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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4-25 15:48
[한국사] 2. 고조선 제국과 고대 요동 끝판 정리
 글쓴이 : 아비바스
조회 : 532  

고조선(1).png


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南通齊、趙,東北邊胡。上谷至遼東,地踔遠,人民希,數被寇,大與趙、代俗相類,而民雕捍少慮,有魚鹽棗栗之饒。北鄰烏桓、夫餘,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 洛陽東賈齊、魯,南賈梁、楚。故泰山之陽則魯,其陰則齊。齊帶山海,膏壤千里,宜桑麻,人民多文綵布帛魚鹽。臨菑亦海岱之閒一都會也。其俗寬緩闊達,而足智,好議論,地重,難動搖,怯於眾鬬,勇於持刺,故多劫人者,大國之風也。其中具五民。 

연(燕) 역시 발해(渤海)와 갈석산(碣石山) 사이에 있는 도회지이다. 남쪽으로는 제(齊)와 조(趙)에 통하고, 동북쪽은 흉노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상곡(上谷)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는 지역은 아득히 멀어 인구가 적고 자주 침략을 당했으며, 조(趙)와 대(代) 지역의 풍속과 대체로 비슷하나, 백성들은 독수리처럼 사납지만 생각이 부족하고, 물고기·소금·대추·밤이 많이 생산된다. 

북쪽으로는 오환(烏桓)과 부여(夫餘)와 이웃해 있고, 동쪽으로는 예맥(穢貉), 조선(朝鮮), 진번(眞番)이 집결되어 있어 유리한 위치에 있다. 낙양(洛陽)은 동쪽으로 제(齊), 노(魯)와 교역하고, 남쪽으로 양(梁), 초(楚)와 교역을 한다. 태산의 남쪽은 노나라의 옛 땅이며 태산의 북쪽은 제나라의 옛 땅이기 때문이다.

제(齊) 땅은 산과 바다가 둘러싸여 있고 기름진 땅이 천 리에 이르며 뽕과 삼 농사에 적합하며, 백성들은 채색 비단, 직물, 물고기, 소금 등을 많이 생산한다. 임치(臨菑) 역시 바다와 태산 사이의 도회지이다. 그 풍속은 너그럽고 활달하며, 아는 것이 많고 토론을 좋아하며, 땅을 중시하여 쉽게 타지로 떠나지 않으며, 무리로 싸우는 것을 겁내지만 사람을 암살하는데 용감한 까닭에 남을 겁박하는 자가 많은 것은 큰 나라의 기풍이다. 제 땅에는 선비·농민·기술자·상인·병사들이 두루 산다.

- 사기, 화식열전




고조선(2).png


當是之時,秦晉為彊國。晉文公攘戎翟,居于河西圁、洛之閒,號曰赤翟、白翟。秦穆公得由余,西戎八國服於秦,故自隴以西有綿諸、緄戎、翟、獂之戎,岐、梁山、涇、漆之北有義渠、大荔、烏氏、朐衍之戎。而晉北有林胡、樓煩之戎,燕北有東胡、山戎。各分散居谿谷,自有君長,往往而聚者百有餘戎,然莫能相一。自是之後百有餘年,晉悼公使魏絳和戎翟,戎翟朝晉。後百有餘年,趙襄子踰句注而破并代以臨胡貉。其後既與韓魏共滅智伯,分晉地而有之,則趙有代、句注之北,魏有河西、上郡,以與戎界邊。其後義渠之戎筑城郭以自守,而秦稍蠶食,至於惠王,遂拔義渠二十五城。惠王擊魏,魏盡入西河及上郡于秦。秦昭王時,義渠戎王與宣太后亂,有二子。宣太后詐而殺義渠戎王於甘泉,遂起兵伐殘義渠。於是秦有隴西、北地、上郡,筑長城以拒胡。而趙武靈王亦變俗胡服,習騎射,北破林胡、樓煩。筑長城,自代并陰山下,至高闕為塞。而置雲中、鴈門、代郡。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筑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當是之時,冠帶戰國七,而三國邊於匈奴。其後趙將李牧時,匈奴不敢入趙邊。後秦滅六國,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眾北擊胡,悉收河南地。因河為塞,筑四十四縣城臨河,徙適戍以充之。而通直道,自九原至雲陽,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治之,起臨洮至遼東萬餘里。又度河據陽山北假中。

그 당시에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강국이었다. 진(晉)나라 문공은 융적(戎翟)을 하서의 은수와 낙수( 사이에 거주하도록 내쫓고 그들을 적적(赤翟)과 백적(白翟)으로 불렀다.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서융의 사신이었던 유여를 신하로 받아들여 서융의 여덟 나라를 복속시켰으며, 그 나라들은 농 지방의 서쪽에 있는 면저(綿諸), 곤융(緄戎), 적(翟), 원(獂) 등의 융족과 기산(岐山), 양산(梁山)과 경수(涇水), 칠수(漆水)의 북쪽에 있는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지(烏氏), 구연(胊衍) 등의 융족이었다.

그리고 진(晉)나라 북쪽에는 임호(林胡), 누번(樓煩) 등의 융족이 있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東胡), 산융(山戎)이 있었다. 이들은 각자 산의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자신들의 군장(君長)이 있었다. 종종 1백여 개의 융족의 부락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경우는 있었지만 서로 통일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진(晉)나라 도공(悼公)이 위강(魏絳)을 융적에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맺음으로써 융적들은 진(晉)나라에 조회하게 되었다. 또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조양자(趙襄子)가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대(代)를 쳐부수고 그 땅을 병합하고 
호(胡)와 "맥(貉)" 에까지 이르렀다. => 맥() = 예맥(濊貊


 그 후 조양자는 진나라의 한강자(韓康子), 위환자(魏桓子)와 함께 지백(智伯)을 멸하고 진(晉)나라 영토를 나누어 가졌는데, 즉 조(趙)나라는 대(代)와 구주산 북쪽을 차지하고, 위나라는 하서(河西)와 상군(上郡)을 차지해 융족과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 후에 의거(義渠)의 융족들은 성곽을 쌓고 스스로 지키고 있었으나 진(秦)나라가 점차 잠식해 들어가 진(秦)나라 혜왕(惠王) 때에 이르러 마침내 의거의 25개 성을 빼앗았다. 또 혜왕은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의 서하(西河)와 상군(上郡)을 전부 진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진(秦)나라 소왕(昭王) 때 의거의 융왕(戎王)이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와 사통해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선태후는 의거의 융왕을 속여 감천궁(甘泉宮)으로 유인하여 그를 죽이고, 이어 군사를 일으켜 의거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래서 진나라는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을 차지하고 거기에 장성을 쌓아 융적의 침입을 막았다. 

