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고승덕 딸 아닌 세월호 활동가 '캔디 고'를 만나다
지난 4월 뉴욕에서 세월호 2주기 추모 행사가 열렸다. 그곳에서 한 여성을 보았다.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뒷자리에 앉은 그는 앳된 얼굴이었지만 학생 같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 같아 한참 멀리서 지켜보았다. (중략)
편견 앞에 서다
그의 프로필은 화려하다.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외손녀이자 전 서울시 교육감 후보 고승덕 변호사의 딸, 고 전 후보의 낙선에 큰 영향을 미친 글을 썼다. 그 일로 매우 유명해졌다.
그의 행보가 특별해 보였다. 캔디 고 씨는 '활동가'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세월호를 미국 사회에 알리고자 노력하는 '활동가' 말이다. 더구나 그 활동은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기자가 상상했던 '캔디 고'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유한 유명인의 2세는 기부할 수 있을진 몰라도 실제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진 '활동가'로 살아가기는 어려울 터이다.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한다. 그건 오해다. 할아버지가 몸담았던 기업은 삼성 같은 글로벌 대기업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군인 출신이었고, 정부를 위해 일했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돈이 엄마의 돈이 아니듯, 내 돈도 아니다. 미국에 왔을 때 엄마는 싱글맘이었고, 힘들게 우리 남매를 키웠다. 난 과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내가 부유하게 자랐을 것이라는 추측은 사람들이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오해이다." (관련 내용은 다음 인터뷰 기사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캔디 씨 자신은 비록 부유하게 자라지 않았지만 부유하게 자란 사람이라도 사회 참여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회 문제는 공감하는 일이며 결국 내 가족, 내 이웃의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유하거나 부유하게 자란 사람은 왜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을 두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그건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다. 그저 한 인간으로서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두고 공감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피해자가 내 이웃일 수도 있고 내 사촌일 수도 있지 않나. 나와 관련이 없다고 해서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든, 나의 배경이 어떻든지 간에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캔디 씨는 지극히 상식적인 자기 생각을 명확하게 말했다. 그런 답변이 기자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동안 언론에 비친 그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모르겠다.
"2년 전에 내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가 '한국에 사는 사람도 아니면서 왜 나서냐'는 말이었다. 정확한 지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국에 원해서 오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의 손에 이끌려 오게 됐다. 어린아이에게 선택이나 결정권이 있을 리 없었다.
1998년 이후로 한국에 가을이나 봄에 가지 못했다. 한국의 사계절은 매우 아름답지 않나. 한국의 봄과 가을이 정말 그리웠다. 봄과 가을의 계절을 나는 잊지 못한다. 가을의 낙엽과 봄의 꽃내음도 생각난다. 미국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나는 누군가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헤어졌다고 말하고 싶다.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에 와서도 계속 한국 뉴스를 찾아보았다. 우리말이 서툴러서 한국 뉴스를 보고 이해하는 데에 꽤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계속해서 보고 있다."
예술가에서 법학도가 되기까지
캔디 씨는 현재 로스쿨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다. 학부에서는 문학과 조형예술을 복수 전공했고 석사는 미술 비평으로 학위를 받았다. 문학과 예술을 공부해 예술 분야로 나가던 캔디 씨에게 로스쿨 입학은 조금 특이한 이력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6월 3일에 있었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건 5월 31일이었다. 이 글이 여파를 몰고 올 거라는 짐작은 했었지만, 한국 시민들이 내가 법대에 진학하게 되는 걸 알면 내 말과 글이 더 신뢰가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 시민들이 알아줬으면 했고, 내 진심을 더 믿어주길 바랐다."
그는 한국 시민들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중대한 진로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줄 만큼 간절했다. 그건 진실을 향한 갈망이었다. 법대생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세월호 활동가로 살아가는 이유
캔디 씨가 글을 올린 2014년 봄은 세월호 사건으로 전 국민이 슬픔에 빠져있던 때였다. 그는 두 사건이 겹쳤는지 매우 슬픈 눈으로 말했다.
"나는 세월호 사건을 뉴스에서 찾아보다가 서울시 교육감 후보로 아버지가 나온 것을 알게 됐다. 세월호 사건은 4월에 일어났고, 페이스북에 글을 쓴 것은 5월이었다. 당시 한국 시민들은 한창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그런 기간 내가 쓴 글 때문에 세월호 뉴스가 묻히는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미안했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는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실이 규명되고, 유가족들에게 정확한 답변과 보상이 있을 때까지 나도 내가 있는 장소에서 계속 참여할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진정성을 증명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캔디 씨는 당시 결심한 대로 로스쿨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세월호 진실 규명을 위해, 더불어 그가 품은 미안한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활동가가 되었다. 옳다고 생각한 그대로 행동했고, 그 행동의 진실성을 위해선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캔디 씨의 인생을 어느 누가 정치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 캔디 씨는 영락없는 보통 한인 청년이었다. 한국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그에게 아름다움으로 남았다. 여전히,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 관심을 두고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11세 소녀는 어느새 미국에 정착한 한인 청년이 됐다. 20여 년 동안 미국 땅에서 지냈다. 그 세월 동안 과연 캔디 씨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우리는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어느 유명인의 딸 '캔디 고'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캔디 고'를 만나러 가는 길이 무척 설렐 것 같다.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