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30분 대통령 관저에서 무초와 만났을때 이승만이 보여준 인식은 비상사태 하의 침착성, 통찰력, 정확성, 그리고 치밀한 전략적 고려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 기록은 이승만의 첫날 반응으로는 가장 상세한 것이다. (중략) 이승만은 필요하면 남녀노소 국민들에게 돌맹이와 막대기를 들고라도 싸우라고 호소하려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충분한 무기와 탄약만 주어진다면 이 말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것으로 믿었다. 그는 놀랍게도, 자기는 한국을 제 2의 사라예보로 만드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해왔으나 어쩌면 현재의 위기는 한국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기회를 제공해준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려는 미국의 여론이 나날이 강력해지고 있다고 언급하며, 미국이 대만에서 현상을 유지하려는 정책을 취해주기를 희망하였다. 왜냐하면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을 당분간 묶어두고 싶기 때문이었다. 통일의 기회로 삼고 싶다는 구상, 미국의 여론판독, 중국문제에 대한 인식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 노회한 현실주의자의 머리 속에는 북한의 기습이 통일의 호기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25일 하오 2시에 열린 국무회의는 대통령이 주재하였다.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은 후방 부대를 진출시켜 반격을 감행하면 능히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회의는 15:30에 산회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벌써 자기 수하들의 얘기를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국제정치에 대해 철없는 애송이인 신성모와 채병덕을 믿고 있지 않았다. 그는 문제의 핵심, 즉 거대하게 몰려드는 이 공산 파고를 넘을 힘은 동경의 맥아더와 워싱턴에 있음을 곧바로 알아차렸고 문제를 저 높은 국제수준으로 밀어올릴 구상을 번개처럼 밀어붙이고 있었다. 전전부터 그는 김일성 뒤에 소련이 있다고 의도적으로 소리를 질러대었다. 1948년 12월 맥아더의 초청으로 동경에 갔을때 이승만은 다소 엉뚱하게 '소련은 북한군에게 물자를 공급하고 있고 소련은 중국에서 난리가 가라앉는 대로 즉시 남침하려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그는 의도적으로 소련을 걸어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이승만은 자신의 강경한 대소 경고가 북한에게 남침의 허가를 내주지 않은 이유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소련이 한국에의 개입으로 인해 비난받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궤뚫고 공격하였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이승만이 '한국의 안전은 미국의 안전과 직접 관계된다'면서 미국을 끌어들이고 '소련은 중국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하면 북한으로 하여금 즉시 남침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고 공격하여 소련을 끌어들임으로서 한국문제를 국제문제로 상승시키려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한국전쟁사 관련 국내 학자들 중 최고 권위자랄 수 있는 박명림 교수의 논문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 분은 진보 쪽 성향이시고 여러 글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의 인간성을 대단히 싫어하시는 분임을 참조하실 필요가 있는데 그럼에도 한국전쟁 전후로 이승만이 나름 일관적인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게 현재 한미동맹의 모습으로 이어짐..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며, 이 조약은 앞으로 우리를 번영케 할 것입니다.
- 이승만, 1953년 8월 8일 조약 최종안이 서울에서 가조인된 후 발언.
6.25 전쟁이 발발 후 3년을 채워 가는 상황에서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맥아더가 경질되고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미국 본토에서는 무의미한 전쟁 질질 끌지 말고 '휴전협정 하고 빨리 끝내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후 UN 연합군이 철수하면 잿더미만 남은 남한은 짧은 시간 내에 북한의 재침공으로 적화가 될 것이라고 판단, 1953년 6월 17일 당시 미국 브릭스 대사와의 회동에서 휴전 후에도 한국의 목숨을 지켜 줄 상호방위 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해외에 간섭을 하지 말자는 고립주의 방향으로 흘러가던 미국은 이승만의 제안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이승만은 6월 18일 약 25,000명의 반공 포로를 직권 석방시켰다. 이 조치에 크게 놀란 미국은 이승만을 '약속 위반자'라고 비난했고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는 건의안이 나오기도 했다.
이승만은 상호방위 약속을 해주지 않으면 휴전협상 주체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을 하겠다고 선언했으며 미국은 조약을 맺는 조건으로 휴전에 응할 것을 제시, 1953년 7월 휴전협상이 체결 되었다.
이후 동년 8월 3일 미국과 협상을 시작, 8월 8일 최종안이 서울에서 가조인 되었다. 이승만은 여기에 크게 기뻐하며 '이 조약으로 우리 후손들은 많은 혜택을 볼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6.25에 의한 공산화를 막은것도 이승만
한미동맹도 이승만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한것도 이승만...
친북단체가 이승만을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는게 당연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