한편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은 조나라의 풍속을 개혁해 군사들에게 호복을 입고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연습시켜 북쪽의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무찔렀다. 장성을 쌓고 대(代)에서부터 음산(陰山)산맥 기슭을 따라 고궐(高闕)에 이르는 지역을 요새로 만들었다. 조나라는 그 땅에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代) 등 군(郡)을 설치했다. 그 후에 연나라의 명장 진개(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켰으며, 이때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왕 영정을 암살하려던 진무양(秦舞陽)은 진개의 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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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역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았다.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등에 
군을 설치하여 북방 융적을 방어했다. 

당시에는 문명과 예의와 풍속이 발달한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있었는데 그 중 세 나라가 흉노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 후 조나라 장군 이목(李牧)이 있는 동안은 흉노가 감히 조나라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다. 그 뒤에 진(秦)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고, 시황제(始皇帝)는 몽염(蒙恬)에게 10만 명의 군사를 주어 북쪽의 흉노를 공격하여 황하 이남의 땅을 모두 진나라의 영토로 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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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황하를 이용해 요새를 만드는 한편, 황하의 강변을 따라 44곳에 현성(縣城)을 축조하고, 죄를 짓고 변방을 지키는 병사를 옮겨와 현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직도(直道)를 만들어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에 이르게 하였으며, 또한 산의 주변을 이용하여 험준한 구릉과 계곡에 치수(治水)하여 성의 해자를 만들고 임조(臨洮)를 기점으로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에 달하는 장성을 쌓았다. 
또 황하를 건너가 양산(陽山)과 북가(北假) 일대를 점거했다.

- 사기, 흉노열전






蒙恬者,其先齊人也。恬大父蒙驁,自齊事秦昭王,官至上卿。秦莊襄王元年,蒙驁為秦將,伐韓,取成皋、滎陽,作置三川郡。二年,蒙驁攻趙,取三十七城。始皇三年,蒙驁攻韓,取十三城。五年,蒙驁攻魏,取二十城,作置東郡。始皇七年,蒙驁卒。驁子曰武,武子曰恬。恬嘗書獄典文學。始皇二十三年,蒙武為秦裨將軍,與王翦攻楚,大破之,殺項燕。二十四年,蒙武攻楚,虜楚王。蒙恬弟毅。 始皇二十六年,蒙恬因家世得為秦將,攻齊,大破之,拜為內史。秦已并天下,乃使蒙恬將三十萬眾北逐戎狄,收河南。筑長城,因地形,用制險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於是渡河,據陽山,逶蛇而北。暴師於外十餘年,居上郡。是時蒙恬威振匈奴。始皇甚尊寵蒙氏,信任賢之。而親近蒙毅,位至上卿,出則參乘,入則御前。恬任外事而毅常為內謀,名為忠信,故雖諸將相莫敢與之爭焉。

몽염(蒙恬)의 선조는 제나라 사람이다. 몽염의 할아버지 몽오는 제나라에서 진나라로 와 진 소양왕을 섬기며 관직이 상경에 이르렀다. 진 장양왕 원년(기원전 249년), 몽오가 진나라 장수가 되어 한나라를 정벌하여 성고와 형양을 빼앗고 삼천군을 설치했다. 장양왕 2년(기원전 248년), 몽오가 조나라를 공격해 37개의 성을 빼앗았다. 진 시황 3년(기원전 244년), 몽오가 한나라를 공격해 13개의 성을 빼앗았다. 진 시황 5년,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해 20개의 성을 빼앗고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진 시황 7년(기원전 240년), 몽오가 죽었다. 몽오의 아들은 몽무이며, 몽무의 아들은 몽염이다. 몽염은 일찍이 소송에 관한 기록과 재판에 관한 문서를 담당했다. 진 시황 23년(기원전 224년), 몽무가 진나라의 비장군이 되어 왕전과 함께 초나라를 공격해 크게 무찌르고 항연을 죽였다. 진 시황 24년(기원전 223년), 몽무가 초나라를 공격해 초왕을 사로잡았다. 몽염의 동생은 몽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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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시황 26년(기원전 221년), 몽염은 집안 대대로 장수를 지냈기에 진나라 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공격해 크게 무찌르고 궁중의 일을 기록하는 내사(內史)로 임명되었다. 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하자 이에 몽염에게 3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융적(戎狄)을 쫓아내게 하여 황하 남쪽 땅을 점거했다. 장성을 쌓으며 지형에 따라서 험난한 요새를 만들었으며, 서쪽 임조(臨洮)에서 동쪽 요동(遼東)까지 길이가 일만여 리를 뻗어갔다.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을 거점으로 하여 구불구불 북쪽으로 이어갔다. 비바람을 맞으며 외지를 10여 년간 전전하다 상군(上郡)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 몽염의 위세가 흉노(匈奴)에 떨쳤다. 진 시황제는 몽씨 일족을 매우 존중하고 총애하며 신임했으며 현명하다고 여겼다. 몽의와 친근하게 지내 몽의의 지위가 상경에 이르렀고, 출궁 시에는 수레를 함께 탔고 입궁해서는 곁에 두었다. 몽염은 궁 밖의 일을 맡고 몽의는 언제나 궁 안에서 계책을 세우며 충직하고 믿음직스럽다는 명성을 얻었으므로 비록 장수나 재상들도 감히 이들과 다투려 하지 않았다. 

