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봄 2월에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를 갖추니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했다. ‘진한·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했다. ‘우리나라에 두 성인이 일어난 뒤 인사가 잘 닦이고 천시가 순조로워, 창고가 가득 차고 인민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낙랑·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임금께서는 겸허하게 저를 보내 우호를 닦으시니 이는 가히 예의를 넘어서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시니 이는 무슨 의도이십니까?’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호공을 돌아가게 해주었다. 예전에 중국인들이 진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다. 이들 중 마한 동쪽에 자리잡고 진한과 뒤섞여 산 경우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책망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조선의 유민들이 진한 6부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혹은 정월 15일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오르니 이를 거서간이라 했다. 그때 나이는 13세였으며, 나라 이름을 서나벌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 둘째는 돌산 고허촌, 셋째는 취산 진지촌(간진촌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 대수촌,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위만은 연과 제(齊)의 유민들을 모아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더니 마침내 고조선 전체를 차지하려고 꾀하였다. 위만은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한나라의 병사가 십도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고 하고는 갑자기 군사를 몰아 준왕을 쳐서 왕위를 빼앗고 도읍을 왕검성(王儉城)에 정했다. 기원전 2세기경, 많은 중국인들이 고조선으로 이주를 합니다.당시 중국이 혼란스러웠던 때를 틈타서 이주를 한것이죠.... 중국이 진한 교체기 때 유민들이 발생하여 고조선지역으로 이주해왔다
삼국지』는 진한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고역을 피하여 망명한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낙랑 사람을 아잔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아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라고 한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한 사람들은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떠나온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아잔’이라 불렀는데, 낙랑인들을 ‘아잔’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진한 사람들이 떠나 온 고향이 낙랑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잔’이라는 말에는 멀리 이국땅으로 망명한 사람들이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심정이 전해진다.
중국인들은 공자를 비롯해 귀족과 일반백성들까지 다투어 동이지역이 중국보다 살기 좋은곳었다는 깉고 와서 살기를 희망했다고 할수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