 서울
서문여고를 졸업하였다.
[2]
대학 재학 시절[편집]
그해
1987학년도 학력고사에서 340점 만점에 323점을 획득해 인문계 공동 14등
[3] (인문계 여자수석)을 차지했고,
[4] 1987년 3월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다. 신입생 시절
6월 항쟁을 겪었다. 이때 이후로 그는 인권운동가의 길을 선택했다.
[2] 1990년에는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장에 선출되어 활약했으나, 대학 1학년 때는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기지 않아서 한때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다'라고 전한다. 학생운동과 함께 공부를 병행하였으나 상위권의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시력이 악화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대학 졸업 무렵 동두천 기지촌에서 만난 한 소녀를 보고 충격을 받아
여성 운동에도 참여했다고 전한다.
[2] 이를 계기로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1992년 2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를 졸업했다.
변호사 개업과 인권 운동[편집]
1992년 초 그는
경기도 동두천에서 한국인 성매매 여성과 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6세 여자아이를 만난 뒤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고 전한다.
[5] 그해
10월 동두천에서 발생한 주한 미군에게 살해된 기지촌 여성
윤금이 피살 사건은 그가 인권변호사와 사회운동가로 나설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5] 미군 기지촌 윤락여성인 윤금이는 주한미군 병사와 언쟁 끝에 처참하게 살해되었으나 아무도 윤금이 변사 사건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윤금이를 타살한 미군 병사에 대한 처벌을 강력 주장했다.
가생이 젊은이와 자녀 교육을 위해서 나의 생각을 말해보자
세상에는 밝고 어두운 면이 반드시 공존한다.
밝은 것만 아니면 어두운 것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의 진리를 모르는 철부지이다.
그러면 세상의 밝은 면을 보고 성장한 사람과
어두운 면을 보고 성장한 사람에게는 차이가 크다.
결코 개인의 성실성과 두뇌와 능력 만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자기 운명의 50%를 넘지 못한다.
그 사람 주변 환경이 나머지 50% 이상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
밝은 주변환경을 가지면 환해지고
어두운 주변환경을 가지면 어두워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개인의 능력과 주변환경이 그 사람을 만드는 것이 확실하다.
내가 이정희의 생애초반 그녀의 옆에 있었다면 이런 조언을 했을 것이다.
어두운 주변환경을 벗어나서 밝은 주변환경에 거주하라고
이정희는 질문했을 것이다.
그러면 어두운 환경의 사람은 다 죽어야 합니까?
네가 직접 도와주지 말고
간접적으로 도와줘라
종교단체를 이용하던지
믿을 수 있는 단제를 후원하므로서 직접 어두운 사람을 주변에 두지 말아라.
그리고 네가 성공할 수록 더욱 강하게 어두운 환경에 햇볕을 주면 안되겠냐?
이정희는 내가 볼 때 안타깝지만
지금은 너무 많이 늦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