- 사기열전, 몽염열전





六年,秦滅東(西)周,置三川郡。七年,秦拔趙榆次三十七城,秦置大原郡。九年,秦王政初即位。十年,趙使廉頗將攻繁陽,拔之。趙孝成王卒,悼襄王立。使樂乘代廉頗,廉頗不聽,攻樂乘,樂乘走,廉頗奔大梁。十二年,趙使李牧攻燕,拔武遂、方城。劇辛故居趙,與龐煖善,已而亡走燕。燕見趙數困于秦,而廉頗去,令龐煖將也,欲因趙獘攻之。問劇辛,辛曰:「龐煖易與耳。」燕使劇辛將擊趙,趙使龐煖擊之,取燕軍二萬,殺劇辛。秦拔魏二十城,置東郡。十九年,秦拔趙之鄴九城。趙悼襄王卒。二十三年,太子丹質於秦,亡歸燕。二十五年,秦虜滅韓王安,置潁川郡。二十七年,秦虜趙王遷,滅趙。趙公子嘉自立為代王。燕見秦且滅六國,秦兵臨易水,禍且至燕。太子丹陰養壯士二十人,使荊軻獻督亢地圖於秦,因襲刺秦王。秦王覺,殺軻,使將軍王翦擊燕。二十九年,秦攻拔我薊,燕王亡,徙居遼東,斬丹以獻秦。三十年,秦滅魏。 三十三年,秦拔遼東,虜燕王喜,卒滅燕。是歲,秦將王賁亦虜代王嘉。 

연왕 희 6년(기원전 249년), 진(秦)나라가 동주(東周)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삼천군(三川郡)을 두었다. 연왕 희 7년(기원전 248년),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유차(楡次) 등 37개 성을 공략해서 태원군(太原郡)을 두었다. 연왕 희 9년(기원전 246년), 진왕(秦王) 영정(嬴政)이 즉위했다. 연왕 희 10년(기원전 245년), 조나라가 염파를 보내 위나라의 번양(繁陽)을 공격해 빼앗았다. 조나라 효성왕(孝成王)이 죽고 도양왕(悼襄王)이 즉위했다. 도양왕이 악승(樂乘)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게 했으니 염파가 따르지 않고 악승을 공격하자 악승은 달아났고 염파도 대량(大梁)으로 달아났다. 

연왕 희 12년(기원전 243년), 조나라가 이목(李牧)에게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무수(武遂)와 방성(方城)을 빼앗았다. 극신(劇辛)은 예전에 조나라에 있을 때 방난(龐煖)과 친하게 지냈는데 얼마 뒤 연나라로 도망해 왔다. 연나라는 조나라가 진나라에게 여러 차례 곤경을 당하고, 염파도 떠나버려 방난을 대장으로 삼은 것을 보고 피폐해진 틈을 타 조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극신에게 묻자 극신이 대답했다. “방난은 상대하기 쉽습니다.” 연나라는 극신을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며, 조나라는 방난에게 맞아 싸우게 하여 연나라의 군대 2만을 물리치고 극신(劇辛)을 죽였다. 

진(秦)나라가 위(魏)나라의 성 20개를 빼앗고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연왕 희 19년(기원전 236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땅 업(鄴)의 9개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조나라 도양왕(悼襄王)이 죽었다. 연왕 희 23년(기원전 232년), 태자 단(丹)이 진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도망쳐 연나라로 돌아왔다. 연왕 희 25년(기원전 230년), 진나라가 한왕(韓王) 안(安)을 포로로 붙잡고 한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영천군(穎川郡)을 두었다. 연왕 희 27년(기원전 228년), 진나라가 조나라 왕 천(遷)을 포로로 붙잡고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조나라의 공자 가(嘉)가 대(代)에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연나라는 진나라가 머지않아 6국을 멸망시키고, 진나라의 군대가 역수(易水)까지 밀어닥쳐 화가 장차 연나라에 미칠 것을 알았다. 태자 단(丹)은 몰래 장사 20명을 기르고 형가(荊軻)를 보내 독항(督亢)의 지도를 진왕에게 바치면서 기습적으로 진왕을 찌르게 했다. 진왕이 이를 알아채고 형가를 죽이고는 장군 왕전(王翦)을 보내 연나라를 공격했다. 연왕 희 29년(기원전 226년), 진나라가 연나라의 도성 계(薊)를 빼앗자, 연왕은 요동(遼東)으로 도망쳐서는 태자 단의 목을 베어 진나라에 바쳤다. 연왕 희 30년(기원전 225년), 진나라가 위(魏)나라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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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왕 희 33년(기원전 222년), 진나라가 요동을 빼앗고, 연왕 희(喜)를 사로잡아 마침내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해에 진나라의 장수 왕분(王賁)도 조나라 대왕(代王) 가(嘉)를 사로잡았다. 







行從直道至咸陽,發喪。太子胡亥襲位,為二世皇帝。九月,葬始皇酈山。始皇初即位,穿治酈山,及并天下,天下徒送詣七十餘萬人,穿三泉,下銅而致槨,宮觀百官奇器珍怪徙臧滿之。令匠作機弩矢,有所穿近者輒射之。以水銀為百川江河大海,機相灌輸,上具天文,下具地理。以人魚膏為燭,度不滅者久之。二世曰:「先帝後宮非有子者,出焉不宜。」皆令從死,死者甚眾。葬既已下,或言工匠為機,臧皆知之,臧重即泄。大事畢,已臧,閉中羨,下外羨門,盡閉工匠臧者,無復出者。樹草木以象山。 二世皇帝元年,年二十一。趙高為郎中令,任用事。二世下詔,增始皇寢廟犧牲及山川百祀之禮。令群臣議尊始皇廟。群臣皆頓首言曰:「古者天子七廟,諸侯五,大夫三,雖萬世世不軼毀。今始皇為極廟,四海之內皆獻貢職,增犧牲,禮咸備,毋以加。先王廟或在西雍,或在咸陽。天子儀當獨奉酌祠始皇廟。自襄公已下軼毀。所置凡七廟。群臣以禮進祠,以尊始皇廟為帝者祖廟。皇帝復自稱『朕』。」二世與趙高謀曰:「朕年少,初即位,黔首未集附。先帝巡行郡縣,以示彊,威服海內。今晏然不巡行,即見弱,毋以臣畜天下。」春,二世東行郡縣,李斯從。到碣石,并海,南至會稽,而盡刻始皇所立刻石,石旁著大臣從者名,以章先帝成功盛德焉:二世與趙高謀曰:「朕年少,初即位,黔首未集附。先帝巡行郡縣,以示彊,威服海內。今晏然不巡行,即見弱,毋以臣畜天下。」春,二世東行郡縣,李斯從。到碣石,并海,南至會稽,而盡刻始皇所立刻石,石旁著大臣從者名,以章先帝成功盛德焉:皇帝曰:「金石刻盡始皇帝所為也。今襲號而金石刻辭不稱始皇帝,其於久遠也如後嗣為之者,不稱成功盛德。」丞相臣斯、臣去疾、御史大夫臣德昧死言:「臣請具刻詔書刻石,因明白矣。臣昧死請。」制曰:「可。」遂至遼東而還。


일행은 직도(直道)를 따라 함양에 도착한 뒤 상을 알렸다. 태자 호해가 제위를 이어받아 2세 황제가 되었다. 이해 9월에 시황을 여산(酈山)에 안장했다. 진 시황이 처음 즉위하자 여산에 무덤을 파는 공사를 시작했으며,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는 전국에서 이송되어 온 70여 만 명의 죄수들로 묘를 깊이 파고 외관(外棺)에 이르도록 구리 용액으로 공간을 메우고, 궁궐과 백관의 모습과 진기한 기물과 보물 괴석들을 옮겨 가득 채웠다. 장인에게는 화살이 자동으로 발사되는 기계장치를 만들게 하여 도굴하려고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발사되게 했다. 수은으로 온갖 하천과 강과 바다를 만들어 기계장치로 계속 흐르도록 했으며, 천장에는 천문도를 갖추고 바닥에는 지도를 갖추었다. 인어(人魚) 기름으로 양초를 만들어 오래도록 꺼지지 않게 했다. 

2세 황제가 말하길 “선제의 후궁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들을 궁궐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 영을 내려 모두 순장시켰으니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장례가 끝나자 어떤 자가 말하기를 ‘장인들이 기계장치를 만들고 묘에 보관한 보물들을 모두 알고 있으니 보물들이 귀중한 것이 많아 누설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성대한 장례가 끝나고 보물들이 모두 매장된 후 묘로 가는 중간 문을 폐쇄하고 바깥문도 닫아 보물을 보관한 장인들이 모두 패쇄되어 아무도 다시 나오지 못하게 했다. 묘의 위에 풀과 나무를 심어 산처럼 만들었다.

2세 황제 원년(기원전 209년)에 2세 황제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조고를 낭중령으로 삼아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게 했다. 2세가 조서를 내려 시황제의 침묘에 바치는 제사용 가축과 산천에 올리는 모든 제사의 예물을 늘리게 했다. 신하들에게 명해 시황제의 묘호를 추존하는 문제를 상의하게 했다. 신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옛날에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를 두어 만세토록 훼손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지금 시황(始皇)의 사당은 최상인 극묘(極廟)로 전국에서 모두 공물을 바치고 희생(犧牲)을 늘려 모든 예를 다 갖추고 있는 까닭에 더할 것이 없습니다. 선왕의 사당은 서옹에도 있고 함양에도 있습니다. 천자는 예법에 따라 응당 시황제의 사당에만 직접 술을 올려야 합니다. 진 양공 이하의 묘는 헐어 없애야 합니다. 모두 7묘로 설치해야합니다. 신하들에게 예에 따라서 제사를 올리게 하고, 시황제의 사당을 높여 황제의 조묘로 높이십시오. 황제께서는 다시 스스로를 ‘짐(朕)’이라 칭하십시오.” 

2세 황제가 조고와 의논하며 말했다. “짐이 나이가 어리고 막 즉위한 터라 백성들이 아직 복종하지 않고 있소. 선제께서는 군현을 순시하며 강함을 과시하시어 위세로 천하를 복종시켰소. 지금 순행도 않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은 약함을 보여 천하를 다스릴 길이 없을 것이오.” 이듬해 봄에 2세 황제가 동쪽으로 군현을 순시하러 나섰고 이사(李斯)가 수행했다. 갈석산에 이른 뒤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회계에 이르러 시황제가 세운 비석에 모두 글자를 새기고 비석 옆면에는 수행한 대신들의 이름을 덧붙여 새겨서 선제의 공적과 성덕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2세 황제가 말했다. “금석에 새긴 것은 모두 시황제께서 하신 일들이오. 지금 황제라는 호칭을 이어받고도 금석에다 시황제를 칭하지 않으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마치 후대 자손이 한 것처럼 되어 시황제의 공적과 성덕을 칭송할 수 없게 될 것이오.” 승상 이사와 풍거질, 어사대부 덕(德)이 죽음을 무릅쓰며 청했다. “신들은 황제의 조서를 비석에다 모두 새겨 그 연유를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하길 청하옵니다. 신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옵니다.” 2세 황제는 “그렇게 하시오.”하며 명을 내렸고, 2세 황제는 요동으로 갔다. 

- 사기, 진시황본기






漢之元年四月,諸侯罷戲下,各就國。項王出之國,使人徙義帝,曰:「古之帝者地方千里,必居上游。」乃使使徙義帝長沙郴縣。趣義帝行,其群臣稍稍背叛之,乃陰令衡山、臨江王擊殺之江中。韓王成無軍功,項王不使之國,與俱至彭城,廢以為侯,已又殺之。 臧荼之國,因逐韓廣之遼東,廣弗聽,荼擊殺廣無終,并王其地。田榮聞項羽徙齊王市膠東,而立齊將田都為齊王,乃大怒,不肯遣齊王之膠東,因以齊反,迎擊田都。田都走楚。齊王市畏項王,乃亡之膠東就國。田榮怒,追擊殺之即墨。榮因自立為齊王,而西殺擊濟北王田安,并王三齊。榮與彭越將軍印,令反梁地。陳餘陰使張同、夏說說齊王田榮曰:「項羽為天下宰,不平。今盡王故王於醜地,而王其群臣諸將善地,逐其故主趙王,乃北居代,餘以為不可。聞大王起兵,且不聽不義,願大王資餘兵,請以擊常山,以復趙王,請以國為捍蔽。」齊王許之,因遣兵之趙。陳餘悉發三縣兵,與齊并力擊常山,大破之。張耳走歸漢。陳餘迎故趙王歇於代,反之趙。趙王因立陳餘為代王。是時,漢還定三秦。項羽聞漢王皆已并關中,且東,齊、趙叛之:大怒。乃以故吳令鄭昌為韓王,以距漢。令蕭公角等擊彭越。彭越敗蕭公角等。漢使張良徇韓,乃遺項王書曰:「漢王失職,欲得關中,如約即止,不敢東。」又以齊、梁反書遺項王曰:「齊欲與趙并滅楚。」楚以此故無西意,而北擊齊。徵兵九江王布。布稱疾不往,使將將數千人行。項王由此怨布也。漢之二年冬,項羽遂北至城陽,田榮亦將兵會戰。田榮不勝,走至平原,平原民殺之。遂北燒夷齊城郭室屋,皆阬田榮降卒,系虜其老弱婦女。徇齊至北海,多所殘滅。齊人相聚而叛之。於是田榮弟田橫收齊亡卒得數萬人,反城陽。項王因留,連戰未能下。

4.png

한(漢) 원년(기원전 206년) 4월, 제후들이 휘하 군사를 철수시켜 각자의 봉국으로 떠났다. 항왕은 함곡관을 나와 자신의 봉국으로 와서 사람을 보내 의제(義帝)를 옮기게 하면서 말했다. “옛날 제왕들은 땅이 사방 천 리에 지나지 않았고 반드시 강의 상류에 기거했습니다.” 이에 사신을 보내 의제(義帝)를 장사(長沙)의 침현(郴縣)으로 옮기게 했다. 의제의 행차를 재촉하자 의제의 신하들이 점차 의제를 배반하자 이에 은밀히 형산왕과 임강왕에게 장강 가에서 의제를 죽이도록 명했다. 한왕 성(韓王 成)은 전공이 없어 항왕은 그를 자기 나라로 가지 못하게 하고 함께 팽성(彭城)으로 데려갔다가 왕을 폐하여 후(侯)로 삼았다가 곧 죽였다. 장도(臧荼)는 자기 나라로 가서 한광(韓廣)을 요동으로 내쫓으려 했으나 한광이 말을 듣지 않자 장도는 한광을 무종(無終)에서 쳐 죽이고 그 땅을 자기 나라에 병합하여 다스렸다. 


전영(田榮)은 항우가 제왕 전불(田市)을 교동(膠東)으로 옮기고 제나라의 장수 전도(田都)를 제나라 왕으로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제왕 전불을 교동으로 보내려 하지 않고 제나라를 점거한 뒤 반란을 일으켜 전도(田都)를 맞이하여 싸웠다. 전도는 초나라로 도망쳤다. 제왕 전불은 항왕이 두려워 교동으로 도망가 봉국에 따랐다. 

전영이 화가 나서 전불을 추격하여 즉묵(即墨)에서 죽였다. 전영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서쪽으로 제북왕 전안(田安)을 쳐서 죽이고 삼제(三齊)의 땅을 병합한 왕이 되었다. 전영은 팽월(彭越)에게 장군의 도장을 주고 양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진여는 은밀히 장동(張同), 하열(夏說)을 보내 제왕 전영에게 권하여 말했다. “항우가 천하를 주재하는 것은 공평치 않습니다. 

지금 이전의 왕에게는 모두 나쁜 땅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자기 신하들과 장수들을 좋은 땅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또 예전의 군주인 조왕(趙王)을 내쫓아 북방 대(代) 땅에 거주하게 했으니 저 진여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군대를 일으키셨고 또 불의를 따르지 않는다 하시니 원컨대 대왕께서 저 진여에게 병사를 지원해주시어 상산을 공격하게 하여 조왕을 회복시키고 제나라의 방패로 삼으십시오.” 제왕은 이를 허락하고 군사를 조나라로 보냈다. 

진여는 세 개 현의 군사를 모두 징발하여 제나라와 힘을 합쳐 상산을 공격하여 대파했다. 장이(張耳)는 도주하여 한(漢)나라에 귀의했다. 진여가 이전의 조왕인 헐을 대 땅에서 맞이하여 조나라로 돌아오게 했다. 조왕은 진여를 대왕(代王)으로 임명했다. 

이 때 한왕 유방은 군사를 돌려 삼진(三秦)을 평정했다. 항우는 한왕이 관중을 모두 병탄한 뒤 동진하려 하고 제나라와 조나라가 배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했다. 이에 전에 오현의 현령이었던 정창(鄭昌)을 한(韓)왕으로 삼아 한(漢)나라를 막게했다. 소공(蕭公) 각(角) 등에게는 팽월을 치게 했다. 팽월이 소공 각 등을 물리쳤다. 

한(漢)나라는 장량에게 한(韓)나라를 순시하게 한 뒤 항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 한왕은 직책을 잃었고, 관중(關中)을 얻으면 약속대로 공격을 멈추고 감히 동쪽으로 더 나가지 않으려 하오.” 또 제나라와 양(조)나라의 반란을 알리는 편지를 항왕에게 보냈다. “제나라가 조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멸망시키려 합니다.” 초나라는 이 때문에 서쪽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북쪽 제나라를 쳤다. 항왕이 구강왕(九江王) 경포(黥布)의 군대를 징발했다. 

경포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고 장수에게 수 천 명을 이끌고 가도록 했다. 항왕은 이 때문에 경포를 원망하게 되었다. 한(漢) 2년 겨울, 항우가 북진해 성양(城陽)에 이르자, 전영 역시 군대를 이끌고 나가 맞싸웠다. 전영이 이기지 못하고 평원(平原)으로 달아나자 평원의 백성들이 그를 죽였다. 항우가 이에 북진해 제나라의 성곽과 집들을 불 지르고 항복한 전영의 병사들을 생매장하고 노약자와 부녀들은 묶어 포로로 삼았다. 제나라를 거쳐 북해까지 토벌하니 대부분이 부서지고 없어졌다. 

제나라 사람들은 다시 사람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이 제나라의 도망친 병사 수만 명을 거두어 성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항왕이 이곳에 머무르며 잇따라 싸웠으나 성양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 사기, 항우본기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遼東太守即約滿為外臣,保塞外蠻夷,無使盜邊;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勿得禁止。以聞,上許之,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真番、臨屯皆來服屬,方數千里。傳子至孫右渠,所誘漢亡人滋多,又未嘗入見;真番旁眾國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元封二年,漢使涉何譙諭右渠,終不肯奉詔。何去至界上,臨浿水,使御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即渡,馳入塞,遂歸報天子曰「殺朝鮮將」。上為其名美,即不詰,拜何為遼東東部都尉。朝鮮怨何,發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擊朝鮮。其秋,遣樓船將軍楊仆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右渠發兵距險。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敗散,多還走,坐法斬。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右渠城守,窺知樓船軍少,即出城擊樓船,樓船軍敗散走。將軍楊仆失其眾,遁山中十餘日,稍求收散卒,復聚。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自前。天子為兩將未有利,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恐兩將詐殺臣;今見信節,請服降。」遣太子入謝,獻馬五千匹,及饋軍糧。人眾萬餘,持兵,方渡浿水,使者及左將軍疑其為變,謂太子已服降,宜命人毋持兵。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遂不渡浿水,復引歸。山還報天子,天子誅山。


조선(朝鮮)의 왕 위만(衛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당초 연나라의 전성기 때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고 변방에 성루를 쌓았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조선은 요동군(遼東郡) 바깥 변경에 속했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그곳이 멀어 지키기가 어려워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를 정하고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옷을 입고는 동쪽으로 달아나 변경을 나와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옛 비어 있는 땅 상하장(上下鄣)에 거주하면서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와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王險:왕검)을 도읍으로 정했다. 

마침 효혜(孝惠)황제와 고후(高后) 때에 이르러 천하가 비로소 안정을 찾자 요동 태수가 위만이 한나라 조정의 외신(外臣)이 될 것을 약속받고 요새 밖의 만이(蠻夷)를 보호하게 하고 변방을 노략질하지 않도록 할 것이며, 만이의 군장들이 한나라로 들어와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면 금지하지 못하게 했다. 이를 보고하니 황제가 허락했고, 이로써 위만은 그 땅의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부근의 작은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땅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아들에게 왕위가 전해졌다가 손자 우거(右渠)에게 이르러 한나라에서 도망한 사람들을 유인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고 또 천자를 알현한 적도 없었다. 진번 주위의 여러 나라들이 상서를 하러 천자를 알현하려 하면 또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년), 한(漢)나라는 섭하(涉何)를 보내 우거(右渠)를 꾸짖고 타일렀으나 우거는 끝내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가 떠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에 이르렀을 때 마부로 하여금 섭하를 전송하던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게 하고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말을 달려 들어갔으며, 돌아와 천자에게 보고하기를 “조선의 장수를 죽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천자는 그 명분 때문에 꾸짖지 않고 섭하를 요동의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임명했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해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습격하여 죽였다.

천자는 죄수들을 모집하여 조선을 공격했다. 그 해 가을(기원전 109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해 제 땅에서 출발해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고, 병사 5만의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군을 나와 우거를 토벌하게 했다. 우거는 군사를 동원하여 험준한 곳에서 한나라 군대에 저항했다. 좌장군의 중급 군관 다(多)는 요동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공격했으나 패해 흩어져 여러 명과 달아나 돌아왔으나 그는 군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누선장군은 제(齊) 땅의 군사 7천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에 이르렀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음을 염탐해 알아내고는 즉시 성을 나와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의 군사들은 패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장군 양복은 자신의 군대를 잃고 산속에 10여 일 숨어 있다가 점차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다시 모았다. 좌장군 순체는 조선의 패수 서쪽의 조선의 군대를 공격했으나 돌파하여 전진할 수 없었다. 

천자는 두 명의 장군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고 여기고 위산(衛山)을 보내 군사적 위력으로 우거를 가서 타이르도록 했다. 우거는 사신을 만나자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며 말했다. “항복을 원했으나 두 장군이 신을 속여 죽일까 두려웠습니다. 지금 믿을 수 있는 부절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는 태자를 한나라로 보내 사죄하게 하는 한편 말 5천 필을 바치고 아울러 군량을 제공하기로 했다. 조선의 백성 만여 명이 무기를 들고 막 패수를 건너려 할 때, 사신과 좌장군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무기를 지니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태자 역시 한나라 사신과 좌장군이 자신을 속여 죽일까 의심이 되어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백성을 이끌고 되돌아 왔다. 위산이 돌아가 천자가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죽였다.

- 사기. 조선열전


------------------------------------- 최종 결말 -------------------------------------


사기의 기록을 조합해 본 결과, 고조선, 부여, 진번과 같은 고대 예맥족 국가들이 춘추시대 부터 중원에 알려질 정도로 위협적인 세력이었고 대륙을 빈번히 침공하여 약탈했음을 알 수 있으며, 예맥과 인접한 연나라가 가장 큰 피해자였음을 알 수 있다. 

전국시대에 연소왕에게 비록 조선의 요동을 강탈 하였으나, 연진장성, 조-진장성 북으로 맥족이 활동했던 것을 보면, 예맥계 위상이 대단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중원에 군현이 세워지고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구체적인 기록과 달리 요동은 장성만 쌓았다는 기록 진나라 - 한나라 시대 까지 답습만 되었을 뿐 "실질적인 지배" 를 했는지 알 수 없다. 



그 근거로는 2가지가 있다. 


1. 한광은 진나라 혼란기를 틈타, 조왕이자 연왕이 된 인물이다. 
   그가 왜 항우에게 반기를 들며 요동으로 가지 않은 것일까? 

--> 항우에게 대항할 정도로  요동세력이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2. 조선열전에서 요동의 밖에 고조선이 있다고 강조한 점. 
   비왕과 장이 시해 당한 이후, 섭하를 요동도위부에 앉힌 점. 
   우거왕이 요동을 치고 섭하를 시해한 점.
   한나라 출정을 굳이 "요동" 에서 출정했다고 강조한 점.  
   1년이 지났음에도 고조선을 정복하지 못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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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바스" 역사 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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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폰 24-04-25 19:13
   
오! 짝퉁 아디다스 '아비바스' ... 오늘도 하나 올렸네.
고마워...잠시 심심할 때 너님이랑 말장난하며 시간 보낼 수 있게 되어서....

그런데 읽다 보니...좀 황당해...물론 너님은 황당하지 않겠지만...너님의 시각을 보니...사기를 나름대로 종합해 본 결과 우리 조상이 약탈자라는 얘기를 하고자 했던건 같은데? 도대체 누구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나 모르겠네?

아니.... 예맥과 인접한 연나라가 가장 큰 피해자? 정말 꼴값도 가지가지 하네. 그러니까 연나라 놈들은 피해자고 우리 조상인 예맥은 가해자다 그 얘기네... 이렇게 자기 조상(아닌가? 너님은 중국놈인가?)을 까는 것을 보니 딱 후레자식 같기도 하네

이런 식으로 글을 푸니 내게 중뽕 소리를 듣는거야 ... 그리고 도대체 어느 사서에 어디에 맥이 당시 중국을 약탈했다고 나와있어??? 설사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너님이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걸러서 봐야지... 별로 있지도 않은 내용을 기억해서 우리 조상님을 약탈자니 뭐니 하며 글을 쓰면 안되지 않나?

이런 걸 보면 의식있는 사대주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설픈 중뽕은 맞는 듯하고..

그리고 너님의 결론... 내가 연진장성 같은 것을 본 적이 없어 얘기하기 그렇기는 하지만... 조나라와 진나라 북쪽에 맥족이 활동했다는 것과 예맥계 위상이 대단했음을 시사한다는 것도...그냥 논리도 없는 비약 아닌가?

결국 너님도 아무 출처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 같은데 ... 글쎄 너님이 인용한 그 어디에도 예맥의 위상이 대단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안 보이는데...왜 그런 소리를 하지...조상님을 약탈자니 뭐니 하다가 위상이 대단했다는 것은 또 뭐임? 약탈자로 위상이 대단했다고 얘기하고 싶었던거임?

어쨌든 상상력도 부족하고 자료없이는 글을 못쓴다고 어제 그렇게 얘기해놓고서는 상상력 그 이상의 비약도 엄청 잘 하는구먼...

어쨌든 한광이든 누구든 남의 나라 필부 행적까지 잘 아고 그 인간 들의 심리까지 분석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중뽕 내지 그 기질이 다분한 듯 ... 사서에 나온 몇 줄 글을 가지고 소설 캐릭터도 아닌 남의 나라 옛날 사람 들의 심리까지 분석하며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면 뭐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한광인지 뭔지가 요동세력이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하는 너님의 추측이 너님이 내리는 결말의 근거다 이거네? 너님의 추측은 자료 정도의 가치가 있는 근거가 되고 남의 생각이나 가설은 그냥 상상력? 이건 내로남불 급도 아닌 듯

너님이 그린 지도의 위치가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사서기록에 의거한다면...고조선이 진번이나 임둔을 흡수하고, 고조선이 한에 패한 후 진번군과 임둔군 그리고 그 후 낙랑의 남부도위나 동부도위로 전환되는 것을 함께 고려하면 그 위치나 크기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몰라?

즉, 몇 권 안 되는 사서만 보려고 하지말고 지도를 펴놓고 지형도 고려하고 면적이나 방위도 고려해서 얘기해야 하는거임...그러다가 사서의 내용이 안 맞으면 그 내용 자체를 의심도 해야하는거지...그런 의심을 상상력으로 호도하고 없는 자료 찾는다고 역사적 시각이 넓어지는게 아니걸랑

어제도 댓글을 달았지만... 장황하게 copy & paste를 하고 난 다음 결론을 보면 관련이 별로 없어...열심히 긁어다가 붙여놓으면 어설프게 내린 너님의 결론이나 추측이 그럴 듯 해 보일 것 같아서 그러는가?

너님은 먼저 두괄식으로 기술하는 것도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 너님처럼 장황하게 자료 긁어다 붙이는 사람은 먼저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에 적합한 것을 인용하는 식으로 써야 욕 안 얻어먹음... 너님의 글을 보면 장황하든 말든 대충 비슷할 것 같은 것을 가져다가 포스트 도배를 한 다음 대충 그리고 어설프게 결론을 내리는 것 같은데 ... 너님 글이 논문이 아니라서 다행이지...만약 이걸 논문같이 썼다가는 매일같이 빠꾸 맞을 듯...

어쨌든 너님은 얼치기 중뽕이고...짝퉁 아디다스 '아비바스'^^

내가 장황하게 글을 쓰는 것은 너님이 읽기를 기대하는게 아니고...그냥 너님 글의 문제점을 트집잡아 만천하(^^) ... 그래봤자 백명 내외가 보는 가생이 회원 들에게 알리고자 함... 너님이 어설픈 중뽕이라고 씹다보니 나도 너님 수준으로 욕은 얻어먹겠지만...그래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듯...최소한 너님 덕에 잠시 한가한 시간 소일할 수 있어서~~
     
아비바스 24-04-25 19:19
   
폰짱~~

오늘도 악플을 달아줬네~~

중국 사료 쓴다고 중뽕이라니 ㅋㅋ

너처럼 선동과 날조, 비난과 조롱으로 승부 봐야 하는데~~


나는 역사 기록을 쓰니깐 불편했나보네~~

폰짱 오늘도 화이팅~!
          
윈도우폰 24-04-25 20:57
   
이런 거는 선플이지... 좀 모자라는 너님을 글 제대로 쓰라고 인도해 주는 것인데...이런 것을 악플이라고 하면...그건 너님의 피해망상증이야.

너님의 문제점 지적 해줬잖어... 너님은 우리 조상을 중국을 약탈했다고 썼고 중국 연나라가 우리 조상한테 피해를 입었다고 글을 써놓은 것에 대해 너님을 지적한건데...그게 왜 선동이나고 날조고 비난이야?

조롱은 맞어..너님 자체는 조롱 대상이니까....그건 너님이 쓴 글 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조롱받기 위해 태어난게 너님인 듯 하니...

계속 교정해 주려고 하지만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어둡짢게 역사기록같은 소리하지 말고... 글을 쓸 때는 주제의식! 바로 주제를 갖고 쓰라고... 도대체 주장하는 내용은 쥐뿔도 없이 긁어다가 같다 붙여놓고...무슨 역사기록을 썼다고 해? 그런 식으로 사람 들을 호도하면 안되지! 어제도 야그해 줬는데...그건 기망행위이고...이런 것은 사기꾼이나 다름없다고

그리고 너님 왈 역사적 기록이란곤 너님 나라...중뽕 사료지... 사료라기 보다는 인터넷에서 긁어온거지...시대가 좋으니까... 개나 소나 다 사료 타령이네.

너님이 말하는 사료는 그냥 돼지 사료...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

그리고...너님은 깜냥도 안 되는데 무슨 승부 씩이나 ... 나랑 승부하겠다면 그건 나에 대한 모욕이여... 어떻게 중뽕 돼지랑 나랑 같은 선상에 두고 야그를... 너님은 그냥 중국 원산지 돼지사료나 열심히 먹고 어설픈 자기 지식에 만족하며 살기를...그것도 너님같은 얼치기의 행복일지도...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잘 생각해봐...너님이 중뽕인지 아닌지 ... 나이가 몇 개인지는 모르겠지만...정체성은 명확히 해야하는데... 그냥 중국 돼지사료에 걸신 든 중뽕으로 살도록 하삼

그리고...우리 조상을 중국의 약탈자라고 표현한 것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삼 ...너님이 한국인이라면...너님은 자기 조상을 도둑놈으로 매도하는 후레자식이 되걸랑...

난 전혀 안 불편하니 계속 써봐 ... 잠시 머리 식히러 가생이 들어와서 너님을 씹으면 그냥 상쾌...

이렇게 하면 너님 글이나 내 댓글을 읽은 사람 중 몇 사람이 내 생각에 동조할지도 모르겠지만...그래도 너님의 같잖은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 보다는 아주 쬐끔 더 많겠지? 

너님이나 나나 함께 민폐끼치다 보면...반면서생이 될 듯...너님같아도 안 되고 나같아도 안된다는~~

하여간...짝퉁 아디다스 '아비바스' ... 원산지는 중공, 의식은 중뽕인 '아비바스'...내일도 올려봐...그럼 또 씹어줄테니 소화 잘 하도록 하고^^
               
아비바스 24-04-25 21:04
   
오궁 오궁~~

그렇지~ 그렇지 ~

암요~ 암요~

폰짱말이 다 맞습니다~
                    
윈도우폰 24-04-25 21:23
   
너님은 여기 죽돌이인가 보네? 댓글 쓴 다음 나갔다 다시 와보니 그새 댓글을 달았네...그정말 원숭이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너님의 반응도 다 예상됨

뭐...그래도 말귀는 쬐끔은 알아 듣나 보구먼...그려...내 말이 곧 진리고 생명이니 잘 새겨 듣도록 하고

그리고... 내게 고마워 하도록 하삼

사실... 내가 댓글을 안 달면 너님 글은 사람의 관심을 일도 받지 못할 그런건데...내가 수고스럽게도 너님 씹는 댓글을 달아줘서 다른 사람 들이 같지도 않은 너님이 퍼와 겨우 한두 줄 자기 의견인양 가미한 그런 내용을 읽어주기도 하는거임

그리고...너님의 글 정리 솜씨가 워낙 없어 읽는 양에 비해 포인트가 없는 문제점을 내가 지적해 줌으로써...같지도 않은 너님 포스트를 읽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있으니...너님은 정말 내게 고마워 해야 혀

이런 얘기 잘 새겨들어 나중에 자식 교육에도 활용하고...지금까지 너님 반응을 보면 딱 어린 애야...하지만 어린 애같이 반응하지 말고...너님이 쓴 내용를 가지고 댓글을 쓰자고...너님 댓글은 '난 멍청해요'라고 하는 소리랑 다를 바 없거든

난 너님을 씹는 댓글이라고 해도 너님이 쓴 글이나 너님의 자세에 대해 그나마 진솔하게 얘기해 주는데...너님의 대댓글이 이게 뭐여...거의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하기야 너님 지적 수준에서는 초등학생 수준도 좀 과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욕하고 싸우더라도...좀 격좀 맞춰보삼
                         
아비바스 24-04-25 21:28
   
암요~ 암요~

레벨 13이 레벨 5한테 죽돌이라니~~


암요 암요~~

폰짱, 악플이 선플이라고 우기면~~

아유~~ 폰짱말이 다 맞지~~~
                         
위구르 24-04-26 00:21
   
이제 그만 하십시오

빌어먹을 넋두리를 따로 들어줄 가족도 없으셔서 여기서 그 모양입니까
나유키 24-04-26 23:22
   
감정적인 논쟁이 오가지만 두분 사이에 애정이 느껴지네요

근데 동아게에 글올릴 능력은 안되고 눈팅만 하는 유저로서 게시판 분위기가

사료제시만을 고집하는거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그런 제한때문에 읽을만한 게시글이 거의 없으니 관심도 줄어듭니다

 아무튼 활동하시는 분들 응원합니다 홧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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